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金時敏,1681-1747)


 

김시민(金時敏,1681-1747)                                  PDF Download

 

1681(숙종 7)∼1747(영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수(士修), 호는 동포(東圃) 또는 초창(焦窓)이다. 경기도 양주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호조정랑을 지낸 김성후(金盛後)이며, 어머니는 임천 조씨(林川趙氏)로 관찰사 조원기(趙遠期)의 딸이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다.

김시민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심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조심하며 아무리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자존(自尊)하지 않았다. 14~5세 무렵에 집안 어른인 김창협의 문하에 들어가서 ⌈대학⌋과 「서명(西銘)」․「태극도(太極圖)」 등의 글을 배웠는데 듣는 대로 이해하여 김창협으로부터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깝다는 평을 들었다.

오랜 병을 앓던 부친의 증세가 심해지자 직접 약을 달이고 상분(嘗糞: 사람의 대변의 맛을 보아 그 건강한 정도를 살펴보는 의학적 행위를 말한다)의 정성을 다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3년의 시묘 살이 동안 잠시도 띠를 풀지 않아서 한여름에는 흐른 땀으로 최질(상중에 입는 삼베옷)을 두른 곳의 피부가 모두 문드러질 정도였다. 또 모친인 조부인이 70세의 나이로 쇠약해져 병이 들자 다른 곳에서 자다가도 곧장 일어나 옷을 갖추어 입고 문안하였다. 그의 행동에 대해 사람들이 의아해하자, 조부인이

“이 일은 정성과 효심이 감응해서 그러한듯하다. 내가 밤사이 기침을 하다가 기도가 한참 막혔는데 이제 괜찮다”

라고 한 일화가 있다. 새벽마다 사당에 참배하고 물러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선조의 영령이 양양(洋洋)하실터인데 이곳에 계시지 않음은 내가 하는 일이 마땅하지 않아서인가? 아버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어찌하실까?

내가 체득한 것은 털끝 하나라도 버려두지 않으리라”라고 하며 실천적인 삶을 영위할 것을 다짐하였다.

김창협 등의 영향으로 출사보다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둔 김시민은 52세인 1732년에 음보로 선공감역(繕工監役)을 맡아 태묘(太廟)를 수리한 공으로 사옹원주부․장예원사평․사직종묘령을 역임하였다. 이때의 공으로 현감직에 제수된 그는 외롭거나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을 먼저 규휼하는 유화(儒化)를 실천하는 목민관을 자임하였다. 1735년 낭천현감 재임 당시에 큰 흉년을 규휼하는 공을 세워 벼슬을 올리는 승서(陞敍)하라는 명이 있었음에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가 고을을 떠날 때는 그곳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공적을 기념하였다. 진산군수(珍山郡守)로 부임했을 때는 학궁(學宮)을 짓고 고을의 재정을 개선하고 선비를 양성하였는데, 그가 임지를 떠난 후에도 진산의 유림들이 공을 제사하여 받들었다.

김시민의 교우 관계의 주요 인물들은 이종사촌인 신정하(申靖夏) 형제를 비롯하여 대체로 김창협과 김창흡의 문하생들인 이하곤(李夏坤) 등 당대의 시명(詩名)을 떨치던 인물이 주축이다. 그보다 10살이 많기는 하지만 서로를 깊이 알고 온 집안이 교유하며 천고에 큰 마음을 나누던 이병연(李秉淵)과의 만남은 그의 시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 홍중성(洪重聖)을 비롯하여 시인 홍세태(洪世泰)와 정래교(鄭來橋)등과도 교분이 깊었다.

