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시키는 일을 아이가 곧바로 따르지 않을 때


부모가 시키는 일을 아이가 곧바로 따르지 않을 때

 

내 아이도 내 맘대로 되는가?
식을 키워 본 사람이라면 내 자식도 내 맘대로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잘 안다. 특히 어릴 때는 아이에게 무얼 시켰는데 곧장 하지 않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가령 밥을 다 차려 놓고 밥 먹으로 오라고 부르면 꾸물대면서 늑장을 부리기도 하고, 숙제를 미리미리 하라고 당부했는데 하지 않고 놀다가 정작 등교하기 직전에 밥도 안 먹고 숙제한다고 허둥대기도 하며, 자기 전에 양치질 하고 자라고 일렀는데 그냥 자버리기도 한다.

아이가 좀 자라서도 그런 일은 반복된다. 등교 후 곧장 집으로 오라고 일렀는데 친구들과 놀면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돌아오고, 공부나 숙제 따위를 다 하고 게임은 한 시간만 하라고 했는데도 공부나 숙제를 내팽개치고 몇 시간 째 게임을 하기도 하며, 속옷을 자주 갈아입으라고 일렀어도 땀이 배어 냄새가 날 때까지도 그냥 입고 다니는 남자아이들도 있고, 동생이나 형, 언니나 누나와 싸우지 말라고 당부했는데도, 틈만 나면 상대방만 탓하며 티격태격 싸우는 아이들도 있다.

옛날에도 아이들이 그랬던 모양이다. 율곡 선생이 『소아수지』에서 말하는 두 번째 경계하는 항목이 바로 이 문제이다.

〔2〕부모가 명한 것을 곧장 시행하지 않는 것(父母所令, 不卽施行)

사실 선생의 이 말에 대해서 ‘부모가 명한 것이라고 해서 곧장 이행해야 합니까?’라는 반문이 가능하다. 지금 세상은 조선시대도 아니고 또 부모가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부모의 명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법도 하다. 더구나 자식이 장성하여 부모보다 교육을 많이 받고 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이 들고 판단력이 흐려져 시대의 흐름과 상황판단을 제대로 못하는 부모의 명을 곧이곧대로 따라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상식을 조금이라도 갖춘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고대에서 부모에 잘못이 있으면 간(諫)하라고 하고 있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따라서 선생의 이 말은 보편적인 입장보다는 일단 아동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아이는 태어나서 최초의 교사가 되는 사람은 부모다. 아이는 사리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부모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래서 부모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부모의 명을 즉시 따르지 않는 원인

그런데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아이가 부모의 명을 순순히 따른다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아이들이라고 해서 다 그런가? 앞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특히 현대의 아이들은 모르긴 해도 옛날보다 부모의 말을 즉각 따르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 천성적으로 성격이 순하거나 칭찬을 통해 잘 길들여진 아이는 부모의 명에 곧장 따른다. 필자도 그랬던 것 같다. 부모님이 하라고 한 일을 거부해 본 기억은 거의 없다. 다만 일에 따라서는 하기 싫어서 마지못해 한 것이 있는데, 그 일 가운데 하나가 여름철 마당에 난 잡초를 뿌리 째 뽑는 일이었다. 필자가 살았던 시골집은 마당이 꽤 넓었고, 그래서 꾀를 내어 잡초의 줄기와 잎만 뜯다가 아버지한테 혼 난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다면 모든 아이들이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도 필자처럼 순한 아이도 있고, 부모의 명에 뺀질뺀질 핑계 대며 거부하는 아이들도 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유전적인 성격 차이 또는 도덕성의 발달 정도에 따라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 양육 환경과 가족 안에서 역할이나 서열 등에 따라서 후천적으로 학습되어 그런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가

“사람의 본성은 비슷한데 습관으로 인해 멀어진다(性相近, 習相遠).”

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유전적 요인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환경적 요인 곧 학습을 통하여 부모의 말을 잘 따르는 경우와 따르지 않는 경우로 그 원인을 나눌 수 있겠다. 여기서 부모의 교육적 역량이나 가정환경이 매우 중요하게 부각된다. 쉽게 말해 양육을 잘하는 부모와 그렇지 못한 부모의 역량 차이에 따라 아이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양육 방식의 차이

사실 아이가 부모의 명을 순순히 따른다고 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부모가 매우 엄격하여 마치 군대의 상관이 부하에게 명령하듯 지체 없이 명을 따르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아이는 부모가 무서워서 시키는 대로 곧장 따를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부모의 권위나 강압에 못 이겨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기가 약한 아이는 따르겠지만 기가 센 아이는 처음에는 따르다가 나중에는 빈틈을 노려 꾀를 부리거나 좀 더 자라면 점점 반항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명을 거역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못한다.

반면에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말고, 예기치 않게 어겼을 때는 가벼운 벌칙을 병행하면 아이들은 바르게 자라고 부모의 명을 잘 따른다. 그런데 여기에도 조건이 있다. 부모가 항상 올바르며 자식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고, 또 그 양육방식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잘못에 대한 벌을 줄 때 안됐다 싶어 감해주거나 생략하다보면, 아이는 벌을 우습게 여긴다. 또 아버지는 엄격한데 어머니가 인정이 많아 몰래 아이를 감싸준다면 아버지의 훈육이 먹히지 않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벌이나 책임에 대한 일관성이 없다면, 아이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여 올바른 가치관을 배양하지 못하게 된다.

