농담하기를 좋아하고 웃기는 얘기로 시끄러울 때


농담하기를 좋아하고 웃기는 얘기로 시끄러울 때

인기 있는 사람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할 때 어떤 사람이 인기가 있을까? 또 아이들 사이에서도 어떤 아이가 인기가 있을까? 답은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시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몇 십 년 전만해도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고 잘 생기고 게다가 마음씨가 착한 학생이 인기가 좋았다. 사회에서도 잘 생기고 능력 있고 집안 배경이 좋은 사람들이 대체로 인기가 있었다. 게다가 인간성까지 좋으면 금상첨화였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을 보면 공부 잘하는 게 그다지 인기의 요소는 아닌 것 같다. 같이 잘 놀아주고 재미있으며 인간성까지 좋으면 그만이다. 공부를 잘하거나 외모가 출중하면 인기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된다. 알게 모르게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모종의 질투를 느끼는 것 같다. 이 점은 성인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회가 워낙 경쟁이 심하다보니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좀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익살맞으며 때로는 실수도 하여 자신의 경쟁과 무관해 보이는 그런 사람들이 되레 인기가 많다. 잘 나가는 사람을 보고는 겉으로는 부러워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질투를 하고 속상하기도 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대체로 인기 있는 사람은 학자나 의사나 법률가 등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웃겨서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들이다.

인기보다 덕(德)

그런데 율곡 선생이 경계하는 내용은 이와 좀 딴 판이다. 우선 이렇게 말하고 있다.

〔10〕농담하기를 좋아하고 웃기는 얘기로 시끄러운 것(好作戲謔, 言笑喧囂)

율곡 선생이 경계하는 대상은 되레 요즘 인기 있는 아이의 태도와 유사하다. 물론 인기는 요즘 아이들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과연 학부모들도 자기 자녀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좋아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요즘 도덕의 기준으로 보아 이런 아이가 굳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도 힘들 것 같다. 다만 타인에게 방해가 될 정도로 시끄럽게 떠든다면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을까?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렇게 농담하고 웃기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분명 덕이 없는 행동이다. 앞에서 구용(九容)을 소개할 때 보았겠지만, 농담하고 웃기는 행동은 그것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 이렇게 덕스럽지 못한 행동이기에 경계했던 것이다.

이점은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쉽게 이해할 것 같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자기 고향에서 양반이나 선비의 후손으로 자부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녀들이 큰소리로 떠들거나 크게 웃거나 농담하는 것을 금했다. 심지어 집안에서 크게 노래하는 것도 경계했다. 물론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아무튼 이런 것들이 다 앞에서 말한 덕스럽지 못한 행위와 관계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경계할 것을 더 제시한다. 그것은 이렇다.

 

〔11〕쓸데없는 일과 상관없는 일을 하기 좋아하는 것(好作無益, 不關之事)

쓸데없는 일의 원문은 무익한 일이다. 무익한 일이란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상관없는 일에 속한다. 당시 아일들과 상관없는 일이란 무엇일까? 앞의 글에서 선생이 말한 분위기를 알아차렸다면, 아이로서 해야 할 공부와 상관없는 것이라 보면 되겠다. 그 공부란 글공부도 포함되겠지만, 기본적으로 아이로서 지켜야 할 도덕적 실천에 관계되는 일이다. 가령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롭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 따위가 아닐까?

그래서 그 쓸데없는 일이나 상관없는 일의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역시 『격몽요결』에서 찾아 볼 수밖에 없다. 『격몽요결』에서는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일이 무엇인지 직접 명시한 곳은 없다. 나쁜 습관을 고친다든지 해서는 안 되는 일에서 그것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아이들에게 해당하는 것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어지럽게 드나들고 떠들며 세월을 보내는 것
경전(經典)을 표절해 문장을 꾸미는 것
글씨와 편지쓰기에만 공을 들이는 것
바둑과 장기를 두는 것
배불리 먹고 다툼을 일삼는 것
돈과 음악과 이성(異性)에 빠지는 것

(「혁구습장」)

이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의 가치관에서 볼 때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쓸데없고 상관없는 일들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는 오늘날 어린이들이 경계해야 하는 일에 해당되는 것도 있고 해당되지 않는 것도 있다. 그 해당되지 않는 것 가운데 글씨, 편지쓰기, 장기와 바둑, 음악 등의 일상생활이나 취미생활에 필요한 것들이다. 해당되는 것에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떠드는 것, 표절과 다투는 것, 그리고 이성에 지나치게 빠지는 것 등이다.

도덕적 인간 양성

그렇다면 율곡 선생의 이런 생각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왜 이런 차이가 날까? 그 차이가 나는 근거 또는 배경은 무엇일까? 이런 차이를 인정한다면 선생의 교육관이 오늘날 도움 되는 것이 얼마나 될까? 이것을 알려면 당시 교육관과 그 근거로서 당시 지배하던 사상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유학 특히 성리학이 지배이념이었던 조선시대의 교육목적은 한 마디로 군자(君子)를 양성하는 것이다. 그 이념적 기반은 유학의 경서(經書)에 있는데 특이 『대학』에 나타나 있다. 『대학』은 옛날 태학[대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던 방법을 적은 책이다. 거기에 나타난 3강령과 8조목에 가르침의 목적이 드러나 있다.

대학의 길은 명덕(明德: 천부적 마음)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친하게] 하며[여기며] 지극히 선한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데 있다.

이것이 3강령이다. 8조목은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이다. 바로 여기서 3강령과 8조목의 내용을 보면 대부분 군자의 도덕과 관련이 있고 그 주체가 군자이며, 그 가르침의 끝에는 도덕적 이상세계의 건립과 관련이 된다. 흔히 이 이상세계를 대동사회(大同社會)라 부른다.

이런 군자를 양성하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은 전통사회에서 요구되는 아동의 행위는 도덕적이어야 하며, 사적인 것에 관련된 이익이나 놀이나 취미 따위가 금기시 된다. 왜 이런 놀이나 취미 따위를 금기시 여기느냐 하면,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인욕(人欲) 때문이다. 인욕 그 자체만 본다면 먹을 때 당연히 먹어야 하고 입을 때 당연히 입어야 하니까 없애야 할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온갖 악이 그로부터 발생한다. 오늘날 현실을 보라. 인간의 욕망은 조금이라도 허용되면 점점 더 커져서 끝이 없을 정도로 확대된다. 급기야는 그 욕망 때문에 사회에 피해를 주기도 하고 자신도 망하는 경우를 보지 않는가?

그래서 유학 특히 성리학은 처음부터 아주 기초적인 욕망 외에는 그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이렇게 흥미나 취미 위주의 일을 군자에게 쓸데없거나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도덕이 필요하기는 해도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자본주의가 군림하는 세상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굴러간다. 어떻게 하든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겨 소비를 촉진시키고, 그에 맞는 생산을 함으로써 이윤을 창출시킨다. 그래서 교육이념도 겉으로는 개인의 바람직한 성장이나 소질과 능력을 계발시킨다고는 하지만, 알고 보면 이런 자본주의의 체제에 상응하는 기능인과 소비자를 양성하는 데 있다.

여기서 전통적 도덕은 보편적인 것을 해치지 않는 이상 유지되겠지만, 자본주의에 방해된다면 전근대적이라 하며 폐기되어 버린다. 특히 맹자 이래로 군자는 이익을 멀리한다는 관념이 그것이다. 이제 자본주의적 교양인이라면 불법이나 탈법이 아닐 경우 이익을 좇아 어디든 달려가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국의 경제적 양극화의 주범 가운데 하나인 부동산 투기이다. 군자는 원래 투기를 하지 않는데도, 지금 우리 사회는 그것을 못하는 사람이 무능한 사람으로 통한다.

가만히 있어라?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아이들 때문에 짜증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그렇더라도 대부분의 교사들은 직업윤리 상 그것을 크게 내색하지 않고 넘어간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이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돌아다니거나 떠드는 일이다. 그러다보면 수업 분위기를 해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기도 한다. 그래서 교사들은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가만히 있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돌아다니며 떠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흔히 있었던 모양이다. 전통적으로 이런 행동을 아이의 인성 또는 잘못된 습관이나 버릇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근대식 학교가 생기면서 교실이라는 좁은 공간에 많은 아이들을 몰아넣고 오전 내내 때로는 오후까지 가르치다보니 지루하고 따분해서인지 이런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아이를 탓하기 전에 좀 더 솔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진화해 온 시간에 비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이렇게 모아놓고 가르친 역사가 얼마나 길겠는가? 그 긴 진화의 과정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먹고 살기 위해서 또는 맹수를 피하기 위해 들판이나 산속, 때로는 물가를 뛰어다니면서 보내지 않았겠는가? 기껏해야 몇 천 년도 되지 않는 시간의 역사를 가지고 유전자에 각인된 그 긴 시간의 역사를 어찌 뛰어 넘을 수 있겠는가?

어찌 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활동하는 존재이다. 특히 어린 시절은 더욱 그러하다. 인간의 성장이 인류 진화의 과정을 밟아 재현한다는 이론을 따른다면, 어린이들이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뜀박질하거나 떠들거나 돌아다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더구나 자기 행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주의력 결핍 또는 과잉행동 장애라는 것도 있다.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고 막무가내로 꾸중하고 야단친다고 해서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겠는가? 다른 해결 방법이 요구된다.

남을 잘 웃겨야 성공한다

성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농담을 좋아하고 남을 잘 웃기는 말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인 인욕(人欲)과 관련된 일이어서 덕이 없어 보이고, 자칫 지나칠 경우 불선(不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성리학적 이념이 작동을 멈춘 지 오래되었다. 이제 인간은 도덕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위해 사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 이익이 인간의 욕망 충족에 절대적인 것이므로, 오늘날은 가히 욕망의 해방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이런 해방을 만끽하는 사람은 부자들에게 해당되기 때문에, 너도나도 부자가 되려고 서로 경쟁한다.
이제 사람들은 도덕적 모범생보다 농담을 잘하고 자기들을 잘 웃기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개그맨이나 또 이와 유사한 연예인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들의 신상이나 생일 따위를 잘 기억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조부모나 부모의 그것을 모르는 이들도 있다. 또 장래희망조사에서 과거에는 연예인을 선호하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압도적이다. 연예인이 인기를 얻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실제로 유명 연예인은 성공의 상징으로 통한다. 지상파를 포함하여 케이블 티브이의 채널이 얼마나 많은가?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가히 연예인 천국이다. 그래서 연예인들을 자본주의 아이콘이라 말하지 않던가?

그러니 이제 아이들이 농담을 잘하거나 남을 잘 웃기는 일은 권장 사항이지 금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어차피 무슨 일을 하든 먹고 살아야 하고, 더 나아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욕망을 마음껏 충족시키기에 도움이 된다면 말이다.

내 아이의 몸가짐이 바르지 않을 때


내 아이의 몸가짐이 바르지 않을 때

 

애들은 애들답게?
소싯적에 어른들께 들은 얘기다. 젊은 부부가 지나칠 정도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참견하며 가르치려고 하자, 나이가 지긋한 어른이

“그냥 내버려 둬요. 원! 애들은 애들답게 키워야지.”

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본 적이 있다. 이것이 한 집안에서 대체로 시부모와 며느리가 손자의 교육방식을 두고 갈등하는 하나의 상징이 될 법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나이든 부모나 친정부모에게 그런 문제로 아이를 맡기지 않으려는 젊은 부부도 있다고 한다. 아마 그들의 기준에서 생각하는 구식인 옛날 사람들의 교육적 악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추측건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아이들을 놀게 내버려 두거나 아니면 언어나 지식의 악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아이들 행동 하나하나에 참견하는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도덕 교과서에도 보이는데, 아이들이 어떻게 몸가짐을 해야 할지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것이 몸에 배지 않은 이상 하나하나 지키기에는 벅차다. 그래서 어릴 때 익히도록 수없이 그 행동을 반복시킨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지루하고 짜증낼 수도 있다. 옛날 시골 노인들이 그 모습을 본다면 틀림없이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둬요. 애들은 애들답게 키워야지, 그렇게 좁쌀영감처럼 하나하나 간섭하면 그 아이가 자라서 어떻게 되겠소?”

얼핏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아이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면 그 아이는 분명 우유부단한 판단력이 결핍된 사람으로 자랄 가능성이 있다. 동아시아 전통의 노자나 장자의 사상, 그리고 서구의 자연주의 교육관 등의 관점도 이론의 방향에서 볼 때 이를 지지하고 있다.

두 교육관의 충돌

그렇다면 정말 애들을 애들답게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야 할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 율곡 선생은 어떤 관점을 지지했을까? 여기서 두 교육관이 충돌한다.

〔8〕공수가 단정하지 않고 옷소매를 풀어 놓고 한 쪽다리로 기대서는 것(拱手不端, 放袖跛倚)

공수(拱手)란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맞잡는 것으로 읍(揖)을 하거나 절을 할 때 주로 사용한다. 또 한쪽 다리에만 의지해 서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그러니까 공수를 공손하게 하며 옷소매도 잘 여며야 하고 서 있을 때는 두 다리에 힘을 균등하게 배분하여 바른 자세로 서야 단정한 모습이다.
선생은 여기에 더하여 또 이런 것을 경계한다.

 

〔9〕발걸음이 가볍고 뜀박질하고 뛰어 넘는 것(行步輕率, 跳躍踰越)

발걸음이 가볍다는 뜻은 경망스럽게 가벼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뜀박질하고 뛰어 넘는 것이 그 사례이다. 어찌 보면 발걸음이 가볍고 뜀박질하고 뛰어 넘고 하는 것이 아이들의 자연스런 모습이 아닌가? 아이들의 기운은 어른보다 훨씬 생동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동물들의 새끼를 보라. 그래야 신체가 발달하여 성숙해지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선생이 금하는 것은 아이들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그래서 선생의 입장은 애들을 애들답게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입장은 분명히 아니다.

