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양(朴性陽: 1809~1890)


운창 박성양(朴性陽: 1809~1890)                    PDF Download

 

조선 말기의 문신인 그의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계선(季善), 호는 운창(芸窓)이다. 서울 출신으로, 제일(齊日)의 아들이며, 어머니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운원(運源)의 딸이다. 천자(天姿)가 총명하고 용모가 단정하였던 그는 일찍이 외가에서 공부하다가 이지수(李趾秀)의 문하에 들어가서 경의(經義)를 배웠다.

1866년에 프랑스가 강화도에 침범하자, 그가 이를 물리쳐야 한다는 내용의 <벽사명(闢邪銘)>을 지어 사람들을 깨우쳤다. 송근수(宋近洙)의 천거로 그는 또 1880년(고종17)에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호조 참의(戶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 호조 참판(戶曹參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등을 역임하였다.

편저서로는 《운창문집(芸窓文集)》 15권을 비롯하여 《이학통고(理學通攷)》,《호락원류(湖洛源流)》, 《가례증해보유(家禮增解補遺)》, 《거상잡의(居喪雜儀)》,《속통감(續通鑑)》, 《국조기이(國朝記異)》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고종실록(高宗實錄)》을 보면, 자의(諮議) 박성양(朴性陽)에게 타일러 말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예로부터 훌륭한 선비는 반드시 훌륭한 임금을 기다려서 일어나기 때문에 몸이 시골에 있어도 성인의 글을 항상 공부하면서 임금을 존경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을 스스로 맡아 도(道)를 실천하고 학문을 전개하다가 임금이 부르면 사양하지 않고 선뜻 나서는 것이 바로 그들의 본분이고 의지였다.

경은 이름 있는 집안의 대대로 벼슬을 지내온 후손으로서 나라와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해왔으며 병으로 초야(草野)에 있으면서도 공자(孔子)의 학문을 연구하고 정주학(程朱學)의 뜻에 통달하였다.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여 진실로 곤궁한데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므로 당대 선비들의 으뜸으로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유독 자신만을 좋게 하려고 한 것이겠는가. 대궐에 나와서 임금을 돕는 계책을 말해 주어야만 한다. 내가 몹시 사랑하는 것도 이 때문이고 경이 기다렸다가 나서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세자(世子)의 슬기로운 자질이 날로 갖춰지고 사(師), 부(傅)의 상견례(相見禮)도 좋은 날을 받아놓았다. 경에게 자의(諮議)의 벼슬을 주었으니 경은 제때에 길을 떠나 빨리 와서 빛나게 바른 일과 바른 말로 세자(世子)를 돕도록 하라. 이것이 또한 내가 좌불안석(坐不安席)하면서 목마르게 기다리는 까닭이다.

가을철도 깊어가니 경이 그리워진다. 흰 말을 타고 올라와서 이 저녁을 함께 지내기 바란다.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기 바란다.”

이러한 하명이 있고난 뒤에 아마도 이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박성양(朴性陽)의 부주 서계(附奏書啓)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초야의 미천한 신이 외람되게 이 큰 은혜로운 지시를 받았으므로 마음의 격정을 누르지 못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히 태연스럽게 지시를 받고서 스스로 참람한 죄를 범할 수 없기에 삼가 놀란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죽음을 무릅쓰고 하소연합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박성양이 사직을 청하였으나 고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비답(批答)을 내려 간곡한 마음을 피력하였다.

 

“지난번에 비록 부주(附奏)를 보기는 하였다마는 멀리 떠나가려는 마음을 애써 되돌려줄 것을 나는 기대했는데 지금 온 편지에 또다시 사양한 내용을 보게 되니 실망스런 마음을 가눌 수 없다. 나는 꼭 오게 하려는 마음이 있으나 성의가 부족하여 믿음을 보이지 못하였고, 경은 반드시 사양할 의리가 없는데도 고상한 뜻을 더욱 굳게 가지니, 그렇다면 어진 사람을 좋아한 시(詩)와 좋은 자리를 펴놓고 초빙하는 예법은 과연 오늘날에는 실현하기 어렵단 말인가.

