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부(姜浩溥,1690-1778)


 

강호부(姜浩溥,1690-1778)                                   PDF Download

 

1690(숙종 16)∼1778(정조 2).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관은 진주(晉州). 자는 양직(養直). 호는 사양재(四養齋)이다. 강진휘(姜晋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덕후(姜德後)이고, 아버지는 시정(寺正) 강석규(姜錫圭)이며, 어머니는 김성급(金成岌)의 딸이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이다. 1754년(영조 30) 통덕으로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으며, 같은 해 교리를 거쳐 현감으로 나가 크게 치적(治積)을 남겼다.

강호부는 1690년 9월 25일에 태어났다.  6세 때에 아버지 강석규가 별세하자 일가족이 연천(漣川)으로 이사하였다.   8세 때 소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육경(六經)과 사서(史書)를 질문하였다. 부친의 사망 이후 집안형편이 빈곤하였는데, 팽성(彭城)의 여자를 아내로 취하여 처가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일찍이 노모의 봉양을 위한 목적으로 과거에 응시한 적이 있었다. 나이 13세 때 경기도 회시(會試)에 수석을 차지하였으나 ‘무적(無籍)’이라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었다. ‘무적’은 국적이나 학적 따위가 해당 문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호적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도 쓰인다. 20대 중반쯤 집안의 경제적 여유를 확보한 후에, 한원진을 배알하고 그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1726년(영조 2)에 생원시(生員試)에 1등으로 합격했으나 이후 경학에 매진할 것을 결심한다. 그의 호가 사양재(四養齋)인 것도 이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강호부가 거처하던 방의 편액에서 유래하였는데, 성(性)․기(氣)․재(材)․량(量) 네 가지를 기르고자 하는 강호부의 학문적 지향을 반영하고 있다. 편액(扁額)은 종이, 비단, 널빤지 등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를 뜻한다.

강호부의 학문과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아마도 스승인 한원진이다. 강호부는 한원진이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를 통해 주자의 초년과 만년설의 동이(同異) 문제를 정리함으로써 500여 년 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주자언론동이고는 주자의 문집 속에 보이는 동일 개념에 대한 차이를 정리한 책으로, 시작한 사람은 송시열이었으나 실제 작업은 한원진의 손에서 완성되었다. 단순히 용어사용의 차이나 기록의 착오 또는 견해의 바뀜을 밝히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주자의 세계관, 고전 해석 방법 등을 깊이 있게 해명한 책이다. 이이→김장생→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지는 학문적 성취도 한원진으로 말미암아 천명되었다고 보았다. 한원진이

“주자에게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이․김장생․송시열․권상하를 빛내기도 하였다”

는 평가는 주자 이래로 이이를 거쳐 권상하에 이르는 도통(道統)의 적전(嫡傳)으로 한원진을 자리매김한 것이다.

강호부가 20대에 한원진에게 사사 받은 것은 어려서부터 그의 학설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강호부는 한원진의 문하에 들어가기 전부터 당대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 대해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다는 한원진의 주장이 옳고,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이간(李柬)의 논의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심(心)의 선악문제를 기질의 청탁(淸濁)과 관련시켜 이해하였다. 기질의 청탁이 반반인 사람은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으며, 완전히 맑은 기질을 가진 사람은 성인(聖人), 완전히 탁한 기질을 가진 사람은 우인(愚人)이 된다고 하였다. 기질의 맑고 탁함, 순수하고 잡박함은 성인과 보통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되며, 기질의 통하고 막힘, 온전하고 치우침은 사람과 사물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 강호부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사람은 인의예지의 성품을 부여받은 존재이고, 사물은 그렇지 못한 존재이다.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만들 때 이 과정에서 오행의 이치가 오행의 수기(秀氣)에 들어가면 그것은 오상(五常)의 성품이 되고, 오행의 ‘수기’에 들어가지 못하면 오상의 성품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과 사물의 차이는 오행의 ‘수기’를 얻었느냐 얻지 못했느냐로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강호부는 한원진의 문하에서 많은 문인들과 고유하였다. 송능상(宋能相)․권진응(權震應)․김근행(金謹行) 등과 학문적인 토론을 하였고, 김용경(金龍慶)․정존겸(鄭存謙)․조엄(趙曮)․이석재(李碩載) 등의 관료들과도 교유관계를 가졌다.

저서로는 문집인 췌언(贅言)과 문장론인 불후방(不朽方) 3편, 역사서인 사유(史腴) 10편, 예서인 상례보유(喪禮補遺) 1권, 학자의 실천을 경계한 하학일과(下學日課) 3권, 연행록인 상연록(桑蓬錄) 4권 등이 있다. 강호부는 일찍이

“성인의 학문은 모두 춘추(春秋)에 있다”

라고 하여 춘추의 사상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그는 역대의 여러 주석들이 경전의 본뜻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이에 그는 춘추의 경문 아래에 역대의 주석을 기재하고 단락마다 정자와 주자의 논의를 적었으며, 정자와 주자의 해석이 없는 경우에는 자신의 해석을 붙여 춘추원류(春秋源流)라고 이름 하였다. 이 책은 100여 편 가까이 되었다고 하는데 탈고하지 못하고 강호부가 사망한 후 잃어버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소론에 속했던 인물로써 여러 차례 정치적 위기를 겪었으나 벼슬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정조 초에 벼슬길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주기론(主氣論)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 뒤 저술과 후학육성으로 여생을 보냈으며, 편저로는 주서분류(朱書分類)가 있다.

주서분류는 강호부가 주자의 서간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편집한 책이다. 필사본으로 54권 54책이다. 저작 시기는 미상이며, 현재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중국 송나라 주희(朱熹)의 글을 내용에 따라 분류한 책으로, 서문․발문․간기(刊記) 등이 없으며 저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지 조선도서해제(朝鮮圖書解題)에 강호보 편저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 필사본이 원본인지의 여부는 미상이나 편자의 이름이, 원래 기재되어 있었거나 그 후손이 보관했던 것을 수집할 때 확인했을 수도 있다. 이 책은 주서(朱書)에 관한 체계적인 분류의 대작이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주자의 글을 편집한 저서 중에서도 가장 분량이 큰 것이다. 따라서 방대한 양을 내용에 따라 분류한 것으로 학자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된다.

이 책은 이기(理氣)를 비롯하여 태극(太極)․이기선후(理氣先後)․이자훈의(理字訓義)․천지(天地)․천문(天文)․사시(四時)․혼천의(渾天儀)․역법(曆法)․기수(氣數)․도기(道器)․음양(陰陽)․체용(體用)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의 힘으로 그 방대한 양을 섭렵하여 이처럼 분류한 것은 보기 드문 일이며 그 노심초사의 정력이 집약된 결과이다. 주자서를 이용하는 학자들에게는 길잡이가 될 뿐만 아니라, 역사 이래 이런 분류가 드물었다는 데에도 이 책의 가치가 더해진다. 또 주자의 정치․경제․사회 그리고 경서․문학 등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이용하기가 대단히 편리하게 되어있다. 한편 동일한 편자(編者)가 편한 24권 8책으로 된 활자본이 성대도서관, 국립도서관, 이대도서관 등에 전해진다. 이 활자본은 1928년 간행되었다. 이 주서분류 중에서 일부분만 뽑아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서인-노론계의 주자 도통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다. 일찍이 이 문제를 시도한 이는 송시열(宋時烈)이었고, 이것이 한원진을 거쳐 강호부에게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강호부의 40년에 걸친 노력의 결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