구용(九容)

여기서 선생이 강조하는 사례를 더 살펴보기 위해서는 또 『격몽요결』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몸과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구용만큼 절실한 것은 없다. 이른바 구용이란 발걸음을 무겁게 하고[가볍게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어른 앞에서 걸을 때는 예외임], 손 모양은 공손히 하고[손을 게을리 하지 말되 일이 없으면 공수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않음], 눈은 단정하게 하고[눈동자를 고정시키고 시선을 바르게 하여 흘겨보거나 훔쳐보지 않음], 입은 다물고[말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가 아니면 입은 언제나 움직이지 않음], 목소리는 조용하게 하고[모습과 기운을 가다듬어 구역질이나 트림 등의 잡소리를 내지 않음], 머리는 꼿꼿이 세우고[머리를 바르게 하고 몸을 곧게 하여 기울이거나 돌리거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함], 숨 쉬는 것은 엄숙하게 하고[호흡을 고르게 하되 소리가 나지 않게 함], 서 있는 모양은 덕스럽게 하고[가운데 서고 한쪽으로 기울지 않으며 의젓하여 덕이 있는 기상이어야 함], 얼굴빛은 장엄하게 하는 것이다[얼굴빛을 정돈하여 가지런히 하고 게으른 기색이 없어야 함]

(「지신장」).

이 구용은 군자가 항상 지켜야 할 신체 아홉 부분의 몸가짐인데 원래 『예기』에 나오며 후대에 편찬한 『소학』에도 실려 있다. 주자의 『동몽수지』에도 이와 유사한 말이 나온다. 곧

“걸음걸이는 단정하게 해야지 달리거나 뛰어넘거나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부모나 어른이 부를 때에는 잽싸게 달려가야지 느긋하게 느리게 가서는 안 된다.”

라는 말이 이것이다. 선생의 두 번째 말과 거의 동일하다.

이 구용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아마 요즘 아이들에게 이걸 시켰다간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다. 아이들의 자연스런 천성을 무시하고 너무 자잘하게 간섭한다고.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아이들은 천성적으로 발걸음이 가볍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뜀박질을 하거나 움직인다. 손은 공수는커녕 조금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하고, 부지런히 움직인다. 장난감을 조립하거나 가지고 놀거나 게임을 하거나 또 무엇을 하던 항상 바쁘다. 눈은 또 어떤가? 뭐가 그리 궁금한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엿보는 것을 예사로 안다. 또 아이들에게 입을 다물게 하거나 목소리를 조용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우리나라 경제를 살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러니 머리나 숨 쉬는 것이나 서 있는 모양이나 얼굴빛 따위는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옛날 아이들이라고 해서 오늘날 아이들과 천성적으로 뭐가 그리 달랐겠는가? 굳이 말한다면 아동에 대한 옛날의 관습이나 문화가 지금에 비해 더 엄격하고 억압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동의 천성(天性)에 반하여

그렇다면 왜 이렇게 아이들의 천성에 반하여 이러한 몸가짐을 주문했을까? 이 구용의 내용이 『예기』에 들어 있으니 오랜 옛날부터 유가들 사이에 강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걸 보면서 정말로 옛날의 아이들이 이랬을까 하는 정당한 의문을 가져야 한다. 모든 고전이나 경전 또는 책 속에서 강조하는 동기는 그것이 잘 안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닐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굳이 사회가 잘 돌아갔다면 공자가 인(仁)을 주장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아동교육이 잘 되었다면 굳이 선생이 이 『소아수지』나 『격몽요결』 같은 책을 펴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 구용이 『예기』에 최초로 등장하였다는 점은 특수한 사례라고 보아야 한다. 당시는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이른바 군자로 불리는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에게 요구되는 사항이지 노예나 평민자제에까지 강조되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또한 신분제 사회였고 사대부가 지배층으로서 사회를 이끌어 갔다. 따라서 사대부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역할을 잘 하려면 어릴 때부터 자신의 사적인 욕망을 이겨내고 예법을 준수하는 모범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러니 그 욕망을 어릴 때부터 이겨내는 방법이 음식을 탐내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여 이 구용만큼 좋은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예기』의 그것을 『소학』에서 또 『격몽요결』까지 강조하고, 더 나아가 그 구체적 사항을 『동몽수지』나 『소아수지』에 반영하였다는 점은 뭔가 냄새나는 구석이 있다. 이것은 성리학을 완성하고 계승한 신유가(新儒家)들의 이상사회 건립을 위한 철학적 이념과 공부방법과 관련이 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만 육체적 욕망에 의하여 그 선이 잘 발휘되지 않으므로 사회가 혼란해진다고 보고, 그 욕망을 극복하고자 하는 공부방법을 여러 가지로 모색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어릴 때부터 욕망을 이겨내는 방법으로서 어린이들이나 초학자를 위한 책을 펴냈다. 그것이 『소학』이나 『격몽요결』 등이다.

그래서 인간 욕망의 근거를 인욕(人欲)으로 보아서 그것을 막고자 하여, 어릴 때부터 몸을 단속하는 학습을 시켰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교육방식은 다분히 도덕적이다. 아동의 심리발달이나 생리적 특성을 고려하기보다 도덕적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엄숙주의가 자연히 작동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은 모든 아이들에게 강요하였다기보다 자연히 사대부가 자제를 중심으로 교육했을 공산이 크다. 어찌 보면 아동의 입장에서는 미래에 지도층이 되기 위한 의무적으로 따라야 하는 교육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물론 이것만으로 충분히 납득되는 것은 아니다. 가능한 모든 아이들이 이 같은 예법을 지킴으로써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도 배제할 수 없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습, 대부분 예법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겠지만 그것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고 체제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이런 도덕적 행위 규범은 전통문화 속에서는 하나의 보편적인 것이 되어 그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었던 강력한 도구였다.

한국인들의 공중도덕

오늘날은 이런 구용과 같은 규범을 거의 지키지 않는다. 그런 용모를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지는 이상한 것으로 본다. 발걸음을 무겁게 하거나 머리를 꼿꼿이 세우거나 얼굴빛을 장엄하게 하면 십중팔구 거만하게 여긴다. 그러나 입은 다물고 목소리는 조용하게 하고 손 모양을 공손히 하고 덕스럽게 서는 것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런데 이걸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사실 오늘날 학교에서 도덕시간에 이와 유사한 것을 현대에 맞게 교육시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회가 복잡하므로 이와 유사한 것에 더 많은 규범을 추가하여 가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도덕 지수가 낮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다 제쳐두고 공공장소에서 지키는 예절만 해도 그렇다. 물론 예전보다 다소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은 여전하다. 그 사례가 너무 많이 일일이 지적하지는 않겠다. 왜 초중고 보통교육을 통해서 가르치지만 정작 어른이 되었을 때 지키지 않은 사람이 생길까?

필자는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학교에서 배운 것이 사회에 통용되지 않는 점이 그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이른바 ‘학교의 모범생이 사회의 모범생은 아니다’라는 말도 여러 맥락에서 쓰이기는 하지만, 이런 점에도 사용된다. 곧 불의에 적당히 타협하고 실속을 챙길 줄 모르는 융통성이 없는 태도를 가리킬 때도 사용된다. 우리가 국회청문회를 통해서 눈여겨보았듯이 사회지도층부터 비리의 온상처럼 보인다. 지도층이 되기를 포기하고 실속만 챙기는 사람들은 이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영악하게도 요즘 아이들은 그것을 잘 안다. 그래서 학생 때도 잘 안 지킨다.

공중도덕을 비롯하여 한국인들의 도덕성 지수가 낮은 것, 다시 말해 실용성과 편의를 따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적 이득만 챙기려는 행태는 근원적으로 욕망을 절제할 줄 모르는 데서 기인한다. 유가(儒家)들은 이렇게 욕망의 끝이 어떻게 될지 알았기에 다소 무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어릴 때부터 자기 몸단속하는 교육을 시켰다. 그럼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기 위해 어떤 교육을 시키는가?

때와 장소에 따라

옛날의 예법이라고 해서 다 케케묵거나 나쁜 것도 아니다. 얼핏 보면 옛날에는 어린이들의 자연스런 생리를 모르고 엄숙주의나 도덕주의 같은 교육을 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날 전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아이들이 평소에 자연스럽게 생기발랄하게 자라도록 해야 하지만, 올바른 예절이나 바른 몸가짐이 필요할 때도 많다. 바로 선생도 『격몽요결』에서 작은 글씨(앞의 [ ] 속의 글)로 예외를 인정하고 있듯이 때와 장소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할 것을 말해준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예절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가짐부터 바르게 해야 한다. 이것은 백 번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어릴 때부터 바른 몸가짐을 갖추지 못하면 커서 더욱 어렵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던가?

내 아이가 친구와 싸울 때


내 아이가 친구와 싸울 때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
필자가 어렸을 때를 기억해 보면 아이들은 잘 놀다가도 걸핏하면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 싸웠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언제 싸웠는지 금방 잊어버리고 깔깔거리며 놀았다. 그 후 청소년기를 넘어 청년기에 돌입하면 그 싸운 일을 금방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앙금이 남기도 한다. 더구나 장년기나 노년기가 되면 그 사태는 점점 심각해진다.

이렇듯 아이들은 특성상 싸우다가도 친해지기도 한다. 생각해 보라. 초등학교나 중학교 다닐 때 한두 번 이상 안 싸워본 일이 있는가? 그렇다고 지금 동창회에 갔을 때 그 싸웠던 일을 잊지 못해 여태껏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가? 그 싸운 일도 하나의 추억이 될 뿐이다.
그래서인지 예부터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

라는 속언이 생겼다. 아이들이 다투는 문제에 대해서 너그러웠고, 그 싸움 때문에 야단칠 때도 자기 자식을 혼냈지, 자식 편을 들어 남의 자식 탓을 하거나 그를 혼내주지 않았다. 물론 상대편 부모도 그렇게 했다. 어쩌면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은 부모가 잘못 가르쳤다고 여겼기 때문에 아이들이 싸우는 경우도 자신의 허물로 알아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그러나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라는 말은 이제 금기어가 되었다. 싸움을 방치하거나 모르는 척 하거나 사소하게 여기고 넘어갔다가는 문책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체로 학교의 교사들이 거기에 해당된다. 아이들이 다투다가 조그만 피해를 입어도 피해자나 그 부모가 폭력을 당했다고 신고를 하면, 이른바 ‘학폭위(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를 열어서 조치를 취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쌍방의 부모가 합의를 하지 않을 경우 법정 싸움까지 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필자도 수차례 목격한 바 있다. 그래서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라는 속담이 빈 말이 아니라는 것도 실감하였다.

가깝게는 지금의 40대 정도의 사람들이 학교에 다닐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묻지 마시라. 이런 일이 생기게 된 원인을 밝히려면 또 많은 지면이 필요하므로 여기서 밝힐 수는 없다.
그런데 율곡 선생이 무슨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싸움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로 경계하고 있다. 먼저 첫 번째 것을 소개하면 이렇다.

 

〔6〕다른 아이를 건드리고 모욕하여 성내며 서로 다투는 것(侵侮他兒, 相與忿爭)
저는 가만히 있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의 담임을 맡으면 아이들로부터 이런 고발이나 변명을 자주 듣는다.
“저는 가만히 있었는데 갑돌이가 나를 건드렸다.”
라는 따위가 그것이다.
정말로 자기가 가만히 있는데 다른 아이가 자기를 건드리는 일는 성격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특이한 아이가 온 학급을 휘젓고 다니며 아이들을 귀찮게 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의 해결책은 말로 해서 될 일이 아니다. 해당 아이의 심리 발달과정에서 나온 과잉 행동일 수 있고, 또 정서나 심리의 발달장애 때문에 나올 수도 있어서 전문가의 상담이 필요하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아이가 가만히 있었는데 건드리는 경우는 또 있다. 그 아이의 행동이 다른 아이가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그런 사람을 ‘밉상’이라 하지 않던가? 아이들 집단에서도 정당하든 부당하든 밉상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 밉상을 여럿이 심하게 괴롭히면 이른바 집단따돌림이라는 ‘왕따’ 현상이 생긴다. 물론 모든 집단따돌림이 밉상 때문만은 아니다. 너무 소심해 저항을 못하는 아이도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아무튼 어른들은 그 밉상에 대해 상대를 안 해주지만, 아이들은 어쩌면 더 직설적이기 때문에 밉상에 해당하는 아이나 저항을 못하는 아이를 건드리기까지 한다. 문제는 건드리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별 효과가 없다는 점이다. 불이익을 주거나 혼내는 것 외에는 자발적으로 싫어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어른들도 못하는 일인데. 이걸 해결하려면 또 다른 전문지식이 필요하다.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는 종이 한 장

그러나 사실 그런 특정한 아이만이 아니라 이른바 정상이라고 여기는 아이들도 이런 정서적 과잉행동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정상과 비정상을 칼로 무를 자른 듯이 구분하는 일에 익숙해졌는데, 많은 아이들을 한 교실에서 오랫동안 관찰해 보면 그런 구분이 너무나 허술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개의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지적 발달에만 관심이 많은데, 그것이 성적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서나 사회성 발달이다. 그것이 충분히 발달되지 못해서 부조화를 이루거나 미숙할 때 타인과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이 스스로는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부모의 벌이나 불이익이 무서워 그런 행동을 자제하겠지만 이 또한 한순간일 뿐이다. 먼 옛날과 달리 수많은 아이들을 교실이라는 좁은 공간에 몰아넣어 장시간 머물게 하기 때문에 미성숙한 아이들이 충돌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 책임을 학교나 담임교사에게 맡기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가혹하다.

율곡 선생이 이런 말을 한 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 옛날에도 아이들끼리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형제끼리 다툼도 있었는데 남이겠는가? 그래서 다른 아이를 건드리는 것과 그로 인해서 화를 내며 싸우는 것을 경계했다. 원론적인 차원에서 볼 때 오늘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다툼을 어떻게 예방할지 그리고 그 다툼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결하라는 안내는 없다. 다만 상대가 나를 놀리거나 비방할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두 번째 경계이다.

 

〔7〕경계하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버럭 원망하고 화내는 것(不受相戒, 輒生怨怒)
친구끼리 충고할 능력은 있는가?

