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영(鄭胤永)


정윤영(鄭胤永)                                                           PDF Download

 

181833(순조 33)∼1898. 조선 말기의 유학자.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군조(君祚). 호는 석화(石華)·후산(后山)이다.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아버지는 현풍(鉉豊)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시면(時冕)의 딸이다. 큰아버지 정현택(鄭鉉澤)에게 입양되었다.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이다.

정윤영은 화성시 동탄면 금곡리 출생으로 39세되던 1871년 안성으로 이주한 후 죽을 때까지 안성에서 활약한 당대를 대표하는 화서학파 유학자다. 화서학파는 화서 이항로를 따랐고 위정척사 운동과 의병운동을 주도했다. 정윤영은 1889년 수십명의 관동(冠童, 남자 어른과 남자아이를 아울러 이르는 말)들과 청룡사에 모여 강회를 열었고, 이때 필요한 절차를 모아 서운강안(瑞雲講案, 1889년)이라는 책도 남겼다.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시점이 1889년으로 조선후기이고 그 장소가 청룡사라는 것이다. 고종의 조상의 묘가 있는 마을에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당대의 학자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하는가 하면 수 십명의 남자들이 모여 강학회를 한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조선말기 안성의 유림동향을 알려주는 중요한 내용임과 동시에 당시의 청룡리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청룡리는 기울어가는 왕조의 왕실 후손들이 모여살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울어가는 나라와 왕조를 지키겠다는 사상을 가진 학자들이 모여 토론하고 시를 읊던 마을인 셈이다.

전우(田愚)·신두선(申斗善)·심의윤(沈宜允)·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政淳)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항로(李恒老) 학파의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유시수(柳始秀)·홍대심(洪大心)과도 교유하면서 심성이기론(心性理氣論)을 주기론의 입장에서 피력하였다.

1881년(고종 18) 유생들의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이 전국적으로 일어날 때에 경기도에서는 유기영(柳冀榮)과 신섭(申㰔)이 소수(疏首, 여러 명이 올린 상소문에서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로 활동하였는데, 정윤영은 「척사만인소(斥邪萬人疏)」를 작성하여 경기유생들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에 연루되어 이원현(利原縣)에 정배되었다가 3년 만에 풀려났다. 1893년의 금부도사, 성균관직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학행으로 특지(特旨)에 의하여 사간원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처의(處義)에 있어 신하들은 마땅히 나가서 죽어야 하고 선비들은 자정(自靖)해야 한다”

 

라고 역설하였다. 단발령이 내리자 「자정명(自靖銘)」을 지어 맹세하였다. 저서로는 「후산문집(后山文集)」·「위방집략(爲邦輯略)」·「화동연표(華東年表)」 등이 있다.

후산문집」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 정윤영의 시문집이다. 16권 8책으로 필사본이다. 1899년 아들 정수용(鄭秀容)에 의해 필사되었다. 서울의 정재길(鄭載吉)이 소장하고 있으며, 1994년 보고사(寶庫社)에서 상하 2책으로 영인, 간행하였다.

권1∼3에는 부(賦) 5편, 사(詞) 3편, 시 343수, 권4에는 소(疏) 3편, 권5에는 서(書) 35편, 권6·7은 서(序) 18편, 기(記) 15편, 제발(題跋) 14편, 잠(箴) 5편, 명(銘) 17편, 찬(贊) 7편, 권8∼권12에는 혼서(昏書) 6편, 상량문 1편, 축문 6편, 제문 12편, 애사(哀辭) 6편, 잡저 22편, 수록(隨錄) 67조, 권13에는 세가(世家) 2편, 전(傳) 7편, 권14에는 묘표·묘갈 각 1편, 묘지 6편, 행장 2편, 권15~16은 부록으로 연보·가장·묘지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 중에는 「척사만인소」 2편이 수록되어 있다. 전자는 1881년 경기의 소수인 유기영(柳冀榮)을 위해 지은 것이고, 후자는 두 번째 소수인 신섭(申㰔)을 위해 지은 것으로, 신사척사론(辛巳斥邪論)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서 가운데 전우(田愚)·유시수(柳始秀)·홍대심(洪大心)·유중교(柳重敎)·신기선(申箕善)·홍재구(洪在龜) 등에게 보낸 편지들은 당시 임헌회학파와 이항로학파 간에 전개된 학설상에서의 명덕(明德)의 주리(主理)와 주기(主氣) 논쟁의 중요한 자료들이다. ‘명덕’을 주리로 볼 것인지 주기로 볼 것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인 것이 19세기의 심설논쟁이다.

성리학에서는 마음을 리와 기가 결합된 구조로 해석한다. 마음에는 리에 해당하는 성이 근거하고 있지만, 그 성은 기의 작용을 통하여 밖으로 드러나서 정이 되니, 이러한 의미에서 리와 기 모두를 심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이 리와 기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마음을 리의 측면에서도 볼 수 있고 기의 측면에서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마음의 리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는 일군과 마음의 기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심즉리(心卽氣)’를 주장하는 일군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심설논쟁’이다. 또한 주희는 마음과 명덕을 모두 ‘온갖 이치를 갖추고서 만사에 응하는것(具衆理 應萬事)’이라고 동일하게 해석함에 따라 ‘명덕논쟁’으로도 불린다. 명덕논쟁은 마음의 본체에 해당하는 명덕을 리로 규정할 것인지 기로 규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다. 이러한 명덕논쟁에서 정윤영은 주기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

대소유여영남소수이만손(代疏儒與嶺南疏首李晩孫)」과 「대소유여호서소수한홍렬(代疏儒與湖西疏首韓洪烈)」은 ‘신사척사론’ 때 경기 유생을 대표해 쓴 편지이다. 당시 유생들의 상호관계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 그 사료적 가치가 높다. 잡저 가운데 「사평(史評)」에서는 저자의 역사관을 살필 수 있다. 「의만언봉사(擬萬言封事)」 상하 2편은 22조에 걸쳐 시무개혁론을 제시한 것으로, 정윤영의 현실 인식을 극명하게 표출한 작품이다. 「기자세가(箕子世家)」는 저자의 유교 사관을 엿볼 수 있다. 「창의대장유인석전(倡義大將柳麟錫傳)」은 을미의병과 유인석의 당시 활동을 전한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후산문집(后山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국(救國)의 마지막 제언-후산 정윤영의 학문과 실천」(오영섭, 김자운 공저, 화성문화원,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