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金正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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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율곡학맥-김정희
추사 김정희 초상
김정희(金正喜, 1786년∼1856년)는 조선시대 후기의 북학파 실학자이자 서예가이며 화가이다. 고증학자이기도 하며, 우리나라 금석학의 개조로 평가되기도 한다.

젊어서 중국 연경(북경)에 사신의 일행으로 따라가서 당시 청나라의 명사들이었던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과 교류하고 금석학을 배워,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였으며, 예술가로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스스로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그는 30대 중반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하지만 집안 대대로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고 임금의 외척이었으며, 외가 역시 노론의 명문이었기 때문에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 높은 관직에까지 올라 출세하였다. 그러나 50대 중반부터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집안이 몰락하고 10년 넘게 귀양살이를 하는 등 불우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인 성과인 추사체는 바로 이러한 환경이 낳은 성과이기도 하였다.

 

1786(1, 정조 10)
6월 3일, 충청도 예산현(지금의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김노경(金魯敬)과 어머니 기계(杞溪) 유씨(兪氏) 사이에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일설에는 장자) 본관은 경주, 이름은 정희(正喜),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과노(果老), 농장인(農丈人) 등을 사용하였다.

고조할아버지 김흥경은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할아버지 월성위 김한신(金漢藎)은 영조 임금의 사위가 되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추사 고택은 증조할아버지가 지은 집이다. 외가는 노론의 명문으로 함경도관찰사를 지낸 유한소(兪漢蕭)가 외증조부이며, 문장과 서예로 유명한 유한준(兪漢雋), 유한지(兪漢芝)가 그의 4촌, 6촌 형제이다.

 1788(3, 정조 12)
동생 김명희(金命喜)가 출생했다. 재취부인 예안 이씨도 이해에 출생하였다. 할아버지 김이주(金頤柱)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790(5, 정조 14)
큰아버지 김노영(당시 44세)이 외교사절단 사은부사로 북경에 갔다. 이해 여름에 박제가(朴齊家, 당시 41세)가 진하사 수행으로 북경에 가 완원(阮元), 손성연(孫星衍) 등과 교류하였다.

 1791(6, 정조 15)
이 무렵(일설에는 1793년경)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가 되어 서울(당시의 한성부)로 상경했다. 이해에 실학자 박제가가 김정희의 <입춘첩>을 보고 장차 크면 이 아이를 가르치고 싶다고 하였다. 나중에 박제가는 실지로 중국에 가서도 김정희를 자신의 제자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다음해 채제공(蔡濟恭, 당시 73세)도 김정희의 <입춘첩>을 보고 장차 글씨로 이름날 것을 예언하였다.

1793(8, 정조 17)
양아버지 김노영이 개성유수가 되었다. 그러나 11월경 옥사 사건을 잘못 다스려 파직되었다. 다음해 김노영은 공금을 함부로 빌려준 일로 유배되었다. 7월, 막내동생 김상희(金相喜)가 출생했다.

 1797(12, 정조 21)
큰아버지이자 양부인 김노영(향년 51세)과 할아버지 김이주(향년 68세)가 사망했다. 이해에 종형(從兄, 사촌형) 김관희(金觀喜)도 향년 25세로 사망하였다.

 1800(15, 정조 24)
한산이씨 이희민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아내와는 나이가 같았다. 박제가에게 사사하였다. 그에게 북학파의 사상을 배우고 박지원의 학풍을 계승하였다. 이해 6월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였다. 7월부터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 정순왕후는 김정희의 11초 대고모에 해당하는 친적이었다.

 1801(16, 순조 1)
8월, 친어머니(생모) 유씨의 상을 당했다. 향년 34세였다. 박제가 북경에 가서 옹방강(翁方綱)과 면담하였다. 옹방강은 일찍이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에 관여한 학자로 경학(經學)에 정통하였으며, 금석문과 서화, 시문에 능하였다. 청나라 때에는 성리학과 양명학, 즉 송나라와 명나라 사상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옹방강은 모두 거부하지는 않고 절충하는 입장을 가졌다. 이러한 입장은 김정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2월에 정약용이 유배되었다. 9월에는 박제가가 유배당했다.(이후 1804년에 풀려났다.) 다음해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었다.

 1805(20, 순조 5)
전해에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거두었는데, 이해 1월 61세로 사망하였다. 대비 상을 당하여 홍천현감 김노경(김정희의 친부)이 종척집사(宗戚執事)가 되었다.

2월, 부인 한산 이씨의 상을 당하였다.(향년 20세) 이해에 박제가(朴齊家)가 사망하였다. 향년 56세였다. 이해에 김노응, 김노경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즈음 양어머니가 사망하였다.

 1808(23, 순조 8)
양어머니의 삼년상이 끝나고, 예안(禮安) 이씨 이병현의 딸을 새 아내로 맞이했다.

 1809(24, 순조 9)
9월, 친아버지 김노경이 호조참판이 되었다. 11월,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했다. 12월, 친아버지(생부) 김노경을 따라 북경에 갔다. 아버지는 당시 동지 겸 사은부사의 직책이었다. 양부가 사망한 뒤로 추사는 부친을 모시고 살았다.

 1810(25, 순조 10)
1월에 북경에서 완원(阮元, 당시 47세)과 옹방강(翁方綱, 당시 78세)을 만나 사제의 의를 맺고 고증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옹방강으로 부터 편액을 받았다. 완원으로부터는 그의 저서와 ⌈심삼경주소 교감기⌋등을 기증 받았다. 완원은 경학의 대가였는데, 김정희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과 고증학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들 외에 북경에서 여러 명사들을 만나 교류하였다. 북경에서 옹방강과의 만남은 김정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귀양살이를 할 때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평생에 두 사람의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을 잊을 수가 없는데 한 분은 완원이고 다른 한 분은 옹방강이다. 완원 선생께 배운 것은 남이 그렇다고 한다고 해서 나 또한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고, 옹방강 선생께는 평생 경을 떠나지 않는 것이 경학이라는 것을 배웠다.”

나중에 박규수는 추사의 글씨체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여러 번 변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젊어서는 동기창의 글씨를 따랐었고, 중년에 중국에 다녀온 후에는 옹방강의 글씨를 열심히 써서 쓸데없이 기름지고 두껍다는 흠이 있었다. 그러다 중년을 지나면서 중국의 구양순을 비롯한 여러 대가의 글을 다 익히더니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여러 대가의 장점은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이해 3월, 동생 김명희의 부인 은진 송씨가 사망하였다.(향년 21세) 3월에 북경에소 돌아와 입조(入朝)하였다. 다음해 부친 김노경이 예조참판으로 승진하였다.

 

1815(30, 순조 15)
옹방강과 편지를 교환하면서 경전의 연구의 지도를 받았다. 옹방강과는 북경에서 돌아온 뒤로도 지속적으로 편지와 선물을 주고 받았다. 옹방강에게는 김정희와 같은 나이의 아들(옹수곤)이 있었는데 아들이 이 해에 죽어 부음을 알려왔다. 옹방강은 아들을 대신할만한 젊은 학자 섭지선(葉志詵, 당시 37세)을 소개해주었다. 이 섭지선과 김정희는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해에 수락산 학림암에서 초의선사와 처음 만나 친구로 사귀었다. 부친 김노경이 경상감사가 되었다.