옛날 유학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친구를 사귀는 방법과 목적을 분명히 했다. 글로서 벗을 모으고(以文會友), 벗을 사귐으로써 바른 행위를 도우는 일(以友輔仁)이 그것이다. 여기서 말한 바른 행위의 원문은 인(仁)으로써 도덕적 행위의 총칭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래서 공자는 친구에게 잘못이 있을 때 이렇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마음을 다해 알려서 잘 인도하되 그것이 불가능하면 그만두어 스스로 욕됨이 없게 하라
(忠告而善道之, 不可則止, 無自辱焉.

『논어』, 「안연」).

 

친구가 고치지 않는데도 자꾸 충고하면 자연히 멀어진다. 그래서 스스로 모욕이 된다. 선생도 이런 전통에 따라 친구에게 잘못이 있으면 경계시키는 충고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아이가 버럭 원망하고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문제는 요즘 아이들 수준에서 친구에게 충고할 수 있느냐이다. 그렇게 못하는 데에는 두 가지 난점이 있다. 하나는 친구에게 충고할 정도로 도덕성이 발달되었는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충고해야 할 줄 알면서도 그 친구와 멀어질까봐 오히려 동조하는 행위가 그것이다. 전자는 초등학교 저학년, 후자는 고학년에 주로 해당되는데, 어쩌면 아이들이 그만큼 약았거나 도덕적 상황에 민감하지 않다고 하겠다.

남에게 비방을 당했을 때

여기서 더 나아가 선생은 『격몽요결』에서 남에게 비방을 당했을 때는 싸우거나 대항하지 말고 이렇게 대응하라고 말한다.

누가 나를 헐뜯고 비방하거든 반드시 돌이켜 반성해야 한다. 그래서 내게 정말로 비난당할 만한 행위가 있었으면 스스로 꾸짖어 그 잘못을 고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나의 잘못이 조금밖에 없는데 남이 과장해서 말했다면, 그들의 말이 좀 지나쳤어도 내게 원인이 있었으니 그 잘못을 제거하여 털끝만큼도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만약 내게 아무 잘못이 없었는데 남이 거짓말로 날조했다면, 이는 망령된 사람일 뿐이니 망령된 사람과 어찌 진실을 따지겠는가?

(「접인장」)

유학자는 어떤 잘못된 일을 당해서 남 탓보다 먼저 자신을 되돌아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에, 먼저 나의 수신(修身)이 제대로 되었는지 따지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도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는 정신이 발휘되고 있다. 이것은 수신이 어느 정도 된 사람에게 해당되는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그러니까 초학자라고 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나름의 기초교육을 받았다고 전제하면 되겠다.

문제는 요즘 초등학교 이하 수준의 아이들로서는 이것이 가능할지 참 의문이다. 아니 어른들조차도 열에 한둘도 기대하기 어렵다. 누가 내게 비방을 했다면 따질 것 없이 다짜고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이다. 물론 자신에게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을 애써 감추며 변호사를 통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소송을 전개할 것이다. 특히 내게 아무 잘못이 없었는데 남이 거짓말로 날조할 경우는 재판에서 이길 확률이 100%이니, 그야말로 정신적 피해보상으로 이득을 취할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이렇듯 선생의 가르침과 현실의 간극은 이렇게 크다. 당시는 덕과 도덕을 높이는 사대부 선비들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사회였으니 가능할지 몰라도, 오늘날은 자본이 이끌어 가는 사회이니 이와 같은 현상이 당연할지 모르겠다.

교육적 역할

아이들이 서로 다투는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반응하여 소송까지 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고 믿어 방치하는 것도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사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를 두고 다툼을 해결하려는 모습은 어쩌면 행정기관의 면피용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소송까지 가면 책임 소재까지 물어야 하니 문제가 복잡해지니까 그 수준에서 해결해 보라는 가상한 숨은 뜻이 있을 것이다. 그게 있어 갈등을 중간에서 해결하는 완충적 역할을 하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고, 그것을 빙자하여 걸핏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다툼을 가지고 ‘학폭위’를 열어달라고 하여 자신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소송으로 가는 경우의 부정적인 모습도 있다.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완벽한 것은 없다. 다 이렇게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다툼이 폭력을 유발하는가? 그렇지 않다. 다툼의 종류는 무척 많고,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아이가 성장하면서 필수적으로 겪는 문제도 있다. 각자의 생각이 자라고 그에 따라 의지가 들어나면서 주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대부분의 인간사가 갈등에 따른 다툼의 연속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다툼을 죄악시 여길 것이 아니라, 그 다툼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부모와 교사의 교육적 역할이 매우 중요할 뿐이다. 해당 아이의 정서적 미숙함이나 결함 때문이라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다툼의 원인에 대해서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해 들어볼 필요가 있다. 한쪽이 도덕적으로 미숙할 경우도 있고, 서로 양립 불가능한 주장을 할 경우도 있고, 또 오해에서 비롯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각각의 원인에 따라 교육적 해결책도 달리해야 한다.

만약 양자가 주장이 강해서 싸운다면, 도덕률을 앞세워 무조건 야단칠 것이 아니라, 앞의 형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협상이나 양보 등을 통해서 스스로 갈등을 해결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어차피 이들도 그런 방식을 통해 성장하여 성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등하고 싸우는 것보다 협상하고 양보하는 것이 더 낫다는 점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역성드는 것은 금물

학교폭력으로 인해 사람이 다쳐 내 아이가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된 경우라면 상대방과 합의가 잘 안돼서 소송까지 갈수 있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부모는 아이를 편들어야 할지 야단쳐야 할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내 아이를 편들었는데 만약 그 싸움이 내 아이의 잘못으로 생겼다면, 반성할 줄 모르는 아이로 키워 그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아이의 잘못이 밝혀졌다면 상대방에게 사과함과 동시에 철저히 반성시켜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아이의 장래를 위한 길이다. 그렇지 않고 다짜고짜 상대 아이를 욕하며 아이 편에서 역성든다면, 그 아이의 미래는 기대할 것이 없어진다. 옛날에는 다소 가혹하리만큼 되레 자기 자식을 야단치고 훈계했다. 앞의 율곡 선생의 논리를 보라.

형제끼리 다툴 때


형제끼리 다툴 때

 

왕자의 난
른바 ‘왕자의 난’은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의 후계자를 놓고 두 차례의 왕자끼리의 싸움이었다. 최종적으로 이방원이 이겨서 태종이 되었지만, 훗날 이 사건은 형제끼리 싸우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재벌 총수 자리나 재산을 두고 형제끼리 다툴 때 이 왕자의 난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과거에는 남성 위주로 지위나 권력이 이동되었으므로 왕자니 형제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현대적 입장에서 볼 때 ‘형제’라는 말 속에는 ‘형제자매’가 축약된 말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현대적 예로 사용할 때는 후자의 뜻으로 사용하겠다.

사실 이런 왕자의 난은 조선 초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가 유구하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권을 계승하거나 재산이나 이권을 놓고 형제끼리 다투는 사례는 이루다 말하기 어렵다. 앞에서 소개 했듯이 형이나 연장자를 공경하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집안이나 사회에서 이런 다툼을 사전에 예방하는 차원에서 강조되었을 것이다.
율곡 선생이 형제끼리 다투는 문제를 이 책에서 거론한 것은 두 조목이다. 먼저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4〕형제가 사랑하지 않고 서로 성내며 다투는 것(兄弟不愛, 相與忿爭)
아이들은 사소한 일로 다툰다

이 글에서는 무엇을 가지고 다툰다는 말은 없다. 일반적인 경계이다. 사실 아이들이 서로 싸우는 경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성인들도 어렸을 때 싸워봤고, 부모가 된 뒤에는 어린 자녀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봐서 잘 알 것이다.
어린 자식들이 서로 싸우는 원인은 대개 큰 문제라기보다 사소한 문제로 싸운다. 적어도 어른이 보기에는 그렇다. 가령 맛 음식을 서로 많이 먹으려고, 장난감을 서로 차지하려고, 옷이나 물건을 서로 차지하려고, 어떤 일을 할 때 양보하지 않고 서로 먼저 하려고, 드물게 자신의 비밀을 부모께 고자질 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물건을 손댔다고 싸우는 경우도 흔하다. 그밖에 싸우는 일은 더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형제끼리의 다툼에 대해 선생이 말하는 두 번째 경계는 이러한 싸움에 대한 일종의 사례이다.

〔5〕음식을 두고 서로 다투며 상대에게 양보하지 않는 것(飮食相爭, 不相推讓)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다투는 이유 가운데 단연코 큰 것은 음식인 모양이다. 특히 맛있거나 귀한 것은 서로 많이 먹으려고 눈치 보며 다툰다. 언제나 먹는 밥이나 김치 같은 것을 가지고는 다투지 않는다. 물론 과거에 가난하게 살았을 때는 밥 가지고도 다투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더 자세한 사례도 있지만, 이정도만 말해도 알아들을 것이라는 선생의 속뜻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인간도 동물의 습성이 있어서 자신의 생존에 유리하게 행동한다. 그래서 먹는 것이나 입는 것 등을 먼저 차지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끼리 다툼을 경계하여 사전에 예방하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가정의 화목이 그것이다. 유가(儒家)들은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를 통해 남을 다스리는 치인(治人)으로 나아가는 이른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중요한 이념으로 삼았으므로, 수신과 제가의 차원에서 형제끼리의 화목을 강조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가정의 화목이 사회의 안녕과 평화를 마련하는 기초이므로 사회의 질서유지 차원에서 강조했을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가장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인간의 수양 문제와 직결된다. 바로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는 문제이다. 각자가 욕망을 참지 못하고 충족하려는 태도에서 다툼이 발생한다. 그래서 일찍이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 곧 자신의 사적인 욕망을 이기고 예법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러한 욕망을 극복하는 일은 어릴 때부터 하지 않으면 실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형제끼리 다투는 것을 경계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점은 현대 초등학교에서 도덕 교과가 있는 것을 봐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어릴 때부터 도덕성 곧 도덕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않으면, 커서 도덕적 인간이 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형제는 한 몸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제 사랑 또는 형제끼리 다투는 문제를 경계하는 것은 이론적인 면에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론적인 것은 혹시 성인에게나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이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어서 설득력이 약하다. 그렇다면 선생은 이렇게 선언적으로만 말하고 구체적인 언급은 왜 말하지 않았을까? 이 간단한 책의 성격상 말하기 어렵지만, 자세한 내용은 『격몽요결』에서 찾아 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선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형제는 부모님이 남겨주신 몸을 함께 받았으니 나와 한 몸이다. 형제 보기를 ‘너는 너고 나는 나이다’라는 틈을 없애서, 음식과 의복이 있든지 없든지 늘 함께 해야 한다. 혹시 형이 굶주린데 동생이 배부르고 형이 추워서 떠는데 동생이 따뜻하게 지내면, 이것은 한 몸 가운데서 일부가 병들거나 일부가 건강한 것과 같으니, 몸과 마음이 한쪽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 가운데 형제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두 부모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찌 자기 부모의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형제에게 혹시 좋지 못한 행실이 있으면, 정성을 다해 충고하여 점차 이치로써 깨우쳐 감동하며 깨닫기를 바라야지, 갑자기 성난 얼굴과 마음에 거슬리는 말을 하여 형제끼리의 화목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

(「거가장」).

 

형제끼리 다투어서 안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를 선생은 형제가 한 몸이라는 점을 들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똑같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를 각각 50%를 가지고 있으니 과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개체는 달라도 유전자의 분포로 볼 때 형제가 한 몸인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러한 합리적인 또는 과학적 사실이 도덕적 당위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한 몸이니까 사랑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 논리가 옛날에는 먹혔을지 몰라도 지금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혹시 어렸을 때는 모르지만 성인이 되어 결혼하고 배우자가 생겼을 때 과연 형제들을 한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세간의 경험을 가지고 살펴 볼 때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는 판단인지 모르겠다. 배우자는 각자의 친가에 대해서는 혹시 그런 정서가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시가나 처가에 해당하는 배우자의 형제에 대해서 한 몸이라는 감정을 과연 느낄 수 있을까? 어쩌면 형제끼리의 다툼도 배우자가 있음으로 해서 상속이나 기타 가정사의 문제로 다투지 않을까? 물론 선생이라고 해서 이 점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형제사랑을 교육시키면 그나마 커서도 가정이 화목할 것이라 여겼던 것 같다. 지금의 도덕교육도 그러하다.

다음으로 선생이 형제가 사랑해야 한다는 근거로 부모의 사랑과 연결시켰다. 곧 형제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부모를 사랑한다면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다시 말하면 효도를 잘 하는 사람은 형제도 사랑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과거처럼 부모에게 효도를 제대로 하는지 의문이다.

형제에게 잘못이 있을 때

흔히 아이들은 형제 가운데 누가 잘못하면 곧장 부모에게 고자질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당사자가 부모께 혼나면 마음속으로 상쾌한지 모르겠다.
선생은 앞의 『격몽요결』에서 형제에게 잘못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의 사례를 말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처럼 형이나 동생의 잘못에 대해 그들로부터 일종의 뇌물을 받고 침묵하거나 반대로 혼나도록 부모에게 고자질 하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충고하되 바른 이치로서 깨우쳐 감동하여 잘못을 깨닫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덧붙여 성난 얼굴과 마음에 거슬리는 말을 해서 화목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 부분은 아마도 약간 나이가 든 형제에게 해당될 것 같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사례가 발달단계상 적용하기 어렵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격몽요결』이 초학자를 대상으로 하므로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약간의 간격이 있다. 그렇더라도 부모 된 사람은 아이들이 성난 얼굴과 거슬리는 말을 해서 가정의 화목을 잃지 않도록 지도해야 한다.