대체로 선비의 글공부는 반드시 써먹을 데가 있어서 덕행과 정사를 4과(四科)에 병렬하여 놓았던 것이다. 경은 이 뜻을 필시 깊이 알고 익숙하게 연구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세자(世子)의 서연(書筵)을 자주 열고 있는 만큼 모름지기 노숙하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덕성을 길러주어야 할 중요한 시기이다. 경은 선뜻 마음을 돌려먹고 즉시 조정에 나와서 이 두터운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그러나 박성양(朴性陽)은 여전히 상소를 올려 사직하고 옷을 하사한 은전(恩典)을 철회할 것을 청하니, 고종은 너그럽게 권면하는 비답(批答)을 다시 내렸다.

 

“경를 불러 오는 것을 단 하루도 마음속에서 잊어버린 적이 없다. 옛날의 어진 이들을 손꼽아 보아도 역시 세상에 나가서 쓰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실로 임금을 돕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방도가 시골에 있을 때부터 정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한 신하의 본의가 고상하게 벼슬하지 않는 사람과는 원래 다른 점이 있는 만큼 어찌하여 굳이 시골에 박혀있으면서 포부를 펴서 자기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 것을 생각지 않는가.

하물며 지금 백성들의 뜻이 안정되지 않고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단정하지 못하므로 반드시 옳은 말을 하고 덕을 닦아서 유교를 부지하는 것이 눈앞의 급선무이기도 하려니와 또 가을철에 경연(經筵)과 서연(書筵)도 장차 열어야 하겠으니, 경은 빨리 마음을 고쳐먹고 조정에 나와서 나의 애타는 기대에 부응토록 하라.”

이와 같이 간곡하게 당부하였건만, 박성양은 또 다시 사직을 청하였고 고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다. 박성양이 다시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자, 다음과 같은 비답을 내렸다.

 

“해가 저물어가므로 경을 생각하는 마음이 날로 더해지는데 사임하는 편지가 이런 때에 와서 줄곧 멀리 가려고만 하니, 나의 말이 졸렬하고 예의가 부족해서 경으로 하여금 은퇴하려는 마음을 돌려세우게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대로 벼슬해 온 후손이며 노숙한 학문을 지니고서도 그저 혼자만 살고 혼자만 좋게 하려 하면서 자기 임금과 백성들을 도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공평하게 하는 방도가 자신을 수양하고 가정을 잘 꾸리는데 근본을 두었다는 말과도 어긋나지 않겠는가. 더구나 지금 서연(書筵)을 자주 열고 경이 참가하여 강론하는 것을 더욱 기대하고 있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런 지극한 뜻을 체득하고 빨리 조정에 나와 주기 바란다.”

고종이 끝까지 무려 몇 차례에 걸쳐 설득하고 타일러 조정에 나와 주기를 바라는 그의 간곡한 부탁이 절박하기까지 하다. 그 내용은 다음 글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어진 사람을 구하고 훌륭한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급선무이고 포부를 드러내어 써먹는 것은 옛날의 명철한 사람들이 실행한 일이다. 경은 글을 읽어서 이치에 밝고 자신을 조심하여 행실이 독실하니 마땅히 스스로 중책을 맡아주어야 하겠는데 도리어 영영 시골에서 살 것을 맹세하기를 마치 은퇴한 선비가 자신만 보전하려는 것처럼 하고 세상에 나가서 쓰여서 애타게 도움을 받으려는 나의 기대에 맞추려고 하지 않고 있다. 비록 나의 정성과 대우가 박해서 믿음을 사지 못한 탓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어찌 지난날부터 경에게 바라던 것이겠는가. 세자(世子)의 입학과 관례(冠禮)는 이미 내년 정월달에 길일을 정했으니 세자의 학문이 성취되고 예식이 성대히 진행되는 것은 경이 조정에 나오는 데에 달렸다. 그러니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며칠 내로 길을 떠나도록 하라.”

위의 몇 차례 주고받은 글에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마치 밀당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글에서 박성양이 고종 임금으로부터 얼마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는가를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신하가 되어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더할 데 없는 영광이 될 터인데 끝까지 이를 사양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려는 박성양의 당시 처지는 어떤 것이었는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연구해 봐야할 듯하다.

 

<참고문헌>
《운창문집(芸窓文集)》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실록(高宗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