 1816(31, 순조 16)
고증학에 흥미를 느끼고 7월,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석이 진흥왕순수비임을 고증하였다.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짓고, 「이위정기(以威亭記)」를 지었다. 옹방강이 청나라에서 긴 편지와 함께 자신의 시집과 「소재필기(蘇齋筆記)」(1, 2권)를 보내왔다. 일전에 김정희가 옹방강에게 고경(古鏡)과 탁본들, 그리고 「퇴계집」, 「율곡집」, 일본의 구각(舊刻), 그리고 중국에서 구할 수 없는 묘품(妙品) 인삼 등을 보냈는데 그에 대한 감사의 글도 함께 왔다.

 1817(32, 순조 17)
6월, 조인영과 북한산비를 다시 방문하고 비석의 글씨를 살폈다. 측실(側室)에게서 아들(庶子) 김상우(金商佑)를 얻었다. 옹방강이 「소재필기」 제3권을 보내왔다.

 1818(33, 순조 18)
1월에 옹방강이 사망했다. 향년 86세였다.

가야산해인사중건상량문」을 지었다. 2월, 부친의 근무지 대구 감영에서 장동 본가에 있는 부인 예안 이씨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한글 편지를 썼다.

“지난번 대구로 내려오는 중간에 보낸 편지는 보셨소? 그 사이 대구로 내려오는 인편이 있었는데, 당신 편지를 못 보았소. 부끄러워서 아니하셨소? 나는 마음이 심히 섭섭하오. 그동안 편안히 지내시고, 대소 연고 없고, 집안단속과 예의범절은 착실히 잘 하고 있소? 사랑방의 동네 일꾼들이 아직 떠나지 않고 있다 하오? 일념이 놓이지 아니하오며, 나는 오래간만에 친 아버지를 모시고 지내니 든든하여 기쁘기 한이 없어 그걸 어찌 다 적소? 그 길에 천리나 주유(周遊)하여 흙탕길과 험로에 무수히 고생하고 대구에 14일 만에 득달하여 왔사오니, 쉰지 3일이로되 너무 피곤하여 못 견디겠소. 오늘 저녁이 (전부인 한산 이씨) 제사인데, 형님께서 멀리서 오시고, 뒷집 동생은 들어와 같이 지내는가? 멀리 떨어져서 이렇게 걱정이오며……”

(김경순, 117쪽 참조. 일부 문장 수정함. 이하 같음.)

이해에 그는 이러한 편지 외에 여러 편(총 11편)의 편지를 부인과 주고받았다.

11월, 부친 김노경이 병조참판이 되었다. 12월, 김노경이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이어서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었다.

 

1819(34, 순조 19)
1월, 부친 김노경이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3월에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해 4월에 함께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집안이 왕실과는 외척관계였기 때문에 그의 과거 합격은 왕실의 경사이기도 하였다. 이 때 그는 조정의 허락을 받아 증조할아버지 월성위 내외 묘에 제사를 드렸다. 친구 조인영도 이 때 같이 합격하였다. 이후 세자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 등을 지냈다.

 1820(35, 순조 20)
5월, 양자로 삼은 13촌 조카가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 상우를 위해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정자체로 썼다. 섭지선이 중국에서 동지사 편으로 원나라 사람의 그림과 책자를 보내왔다. 이해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출생했다. 다음해 부친 김노경은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섭지선이 중국에서 서적과 탁본 자료를 보내왔다. 주달은 조맹부의 책 (⌈前後赤壁賦帖⌋) 2권을 보내왔다.

 1823(38, 순조 23)
3월 부친 김노경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부친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김정희는 4월에 「석견루노사시권(石見樓老史詩卷)」을 지었다. 이해 8월, 규장각의 대교(待敎)가 되었다.

 1824(39, 순조 24)
부친 김노경이 과천에 별서(別墅, 농막)로 과지초당(瓜地草堂)을 지었다. 12월 부친이 형조판서가 되었다. 김정희는 창림사탑에서 출토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고증하였다.

 1826(41, 순조 26)
1월 중국에서 섭지선이 단옥재의 서적 30권 15책을 보내왔다. 6월에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었다. 가는 길에 안동김씨 비인(庇仁, 지금의 충남 서천군 비인면 지역) 현감 김우명(金遇明)을 봉고(封庫) 파직하였다. 이일로 김우명과는 정적관계가 되고 집안이 화를 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1827(42, 순조 27)
4월에, 부교리, 의정부 검상(檢詳)에 임명되었다. 10월에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3일 만에 물러났다. 섭지선에게 글씨와 서책, 옛 비석의 탁본 등을 보냈다.

 1828(43, 순조 28)
3월, 부인 예안 이씨가 온양의 친정 집에 머물고 있어 장동 본가에서 다음과 같이 한글로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가신 후에 다시 소식이 막히니 그 사이 (친정 어른을) 모시고 한결같이 평안하시오? 한해 만에 어른을 모시고 지내시니 오죽 든든 하리오만, 노친네 형편은 어떠시오? 염려 내려놓지 못하오며 당신은 어떠하오? 또 병 때문에 불편하게 지내지 아니 하였소? 잊혀지지 않아 걱정이 놓이지 못하오며 나는 아버님이 감기가 계속 낫지 않아 대단히 불편하게 지내시니, 속이 타고 안타까우니 어찌 다 적소.

(중략) 종시 낫지 못하시니 이렇게 마음이 초조하고 급하오. 나도 이때 까지 낫지 못하고 독감을 또 얻어 대단히 앓았더니 수일이야 조금 낫사오나 기운 수습이 어렵사오니 답답하오.……”

(김경순, 151쪽)

 

한 달 정도 뒤에, 부인 이씨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급히 상경하도록 요청하였다.

“지난번에 형님이 오는 길에 적어 보내신 편지를 보았소. 그동안 일절 소식 없사오니, 부모님 모시고 안녕하시오? 적정이오며, 여기는 그 사이 아버님이 병고로 대단히 불편하게 지내오시더니 수일 전부터 조금 나아지셨소. 근무하시는 남영으로 오늘 복귀하셨으나 여전히 평안하지 못하오신데 반나절 근무이기는 하지만 염려가 되어 계속 마음이 쓰이오. 남성(南城)에서는 좌랑댁(佐郞宅)이 어제 순산하시고, 아들을 낳으시니 이런 경사가 없소. 산후도 탈이 없다 하오니 기쁘오. 나는 이때까지 (독감이) 낫지 못하옵고, 일전에 겸보덕(세자시강원의 정3품 벼슬)이 되었는데, 아직 숙사(肅謝, 숙배와 사은. 정숙하게 사례함)도 하지 못하고 황송하오.