바른 부모가 되기 위해서 선생은 『격몽요결』에서 부모가 되었으면 마땅히 자식에게 자애로워야 하고, 또 부부사이라도 예의와 공경을 잃지 않아야 집안일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자식을 낳았으면 약간의 지식이 있을 때부터 착한 곳으로 인도해야 하는데, 만약 어려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자라게 하면 나쁜 것을 익히고 마음을 놓아버리게 되어 가르치기 힘들다고 지적하고 있다(「거가장」). 바로 부모의 교육적 역할과 환경 조성을 지적한 말이다.
이러한 양육 방식의 차이를 공자가 『논어』에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법을 자식 교육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자녀들을 잔소리를 가지고 이끌고 체벌을 가지고 말을 잘 듣게 만들면,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어겨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 반면에 올바른 인격으로 자녀들을 이끌고 모범적인 행위로 따라오게 하면 자녀들은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을 알고 또 바르게 될 것이다
(원문: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위정」).”

 

말 잘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앞에서 율곡 선생이 아이가 부모의 명을 곧장 시행해야 한다고 하는 데는 어떤 전제가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항상 올바르고 자애로워야 한다는 점과 또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의 명을 어기지 말고 곧장 따라야 한다는 유교적 가치관이 녹이 있다. 이런 조건이라면 선생이 말한 명제는 충족된다. 도덕원리나 논리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도 바른 도리를 말하는데 즉각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비도덕적이다. 도덕률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이는 그런 도덕원리를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도덕적 판단능력을 아직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자님이나 성경의 말씀을 귀에 따갑도록 말해준다고 해서 아이가 순순히 따르겠는가? 강제로 지키게 하면 어딘가에서 문제가 터지기 마련이다. 많은 영화나 소설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럴 때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가 모범적으로 잘 보여주고 사랑으로 인도하여 아이가 잘 따른다면 무척 다행이겠지만, 그래도 안 따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회초리를 들고 야단쳐야 할까? 이것도 요즘에는 아동학대로 비춰져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아이가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데는 그 행위의 잘못을 떠나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아이의 생각이 부모의 그것과 달라서, 또는 아이의 욕심 또는 욕망이 부모의 그것과 배치되거나, 부모의 명이 자신의 욕망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렸거나, 때로는 아이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부모의 명을 망각한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든 다짜고짜 윽박지르거나 야단쳐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알고 보면 아이도 나름의 생각과 주관과 욕망이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 내용이 어떻든 간에 그것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 즉 아이도 나름의 인격체이고 의견과 의지가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이나 지시로 따르게 한다는 것은 요즘 시대에 먹히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라면 자기가 사는 동네나 온 나라 사람들이 다 그러니, 만약 아이가 부모의 명을 거역하면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므로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남이 시키는 대로만 알아서 척척 하는 아이는 아무리 부모의 명이라고 해도,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은가? 아직도 순종이 미덕일 수 있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자신의 주관과 의지가 박약한 우유부단한 사람, 더 심하게 말하면 정신적 노예가 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말 잘 듣는 아이가 착한 아이이다’라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부모나 교사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면 편하겠지만,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간을 대할 때 그렇게 판단하면 곤란하다고 본다. 아이의 생각이나 판단이 비록 미숙하고 보잘 것 없이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교육적 차원에서 볼 때 존중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존중을 받지 못한 채 자란 사람은 커서도 남을 존중할 줄 모르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존중은 사랑의 방법 가운데 하나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으로 ‘부모가 자애로워야[慈] 한다’는 가치를 좀 더 재해석하고 확대하여 ‘자식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현대판 자식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옛날이라고 이러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왜 이렇게까지 굳이 해석하느냐 하면, 흔히 ‘유교’ 하면 고리타분하고 가부장 중심으로 무조건 자식들에게 효도하라고 강요했다는 오해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모에 대한 순종도 부모의 권위에 대한 순종인지 옳음에 대한 순종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정통 유교에서는 옳음에 대해서 당연히 따라야 했다. 혹시 부모가 옳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가? 자식이 부모의 잘못을 여러 번 간했는데도 듣지 않고 계속 고집을 피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도 유교는 울면서라도 마지못해 따르는 것이 옳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가능할까? 지금의 사회적 환경으로 볼 때 힘든 일이다. 혹 겉으로는 따르는 척 해도 순임금과 같은 성인(聖人)이 아닐진대 속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자식 키우기는 옛날보다 더 어렵다. 부모가 자식을 순종하게 만들려면 부모이기 때문이 아니라 옳기 때문에 따르게 해야 한다.

자식의 동의를 얻어야

사실 옳기 때문에 따르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식이 어리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이의 생각을 존중해 주고, 부모가 시키는 것을 따르게 하려면 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애비가 시키면 군말 없이 해야지. 시건방지게 네까짓 것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혹시 이런 말을 할 부모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어쩔 수 없이 아이의 동의를 받는 것이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도 좋다. 더 나아가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존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어른이 되었을 때 아랫사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막 시킬 가능성이 있다. 다행히 좋은 교육을 받아 부모의 이런 영향에서 벗어난다면 혹 달라 질 수는 있겠으나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무튼 자식에게 무엇을 시키고 싶어도 그의 동의를 받는 방식에서 부모의 졸렬함과 노련함이 엇갈린다. 그래서 부모 노릇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