아이들의 다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렇다면 아이들이 집안에서 다툴 때 부모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옛날처럼 음식이나 의복 등을 가지고 다투는 것을 무조건 금해야 할까? 또는 선생의 말대로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주지시켜야 할까?
옛 성현들의 말씀이니까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 말씀이니까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만큼 위험하고 비교육적이다. 설령 도덕 원리상 형제끼리 다투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옳을지라도, 아동들의 성장과 발달 단계상 그 다툼을 이해해야 하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아이들이 음식이나 그 밖의 소유물을 가지고 다투는 일은 자아나 소유 개념 또는 그에 따른 욕망이 자라고 있음을 반증한다. 욕망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생존과 관련이 있으며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정당하다. 어떻게 보면 어릴 때 욕망이 강할수록 그 물꼬를 정당한 방향으로 틀어준다면 큰 인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 욕망이 작은 아이는 작은 일에 만족해서 현실에 대한 도전보다 ‘안전빵’으로 살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그런 욕망 또는 야망을 긍정하는 의미에서 어떤 이는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라고 말하기도 했다.

형제끼리의 양보? 그거 개나 줘라!

그래서 너무 도덕적인 강박관념에서 다툼 자체를 금시기 여길 필요는 없다. 인간사가 다 다툼의 연속이 아니던가? 부모와 자식 간에도 다투는 일이 있는데 하물며 형제끼리겠는가? 문제는 다툼을 피할 수 없다면 최소화해야 하고, 그 다툼을 어떻게 해결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다툼의 여지가 충분히 있는데 쉽게 양보해버리고 회피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는 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픈 병을 직시해야 치료가 되듯이 다툼 또한 그 원인이 어디서 오는지 드러내 놓고 해결해야 한다. 율곡 선생이 양보를 말한 것은 형제 사이의 요청되는 도덕적 원리이지, 현실 사회에서는 그런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형제끼리도 양보를 권장해야 하지만 필자의 경험으로 봐서 그런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특히 요즘 아이들에게 더욱 해당된다. 과거에는 진학이나 재산 분배 등의 문제에 있어서, 형이나 동생, 특히 오빠나 남동생을 위해 자신의 공부를 포기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고, 장손이 재산을 더 많이 갖는 데 대해서도 군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양보가 훗날 자기에게 돌아온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요즘 기성세대들의 경험이다.

“형제끼리의 양보? 그거 개나 줘라!”

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다툼도 교육의 기회로 삼아야

율곡 선생의 말씀을 읽고 그 다툼의 해결이나 예방을 위해 서로 양보하라고 윽박질러도 아이들은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도덕적 원리를 강조한다고 해서 아이들이 도덕적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 답은 선생의 말에 있다.

‘이치로서 깨우친다’

는 말이 그것이다. 욕심을 내는 것도 이치가 있고, 싸우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아이들의 그런 행위에 대해 일단 존중해주고, 그 이유를 차근차근 들어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양자의 주장을 들어보고 서로 협상하게 하여, 얻을 것은 얻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도록 스스로 결정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을 키우는 방법이며, 도덕적 능력도 거기서 발휘하게 해야 한다. 도덕적 사태를 정확히 직시하지 않고 양보만 하는 것은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단지 그 사태가 두려워 회피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윗사람에게 공손하지 않을 때


아이가 윗사람에게 공손하지 않을 때

 

싸가지 없는 놈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이런? 싸가지 없는 놈!”
이라고 상스럽게 내뱉거나 아니면 마음속에서라도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 말은 대개 젊은 사람이나 아이가 어른에게 공손하지 못한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비속어로서 사용된다. 이런 말을 듣는 젊은이나 아이는 어른한테 대들지는 못하고 아마도 마음속으로 불쾌하게 여기면서
‘왜 아랫사람들만 어른에게 공손해야 하는가?’
‘어른들은 아랫사람들에게 공손하면 안 되나?’
‘나이가 무슨 벼슬인가? 나이 값을 해야 어른이지.’
라는 따위의 불만을 터뜨릴 수 있다. 대들지 않고 이렇게 생각만 해도 양반이다. 요즘은 젊은이에게 그렇게 말했다간 봉변당하기 일쑤다.
이런 사례는 찾아보면 엄청 많다. 학교현장에서 교사가 학생을 때려서 폭력 시비가 생기는 일 가운데도 이런 일이 많다. 학생의 언행이 불손하여 분노를 참지 못한 교사가 욱하는 마음에서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나오는 폭력이 그런 예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가정에서도 부모가 돌발적으로 아이들 때리는 경우에도 이것과 관련이 꽤 있다. 그 밖의 학교의 선후배 사이, 군대 내 선임자와 후임자 사이, 직장의 상사와 부하 사이, 한 마을 안에서, 무릇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이런 나이나 경력을 가지고 따지는 서열의식 내지 질서의식이 있다.

젊은 사람들은 젊기 때문에 그런 점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가도, 정작 자신이 어른이 되거나 선배가 되었을 때는 아랫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요즘 것들 참 싸가지가 없어.”
라고 내뱉는다.
선생이 살았을 조선사회에도 이러한 질서의식이 사회의 규칙으로서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선생은 이렇게 경계시켰다.

〔3〕형이나 어른을 공경하지 않고, 화낸 듯이 사납게 말하는 것 (不敬兄長, 發言暴勃)
어른 공경과 효제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의 불손한 태도에 왜 화를 낼까? 교사나 부모에게 불손하게 대드는 아이를 보고 불문곡직하고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정서는 어디서 기원하고 있을까? 앞의 선생의 말을 가지고 볼 때 전통에서 기원하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것은 전통에서 연장자를 공경하는 풍습과 관련이 있고, 가족 내에서 부형(父兄)을 공경해야 한다는 유교적 윤리와도 관련이 있다.
그런데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형을 공경하라는 말은 요즘 사람들의 정서로 볼 때 전혀 이해하기 어려울 듯하다. 옛날에는 조혼의 풍습이 강했기 때문에 생식 능력만 있으면 대체로 일찍 혼인을 시켰다. 그러다 보니 형제 사이 나이 차이가 크게 났다. 큰 형과 막내 동생의 나이 차이는 무려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서, 큰 형은 막내에게 거의 부모와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된다. 게다가 부모가 일찍 죽으면 어린 동생들은 형의 보호를 받고 자라게 된다.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보면 형을 부모처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먹여주고 키워주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유교는 부모 공경의 효도와 함께 형을 공경하는 효제(孝弟 또는 孝悌)를 강조해 왔다.

선생도 『격몽요결』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대할 때는 온화하고 공경해야 하니, 나보다 나이가 갑절이 많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10살이 많으면 형처럼 섬기고, 5살이 많으면 약간 공경해야 한다(「접인장」).

이렇게 나이를 기준으로 공경의 정도를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읍(揖)하고 절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나이를 가지고 말하고 있다.

아버지의 친구이면 절해야 하고, 동네에서 15살 이상이면 절해야 한다. 벼슬이 당상관이고 나보다 10살 이상이면 절해야 하고, 같은 고장 사람으로서 20살 이상이면 절을 해야 한다(「접인장」).

선생이 참고했을 법한 주자의 『동몽수지(童蒙須知)』에서도 이런 사례가 등장한다.

자식과 동생들은 항상 말소리를 낮추고 흥분을 가라앉혀서 상세하고 천천히 말해야지, 고상한 말을 시끄럽게 떠들거나 뜬소문 같은 말을 장난치듯이 말해서는 안 된다. 고개를 숙이고 윗사람이 하는 말을 경청해야지 망령되이 그들과 크게 논의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논의(論議)는 요즘말로 토론에 가까울 것 같다. 어떤 일에 대한 시비나 미추 따위를 웃어른과 함께 따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자식과 동생을 대상으로 한 말이므로 부모나 형에 대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말로 보인다.

왜 어른을 공경해야 할까?

그렇다면 왜 젊거나 나이 어린 사람들은 윗사람들에게 공손해야 할까? 거기에는 설득력 있고 타당한 논리가 있어야 한다. 앞에서 부모나 형을 공경해야 하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가 된 것 같다. 철학적 문제를 떠나 윤리적 의무라는 가치에서 볼 때 세대 간 상부상조의 관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나와 특별히 상관이 없는 남을 특별히 나이가 많다고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문제를 밝히려면 꽤 많은 지면이 요구된다. 그래서 좀 거칠지만 알기 쉽게 말하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공자와 맹자의 유학이 태동하게 된 것도 춘추전국시대라는 사회의 혼란함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물론 그 혼란함은 사회 전체에 걸쳐 있었지만, 치자의 논리를 강조한 유교의 입장에서는 제후나 대부들의 행태를 두고 논의한 것이 많다. 곧 자식이 아버지를 시해하거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는 하극상, 곧 지도층의 비도덕적 행위가 사회를 혼란시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효도나 효제, 그리고 장유유서 등의 오륜이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사회 또한 사대부가 지배하던 사회였으니 이에 더하여 그러한 윤리가 더욱 고착화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전통시대의 산업은 농업이었으므로 인구의 이동이 거의 고착화된 향리와 씨족 중심의 공동사회였기 때문에 이런 윤리가 더욱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이가 기준이 되었고, 그것이 풍습이 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때문에 아랫사람이 버릇이 없을 때 윗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모멸감을 느낀다.

서열의식

그렇다면 이런 장유유서나 나이를 가지고 서열을 매기는 것이 유교만의 잔재일까? 유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숙고 없이 습관적으로 그렇다고 한다. 자칭 진보라고 자부하는 인사들 가운데서도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병폐의 대부분이 유교 때문이라고 말할 때가 더러 있다. 어느 문명권을 막론하고 전근대인 시대와 사회를 거쳐 왔고, 거기에는 비판받아야 할 모습들이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점은 유교 또한 마찬가지다. 필자는 여기서 유교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숭상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반면에 자신의 전통을 곡해하거나 폄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문명이고 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장유유서랄까 아니면 나이를 기준으로 공경을 해야 한다는 점이 꼭 유교에만 있는지 따져 볼 필요는 있겠다. 일찍이 나이 곧 연치(年齒)를 기준으로 남을 높이는 문제는 『예기』나 『맹자』 등에 보인다. 특히 『맹자』에는 벼슬과 나이와 덕을 가지고 높이는 문제를 다루었는데, 마을에서는 나이가 기준이 된다는 말에 등장한다. 여기서 나이를 가지고 사람을 높이는 기준을 마을에서 적용한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자연 발생적이다. 아마도 씨족 중심인 마을이라면 자연이 나이 많은 사람이 부모나 형뻘 되는 사람이니 공경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자연발생적이란 말에 좀 더 신경을 써보자. 이런 서열은 동물사이에서도 존재한다. 동물의 서열은 대개 힘센 놈이 기준이 된다. 어찌 보면 나이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래도 가장 인간적이다. 모르긴 해도 아마 나이로 따지기 이전엔 힘이나 외모 또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했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렇게 나이 곧 연도순이 서열의식으로서 어떤 조직이나 직장에서 그것으로 자연히 연결되었다고 본다. 이른바 군대에서는 병사끼리의 ‘짠밥’ 순, 학교에서는 먼저 입학한 순, 회사에서는 입사한 연도 순, 공무원의 호봉도 근속연수 순 등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나이를 가지고 인위적으로 서열을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고착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굳이 우리문화에는 있는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세계 어느 곳이든 이와 비슷한 현상이 있을 것이다.

나이가 무슨 벼슬인가?

그렇다고 해서 나이만 가지고 기준으로 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더구나 나이만 가지고 높여야 한다면 나이가 적은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한 번도 공경을 받을 수 없다. 비록 나이로 공경의 기준을 삼은 것은 전통사회에서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인정하더라도 나이만으로 그것을 결정하면 상당히 억울한 문제가 생긴다. 다시 말하면 어떤 덕(德)이나 능력(能力)이 공경 받는 경우도 있다. 앞의 『맹자』에서 덕으로 공경 받는 사례가 그것이다.

필자가 볼 때 비록 나이가 상대적으로 어려도 어떤 덕이나 높은 학문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공경 받는 경우가 과거에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분이 어디에 행차할 때 공경하는 마음에서 흠모하여 남녀노소 막론하고 그를 보고자 몰려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니까 무조건 나이만 기준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뭔가 찜찜하다. 높은 덕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은 공경을 받을 수 없는가? 더 나아가 공경 받을 만큼의 인격도 부족하고 나이만 많다고 꼭 공경해야 하는가? 현대인들에게는 이건 정말 납득시키기 어려운 문제이다. 심지어 부모라 할지라도 공경할 만한 점이 없으면 공경하지 않는 것이 요즘 세태가 아닌가? 그래서 아이들은
“나이 값을 해야 공경하지.”
라고 말하든지 생각할 것 같다.
바로 여기서 유교적 장유유서나 연장자를 공경하는 유교적 윤리에 대한 재해석과 새로운 적용이 필요하다. 이것은 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몫이다. 옛날에 이랬으니 성인이 그렇게 했으니 무조건 따르라는 식의 방식은 이제 먹히지 않는다. 새로운 대안을 내야 따르지 않을까?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라

유교적 논리가 젊은 사람들이나 또 세계 어느 나라사람들이든 먹히려면 보편타당해야 한다. 철학자 칸트가

“네 의지와 격률이 동시에 항상 보편타당한 입법원리가 되도록 행위 하라.”

라고 말한 것과 같이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게 적용되고 지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나이 많은 사람 또는 능력이나 덕이 높은 사람만 높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으로부터 존중받기를 원한다. 남을 공경하는 것도 자발적으로 나오게 해야지 어떤 윤리적 규범으로서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다만 항상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생각을 가슴속에 품어야 마땅하다(「지신장」).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려면 나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으면 네가 먼저 대접하라.”

고 한 말을 생각해보라. 인류가 남긴 모든 고전의 주제를 몇 마디로 말하라면, 그 가운데 ‘겸손’이라는 말도 끼지 않을까 생각된다. 자기를 낮춤으로써 남을 높인다면 나이가 문제 될 수 없고, 지위나 덕이 높은 사람도 아랫사람에게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필자도 언제부터인가 후배들이나 강의를 들은 제자들에게 반말이나 예삿말을 쓰지 않는다. 선배에게 하듯이 그대로 존댓말을 쓴다. 그러나 자식에게는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다.