처음에는 당신을 다음달 초순(來初)이나 오게 하자 하였더니, 아무래도 집안일이 말이 아니어서, 일시가 말이 아니 된다고, 집안 어른이 인마(人馬)를 어서 보내야 어서 오는 것이 옳다고 하시기에, 인마는 내일 떠나보내도록 하오. 같이 오는 사람을 그곳 사람에게 부탁하게 하자 하였더니 윤서방 원량이 육친이니 배행(陪行)을 못할 수가 없다고 하여 보내니, 거기 (온양 처가의) 사람은 수고를 덜겠소. 계집종도 늦절이를 가게 하였소. 길이나 조심하여 오시도록 하오. 세세한 곡절은 오시면 아오. 일시가 말이 못 되오. 여러 댁들은 큰 연고는 없소. 잠시 적소. 무자 사월 십팔일 원춘(元春)”

(김경순, 이하 한글 편지는 모두 김경순의 논문을 참조하여 읽기 쉽게 다소 수정함.)

이해 7월 부친 김노경은 평안감사가 되었다. 이 해 장동본가에서 부인에게 보낸 한글 편지는 모두 6통이었다.(장동본가에서 보낸 것이고 나머지 3통은 평양감영에서 보낸 것이다.)

 

1829(44, 순조 29)
1월, 섭지선이 함께 옹방강의 손자 옹인달의 편지를 보내왔다. 옹인달은 김정희를 의부(義父)라 칭하고, 할아버지가 지은 ⌈經義攷補正⌋ 1부 등 서적을 보내왔다. 섭지선이 완원의 서적을 보내왔다.

내각 검교 대교 겸 시강원 보덕에 임명되었다. 4월, 평양 감영에서 친아버지 김노경을 모시고 있었다. 이 때 서울 장동 본가에 있는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한글 편지를 보냈다.

“지난번 편지는 들어갔습니까? 수일 일기가 화창하오니 여전히 들 잘 지내시고 위아래 다 잘 부양하오이까? 오늘 아이 돌이 되니 기특, 든든하오나 멀리 떨어져서 볼 길이 없으니 섭섭 결연하기 어찌 다 적소. 응당 독잡기는 잘 하였을 듯하오니 이렇게 궁금하옵기 한이 없오. 여기 평양에는 아버님 모시고 안녕하고 나는 여전히 잘 지내오. 먹기도 조금 낫고 형편이 서울보다 나아 지내오니 쾌히 효험이 있을까 하오. 사랑방 관리는 착실히 한다 하오? 서강(西江, 마포구에 있는 강)의 어른은 다시 아니 왔소? 이렇게 궁금한 마음이 가득하오.(이하 생략)”

이해 4월, 김정희는 평양감영에서 장동 본가에 있는 부인에게 2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또 평양 고구려 성벽의 석각을 발견하였다. 내각검교대교 겸 시강원보덕에 재직하였다.

 

1830(45, 순조 30)
이해, 청나라의 왕상생, 주위필, 김검, 이장욱 등으로부터 각종 서적과 먹, 불상, 차 그릇 등을 보내왔다. 김검은 김정희가 1, 2년내에 북경에 올 것이라 하는데 자신은 외임(外任)을 맡아 만나지 못할까 염려된다고 하였다.

6월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0월에 윤상도의 옥사(獄事)로 친아버지 김노경이 고금도로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 형을 받았다. 이일은 김정희가 일전에 파면했던 김우명이 일으킨 것으로 외척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사이의 세도싸움이 원인이었다.(김경순, 17쪽)

겨울에 북경의 옹인달이 방탕하고 서적상들이 일을 꾸며서 옹방강이 소장하였던 희귀 서적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다. 섭지선이 상을 당하여 북경을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1831(46, 순조 31)
친아버지 김노경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꽹가리를 치며 격쟁(擊錚)을 하였다.(일설에는 1832년 2월 26일과 9월 10일 두 차례 격쟁을 하였다고 한다.) 격쟁이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임금이 지나가는 길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하소연을 하는 제도였다. 이해 11월, 재종형 김도희(金道喜)가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 달 한글편지를 고금도에서 장동본가에 있는 예안 이씨 부인에게 보냈다.

 1832(47, 순조 32)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을 저술하였다. 부친이 다음해 귀양 3년 만에 풀려나와 판의금사로 복직하였다. 이해에 동지사 편을 통해서 완원의 둘째아들 완복(阮福)에게 편지를 보내고 완원을 위해서 쓴 <완씨가법(阮氏家法)>편액을 기증하였다. 다음해 3월, 신위, 대사간이 되었다. 9월 22일에 부친 김노경이 유배에서 풀려났다.

 1834(49, 순조 34)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를 지었다. 2월, 섭지선이 옹인달의 방탕과 옹방강 서재의 진귀한 서적과 물건들이 산일된 일, 그리고 오승량과 허내곡의 작고 소식, 북경 학예계의 동정 등을 담은 편지와 <화난석권(畵蘭石卷)>을 보내왔다. 11월, 순조가 사망했으며 헌종이 즉위하였다.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다음해 부친은 판의금부사가 되고, 김정희는 초의를 대둔산 일지암으로 찾아가 뵙고 공부를 하였다.

 183651(헌종 2)
2월 정약용이 사망했다. 향년 75세였다. 4월, 성균관 대사성(정3품)에 임명되었다. 조인영은 예조판서가 되었다. 김정희는 7월에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다. 6월 약방제조 김노경이 파직되었다. 7월, 김정희는 병조참판이 되었다. 10월, 동지정사 신재식이 연경(북경)으로 출발하였다. 이상적이 그를 수행하였는데, 출발에 앞서 조인영, 권돈인, 김유근, 이지연 등이 송별회를 베풀고 송별시를 지었다. 이들 시는 김정희가 모두 자필로 써서 시첩(詩帖)으로 꾸몄다.

이중에 권돈인은 김정희와 평생을 친밀하게 지냈는데, 그 역시 그림과 글씨에 능했다. 그는 송학(宋學)에만 머물지 않고, 당시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고증학, 금석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김정희는 그의 뜻과 생각이 훌륭하다는 평을 하였고, 예서체(隷書體) 비문은 조선에는 그동안 없었던 신묘한 경지라는 칭찬을 하기도 하였다. 그도 역시 유작으로 <세한도(歲寒圖)>를 남겼는데, 그는 중국의 글씨와 그림을 얻으면 김정희와 함께 연구하였다.

11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83752(헌종 3)
1월, 북경의 왕희순이 신재식을 통해서 김정희의 편지를 받고 답장과 서책을 보내왔다. 3월, 생부 김노경의 상을 당했다. 향년 73세였다. 다음해 8월, 권돈인이 왕희순에게 긴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해외묵록(海外墨綠)⌋이라는 책으로 만들어졌다.

 183954(헌종 5)
5월,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6월 김우명이 대사간이 되었다. 이달 20일부터 한달 정도 김수철, 허련, 이한철, 등이 글씨와 그림을 배웠다. 이들이 쓴 글씨를 김정희가 품평한 내용을 전기(田琦)가 기록하여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이 이루어졌다. 10월, 조인영이 우의정이 되었다.