김시민이 김창협과 김창흡에게 수학하였기에 학문과 문예 창작의 방면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김시민이 활동하던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을 지배하던 철학적 화두는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이었다. 이에 대해 김창흡은 천하의 사람과 만물이 품부 받은 본성에는 차이가 없다는 ‘인물성동론’을 주창하였다. 김시민도 이 논의에 동조하여 인성과 물성의 같은지 다른지를 두고 벌어진 어유봉(魚有鳳)과 이현익(李顯益)의 논쟁에 가담하여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다.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동일하다는 김시민의 철학 논리는 고(古)․금(今)의 가치를 우열의 논리로 이해하는 당시의 문예이론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났다. 이에 개별 사물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열을 가늠하는 결정론적인 태도를 보이기보다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관찰하고 분석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 예로, 그들이 정선(鄭敾)이 그린 진경산수(眞景山水)를 높이 평가한 것도 우리 산수를 중국 산수인 양 왜곡하거나 비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높은 수준의 예술적 성취를 이룩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이 왜곡되는 번잡한 세속의 삶은 서호(西湖: 중국의 항주)로의 도피를 시도하게 할 만큼 힘들었기에 그는 불교사상에 대한 탐닉과 죽림칠현(竹林七賢)과 도연명(陶淵明) 식의 고아하고 청렴한 은둔적 삶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하고 사물의 본질을 동일시하는 학문 태도는, 당대 지식층의 무조건적인 옛 것을 좋아하는 취향에 반발하며 우리 시대 우리 사람의 문예작품의 가치를 진실한 것, 훌륭한 것으로 평가하게 하였다. 김시민은 평소에 앓던 천식이 악화되어 1747년 3월 20일에 사망하였다. 사후에 이루어진 문집 간행은 그의 벗이자 평생의 지기였던 이병연이 유고를 정리하고 후사인 김면행(金勉行)이 조명리(趙明履)와 한원진(韓元震) 등에게 행장과 묘도문을 부탁하며 이루어졌다. 유고의 간행을 도맡은 이병연(李秉淵)은 시에 대한 뛰어난 조예로 온갖 시체에 능하며 김창협이나 김창흡 등을 비롯한 당대의 거유들에게 전송될 정도이던 김시민의 작품의 삼분의 이를 산삭하는 준엄한 편찬 태도를 고수하여 문집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처럼 그는 경사(經史)에 밝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고체시(古體詩)는 독자적 경지에 도달하였다. 뒤에 김상훈(金相勛)․홍중주(洪重疇) 등 130여명이 그의 덕망과 효행을 나라에 주청하여 이조참의를 추증받았다.

저서로는 동포집이 있다. 이 책은 모두 8권 4책으로 목판본이다. 1761년(영조 37) 아들 김만행(金晩行)에 의하여 편집하여 간행되었다. 현재 규장각 도서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두에 윤봉조(尹鳳朝)와 한계진(韓啓震)의 서문 2편이 있고, 권말에 1757년 신경(申暻)이 쓴 발문과 1761년에 김원행(金元行)이 쓴 발문 2편이 있다. 권1∼6에는 시 899수, 권7에는 서(書) 18편, 잡저 17편, 권8에는 제문 11편, 가승(家乘) 7편이 있다. 부록으로 한원진(韓元震)이 쓴 행장, 이병연이 쓴 묘지명, 조명리(趙明履)가 쓴 묘갈명, 김재노(金在魯)가 쓴 묘표, 이병연과 홍중주(洪重疇) 등이 쓴 20편의 만사(挽詞)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중에 정시(程詩) 11수는 모두 다 역사적인 고사를 가지고 읊은 시들이다. 그의 시는 뛰어난 경지를 이루었으며, 이병연과 함께 당대에 시명을 떨쳤다. 권7의 서(書)에는 시사(時事)․문후(問候)․예제(禮制) 등에 관한 내용이 많다.

이어서 잡저 17편이 있는데, 대부분 서문이나 발문이다. 잡저의 「제왕문성공집후(題王文成公集後)」는 왕수인(王守仁)이 경학에 있어서는 송나라 제현(諸賢)들 이후에 제일인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주자설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당시 유학계의 사정으로 보아 혁신적인 것이며, 양명학에 관하여 새로운 연구를 개척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동국집(東國集)⌋, ⌈영조실록(英祖實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