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예겸(沈禮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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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예겸(沈禮謙, 1537년~1598년)은 조선시대 중엽에 활동한 관리이자 학자이다. 선조 3년 식년시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한 뒤, 관직에 나아가 한산군수, 성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병조판서를 지낸 심충겸(沈忠謙)의 형이며, 판중추부사,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심열(沈悅)의 양아버지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군량 보급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명나라 군대에 군량을 제때에 보급하지 못한 책임으로 곤장을 맞은 적이 있으며 나중에 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하였다.

1537년(1세)
중종 32년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송, 자(字)는 문숙(文叔)이다. 형제는 위로 형 둘이 있으며 아래로 동생 다섯이 있다.
젊어서 영일 정씨 정숙(鄭潚)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1569년(32세)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아들 심열(沈悅, 1569년〜1646년)을 낳았다. 심열은 나중에 심예겸의 양자로 들어왔는데, 성장한 뒤 과거에 합격하여 판중추부사,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학이(學而), 호는 남파(南坡),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저서로 남파상국집(南坡相國集)이 있다.

1570년(33세)
선조 3년 식년시에 생원(生員) 3등으로 합격하였다.

1571년(34세)
우계 성혼이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년〜1546년)의 행장에 대해서 물어와 답해 주었다. 우계집 속집 제6권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송도(松都)에 사는 안경창(安慶昌)이 ‘집에 화담 선생의 행장이 있다’고 하기에 가져다 읽어 보니, 기재한 내용이 자세히 구비되지 못하였고 또 글에 오자가 많았으며, 문체가 기전체(紀傳體)이고 행장이 아니었다. 누가 지은 것인지 몰랐는데 뒤에 심문숙(沈文叔 심예겸沈禮謙)에게 물어보니 관찰사 박민헌(朴民獻)이 찬(撰)한 것이라고 하였다.”

1584년(47세)
우계 성혼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답신을 온 편지 속에 다음과 같은 글이 들어 있었다.
“이제 성은(聖恩)을 입어 품계를 뛰어넘어 크게 발탁되었으니, 황공하고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비가 비록 실제보다 지나치게 소문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나 또한 마땅히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뜻을 지켜 스스로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다만 놀랍고 두려울 뿐이니, 또한 일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작은 벼슬을 사양하고 큰 벼슬을 받는 것은 의리상 편안하지 못하니, 이 사이에 마땅히 제대로 조처해야 거의 한쪽에 치우치지 않을 것입니다.”

1586년(49세)
한산군수에 임명되었다.

1589년(52세)
아들 심열이 과거 시험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55세)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심예겸은 개성부(開城府)에 재직할 때였다. 그는 군량보급(軍糧補給)에 공을 세워 나중에 성천부사(成川府使)에 임명되었다.
이 당시 10월경에 심예겸 등이 모은 의병들을 지휘할 사람을 두고 진중에서 논의가 벌어졌다. 이 자리에 정창연, 윤두수, 이산보, 그리고 선조 임금 등이 있었다. 정창연(鄭昌衍)이 이렇게 제안했다.
“이정형(李廷馨)ㆍ김지(金漬)ㆍ심예겸(沈禮謙)이 군사를 모았는데 군중(軍中)에서 명망이 있는 사람을 장수로 삼을 것을 동궁(왕세자, 즉 광해군)에게 호소하였던 바, 동궁이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성혼을 불러 장수를 삼으면 어떻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군중이 호소해 온 바에 따라 하는 것이 옳다.’ 하였습니다. 이는 동궁께서 하신 일이 아닙니다.”
이에 이산보는 이렇게 제안하였다.
“이강(李綱)은 정승에는 합당하나 장수에는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성혼은 보도(輔導, 보좌)에는 합당하지만 장수에는 합당하지 못합니다.”
윤두수는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직접 창과 방패를 잡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우는 것이 바로 장수의 임무입니다.”
선조 임금은 이들 대신들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1593년(56세)
아들 심열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심열은 성균관전적 등 삼사의 요직을 거쳐, 경기도·황해도·경상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이해 7월 심예겸은 간원(諫院)의 탄핵을 받아 파직을 당하였다. 이때 간원이 임금에게 건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천(信川, 황해도 신천)지방은 쇠잔(衰殘)함이 너무 심한데, 새로 군수가 된 박명립(朴名立)은 나이가 많고 성질이 느려 회복의 책임을 감당할 수 없으니, 교체하시고 각별히 유능한 사람을 골라 임명하소서. 성천 부사(成川府使) 심예겸(沈禮謙)은 전에 개성 경력(開城經歷)이 되었을 적에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일이 있었으니, 파직하시고 유능한 사람으로 교체하시기 바랍니다.”
선조는 이러한 의견에 따라 심예겸을 파직하였다.
개성 경력으로 있을 때 심예겸이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대동야승에 다음과 같은 야사가 전해져 온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의) 대군이 개성부에 이르러 매우 오래 있었는데 군량이 이미 다 되었다. 오직 수로를 따라 마른 풀을 강화도에서 가져오고, 또 배로 충청도와 전라도의 마초를 운반하여 조금씩 도착하였는데, 오는 대로 다 떨어지니 그 형세가 더욱 급하였다. 하루는 여러 장수들이 양식이 모자란다고 구실을 삼아 (명나라) 제독에게 회군을 청하니 제독이 매우 성내었다. 제독은 체찰사 유성룡ㆍ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ㆍ경기좌도 감사 이정형(李廷馨) 등을 뜰아래에 무릎 꿇리고 큰소리로 힐책하며 군법을 가하려 하였는데, 유성룡이 사죄하기를 마다 않고 눈물을 흘릴 뿐이니, 제독이 민망히 여기며 명나라의 여러 장수들에게로 화를 돌려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예전 서하(西夏)에 종군하였을 때에는 군중에서 수일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도 감히 돌아가자고 말하지 못하였는데 끝내는 큰 공을 이루었다. 지금 조선에 와서 우연히 수일간 양식을 대지 못하였는데 어찌 감히 문득 돌아가자고 하느냐. 너희들은 가려면 가라. 나는 적을 멸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요, 오직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가지고 갈 뿐이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유성룡 등이 사례하고 물러 나와서 시기에 맞지 않게 양곡을 방출한 죄로 개성 경력(經歷) 심예겸(沈禮謙)을 곤장으로 때렸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전라도에서 바다로 수송해 오는 쌀과 콩 2만 2천여 석과 황해도에서 수송해 오는 마초 수만 석이 후서강(後西江)에 닿아서 겨우 무사하게 되었다. 이날 저녁에 제독이 총병 장세작을 시켜 유성룡 등을 불러 위로하고 또 군사(軍事)를 의논하였다.
유성룡이 직접 지은 징비록에도 심의겸이 곤장을 맞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

1598(61세)
사망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참고자료>
선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대동야승(「재조번방지」), <한국고전종합DB>
한국학중앙연구원, 「심예겸 인물정보」, 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김신호, 「심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8.
성혼, 우계집 속집 제6권,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