184055(헌종 6)
6월, 동지부사에 임명되었으나, 9월,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예산의 고향집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부친은 소급하여 탄핵되었으며, 윤상도 부자는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일은 안동김씨 세력인 대사간 김우명과 대사헌 김홍근이 일을 꾸민 것으로, 당시 대권을 잡은 안동김씨 세력이 헌종의 외가인 풍양 조씨에게 혹시 세도를 빼앗길 것을 염려해 풍양 조씨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정적(政敵)인 추사 가문 세력을 제거하려한 것이었다.(김경순, 17쪽)

당시 친구였던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은 형조판서였다. 김정희는 그에게 편지를 써서

“행실치고는 선대에 욕이 미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것이 없고, 그 다음은 몸에 형구가 채워지고 매를 맞아서 곤욕을 받는 것인데,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경험하였네. 40일 동안 이와 같은 참상을 겪었네.”

라고 하였다. 이때 풍양 조씨 가문의 우두머리이며 우의정으로 있던 친구 조인영(趙寅永)의 상소로 목숨을 구하고,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위배되어 위리안치(탱자나무 울타리에 갇히는 형)되었다. 이후 제주도로 옮겨 1848년까지 유배생활을 보냈다. 유배가는 길(일설에는 유배가 끝나고 귀향하는 길)에 그는 남원에서 <모질도(耄耋圖)>를 그렸다.

이해 10월 중에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예산에 있는 부인에게 한글 편지 3통을 보냈다. 12월에 순헌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헌종이 14세로 친정을 시작했다.

2017 율곡학맥-김정희
추사 김정희의 <모질도>

이해 10월, 김정희는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한글 편지를 썼다.

“어느덧 겨울이 되었소. 편안이들 잘 지내시오? 경향(京鄕, 서울)에서 다 여전히 무고하오? 천안(天安)에서 당신 모양을 보니 그렇지 아니할 것으로 아오나, 당신이 그렇게 하여 큰 병이 나면 말이 되겠소? 지금 당장은 모든 일에 집안사람들이 편안들 하고 당신도 더욱 아들 상우(商佑)를 돌아보아 전보다 더 보전하여야 이 천리 떨어진 큰 바다 바깥에 있는 마음을 위로를 할 것이니, 매양 목전의 일만 생각마시고 널리 생각하고 크게 마음을 먹어 아무쪼록 편안이 지내도록 하오. 집안일이 지금은 더구나 당신께 다 달렸으니 응당 그런 도리는 아시려니와 걱정스러운 마음이 항상 가득하고 특별히 간절하여 이렇게 말씀을 구구히 하오. 강동(江東, 강동현감으로 있는 동생 김명회)의 모양도 말이 되지 아니하였사오니 그동안 돌아 간 후에는 어떠한지 심장과 간장이 에이는 듯하오. 먹음새나 착실히 하여 병이 회복되도록 마음이 잊혀 지지 않고 염려되오.

나는 천리를 무사히 와서 또 천리 대해를 지난 달 이십칠일에 하루 사이에 쉽게 건너오니, 모든 것이 왕명 아닌 것이 없소. 허나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은 모두 배 멀미를 하여 정신을 잃어 종일들 굶어 지내되 나 혼자 배 멀미도 하지 아니하고 선상(船上)에 종일 바람을 맞으며 앉아 여전히 밥도 잘 먹었소. 그 전에는 물에 만 밥을 먹어 왔는데 선상에서 된밥을 평시와 같이 먹으니 그도 아니 이상하오? 대저 나 혼자 괜찮다 말씀할 것이 아니오라, 아무래도 그 큰 바다는 사람 사람마다 건너오리라 하고 권하여 올 길이 없는데 오니, 행여 아들놈 같은 아이들이 아무 철도 모르고 망상(妄想)을 하게 될지 모르니 미리 그렇게 알아차리게 하오. 초하루 날에 대정 유배지에 오니 집은 넉넉히 몸 둘만한 곳을 얻어 한 칸 방에 마루 있고 집이 깨끗하여 별로 도배도 할 것 없이 들었사오니 오히려 지나친 듯하오. 음식을 먹는 것은 아직은 가지고 온 반찬이 있으니 어찌 견뎌 갈 것이오. 싱싱한 전복이 나오는 곳이오니 그것으로 또 견딜 듯하오. 쇠고기는 매우 귀하나 혹 가다가 얻어먹을 도리도 있는가 보오. 아직은 두서를 정하지 못하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김정희는 동생 김명회의 건강을 몹시 걱정했는데 유배지에서 다음과 같은 한문 편지를 동생에게 쓴 적이 있다.

“이러한 때에 모두 별일이 없고 사촌 형님께서는 기운이 또한 안녕하시며, 서울과 시골의 모든 형편이 한가지로 평상대로 잘되어 가고, 여러 누이들과 서모께서도 모두 잘 계시는가. 자네와 막내아우의 몰골이 시커멓고 삐쩍 말랐었기에 꼭 병이 날 것 같아서 걱정이니, 간혹 억지로라도 밥을 더 먹도록 노력하고 약을 쓰도록 노력하여, 이 바다 밖에서 한마음으로 애태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조금이라도 펼 수 있게 하기를 마음속으로 천만 번 기도하고 있네. 막내아우가 며칠 사이에 묘막에 간다고 하였던데 과연 틈을 내어 모일 수 있었는가. 보면 끝이 없고 생각하면 아찔아찔하며, 바다 끝은 하늘에 맞닿아 아득하니 아마 서로 연락할 수가 없을 것 같네”

(김봉옥, 15쪽 참조)

 또 동생의 병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서신을 써 보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손발이 찬 병의 증세가 끝내 쾌히 떨어지지 않는다 하니 매우 걱정이 되네. 복용하던 약과 음식을 한 번 더 전의 처방대로 계속해서 시험하여 상태가 다시 어떠한가를 보도록 하시게. 나무의 기(木氣, 즉 봄)가 왕성한 때에는 더욱 마땅히 조심하여야 하니, 다시 더 더치지 않으면 움직이기가 좋아질 것일세. 먹고 마시는 것과 자고 깨는 것이 모두 편안한가. 멀리 밖에서 그리워 애태우는 마음은 한 시각을 떠나지 않고 치달리고 있을 뿐일세. 이달 들어서면서부터 때 없이 슬퍼지나 크게 생각하고 참고 있네.”

(김봉옥, 16쪽)

 

184156(헌종 7)
윤3월 20일, 유배지에서 부인 이씨에게 다음과 같이 한글 편지를 보냈다.

“……(가족들 안부를 묻고) 당신은 이 사이 어떠하오? 괜찮다 하오나 괜찮을 리가 있소? 아마 먼 데 사람이라고 속이는 듯하오며 좁쌀미음은 계속해서 자시오? 당신이 몸을 보호하여 가는 것이 날 보호하여 주는 것이오니 그렇게 아시오. (중략) 나는 살아있다 할 길이 없소. 여기 지내는 모양은 여전히 별다른 병은 없사오나, 모질게 참는 일을 어찌 다 이르오며 먹는 것도 그 모양이오니 그럭저럭 견뎌 가오. 모처럼 애써서 해 보낸 찬물(饌物, 반찬 재료)은 마른 것 외에는 다 상하여 먹을 길이 없소. 약식 인절미가 아깝소. 빨리 와도 원래대로 온전히 오기 어려운데 일곱 달 만에도 오고 빨라야 두어 달 만에 오는 것이 어찌 원래대로 온전히 올까 보오. 서울서 보낸 김치는 모두 소금을 과하게 넣어 담은 것이라 맛이 변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김치에 주린 입이라 견뎌 먹었소. 새우젓은 맛이 변하고 조기젓과 고추장 볶은 것이 맛이 변하지 않았으니 이상하오. 민어(民魚)와 소금에 절여 만든 육포는 괜찮소. 소금에 절인 생선 알 같은 것이나 그 부근에서 구하기 쉽거든 구하여 보내주오. 산채는 더러 있으나 본디 여기 사람은 순전 먹지 아니하오니 이상한 풍속이오.