부모가 시키는 일을 아이가 곧바로 따르지 않을 때


부모가 시키는 일을 아이가 곧바로 따르지 않을 때

 

내 아이도 내 맘대로 되는가?
식을 키워 본 사람이라면 내 자식도 내 맘대로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잘 안다. 특히 어릴 때는 아이에게 무얼 시켰는데 곧장 하지 않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가령 밥을 다 차려 놓고 밥 먹으로 오라고 부르면 꾸물대면서 늑장을 부리기도 하고, 숙제를 미리미리 하라고 당부했는데 하지 않고 놀다가 정작 등교하기 직전에 밥도 안 먹고 숙제한다고 허둥대기도 하며, 자기 전에 양치질 하고 자라고 일렀는데 그냥 자버리기도 한다.

아이가 좀 자라서도 그런 일은 반복된다. 등교 후 곧장 집으로 오라고 일렀는데 친구들과 놀면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돌아오고, 공부나 숙제 따위를 다 하고 게임은 한 시간만 하라고 했는데도 공부나 숙제를 내팽개치고 몇 시간 째 게임을 하기도 하며, 속옷을 자주 갈아입으라고 일렀어도 땀이 배어 냄새가 날 때까지도 그냥 입고 다니는 남자아이들도 있고, 동생이나 형, 언니나 누나와 싸우지 말라고 당부했는데도, 틈만 나면 상대방만 탓하며 티격태격 싸우는 아이들도 있다.

옛날에도 아이들이 그랬던 모양이다. 율곡 선생이 『소아수지』에서 말하는 두 번째 경계하는 항목이 바로 이 문제이다.

〔2〕부모가 명한 것을 곧장 시행하지 않는 것(父母所令, 不卽施行)

사실 선생의 이 말에 대해서 ‘부모가 명한 것이라고 해서 곧장 이행해야 합니까?’라는 반문이 가능하다. 지금 세상은 조선시대도 아니고 또 부모가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부모의 명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법도 하다. 더구나 자식이 장성하여 부모보다 교육을 많이 받고 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이 들고 판단력이 흐려져 시대의 흐름과 상황판단을 제대로 못하는 부모의 명을 곧이곧대로 따라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상식을 조금이라도 갖춘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고대에서 부모에 잘못이 있으면 간(諫)하라고 하고 있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따라서 선생의 이 말은 보편적인 입장보다는 일단 아동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아이는 태어나서 최초의 교사가 되는 사람은 부모다. 아이는 사리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부모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래서 부모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부모의 명을 즉시 따르지 않는 원인

그런데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아이가 부모의 명을 순순히 따른다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아이들이라고 해서 다 그런가? 앞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특히 현대의 아이들은 모르긴 해도 옛날보다 부모의 말을 즉각 따르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 천성적으로 성격이 순하거나 칭찬을 통해 잘 길들여진 아이는 부모의 명에 곧장 따른다. 필자도 그랬던 것 같다. 부모님이 하라고 한 일을 거부해 본 기억은 거의 없다. 다만 일에 따라서는 하기 싫어서 마지못해 한 것이 있는데, 그 일 가운데 하나가 여름철 마당에 난 잡초를 뿌리 째 뽑는 일이었다. 필자가 살았던 시골집은 마당이 꽤 넓었고, 그래서 꾀를 내어 잡초의 줄기와 잎만 뜯다가 아버지한테 혼 난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다면 모든 아이들이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도 필자처럼 순한 아이도 있고, 부모의 명에 뺀질뺀질 핑계 대며 거부하는 아이들도 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유전적인 성격 차이 또는 도덕성의 발달 정도에 따라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 양육 환경과 가족 안에서 역할이나 서열 등에 따라서 후천적으로 학습되어 그런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가

“사람의 본성은 비슷한데 습관으로 인해 멀어진다(性相近, 習相遠).”

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유전적 요인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환경적 요인 곧 학습을 통하여 부모의 말을 잘 따르는 경우와 따르지 않는 경우로 그 원인을 나눌 수 있겠다. 여기서 부모의 교육적 역량이나 가정환경이 매우 중요하게 부각된다. 쉽게 말해 양육을 잘하는 부모와 그렇지 못한 부모의 역량 차이에 따라 아이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양육 방식의 차이

사실 아이가 부모의 명을 순순히 따른다고 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부모가 매우 엄격하여 마치 군대의 상관이 부하에게 명령하듯 지체 없이 명을 따르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아이는 부모가 무서워서 시키는 대로 곧장 따를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부모의 권위나 강압에 못 이겨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기가 약한 아이는 따르겠지만 기가 센 아이는 처음에는 따르다가 나중에는 빈틈을 노려 꾀를 부리거나 좀 더 자라면 점점 반항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명을 거역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못한다.

반면에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말고, 예기치 않게 어겼을 때는 가벼운 벌칙을 병행하면 아이들은 바르게 자라고 부모의 명을 잘 따른다. 그런데 여기에도 조건이 있다. 부모가 항상 올바르며 자식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고, 또 그 양육방식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잘못에 대한 벌을 줄 때 안됐다 싶어 감해주거나 생략하다보면, 아이는 벌을 우습게 여긴다. 또 아버지는 엄격한데 어머니가 인정이 많아 몰래 아이를 감싸준다면 아버지의 훈육이 먹히지 않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벌이나 책임에 대한 일관성이 없다면, 아이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여 올바른 가치관을 배양하지 못하게 된다.

바른 부모가 되기 위해서 선생은 『격몽요결』에서 부모가 되었으면 마땅히 자식에게 자애로워야 하고, 또 부부사이라도 예의와 공경을 잃지 않아야 집안일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자식을 낳았으면 약간의 지식이 있을 때부터 착한 곳으로 인도해야 하는데, 만약 어려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자라게 하면 나쁜 것을 익히고 마음을 놓아버리게 되어 가르치기 힘들다고 지적하고 있다(「거가장」). 바로 부모의 교육적 역할과 환경 조성을 지적한 말이다.
이러한 양육 방식의 차이를 공자가 『논어』에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법을 자식 교육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자녀들을 잔소리를 가지고 이끌고 체벌을 가지고 말을 잘 듣게 만들면,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어겨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 반면에 올바른 인격으로 자녀들을 이끌고 모범적인 행위로 따라오게 하면 자녀들은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을 알고 또 바르게 될 것이다
(원문: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위정」).”

 

말 잘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앞에서 율곡 선생이 아이가 부모의 명을 곧장 시행해야 한다고 하는 데는 어떤 전제가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항상 올바르고 자애로워야 한다는 점과 또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의 명을 어기지 말고 곧장 따라야 한다는 유교적 가치관이 녹이 있다. 이런 조건이라면 선생이 말한 명제는 충족된다. 도덕원리나 논리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도 바른 도리를 말하는데 즉각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비도덕적이다. 도덕률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이는 그런 도덕원리를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도덕적 판단능력을 아직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자님이나 성경의 말씀을 귀에 따갑도록 말해준다고 해서 아이가 순순히 따르겠는가? 강제로 지키게 하면 어딘가에서 문제가 터지기 마련이다. 많은 영화나 소설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럴 때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가 모범적으로 잘 보여주고 사랑으로 인도하여 아이가 잘 따른다면 무척 다행이겠지만, 그래도 안 따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회초리를 들고 야단쳐야 할까? 이것도 요즘에는 아동학대로 비춰져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아이가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데는 그 행위의 잘못을 떠나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아이의 생각이 부모의 그것과 달라서, 또는 아이의 욕심 또는 욕망이 부모의 그것과 배치되거나, 부모의 명이 자신의 욕망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렸거나, 때로는 아이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부모의 명을 망각한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든 다짜고짜 윽박지르거나 야단쳐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알고 보면 아이도 나름의 생각과 주관과 욕망이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 내용이 어떻든 간에 그것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 즉 아이도 나름의 인격체이고 의견과 의지가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이나 지시로 따르게 한다는 것은 요즘 시대에 먹히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라면 자기가 사는 동네나 온 나라 사람들이 다 그러니, 만약 아이가 부모의 명을 거역하면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므로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남이 시키는 대로만 알아서 척척 하는 아이는 아무리 부모의 명이라고 해도,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은가? 아직도 순종이 미덕일 수 있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자신의 주관과 의지가 박약한 우유부단한 사람, 더 심하게 말하면 정신적 노예가 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말 잘 듣는 아이가 착한 아이이다’라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부모나 교사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면 편하겠지만,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간을 대할 때 그렇게 판단하면 곤란하다고 본다. 아이의 생각이나 판단이 비록 미숙하고 보잘 것 없이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교육적 차원에서 볼 때 존중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존중을 받지 못한 채 자란 사람은 커서도 남을 존중할 줄 모르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존중은 사랑의 방법 가운데 하나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으로 ‘부모가 자애로워야[慈] 한다’는 가치를 좀 더 재해석하고 확대하여 ‘자식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현대판 자식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옛날이라고 이러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왜 이렇게까지 굳이 해석하느냐 하면, 흔히 ‘유교’ 하면 고리타분하고 가부장 중심으로 무조건 자식들에게 효도하라고 강요했다는 오해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모에 대한 순종도 부모의 권위에 대한 순종인지 옳음에 대한 순종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정통 유교에서는 옳음에 대해서 당연히 따라야 했다. 혹시 부모가 옳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가? 자식이 부모의 잘못을 여러 번 간했는데도 듣지 않고 계속 고집을 피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도 유교는 울면서라도 마지못해 따르는 것이 옳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가능할까? 지금의 사회적 환경으로 볼 때 힘든 일이다. 혹 겉으로는 따르는 척 해도 순임금과 같은 성인(聖人)이 아닐진대 속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자식 키우기는 옛날보다 더 어렵다. 부모가 자식을 순종하게 만들려면 부모이기 때문이 아니라 옳기 때문에 따르게 해야 한다.

자식의 동의를 얻어야

사실 옳기 때문에 따르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식이 어리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이의 생각을 존중해 주고, 부모가 시키는 것을 따르게 하려면 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애비가 시키면 군말 없이 해야지. 시건방지게 네까짓 것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혹시 이런 말을 할 부모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어쩔 수 없이 아이의 동의를 받는 것이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도 좋다. 더 나아가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존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어른이 되었을 때 아랫사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막 시킬 가능성이 있다. 다행히 좋은 교육을 받아 부모의 이런 영향에서 벗어난다면 혹 달라 질 수는 있겠으나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무튼 자식에게 무엇을 시키고 싶어도 그의 동의를 받는 방식에서 부모의 졸렬함과 노련함이 엇갈린다. 그래서 부모 노릇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가 배우는 일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을 때


아이가 배우는 일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을 때

 

아이가 딴 생각 못하게 하는 방법이 정말 있을까?
요즘 부모들도 이 글의 제목을 보면 무릎을 탁 칠 것 같다. 율곡 선생이 살았을 때도 아이들이 공부보다 딴 곳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실이지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공부에 큰 필요성과 관심을 자발적으로 가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예전에 학부모들은 학교에 가서 담임교사와 상담할 때 ‘아이가 딴 생각하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하는 방법’을 자주 묻곤 했다. 이런 질문에 아마 담임으로서는 대단히 난감했을 것이다. 그게 정말로 가능할까? 그리고 가능한 방법이 과연 있을까?

아이들의 관심사는 남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필자의 경험에서 볼 때 온통 먹는 것과 노는 것이 주를 이룬다. 초등학생들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면 남자아이의 경우 거의 다 엄마가 무슨 음식을 해주었다, 어떤 곳에 있는 음식점에서 무얼 먹었다, 그리고 맛있게 먹었다는 기술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누구누구와 무엇하고 놀았다든지 부모와 어디에 가서 무엇을 구경했다는 따위가 대부분이다. 여자아이들은 대개 부모가 시키는 대로 공부를 했다거나 집안일을 도왔다거나 친구와 함께 소꿉(인형)놀이를 했다는 등의 내용이 많다. 대체로 남자아이들보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다.

그러니 옛날이라고 달랐겠는가? 모르기는 해도 옛날 아이들도 글방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동무들과 노는 데 더 정신이 팔렸을지 모르겠다. 개울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는다든지 산골짜기 어디에 있는 산딸기와 머루와 다래를 따 먹을 생각, 오늘밤 누구네 수박과 참외를 서리한다거나, 자치기나 연날리기나 썰매타기 등 노는 것이 무척 많았으니, 거기에 온통 정신이 팔린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소아수지』의 첫 번째 항목의 내용은 이렇다.

〔1〕가르침을 좇지 않고 다른 일에 마음이 달려가게 하는 것(不遵敎訓, 馳心他事)

이 내용은 아이들이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경계해야 하는 말로 되어 있다. 쉽게 말해 아이들은 배우는 일을 잘 따르고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르침’이란 평소 배우는 내용으로서 옛 성현의 가르침일 수도 있고, 스승이나 부모의 가르침이나 훈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보면 모두 동일하다. 부모나 스승이라고 해서 옛 성현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옛 성현의 가르침도 결국 이들을 통해 배우기 때문이다. 결국 배우는 대로 하지 않고 딴 곳에 마음을 쏟는 일이 없도록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일 것이다.