고사리, 소리쟁이와 두릅은 있기에 혹 얻어먹소. 도무지 시장과 상점이 없어 모든 것이 매매가 없사오니 있어도 모르고 얻어먹기 어렵소. 의복은 조정에서 세초선(歲初船, 해마다 6월과 12월에 이조와 병조에서 죄가 있는 벼슬아치 동태를 적어 임금에게 보고하기 위해 제주도를 왕래하는 선박)으로 보내신 것들은 모두 기로(耆老, 나이가 많은 노인)의 것이니 오히려 웃소. 도로 보낼 길도 없고 모두 당분간 두었사오며 양재완 편에 온 의복은 여름에 입는 베옷까지 왔으니 아직 대어 입을까 하오. 지금 입는 저고리가 마침 하나를 가지고 입고 있으니 지나치게 더럽고 더러 해어져 입기 어려우나 다른 사람 것을 바꾸어 입기 어렵고 조금 어려우나 견디오. 가을에 이르러하나 해서 보내도록 하오. 그것도 미리 부쳐야 때에 맞춰 입지 그렇지 못하면 깊은 겨울이 될 염려가 있소. 껴입는 긴팔 등거리도 하나 해서 보내도록 하오.……”

 

4월 20일경에 부인에게 또 이런 편지를 보냈다.

“양재완의 노비 박한의 편으로 보낸 편지는 응당 그 사이에 보셨을 듯하오나 매번 인편 왕래가 지속(持續)을 이루지 못하오니 거기서 오죽 기다렸소? 지난달 음력 초열흘께 서울서 편지 부친 것을 이 달 초팔일에야 보니 삼십일 동안이오나 오히려 최근의 편지라 거기 편지들은 못 보나 대강 여전하다는 소식은 듣고 위로되오. 요사이 점점 여름이 되어 가오니 모두들 평안이 지내시옵고 강동(江東, 강동에 있는 동생 명희)의 요통은 어떠하온지, 조금 나은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걱정으로 마음만 불안하오. 경향에서도 그동안 다 별고 없이들 지내오? 가지가지 염려되며 당신은 요사이도 좁쌀미음은 자시오?

나는 아직 전과 같이 지내오나 수일 담(痰) 덩어리로 거북하더니 몸 바깥으로 나오기도 하고 하여 조금 낫소. 강경의 배가 이 달 초팔일에야 들어와서 정월에 부친 새로운 반찬들은 자세히(정확히) 잘 받았소. 자연히 맛이 변한 것은 어찌하겠소? 그러하되 못 먹지는 아니하게 되니 다행이오. 인절미는 모두 썩어 버렸소.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니 후에는 부질없는 것을 수고 들여 만들어 보내봐야 낭비만 되니 어쩌겠소? 장으로 만든 것은 그렇게 괜찮으나 오이장아찌는 괜찮고 무장아찌는 또 맛이 변했소. 젓 무우는 조금 시었으나 먹겠소. 겨울에 벗은 옷을 올려 보내오니 진작 또 고쳐 보내셔야 되겠소. 여기는 겨울 것을 여름에 유의하여야 이르겠소. 바지는 무명것 고쳐 보내고 명주 바지는 보내지 마오. 여기 두껍고 누르스름한 명주 바지가 하나 있는데 조금 두껍기에 입지 아니하고 당분간 두었소.

두루마기나 둘 다 고쳐 보내오. 무명 두루마기가 나쁘지 아니하오니 잘 생각해서 하오. 소매 있는 두루마기는 내려 온 것이 그대로 다 있으니 다시 하여 보내지 마오. 여기서 종종 입는 것이 아니오니 여럿 부질없소. 차동(양자들어간 큰집의 넷째 누님) 회갑 의복은 어찌하여 보내오. 막연히 걱정뿐이니 마음이 견디기 어렵소. 회갑 날 조반이나 하여 잡수시게 돈냥을 또 얻어 보내야 할 것이니 어찌 요량하오. 다소간 의논들 하여 하도록 하오. 인편 총총 대강 적소.”(김경순, 195쪽.)

 

이해 6월 22일에 추사는 제주도에서 다시 부인 예안이씨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여름이 다 지나고 입추가 되오니 요사이 사정은 어떠하시오? 경향(서울)에서들 모두 한결 같이 평안하오? 강동의 동생은 여름을 어찌 지났소? 가지가지 염려뿐이오며 당신은 병환이나 자주 나지 아니하셨소? 그 사이 차동 회갑이 지났으니 천리 해외에 이런 정리(情理)가 없고 소식도 알 길이 없사오니 한 세상이 아닌 듯하오. 의복은 어떻게 하여 보내었소? 그 날 여러 누님네가 모여 지내셨다 하오? 나는 갑자기 학질을 얻어 나았다가 또 앓고 또 앓고 하기 여러 번 하여 석 달을 이렇게 고생하니 자연 원기는 지치고 먹지 못하고 회복이 결국 되지 못하오니 가을바람이나 나면 조금 낫고 먹기가 좋아진 뒤에는 회복도 될 듯하오니 함부로 신경을 쓰겠소? 서울서 내려 온 장맛이 다 소금 꽃이 피어 쓰고 짜서 가뜩이나 좋지 못한 비위를 불안하게 하오니 일시가 민망하오. 경향(서울)의 장이 어찌 되었는지 빠른 편을 얻어 내려 보내어야 견디겠소.

서울서 진장(陳醬, 검정콩으로 쑨 메주로 담가 만든 진간장)을 살 도리가 있으면 다소간 사 보내도록 하여 주오. 변변치 아니한 진장은 얻어 보내어도 부질없소. 거기 윤생(尹生)에게 진장이 요사이도 있는지 물어 보오. 민어를 연하고 도톰한 것으로 가려서 사서 보내도록 하오. 내려 온 것은 살이 세어 먹을 길이 없더이다. 겨자는 수확한 것이 있을 것이니 넉넉히 얻어 보내오. 밖으로도 기별하였소. 가을 후에 좋은 것으로 사오. 접이 되나 못 되나 선편에 부치고 절인 생선알도 거기서 먹을 만한 것 구하여 보내오. 겨우 두어 자 이렇게 적사오니 대강 보시고 기별 외라도 생각하여 하도록 하오.”

다음 편지에서 추사는 서울에서 보낸 음식물들에 대해서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이번에 보내오신 반찬들은 그 수(數)에 맞게 왔소. 민어와 조기 머리에 약간 상처가 있아오나 못 먹게 되지 아니하여 병든 몸에 입맛이 조금 돌아왔소. 절인 생선알도 빨리 와서 쾌히 입맛이 붙으니 다행이오. 이번에 온 진장이 집의 것이오? 종시 소금 맛이 지나쳐서 쓴맛이 나고 단맛이 없사오니 그 전에 온 장이 가루메주로 담근 장으로 다 그러하여 먹을 길이 어렵사오니 서울도 그 말 하였거니와 조금 단맛 있는 간장을 살지라도 조금 얻어 보내도록 하오. 잣과 호도가 여기는 없는 것이오니 얻어 보내도록 하옵고 좋은 곶감이 거기서는 얻기 어렵지 아니할 듯하오니 배편에 4, 5접 얻어 보내어 주오. 해수(咳嗽, 해소라고도 함. 기침을 심하게 하는 병. 특히 기침이 오래 지속되면서 기침과 가래가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를 말함.)에는 매양 구급이 되기에 이렇게 기별하오. 올해도 김치와 젓무우를 하여 부치도록 하오. 김치는 그렇게 아니하면 겨울철 석달을 얻어먹지 못하오니 아주 보낼 그릇에 담아 보내도록 하오. 어찌 떠나면 또 변하오. 인편도 총총하여 겨우 그리오. 생각지 못하는 것 생각하여서 기별 외라도 생각하오. 이번 절인 생선 알이 그 즈음에는 종종 나는 것이오니 구하여 보오.”

이해 김정희는 이러한 한글 편지를 제주도에서 예산에 있는 부인에게 8통을 보냈다. 4월에 친구 조인영이 영의정이 되었다. 이 해에, 상무(商懋)를 양자로 들였다.

 

184257(헌종 8)
이해 1월부터 11월까지 한글 편지 8통을 제주도에서 예산에 있는 부인에게 보냈다. 부인이 조금씩 아프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나 마지막 편지에서는 그러한 사정을 가까이서 자세히 알 수 없는 자신의 저치를 안타까워했다. 11월 13일 예안 이씨가 사망했다. 부인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유배생활 3년째 되는 해였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유배지에서 아내에게 쓰는 만사(配所輓妻喪)

 聊將月老訴冥府
명부의 월하노인에게 하소연해서

來世夫妻易地爲
내세에는 우리 부부가 바꿔 태어나

我死君生千里外
내가 먼저 죽고 그대가 천리 밖에 살아

使君知有此心悲
그대가 이 마음의 슬픔을 알게 하리라

 

또 그는 상복을 갖추어 입고 통곡을 하며 다음과 같이 「부인 예안이씨 애서문(夫人禮安李氏哀逝文)」을 지었다.

“임인년 11월 을사삭(乙巳朔) 13일(정사)에 부인이 예산(禮山)의 추사(楸舍)에서 일생을 마쳤다. 다음 달 을해삭(乙亥朔) 15일(기축)의 저녁에야 비로소 부고가 해상(海上)에 전해 왔다.

그래서 남편(夫) 김정희는 위폐를 세우고 곡을 하고 살아서 헤어짐(生離)과 죽어서 헤어짐(死別)을 비참히 여기며 영영 가서 돌이킬 수 없음을 느끼면서 두어 줄의 글을 엮어 본집으로 부친다. 이 글이 당도하는 날 그 궤전(饋奠, 염습하고 나서 장사를 지낼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신위神位앞에 올리는 제물)을 따라 영괘(靈几, 영전)의 앞에 고하도록 하는 바이다.

아아! 나는 항양(桁楊, 죄인의 목에 씌우는 칼과 발에 채우는 차꼬)이 앞에 있고 영해(嶺海, 귀양가는 길의 봉우리와 바다)가 뒤에 따를 적에도 일찍이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는데 지금 한 부인의 상을 당해서는 놀라고 울렁거리고 얼이 빠지고 혼이 달아나서 아무리 마음을 붙들어 매자도 길이 없으니 이는 어인 까닭인지요.

아아! 무릇 사람이 다 죽어갈망정 유독 부인만은 죽어가서는 안 될 처지가 아니겠소.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될 처지인데도 죽었기 때문에 죽어서도 지극한 슬픔을 머금고 더 없는 원한을 품어서 장차 뿜으면 무지개가 되고 맺히면 우박이 되어 족히 남편 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이 항양보다 영해보다 더욱더 심했던 게 아니겠소.

아아! 삼십 년 동안 그 효와 그 덕은 집안사람들이 모두 일컬었을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바깥사람들까지도 다 느껴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소. 그렇지만 이는 사람의 도리상 당연한 일이라 하여 부인은 즐겨 받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었소. 그러나 나 자신은 어찌 잊을 수 있겠소.

예전에 나는 장난으로 말하기를 “부인이 만약 죽는다면 내가 먼저 죽는 것이 도리어 낫지 않겠소.”라고 했더니, 부인은 이 말이 내 입에서 나오자 크게 놀라 곧장 귀를 가리고 멀리 달아나서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거요. 이는 진실로 세속의 부녀들이 크게 꺼리는 대목이지만 그 실상을 따져보면 이와 같아서 내 말이 다 희롱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었소.

지금 끝내 부인이 먼저 죽고 말았으니 먼저 죽어가는 것이 무엇이 유쾌하고 만족스러워서 나로 하여금 두 눈만 뻔히 뜨고 홀로 살게 한단 말이오. 푸른 바다와 같이 긴 하늘과 같이 나의 한은 다함이 없을 따름이오.”

 

11월 11일 우의정으로 임명된 친구 권돈인으로부터 부인상을 위로하고 건강을 당부하는 편지가 왔다. 하인 봉진(鳳鎭)에게 상여가 예산으로 향하고 있음을 들었다고 한다.(권돈인, ⌈彛阮尺辭⌋「夜經急癨」)

김정희는 11월 14일, 부인이 이미 하루 전에 사망하였는데도, 유배지 제주도에서 소식을 듣지 못하고 부인 이씨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어느덧 동지가 바짝 다가와 있는데, 병으로 편안치 못함이 어떠하시오? 그 증세가 갑자기 없어지게 하기 어렵사오나 그 동안 (병세의) 가감(加減) 동정이 어떠하시고 벌써 석 달이 넘었사오니 원기가 얼마나 상하여 계시는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마음만 초조하여 어찌할 길이 없소. 침식 등 온갖 일은 어떠하오? 그 동안은 무슨 약을 잡수시며 아주 고통이 심하여 자리에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시오? 간절한 마음이 갈수록 가만히 있지 못하겠소. 강동(江東)의 동생은 요사이 어떠하오며 추운 계절을 당하여 지병은 여전히 빈번하게 발작할 듯하오니 가지가지 염려가 마음에 잊혀지지 않고 염려되옵고 어린 아이들은 별고나 다시없는지요. 나는 아직 마찬가지 모양이오나 피부병으로 가려움증이 지금까지 낫지 못하여 밤을 매양 새우게 되니 가뜩이나 변변치 아니한 잠을 더구나 못 자고 실로 어렵사오나 먹고 마시는 일은 특별히 못하지 아니하오니 견뎌 가오. 당신 병환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온종일 불안한 마음에 걱정이 그치지 않소.