옛날과 지금의 배움의 차이

이글을 보면 아이들이 딴 생각을 못하게 하는 방법은 제시되지 않았다. 다만 가르침을 좇고 공부할 때는 딴 생각을 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정보 정도만 담겨있다. 여기서 가르침에 대한 오해를 풀고 가야겠다. 지금의 가르침의 내용은 적어도 유치원 교육부터는 ‘교육과정’이라고 하여 국가에서 정해놓고, 지역이나 학교에 따라 그 내용을 특성화하도록 약간의 융통성이 보장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 교육과정이라는 것이 대개 교과와 연계되어 있고, 그것을 예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교과서 내용이다. 그 내용은 잘 알다시피 각 교과마다 가진 특수한 내용들이다. 그 내용이 가진 목표에는 대개 지식적인 것 정서와 기능적인 것 그리고 태도적인 것이 모두 포함되는데, 우리나라 교육현장의 모습을 보면 지식적인 것에 치중하고 있다. 대학입시 때문이다. 비록 도덕과의 경우는 태도에 더 치중하고, 예체능 교과는 정서와 기능이 더욱 강조되지만, 지식 교육의 대세에 밀려 해당교과의 목표가 잘 성취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율곡 선생이 살았던 조선중기는 이런 교과가 없었다. 원래 고대 중국에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라 하여 예절·음악·활쏘기·수레몰기·글씨쓰기·셈하기의 육예(六藝)라는 과목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거의 유교경전과 일부 사서(史書)를 읽고 독해하는 것으로 공부의 내용을 차지하였다. 이 또한 과거시험 때문이다.
이렇듯 교육내용이 거의 유교경전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보면 한문을 익혀 독해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내용적으로 보면 성현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일종의 도덕적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를 공부해도 결국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므로 일종의 도덕사관이 주를 이룬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은 거의 당시에 바람직하게 여겼던 도덕적 덕목을 행위를 통해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이 도덕적 가르침을 얼마나 자발적으로 발휘할까?

고분고분한 아이를 원하는가?

아이들이 딴 생각하지 않고 배우는 것을 고분고분 따라 하는 것은 모든 부모나 교사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실생활에서나 필자의 경험에서 볼 때 그런 학생들은 많지 않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고분고분함이 언젠가 필연적으로 배반을 일으킨다. 학생 자신의 삶에서나 그 학생이 관계하는 가정이나 사회 안에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반성하고 부정하고 때로는 저항하거나 반항하면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유아기 때에 형성된 관념과 도덕적 기준과 잣대를 버리지 않은 한 그 인간의 자아는 결코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아이들의 관심사로 돌아가 보자. 아이들이 공부에 관심이 없는 것은 공부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설령 재미가 있어도 요즘 세상에는 공부보다 재미있는 일이 백 배나 더 많다. 공부를 재미있게 가르치려고 교사들이 컴퓨터나 동영상, 게임, 애니메이션 또 그 무엇을 동원하여 가르치려고 부단히 애처롭게 노력해도, 아이들을 유혹하는 세상의 상술을 당해낼 재간은 그 어디에도 없다.

아이들은 동물적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천성적으로 노는 것을 좋아한다. 동물의 새끼들을 보라. 다 놀면서 장난치면서 성장하지 않는가?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이성적인가? 필자는 개인적으로 성인(成人)이 되기 이전까지의 아이들을 감성적 욕망에 이끌리는 동물로 본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이들을 대하는 것이 되레 마음이 편하다. 성인이 되어서도 동물수준의 인간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주변을 둘러보라.
이 말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 결코 아니다. 인간의 이성과 그 이성적 행위는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의 수준이 되면 대체로 먹는 것에 집착하고 또래집단에서 노는 것을 즐긴다. 그러다가 중학년 정도 되면 거기에 보태서 입는 것에도 관심이 쏠린다. 부모가 사주는 옷을 순순히 입는 것보다 자신의 취향을 고집하기도 한다. 그것은 또래집단에서 유행에 뒤떨어져 따돌림을 당하지 않으려는 노력과도 연관되어 있다. 노는 것도 또래집단을 갖지만 점점 개인화 되어 게임에 빠지기도 한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여기에 보태 이성(異性)에도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옷차림이나 용모 등에 무척 신경을 쓰고 부모나 교사의 말보다 연예인의 말 한마디 행동하나가 더 영향력을 미친다. 심지어 반항적이기까지 하고 자기 또래집단끼리만 소통한다. 또래 사이에 중시하는 일종의 명예심이랄까 의리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을 종합하면 이들이 이성적이고 도덕적 가르침을 자발적으로 따를 것이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설령 겉으로는 도덕적으로 행동해도 그 동기는 칭찬을 받고 비난을 피하는 관습적인 수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수준에서 행동하는 것이지, 도덕적 양심과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소인의 행동이지 군자의 행위가 결코 아니다. 그리니까 쉽게 말해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얼마나 직접 노출되느냐 감추어져 있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실 성인(成人)들도 대부분 그러하지 아니한가?

노는 것을 인정해야

그러니 아이들을 동물적이라고 해서 기분 나쁠 일도 아니고, 동물 취급을 해야 한다는 말도 더욱 아니다. 다만 그런 수준을 이해하고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공부보다 놀기 좋아한다는 경향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노는 것은 그냥 무의미하게 노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특히 아이가 어릴수록 그러하다. 노는 것이야 말로 창의력의 원천이며 상상력의 보고이다. 놀면서 물리적이고 구체적 경험을 통해 사고력이 발달하고 창의력도 싹튼다. 흔히 ‘정규 학교에서 공부한 놈보다 가방끈은 짧지만 사회에서 굴러먹은 놈이 머리가 잘 돌아가고 융통성이 있다.’는 속언은 이런 경험을 통해 나름의 사고력과 판단력이 발달했음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학교의 경험이 온실 안의 그것이라면 사회의 경험은 노지(露地)의 험한 경험이 아닌가?
그리고 필자가 작품을 구상할 때 언제나 상상력의 창고가 되었던 것은 어릴 때 놀았던 기억이다. 장면과 스토리 구성,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 때 언제나 옛날의 추억에 의존한다. 그래서 어릴 때 충분히 잘 놀았던 사람이 훗날 적절한 교육을 받았을 때 큰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신념이다. 잘 놀았지만 적절한 교육이 없거나 잘 놀지 못하고 오로지 학원과외를 통해 일류학교 졸업한 사람에게는 큰일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러니 어릴 때 충분히 노는 것을 막으면서 유아기 때부터 오로지 영어니 수학이니 또 무엇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렇게 놀아보지 못한 아이는 훗날 분명히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잘 자라기도 어렵겠지만 설령 나름대로 잘 자랐다고 하더라도, 어릴 때 잘 놀아보지 못했던 보복으로 성인이 되어 엉뚱한 데서 잘 놀아보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망치고 삶이 험난한 구렁텅이에 빠질지도 모른다.

도덕적 엄격주의

자, 그렇다면 율곡 선생은 아이들이 이렇게 놀기 놓아하는 습성을 몰라서 이런 말을 했을까? 선생의 말 가운데 행간을 읽어보면 그 점을 알았던 것 같다.

‘다른 일에 마음이 달려가게 하는 것(馳心他事)’

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인류 역사상 이른바 교육이 존재하는 이상 피교육자의 마음에는 다른 곳에 마음을 쏟는다. 특히 그 대상이 나이가 어리다면 그러하다.
그렇다면 그렇게 한 점 여유도 없이 마음을 단속하라고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점은 아마도 비록 아이들의 습성이 그러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아 올바른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성현의 가르침이라고 선생은 믿었던 것 같다. 당시는 성현의 가르침 외에는 특별한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이 국가의 이념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고 몸을 잘 닦아 남을 대하는 것이 사대부의 교육목표였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이 교육의 방법이나 목표에 개입되는 것을 허용치 않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도덕적 엄격주의가 교육의 방법에 적용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사회적 환경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이 도덕적 엄격주의가 국왕을 비롯한 사대부들에게 요구되었던 태도였다. 그래서 공부의 내용이 온통 도덕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노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

오늘날에도 학부모나 교사들은 아이들이 공부에만 전념했으면 하고 바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해오는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에서 어릴 때 장난치며 놀았어도 훗날 훌륭한 인물이 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이 교육의 목표에 접근하도록 가르쳐야 하지만, 아이들이 노는 것을 금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어쩌면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서 배우는 점이 더 많다. 너무 아이들이 고분고분하도록 강요하면, 기가 센 아이들은 반항하며 다른 길로 빠지고, 기가 약한 아이는 눈치 보며 우유부단한 습성을 길러줄 것이다. 아이들도 정해진 시간과 규칙에 따라 잘 놀게 하고, 그런 휴식과 즐거움에서 동력을 얻어 배움에 정진하도록 해야겠다. 그런 절도가 없이 아이가 노는 데만 정신을 놓고 있다면, 전문가를 찾아 별도로 상담해 봐야 한다. 아이를 망쳤다기보다 그 특성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 아이 어떻게 키울 것인가?


내 아이 어떻게 키울 것인가?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세대

요즘 인구가 줄어들고 앞으로도 더 줄어들 전망이어서, 나라에서는 젊은이들에게 결혼해서 아이 많이 낳으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혜택을 주는 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그 정책은 아직 미흡한지 결혼할 생각조차 안하는 젊은이들이 넘쳐 난다.

젊은이들이 이렇게 혼인을 거부하는 데는 매우 설득력 있는 이유가 많다. 우선  일자리가 없어 수입이 보장되지 않아서 결혼을 못하는 경우다. 대부분의 일자리는 소수 인력이나 기계가 대신하고, 그나마 인력이 필요한 회사는 싼 임금을 찾아 해외로 이전한다. 고작 남아 있는 일자리는 임금도 적고 대우도 열악한 직종인데, 이 자리는 대개 외국인 노동자들의 차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망하는 직종은 경쟁이 치열한 대기업 사원과 공무원, 그리고 소수의 전문직이고, 그래도 좀 낳은 경우는 부모가 경영하는 작은 사업체나 일터를 물러 받는 정도이며, 그 나머지는 신분이 불안정한 서비스나 협력업체 직원이 되거나 아르바이트로 전전한다. 이렇게 좋은 일자리가 인구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혼인을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사실 서민들에게 경제가 이렇게 어렵게 된 데는 현행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경제적 잉여가치가 자본을 많이 소유한 사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법을 바꾸어 개혁해야 풀리는 문제인데, 법을 다루는 국회의원들이 이런 의지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쩌다 운이 좋아 혼인을 한다고 해도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 아이들의 양육비 못지않게 양육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큰 짐이다. 예전처럼 부부 가운데 한 사람이 전업주부로서 활동할 때는 그래도 양육환경이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은 부부가 맞벌이를 해야 하니 양육환경이 열악해졌다. 그래서 경제적 비용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엄청 바쁘다.

아이가 더 자랐다고 해서 문제가 크게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아이의 성장에 비례하여 각종 교육비와 입시 준비, 또 아이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문제, 예컨대 친구사이의 갈등, 각종 사고 등으로 부모는 또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청년이 되어서도 자녀의 혼인과 경제적 자립, 자녀와의 갈등 등으로 죽을 때까지 자녀로부터 해방되기 어렵다. 부모는 언제나 자식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옛날처럼 효도가 일상화 된 때도 아니다. 자녀를 많이 낳아 키워도 결국은 대다수의 부모가 현대판 고려장인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러니 자녀는 낳아 키우는 일은 밑지는 장사가 아닌가? 요즘처럼 이해타산이 밝은 젊은이들이 뭐가 답답해서 혼인하려고 할까? 옛날에는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거의 막혀 있어서 혼인을 통하지 않고는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혼인을 했지만,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어 경제적으로 독립이 가능할 경우, 누가 그런 힘든 결혼생활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겠는가?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인하여 아이를 낳아 기르는 기특한 젊은이들도 있다. 비록 인구절벽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인기 없는 지방의 영세한 사립대학교를 제외하고 학교가 왕창 망했다는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그래도 자녀를 낳아 학교에 보내고 있다는 반증일 테다.

그렇다면 이들은 앞으로 더 복잡하고 어렵고 종잡을 수 없는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 살아갈 자신들의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옛날도 그랬지만 지금도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가 보다 좋은 환경에서 많은 수입이 보장되는 좋은 직장에서 일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 때문에 아직도 입시경쟁은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세상이 하도 자주 변해서 어떤 직업을 택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좋은 학교부터 나오고 보자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생각도 학부모들의 불안감에서 나왔다는 점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부모들에게는 이런저런 걱정이 많다

이렇게 사회가 어렵고, 미래도 불확실하다보니 부모 입장에서는 여간 걱정이 많은 것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교육을 시켜야 할지 과거처럼 정해진 모델도 없다. 그나마 교과교육은 학교나 학원을 통해서 한다고 하지만, 정작 인성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거의 방치 상태이다.
더구나 내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그리고 학교에 갔을 때 안전하게 잘 있는지, 혹 친구와 싸우지는 않는지, 거기다가 혹시 따돌림을 당하고 있지 않는지 무척 고민이다. 아이가 좀 더 자라면 나쁜 친구들과 사귀지는 않는지, 부모 몰래 나쁜 짓이나 하지 않는지, 이성 친구를 잘못 사귀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우리 아이 어떻게 키워야 할지 정말로 고민이다.
간신히 대학에 들어가 대학생이 되었다고 해서 고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대학을 나와서 취직은 할 수 있는지, 전공의 장래가 보장되지 않아 다른 전공으로 선택해야 할지, 해당학교가 일류학교가 아니라서 다시 다른 대학으로 편입학하거나 보다 좋은 대학의 대학원으로 진학해야 할지, 그리고 남자 아이라면 안전하게 군대에 갔다 오는 일 등 부모의 근심걱정은 그칠 날이 없다.

내 아이와 창의력

그렇다면 우리는 자녀들을 어떤 사람으로 키워야 할까? 미래 사회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숙고할 수밖에 없다. 흔히 미래는 창의력과 문제해결력이 뛰어난 사람이 성공한다고 다들 입만 열면 말한다. 그런데 창의력이나 문제해결력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것들은 또 다른 인성(人性)적 요소를 충족시켜야 나올 수 있는 문제들이다. 예컨대 물리학자가 어떤 원리를 발견한다고 하자. 이렇게 하려면 일단 창의력이 발휘되어야 하는데,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개 창의력이 금방 샘솟지는 않는다.
창의력이 발휘되려면 일단 그 일에 호기심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 그 일에 오랫동안 매달리는 인내심, 그 문제에만 온통 관심을 쏟는 집중력, 그리고 누구의 강요나 강압이 아닌 스스로 하려는 자발성,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남의 것을 베끼거나 모방하지 않는 정직성, 어떤 이론이나 편견에만 매달리지 않는 개방성, 그리고 그 연구를 스스로 해결하는 독자성 등 많은 인성적 요소가 기초를 이루어야 한다.