소식까지 자주 듣지 못하니 더욱 마음이 조급하고 가슴이 답답하여, 불이 이글거리듯 못견뎌들 하오. 하인들은 다 마찬가지이오니 다행이오. 식사도 겨울 들어 고기도 얻어서 맛보니 그럭저럭 하여 이 겨울은 또 무사히 넘길 듯하오. 인편이 너무 없기에 제주 성에나 무슨 인편이 있을지 대강 두어 자 안부만 이렇게 부치오니 쾌히 평복이 되신 소식 이렇게 날로 기다리오. 그 사이 경초선(京抄船)편으로 응당 무엇이나 부치셨을 듯하오나 병환 중 심려되셨을 일 이렇게 걱정이오며 서울서들은 어찌들 지내고 미동(渼洞, 서울 의주로, 충정로, 미근동 등 지역)에서 겨울철을 당하여 오직 하시랴 잊혀질 길이 없소. 어깨 통증은 여전히 고통스러워 겨우 이렇게 그리오. 임인(1842년) 지월(11월) 십사일 상장. 당신의 생일이 아주 가까워오니 아이들하고 함께 지내실 일 멀리서 생각뿐이오.”

 

이로부터 4일이 지난 18일에 김정희는 다시 추가로 편지를 보냈다.

“전편 편지 부친 것이 인편에 함께 갈 듯하오며 그 사이 새 현감이 오는 편에 보낸 상회(永柔)의 편지를 보니 그 사이 계속 변환을 떼지 못하시고 여전히 힘드나 보오. 벌써 여러 달을 병에 들어 있어서 근력이 여기저기 오죽하여 계시겠소? 샤향으로 만든 탕약을 자시나 보니, 그 약에나 쾌히 동정(動靜)이 계실지, 멀리 바깥에서 심려가 초조함을 무어라 형용하지 못하겠소. 나는 지난번 보년 글과 마찬가지며 그저 가려움증으로 못 견디겠소. 갑쇠(하인 이름)을 아니 보낼 길이 없어 이렇게 보내오나 그가 가는 모양이 몹시 슬프니 객지에 있는 중에 또 한층 마음을 안정치 못하겠소. 급히 떠나보내기에 다른 사연 길게 못하오. 임인 지월 십팔일 상장”

 

김정희는 이 때 무언가 불안한 마음이 들어 하인 편으로 편지를 들려 보냈다. 부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 소식은 듣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부인의 병환을 걱정하는 마음이 절절하다.

장례가 끝나고 종형 김교희에게 김정희는 다음과 같이 서신을 보냈다.

“초상이 난 때로부터 졸곡(卒哭)까지 때에 맞았다 하니 다행한 일입니다. 널의 재료를 그곳에서 가져다 썼다 하는데 분수에 지나치는 것 같습니다. 널두께가 세 치라서 쉽게 썩으면 어때서 무엇 하러 몇 해를 두고 만든 것에서 얻어 썼답니까? 무덤은 어느 곳에 쓰고, 장사는 어느 날로 정하는지, 막연히 관계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고 논두렁 보듯 하였습니다. 홀아비가 되어 홀로 사는 것은 뒤에 죽는 책임을 지려 한 것이거늘 이를 할 수가 없었으니 이 어찌 살아서 세상에 있는 사람의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순순히 타일러서 위로하시는 말씀을 감히 지키어 경계하지 못하고 구차스럽게 정신을 상하게 하니 역시 장자의 달관에는 이르지 못하는가 봅니다.”

(김봉옥, 24쪽)

 

184358(헌종 9)
이상적이 1월에 북경에서 계복(桂復)의 ⌈만학집(晩學集)⌋ 등 책을 구해 제주도 유배지로 보내주었다. 2월에 사촌현 김교희가 사망했다. 허유(許維, 허련)가 대둔사에 있다가 제주목사 이용현의 막하로 들어가 제주도 유배처를 왕래하였다. 8월, 왕비 안동 김씨가 사망했다. 10월, 예산에 있는 며느리에게 한글로 편지를 썼다. 10월, 친구 권돈인이 좌의정이 되고, 김도희가 우의정이 되었다.

2017 율곡학맥-김정희
제자 허유(허련)이 그린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

이즈음 초의(草衣)선사가 유배지에 왔다. 김정희는 일찍부터 불교에 관심이 있었으며, 백파(白坡)와 초의 등 당시 고승들과 친하게 지내고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해동의 유마거사라고 불릴 정도로 불교 교리에 밝았다. 초의는 제주도에서 반년 동안 김정희와 함께 지내며 시를 주고받으면서 아내를 잃은 슬픔과 유배지의 우울함을 달래주었다.

 

184459(헌종 10)
1월, 이상적이 ⌈황조경세문편⌋ 120권을 구하여 보내왔다. 3월, 며느리에게 한글 편지를 보냈다. 봄에 허유가 다시 육지로 돌아갔다.

여름, 이상적에게 <세한도(歲寒圖)>를 그려주었다. <세한도>에는 그를 향한 마음이 이렇게 적혀 있다.

“지난해도 만학집, 대운집을 보내주더니 변함없이 또 책을 보내주었구나. 세상 사람이 잘 나가는 사람 붙잡고 늘어지기 바쁜데 나처럼 외로운 처지를, 이전이라고 더한 것 없고 지금이라고 덜한 것 없으니, 공자님 말씀이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까지 푸르다는 것을 안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고 하였는데, 네 마음이 그렇구나. 아, 쓸쓸한 마음이여. 완당 노인이 쓰다.”

다음해 권돈인이 영의정이 되었다. 이상적은 북경에서 식사에 초대된 자리에서 김정희가 그려준 <세한도>를 중국의 명사들에게 소개하고 그 자리에서 그들의 글(題辭)을 받아왔다. 5월, 청나라 유학자 이조망(李祖望)이 김정희의 학예관을 듣고 이에 대한 소견을 기록하여 책으로 만들었다.

 

184661(헌종 12)
6월, 유배지에서 회갑을 맞이했다. <화엄사 상량문>을 지었다. <무량수각(無量壽閣)>, <시경루(詩境樓)> 편액을 썼다. 다음해 봄 허유(허련)가 세 번째로 제주도에 왔다.

 

184863(헌종 14)
동생 김명희(金命喜, 1788∼1857)가 회갑을 맞이했다. 8월 신관호가 허유에게 서신을 보내 김정희의 글씨를 가지고 상경, 입궐하라는 왕명을 전했다. 이해 12월, 제주도 유배에서 8년 만에 풀려났다.

환갑을 맞이한 동생 김명희에게 제주도 유배지에서 김정희는 다음과 같이 한문 편지를 써 보냈다.

“앞서 본주(제주도) 관청의 공문편에 글을 보냈는데 과연 언제 도착되었는가. 시절이 가을이니 자네 환갑이 돌아왔네 그려. 우리 모두 살 만큼 다 살았으니 어찌 족히 보통으로 기뻐하고 경사스럽게 여기며 드날리겠는가. 또 하물며 이런 때를 당하여서랴! 다만 막내아우가 잔치와 술을 차려 오래 사는 늙은이들을 먹이고 큰 술잔으로 축하하리니 또한 어찌 그 마음을 막겠는가? 역시 구부리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네.

이 바다 밖은 돌아보니 아득하여 서로 오가지 못할 듯하니 문득 사무쳐 오는 정리(情理)가 어떻겠는가? 혹시 한 가지가 부족하여 집안에서 즐겁게 모여 노는데 흥이나 되지 않는지 모르겠네. 또한 거듭 내 처지를 생각한다면 하늘 끝이 모두 한 집안이니 이 몸이 날마다 같이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만 원하는 것은 우리 형제가 화목하여 덕을 쌓으며 오래 사는 것뿐인데, 어찌 영원토록 끝없이 누릴 수야 있겠는가. 길한 일에는 상서로움이 있기 마련이니 역시 이에 조짐이 나타나는 것뿐인가 보네.”

(김봉옥, 17쪽)

막내 동생 상희에게도 그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비록 이곳이 험하고 곤궁하게 막히었다 하나 역시 성상(聖上, 임금)의 덕화(德化, 교화)가 태양처럼 미치는 데서 빠지지는 않으리니, 가만히 마음속으로 축원하는 것은 거듭 식구끼리 모이는 즐거움을 가지도록 하소서 하는 것뿐일세. 둘째 아우의 환갑이 또 다음에 돌아올 터인데, 머리 센 형제들이 즐겁게 모일 수 있을까?”

(김봉옥, 17쪽)

 

184964(헌종 15)
1월, 서울로 돌아와 강상에 머물렀다. 6월에 헌종이 사망했다. 철종이 추대되고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7월에 신관호가 유배되었다. 여름에 제자들의 서화수련을 지도하였다. 10월에 북경에서 완원이 86세로 사망했다.

다음해 10월에 김덕희(金德喜)가 연행되고, 12월에 친구 조인영이 사망했다. 향년 69세였다.

 

185166(철종 2)
6월 양아들 상무의 처 풍천 임씨가 40세로 사망했다. 7월에 홍문관 교리 김회명(金會明)이 상소를 하여 절친한 친구 권돈인의 진종조천론(眞宗祧遷論)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동생 김명희와 김상희도 축출되었다.

헌종이 사망한 뒤에 천묘(遷墓)의 예론으로 제기된 진종조천론(眞宗祧遷論)은 철종의 증조인 진종의 조천례(祧遷禮, 신주를 옮기는 예)에 관한 주장으로 권돈인은 파직당하여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예론이 권력투쟁에 이용된 것이다. 덕분에 김정희는 김회명(金會明)의 상소로 비판을 받고 유배의 형까지 받게 된 것이다.

당시 영의정까지 지낸 권돈인의 자는 경희(景羲), 호는 이재(彛齋)·우랑(又閬)·우염(又髥)·번상촌장(樊上村庄) 또는 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이고,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우의정을 지낸 권상하(權尙夏)의 5대손이며, 군수 권중집(權中緝)의 아들이다.

2017 율곡학맥-김정희
권돈인이 그린 세한도, 오른 쪽 그림제목은 추사의 글씨.

 

 185267(철종 3)
전년 12월 28일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2월과 4월에 신관호는 유배지에서 옮겨졌으며, 8월에 북청 유배에서 풀려났다. 권돈인도 이때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10월에 과천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도착하였다. 안동 김씨들이 여전히 권세를 잡고 있어서 부친 김노경의 묘가 있는 관악산 아래 과천으로 간 것이다. 이때부터 봉은사를 내왕하면서 글씨를 쓰면서 후학을 가르쳤다.

 185570(철종 6)
과천의 과지초당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허유가 과천으로 찾아왔다. 「백파율사비(白坡律師碑)」를 짓고 글씨를 썼다. ‘백파(白坡)’는 초의선사가 소개한 승려로 백파선사(白坡禪師) 긍선(兢璇, 1767∼1852)을 말한다. 백파는 선승으로 전주이씨이며, 법호는 백파(白坡), 법명은 긍선이다. 전라도 무장(茂長) 출생으로, 12세에 출가하여 선은사(禪隱寺) 시헌(詩憲), 연곡(蓮谷), 상언(尙彦)등에게 배우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는 충청도 운문사에서 선법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으며, 호남선백(湖南禪伯)으로 불렸다. 특히 계율, 화엄과 참선의 정수를 모두 갖춘 거장으로 알려졌으며 김정희도 그를 높이 평가하고, 교류를 하였으며 초상화를 그려준 뒤에 그를 ‘해동의 달마(達磨)’라고 칭찬하였다.

 185671(철종 7)
이즈음 봉은사에 기거하였다. 10월 7일에 봉은사 판전(板殿) 현판을 쓰고 3일이 지난 10일에 과천 과지초당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쓴 글은 다음과 같다.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

(두부와 오이, 나물이 있으면 최고의 진수성찬이요, 부부와 아들, 딸, 손자가 있으면 최고의 모임이라네. 봄바람처럼 큰마음은 만물을 허용하고, 가을 비 같은 맑은 문장은 티끌에 더러워지지 않는다네.)”

 

2017 율곡학맥-김정희
봉은사의 판전, 추사가 사망하기 3일전에 쓴 현판 글씨

 

⌈철종실록⌋ 8권에‘철종 7년 10월 10일 갑오 3번째기사’로 「전 참판 김정희의 졸기(卒記, 사망기사)」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전 참판 김정희가 사망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다. 금석문(金石文)과 그림, 그리고 역사에 깊이 통달해서 초서, 전서, 예서를 잘 쓰고, 참다운 경지를 신묘하게 깨달았다. 때로는 가끔 거리낌 없는 일을 하기도 하였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비판할 수 없었다. 그의 작은 아우 김명희와 더불어 사이좋게 서로 화답하며 홀연히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젊어서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집안의 화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유배 가서 온갖 풍상을 다 겪었다.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기도 하였다.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했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일러 송나라의 소동파와 같다고 한다.

(前參判金正喜卒. 正喜, 吏判魯敬子, 聰明强記, 博洽群書, 金石圖史, 窮徹蘊奧, 艸、楷、篆、隷, 妙悟眞境. 時或行其所無事, 而人不得以雌黃. 與其仲弟命喜, 塤箎相和, 蔚然爲當世之鴻匠. 早歲蜚英, 中罹家禍, 南竄北謫, 備經風霜, 用舍行止, 世或比之於有宋之蘇軾.)”

다음해 1월에 신관호가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4월에 부친 김노경이 복관(復官)되었다. 월에 김정희는 사면되고 복관되었으며, 10월에 추사 영실에 초상화가 봉안되었다.

김정희가 사망하고 8개월 쯤 지난 뒤에, 친구 권돈인이 찾아와 그의 위패를 모시는 영실을 만들고 초상화를 그리게 해서 그곳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땅속에 있는 그대, 그대가 이제 명예를 찾게 됐는데 알겠는가?”

라는 글을 써서 김정희의 아들에게 주고 갔다.

 

 <참고문헌>

철종실록」. 「추사연보」, 추사박물관.

황수환, 「김정희 연보」, 「추사김정희의 사상과 추사체 연구」,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9.2

유홍준, 「추사 김정희, 그의 삶과 예술」, 164회 국민대학교 목요특강, 2002.5.23

김경순, 「추사 김정희의 한글편지 연구」, 충남대대학원, 2013.8

김봉옥, 「추사 김정희의 유배서간 연구」,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