인성은 창의력의 바탕

바로 인성이 제대로 되어야 창의성도 발휘된다. 필자가 아는 작은 회사의 CEO나 대학의 인사를 맡은 교수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임용대상자의 인성을 먼저 본다고 한다. 실력이나 업적은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처음 들었을 때 대개 주관적 판단에 의지하는 인성을 우선시 한다는 것은 인사를 정실(情實)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으나 설명을 자세히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물론 우리 사회에 부조리한 정실에 의한 인사가 있었기 때문에 의구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창의성 또는 문제해결의 바탕이 되는 인성의 덕목을 살펴보면, 결국 인성이 좋은 사람이 실력도 있고 능력도 뛰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좋은 인성은 창의성의 밑바탕만 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직업을 스스로 찾는 진취성, 기존의 직업을 끈기 있게 이어가면서 새롭게 변화시키는 적극성, 친구와 사회에 대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친화성, 좋은 가치와 보편적 선을 위해 헌신하는 희생정신의 발휘,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비록 소박하지만 남과 협력하며 자신의 삶을 여유 있게 사는 협력정신이나 포용성의 발휘 등도 세상을 살아가는 좋은 인성과 관련이 있다.

옛날의 유교식 교육, 지금의 인성교육

인성에 대해서 흔히 세간에서는 고리타분한 옛날 유교적 덕목을 주입하거나 『명심보감』 따위를 달달 외게 해서 길러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글의 의도는 이런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기획하였다. 조선시대는 그런 책들을 달달 외면 그대로 인성함양에 적용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기 때문에 옛 성현들의 가르침대로 그대로 외고 실천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옛날처럼 달달 외고 그대로 실천했다간 남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성관련 교재를 외고 쓴다고 해서 훌륭한 인성이 길러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체로 위선자가 되기에 딱 알맞다. 마치 기독교의 성경을 곧이곧대로 사회에 나와서 사는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경우와 흡사하다. 현실은 과거의 고전이 만들어질 때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해석하여 오늘에 맞게 교육시켜야 한다.

소아수지와 인성교육

소아수지(小兒須知)』는 율곡 선생이 쓴 책이다. 이 책은 『율곡전서습유(栗谷全書拾遺)』 권4의 「잡저(雜著)」에 들어있다. 책의 제목이 그러하듯 어린이가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어린이를 위한 책에는 『격몽요결(擊蒙要訣)』이 있는데, 이 책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격몽요결』은 학문을 시작하는 초학자를 위한 것이라면, 이 『소아수지』는 그것과 별도로 아이들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누구나 지켜야 할 인성교육의 기초로서 소아에게 반드시 주지시켜야 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그러나 한편 모르기는 해도 『격몽요결』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이 책을 언제 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주자(이름 : 朱熹, 1130~1200)의 『동몽수지(童蒙須知)』를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선생도 주자의 내용을 참고하여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몽’은 ‘소아’와 같은 뜻이니 두 책의 제목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소아수지』의 내용을 더 구체화 한 것이 『격몽요결』로 보인다. 내용이 중복된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시에 『격몽요결』을 언급하겠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떻게 스스로 알아서 말씀을 지키겠는가? 성현의 말이니 그대로 따르라고 해서 순순히 지킬 아이는 거의 없다. 이는 반드시 부모나 스승의 지도가 병행되어야 함을 뜻한다. 더구나 이 책의 분량은 매우 적어 총17개의 짤막한 글로 되어 있다. 대부분 아동이 경계해야 할 내용이다. 원문으로 보자면 채 한 쪽도 되지 않아, 어쩌면 가장 내용이 짧은 책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니 부모나 스승 된 사람은 선생의 이 간략한 내용을 보고 실정에 맞게 더 보태서 지도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필자는 총17개의 내용을 하나씩 풀이하면서 설명할 계획이다. 채 한 줄도 안 되는 글을 가지고 이렇게 길게 설명한 필요가 있겠냐고 반문하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옛날의 글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또 옛날의 글이라고 해서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기에, 현대의 인성교육에 적용할 때는 그 때에 맞는 ‘시중(時中)’의 논리나 방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옛 성현을 욕되지 않게 하는 길이다. 무조건 외고 따르게 한다고 해서 아이들이 그렇게 하겠는가? 그렇게 하면 아들은 되레 ‘성인은 성인이고 나는 나이다’라고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실천하려고 노력하겠는가?

그것만은 아니다. 이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은 아이들이 아니라 그 부모나 교사에게 해당되기 때문에, 선생의 주장을 현대 교육적 관점에 맞게 해석할 필요가 있고, 또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내용을 손익(損益)할 필요도 있다. 더구나 옛날과 지금에 있어서 교육철학의 차이점도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전이 다 그러하지만, 그것을 금과옥조로 믿고 따르기보다 거기서 내가 무엇을 취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또한 현재 우리의 인성교육에 대한 뚜렷한 모범 답안이 없기에 옛 성현의 말에서 보편적으로 적용할 가능성을 찾아 설명하겠다.
17개의 원문을 우리말로 옮기고 따로 번호를 붙여 소개하겠다.

율곡과 우계, 친구 이상의 친구


율곡과 우계, 친구 이상의 친구

 

율곡이 평생을 함께한 가장 절친한 벗은 우계 성혼이었다. 율곡이 1536년생이고 성혼이 1535년생이라 성혼이 한 살 더 많았지만 이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친구로 사귀었다. 우계 성혼은 청송 성수침의 아들이다. 그는 초야에 묻혀 살면서도 세상에 이름이 높았던 아버지를 본받아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파주에서 살았다. ‘우계(牛溪)’는 그가 살았던 파주군 파평면 늘로리의 앞 냇물 이름에서 빌려왔다. 율곡 집안의 농장이 파평면에 있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두 사람이 교분을 맺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사람들은 뛰어난 인재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직접 찾아가서 인사를 나누거나 편지를 보내서 만났다. 1년 연상인 성혼이 율곡에게 편지를 보내 스승이 되어 달라고 간청한 것이 두 사람이 벗트게 된 계기였다. 율곡이 성혼을 처음 만난 것은 모친의 삼년상을 마친 19살 때로 금강산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이후로 두 사람의 우정은 죽는 날까지 이어졌다.

남의 단점과 실수를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까다로운 성격 탓에 율곡의 교우 관계는 그리 원만한 편이 못 되었다. 그런 율곡이 “나는 성품이 느슨하고 해이해 비록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지만, 우계는 알고 난 다음에는 곧 하나하나 실천하여 실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라고 칭찬할 정도로 성혼을 높게 보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때의 광경이 어떠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율곡이 43세이던 해 눈 오는 겨울에 소를 타고 우계를 찾아간 날을 기록한 듯싶은 시가 남아 전한다.

 

한 해가 저물어 눈이 산에 가득한데

들길은 가늘게 교목 숲 사이로 갈렸구나.

소타고 어깨 들썩이며 어디를 가나

우계 물굽이에 미인을 그리워했다네.

느지막이 사립문 두드리며 청초한 분 인사하곤

작은 방에 베옷 걸치고 방석에 앉았네.

긴 밤 고요히 잠 못 이루고 앉았노라니

벽 위에 푸르른 등불만 깜박이네.

반생에 슬픈 이별만 많아

산 너머 험한 세상길 다시금 생각하네.

이야기 끝에 뒤치다보니 새벽닭 울어

눈 들자 창문 가득 서릿달만 차가워라.

 

온 산에 눈이 가득한 날, 교목 숲 사이로 갈라진 들길을 따라 우계에 사는 미인(성혼)을 찾아갔다. 말을 탄 것도 아니고 소를 타고 갔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겨울이라 해가 일찍 저물어 이내 밤이 되었다. 우계의 집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작은 방석에 마주 앉았다. 베옷을 입은 성혼과 마주앉아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등잔불에 담아 놓은 기름이 다 타들어갔다. 바람에 깜박이는 등잔불이 어쩌면 동인, 서인으로 나뉘어 치열한 정쟁을 벌이는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닮은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다. 이런 세상에 이 친구마저 없었다면 어찌 견디었을까. 어느새 날이 밝아오는 듯 새벽닭이 울고 창문에는 서리 달만 차갑게 떠 있다.

율곡과 우계는 서로를 깊이 신뢰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언젠가 한 선비가 율곡을 찾아갔는데, 율곡이 술에 취해 누워서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 그 선비가 율곡을 찾아간 것을 후회하고 돌아와 우계에게 자기가 겪은 일을 알렸다. 그러자 우계가

“이 친구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다. 필경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 그날 성상께서 궁궐에서 빚은 귀중한 술을 하사한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고는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였더니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 이런 일화가 말해주듯이 율곡과 우계는 마음으로 깊이 사귄 벗, 즉 심우(心友)였다.
율곡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임금에게 우계를 추천했는데, 『선조실록』선조 13년(1580) 12월 18일자에 이런 내용이 보인다.

“상께서 성혼에게 특별하게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대우하신 것은 근세에 드문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그 사람을 꼭 쓰시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한번 만나보는 데 그치시려는 것입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성혼의 어진 덕은 나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다만 그의 재능이 어떤지를 알지 못할 뿐이다.”

하였는데, 이이가 아뢰기를,

“재능도 한 가지로 논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도 능히 경세제민(經世濟民: 세상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의 책임을 맡아 볼 사람이 있고 선을 좋아해서 능히 많은 아랫사람을 포용해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혼의 재능을 능히 천하를 경륜할 만하다고 평가한다면 지나칠지도 모르나 그 위인이 본디 선을 좋아합니다. 선을 좋아하면 천하도 다스릴 수 있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어찌 쓸 만한 재목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몸에 고질병이 있어 필시 헌관(憲官)의 직책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이 사람을 반드시 한가한 자리에 붙인 후에 때때로 경석에 입시하게 하면 선한 도를 개진하는 데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율곡이 생각하기에 우계는 선하기 때문에 천하를 다스릴 수 있을 만한 재능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다만 고질병이 있어서 건강하지 않으니 한가한 벼슬을 내려주고 이따금 불러서 의견을 구하라는 답변이다. 사실 성혼은 약관의 나이에 병을 얻어 평생토록 병마와 싸우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조선의 이름난 유학자들 중 퇴계 이황과 우계 성혼 두 사람보다 더 많은 병을 앓은 분이 없다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율곡은 임금이 우계를 이따금 만나는 것만으로도 선한 도를 널리 펼치는 데 보탬이 될 거라고 믿었다. 율곡이 우계를 얼마나 깊이 신뢰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1583년(선조 16) 조정에서는 병조판서 율곡 이이에 대한 탄핵이 열흘째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율곡은 과로로 인해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마침 임금이 변방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병조의 당상관을 불렀을 때, 내병조까지 왔다가 현기증이 일어나서 가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의 관리들이 ‘이이는 임금을 업신여겼으니 용서치 못할 죄를 지었고 나라를 그르칠 소인’이라며 일제히 탄핵을 시작했다. 결국 율곡은 조정의 여론에 밀려 이 해 6월에 병조판서를 그만두게 되었다. 율곡은 파주 율곡리에 머물다가 해주로 돌아갔다.

이때 조정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성혼이 율곡을 옹호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당시 성혼은 종삼품의 무관 벼슬이었는데, 상소문을 올려 율곡을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성혼은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오히려 임금을 저버리는 행위라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신이 삼가 이이의 사람됨을 보건대, 생각이 넓고 기질이 민첩한 데다가 타고난 성품이 고상하여 어려서부터 구도(求道)하는 뜻을 가졌으며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 분발하니, 비록 세상의 그 많은 이치를 골고루 안다고 할 수 없으나 의리라고 하는 큰 원칙은 확립되어 있사옵니다. 서재에 들어앉아서 글이나 외고 문장이나 해석하는 그런 썩은 유생들과는 질적으로 다르옵니다.(중략)
그는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것이 최상의 목표라는 것을 알 뿐이고, 자신에게 미칠 화근에 대해서는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은 믿사옵니다. 그는 어려운 때를 당하면 그것을 구제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지 자신의 몸을 후환으로부터 보전하려는 계획을 가질 겨를이 없었사옵니다. 이것이 그의 본래의 사람됨입니다.

우계는 율곡이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를 염려하는 사람이므로 정치적 안위만을 도모하는 썩은 유생들과는 사람됨이 다르다고 변호했다. 우계가 율곡을 얼마나 깊이 신뢰했는지 확연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우계의 상소문은 흔들리고 있던 선조의 마음을 다시 율곡 이이에게 향하게 만들었다. 탄핵을 주도한 대사간 송응개와 도승지 박근원, 신진 관리 허봉을 유배에 처했다. 율곡을 조정에서 몰아내려 했던 동인 세력의 중심인물 세 명이 나란히 유배에 처해진 이 사건을 ‘계미삼찬’이라고 한다.

계미삼찬 이후 선조는 율곡의 복직을 명하는 간절한 비답을 여러 차례 내렸다. 하지만 율곡은 선조의 부름에 응할 수 없었다. 병조판서에서 파직된 지 석 달 후인 1584년(선조 17) 1월,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율곡의 부음이 전해졌을 때 우계는 율곡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꺼내들고 피울음을 토해내었다.

아, 나는 실로 어리석고 혼몽하여 고질병까지 겹쳤습니다. 처음 형을 만나 다소 도(道)를 듣고는 스승으로 섬기려고까지 하였으니, 그렇다면 형에게서 얻은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래에 늙어가면서 정의(情義)에 있어 서로 신뢰하여 더욱 깊어지고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하고 연마함에 있어 서로 도움이 되어 더욱 절실해졌으니, 내가 만약 형이 없었다면 자립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중략)

옛날 편지를 다시 꺼내어 펴보니, 나에게 벼슬하는 의리에 대해 간곡하게 말씀해 주었는데, 그 말씀이 깊고 간절하여 나도 모르게 편지를 쥐고 울었습니다. 형은 그토록 나를 벼슬에 머무르도록 하였으면서 자신은 어찌 머물지 아니한 채 돌아보거나 연연해함이 없이 차마 군부(君父)를 버리고 떠나간단 말입니까.

스승과도 같았던 친구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남겨진 우계에게는 이제 삶이 고통이었다. 율곡이 그리워서 편지를 다시 꺼내보는 밤, 우계는 자신도 모르게 편지를 움켜쥐고 눈물을 흘렸다. 제문(祭文)만으로는 애통함을 달랠 수 없었던 우계는 만사를 지으며 비통해했다.

하늘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대도(大道)가 끝내 캄캄해져

백성들은 의지할 데를 잃었구나.

살아 있음이 고통인 줄 알겠구나

태허(太虛)로 돌아간 것이 즐거움이니

곧 지하에서 만날 것이니

길이길이 처음 뜻을 이루어보세.

 

친구의 죽음은 커다란 도가 사라지는 것이며, 백성들에게는 의지할 데를 잃는 참혹한 슬픔이었다. 친구가 없는 세상에서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임에 절망하면서도 우계는 율곡과 저승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었다. 우계는 율곡의 기일(忌日)이 되면 늘 소복을 입고 지내면서 한평생을 함께 걸었던 친구 생각으로 슬픔에 젖곤 했다.
율곡이 서거한 후에 당쟁으로 옥에 갇혔다가 얼마 후에 풀려 난 우계는 1585년에 율곡의 무덤을 찾아 곡을 했다. 그러고는 율곡 작품의 운을 빌린 시를 지어 친구인 구봉 송익필에게 보냈다. 우계가 지은 시는 이렇다.

세태는 사람 따라 변하고

수심은 늙어갈수록 새롭다.

어이 알았으랴. 뒤에 죽을 사람 되어

그대 시 읽고 상심하게 될 줄을

 

우계는 평소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자신이 율곡보다 먼저 세상을 뜰 거라고 여겼다. 살아서 친구의 죽음을 겪는 것보다 차라리 먼저 이승과 하직하는 것이 더 행복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율곡은 가고 자신은 남았다. 이 시는 그런 참담함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율곡과 계미기사(癸未記事)


율곡과 계미기사(癸未記事)

 

계미기사』는 1583년(선조 16) 1월부터 12월까지 1년간의 시정(時政)을 기록한 것으로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동서당론에 관계된 기사를 뽑아 편찬한 책이다. 1583년은 율곡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 해이다. 이 글은 계미기사의 내용을 중심으로 당시 치열했던 동서 붕당간의 갈등상황을 재구성한 것이다.

1583년 1월, 선조는 율곡을 병조판서로 기용하여 병권을 맡겼다. 당시 율곡은 거듭되는 승진으로 인하여 몇 년째 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지만 선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 해 6월에 니탕개가 이끄는 여진족 2만여 명이 함경도 종성을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율곡은 이에 대한 대책을 다각도로 제시하였다. 우선 군사 가운데 전마(戰馬)를 바치는 자에게는 북변으로 가는 것을 면제해 주는 조치를 취하면서, 이를 임금에게 미리 아뢰지 않고 시행했다가 뒤늦게 임금에게 계(啓)를 올려 ‘황공하다’는 뜻을 표하였다. 또 임금이 변방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병조의 당상관을 불렀는데, 율곡은 내병조까지 왔다가 현기증이 일어나서 가지 않았다.
그러자 동인들로 채워져 있던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가 6월 11일에 선조에게 율곡을 파직시킬 것을 요청했다.

“군정(軍政)은 중대한 일인데 아뢰지도 않고 마음대로 행하였고, 또 예궐하여 대죄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울러 부름을 받고 궐내에 왔으면서도 내조에만 들르고 끝내 지척 사이에 있는 승정원에 들려 교지를 받지도 않았습니다. 이로써 임금을 업신여긴 죄가 크니 파직을 명하기 바랍니다.”

간원들은 여러 날에 걸쳐 논박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율곡을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율곡은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은 터라 계속해서 사직의 상소를 올렸다. 그럴 때마다 선조는 율곡을 타이르며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했고, 영의정을 비롯한 정승들도 율곡의 사직을 반대했다. 그런 가운데 율곡은 6월 17일에 이런 상소를 올렸다.

“신은 죄를 짓고 황공하여 감히 출사를 못 하였습니다. 병권을 제 마음대로 하거나 임금을 업신여기는 일은 바로 신하로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지난번 대신들이 신을 위하여 각자 상소를 올리면서도 대간의 말이 지나치다고 지적하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이렇게 큰 죄를 짓고서 병조 수장의 위치에 처하여 장수들을 호령한다면, 그것이 사방에 전해졌을 때 반드시 해괴하게 여길 것이니 사면령을 내려주소서.”

그러면서 율곡은 계속해서 사직의 상소를 올렸다. 이러한 율곡의 태도에 대해 사헌부와 사간원 간관들이 다시 그의 파직을 청했다.

“이이는 자신을 반성하여 허물을 살피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도 오히려 자기가 먼저 의심하고 시기하여 분노를 깊이 품어, 여러 날 올린 상소의 내용들이 평온하지 않고 대간이 논핵한 것을 꼭 허구 날조한 것으로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대신들이 대간을 물리치지 않은 것을 그르게 여기고, 또 좌우와 여러 대신에게 물어 경중을 헤아려주기를 바라는 것이 마치 무슨 승부를 결정하려는 것 같았습니다.(중략)
대간이란 말을 하는 것이 직책이므로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임금이라도 그대로 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신하의 반열에 있는 자가 자기의 허물을 듣기를 싫어하여, 자기가 옳다고 강변하고 말을 한 대간들을 속 좁은 자들로 몰아 입을 열지 못하게 하니, 이는 매우 대간을 멸시하고 공론을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지만 여전히 선조는 율곡을 파직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이번에는 홍문관이 나서서 율곡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대간이 이이의 직을 파할 것을 청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니 이이로서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허물을 살피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거취를 놓고 다투기 위하여 필설을 놀려 공의와 맞붙어 싸우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근거로는 시론(時論)이 자기를 미워하여왔다고 하고, 두 번째는 좌우에 물어보라는 등의 애절하고 괴로운 말들로 임금의 귀를 동요시킴으로써 죄를 대간 쪽으로 돌려보내고야 말겠다는 심산입니다. 이는 바로 온 세상에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고 대간쯤은 손바닥이나 사타구니 사이에다 버려버리겠다는 생각으로 그 얼마나 공론을 무시한 처사입니까?”

홍문관까지 이렇게 강하게 율곡을 비판하고 나서자, 선조는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결국 선조는 “그대들이 올린 글의 뜻은 알겠다.”면서 삼사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조는 정승들에게 내린 비망기에서 율곡이 이번 일이 있기 전부터 신진 사림들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마침 율곡이 실수를 하게 되자 이 틈을 노려 기필코 그를 제거하려 했다고 쓰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다른 공경대부들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도 오지 않았던 자들이 많았지만 그들을 임금을 업신여겼다고 논한 경우는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왜 대간의 말이 유독 이이에 대해서만 그렇게 직설적으로 공격하는가? 그가 말[馬]을 바치게 한 일을 사전에 아뢰지 않았던 것도 허다한 사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때맞추어 아뢰지 못했던 것뿐이지, 어찌 멋대로 권세를 부리기 위하여 한 짓이었겠는가?”

선조의 이 말을 듣고 옥당 관원들이 모두 사직을 청했다. 이에 대해 선조는 사직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홍문관을 맡고 있던 권덕여와 홍진을 강하게 비판했다.

“권덕여와 홍진은 일찍이 내 앞에서 이이의 충직함에 대하여 칭찬하였었는데, 소인을 그토록 찬예했던 그들 자신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구나. 홍진 같은 별 볼 일 없는 무리야 책할 것도 없겠으나, 권덕여는 연로한 사람으로서 신진 선비들에게 붙어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는 이이를 소인으로 지목하고 나서니 그야말로 앞뒤가 뒤바뀐 자가 아닌가?”

이처럼 왕과 신하들이 언쟁을 벌이자, 영의정 박순이 우선은 율곡을 체직시키는 것이 합당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영의정 박순의 의견에 대해 선조는 다음과 같이 다소 한탄조의 비답을 내렸다.

“병조판서는 갈아야 한다. 이이는 이미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 되어버렸는데 무슨 영명이라는 것이 또 있겠는가? 내 비록 어두운 임금이나 소인과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할 리야 있겠는가? 이이야 자기 고향으로 잘 돌아가서 흰 구름 사이에 높다랗게 누워 있다 한들 그 누가 그를 얽매어둘 수 있겠는가?”

선조의 비답을 전해 듣고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들이 모두 자리를 비워버렸다. 또한 권덕여는 사직을 청하고 물러가 죄를 내리기를 기다렸다. 도승지 박근원을 필두로 한 승정원 승지들이 선조에게 양사의 관원을 모두 출사하게 하고, 권덕여도 출사하여 직무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했지만, 선조는 권덕여를 쉽사리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성혼이 이이를 대변하는 글을 올렸다.

“송(宋)의 구양수나 유지도 논핵을 당하고는 모두 글월을 올려 자신을 변명했지만 그들 역시 반드시 소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이이가 말한 것은 그 목적이 출사하기 위함이었고 자신을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었는데도 삼사의 논의가 크게 일었고, 게다가 또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라든가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다는 죄까지 뒤집어씌웠습니다. 처음은 경미한 죄였는데 거기에다 왕을 업신여긴 죄와 나라를 깔보는 죄명을 씌웠고 이제는 또 그 죄명으로 법에 의거하여 죄를 청하려고 하니, 이는 그를 꼭 죽을 땅으로 몰아놓고야 말겠다는 심산인 것입니다.”

성혼의 상소문에 관한 말을 듣고 장흥 부사 송응개가 상소하여 논박했다. 송응개는 이이와 심의겸은 같은 당인이며, 사실은 이이가 서인의 우두머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원색적으로 율곡을 비판했다.

“이이는 원래 하나의 중으로서 임금과 어버이를 버리고 인륜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변신하여 환속한 뒤에 권력 있는 가문의 가축이 되었던 것을 이 세상의 청의(淸議: 뜻이 높고 올바른 논의)는 용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 높은 관청에 뽑혀 알성급제 할 때에 관청에 있는 많은 선비들은 그와 동렬이 되는 것을 수치로 여겨 사귀기를 불허했는데, 마침 심통원이 자기의 심복을 보내 앞뒤에서 분주히 소통의 길을 열어놓음으로써 비로소 행세할 수 있었습니다. 급기야 출세한 후에는 심의겸의 추천을 받아 청요직의 길이 트였으므로 그와 심복 관계를 맺어 생사를 함께하게 되었으니, 그가 일생 동안 가진 마음을 더욱 알 만합니다. 또 박순은 입을 모아 이이를 찬양하고, 성혼도 박순이 찬양하는 사람이며, 성혼 또한 심의겸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입니다.”

송응개의 말을 듣고 선조는 화가 나서 말했다

. “네 말이 설사 다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이제 와서야 말한 것은 불충이다. 너의 직위를 내놓고 물러가라.”

성혼의 상소를 듣고 사헌부 간관들도 모두 사직을 청했다. 선조는 사직하지 말라고 했지만 사헌부 관원들은 업무를 보지 않았다. 그때 정언 이주가 상소하여 이이를 비판하고, 박순과 심의겸, 성혼 등이 모두 한 패거리라고 했다. 이후 동인 중 한 명이었던 우의정 정지연이 상소를 올려 이이에 대한 조정의 의논을 중재하려 했다. 그는 병이 깊어 조정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이이를 탄핵하는 일로 삼사와 왕이 서로 언쟁을 벌이고 동인과 서인이 나뉘어 다투는 양상이 되자, 중재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정지연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들은 박순, 심의겸, 이이, 성혼을 한꺼번에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이이를 두둔하는 영의정 박순을 파직하라고 요청하자, 선조는 윤허할 수 없다고 버텼다. 이때 양사의 글을 주도한 인물은 허엽의 아들 허봉이었다. 허엽과 박순은 서로 악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허봉이 양사를 충동질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정의 논쟁은 급기야 성균관 유생들에게로 번졌다. 성균관 유생 유공진 등 470명과 전라도와 황해도 유생 400여 명이 상소하여 이이와 성혼은 어진 신하라고 두둔하고 나선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힘을 얻은 선조는 그해(1583년) 8월 28일에 이이와 박순, 성혼을 비난한 도승지 박근원은 강계로, 장흥 부사 송응개는 회령으로, 창원 부사 허봉은 종성으로 귀양 보내버렸다. 이것을 계미년에 세 명을 내쳤다고 해서 ‘계미삼찬’이라고 부른다.

세 사람을 유배 보낸 선조는 이이에 대해 자주 이런 말을 했다.

“이이는 진실로 군자이다. 이이와 같다면 당이 있는 것이 근심이 아니라 오직 당이 적을까 근심이다. 나도 주희의 말대로 이이나 성혼의 당에 들어가고 싶다.”

선조는 그런 말을 한 뒤, 1583년 9월 8일에 율곡을 이조판서에 제수하여 조정에 나오라고 했다. 율곡은 그때 파주에 머물면서 병을 치료하고 있었다. 또한 이조판서에 제수되기 사흘 전인 9월 5일엔 사직 상소를 올렸었다. 선조는 그런 율곡의 마음을 이해한다면서 이번에는 이조판서에 제수한 것이다.
율곡은 10월 22일에 궁궐로 들어와 선조를 알현하고 박근원과 승응개, 허봉 등을 유배에서 풀어줄 것을 청했다. 율곡은 박근원과 송응개는 본래 간사한 자들이지만, 허봉은 다소 가볍긴 하나 간사한 사람은 아니라는 평도 했다. 하지만 선조는 단호하게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경은 말할 것이 없다.”

고 거절하였다.

12월 11일에는 해주 사는 유학 박추가 김성일, 우성전, 이경률 등이 동서 분당의 주역이라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추의 상소문을 읽고 선조는 “바른 말을 상소하여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처럼 선조가 율곡의 의견을 따라 조정 인사를 단행했을 때 이미 율곡은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조정에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84년 1월 16일, 율곡은 4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