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광두(盧光斗) 1772∼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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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영조 48)∼1859(철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관은 풍천(豊川). 자는 청지(淸之), 호는 감모재(感慕齋)이다. 함양(咸陽) 개평촌(介坪村) 출으로, 할아버지는 노정국(盧楨國)이고, 아버지는 호조참판에 추증된 노석규(盧錫奎)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내오(來吾)의 딸이다.  신성진(愼性眞)의 문인이다.

1814년(순조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19년 전적이 되었고 그 뒤 지평(持平)·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고, 1826년(순조 26) 자인현감(慈仁縣監)이 되어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1836년(헌종 2) 장령에 제수되어, 임금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 이륜(彛倫)과 도덕으로 잘 보도(輔導)하여야 한다 하고, 경전(經傳) 중에서 절실한 것만을 뽑아 책을 만들어 올리니 충성이 지극하다 하여 특별히 동부승지에 승진되었고, 1851년(철종 2)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말년에는 노광리(盧光履)와 함께 아버지의 글 중에서 요지를 뽑아 「가학십도(家學十圖)」를 만들었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하였다. <풍천노씨 가학십도 목판(豊川盧氏 家學十圖 木版)>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함양박물관에 있는 목판이다. 2015년 1월 15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86호로 지정되었다.

풍천노씨 가학십도」는 한 집안의 가승(家乘)로서의 가치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책에 수록된 16명의 학문과 삶은 조선시대에도 칭송을 받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의미한 내용을 전해준다.   또한 가문에서 배출된 선조의 유훈과 행적을 도설로 정리하여 체계화한 구성은 매우 독창적인 것이다.  따라서 「풍천노씨 가학십도」는 구성과 내용에 있어 모두 가치가 크므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한 것이다.

이들에 대한 홍직필의 평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반드시 특별히 뛰어나고 재덕이 있는 선비가 그 사이에 태어남이 있을 것이니 그것이 노씨가 세상을 구제하는 아름다움이 된 까닭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사암공(徙庵公)의 후손 노광두가 또한 일찍이 정당한 말을 올려 은총을 받아 발탁되었고 풍고공(風皐公)의 후손 노광리가 학문을 심고 문장을 쌓았으나 세상에 명예를 구하지 않았으니 이 두 사람도 한 지방의 여망(輿望)이었다. 노씨의 문중에 어찌 그렇게 어진 사람이 많다는 것인가.  이것은 아마도 선조들이 선(善)을 행한 보답인 것이다. 대체로 선이라는 것은 하늘이 사람에게 품부한 바이고 사람이 소유한 것은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자신을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하여 여러 사람에게 베풀게 하는 것이니 모두 이치의 당연한 바로 하는 바가 없어도 하게 되는 것이다. 노씨 가문의 십 수세대가 밝은 조정에 나아가면 드러나고 물러가면 산수 속에 은거하면서 오직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의 가르침을 계술하고 행하여 몸에 모아 간직하면서 덕으로 빛내지 않고 남에게 베풀면서 멈추지 아니하니 그 축척한 바가 두터웠다. 그러므로 대대로 전해오는 여러 후손의 아름다운 명성과 소문이 끊어지지 않고 행함이 더욱 오래될수록 더욱 드러나 이 <가학도(家學圖)>가 길을 가는 사람의 이목에도 살펴지게 된 것이다.”

저서로는 「감모재집」 2권 1책이 있다.

함양 노참판댁 고가(咸陽 盧參判宅 古家)는 개평리에 있는 주택으로 현재 소유자의 6대조이자 호조참판에 추증된 노석규(盧錫奎)가 1746년에 지곡면 오평마을에서 이곳으로 이거(移居)하였다고 한다. 노석규의 아들 노광두가 호조참판을 역임할 당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살림이 어려워져 함양, 안의 지방의 환곡에 대한 상소를 올려 이 지역에 대한 세금을 탕감하게 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감사의 뜻으로 노광두에게 많은 재물을 주었으나 노광두는 거절하였다고 한다.

노광두가 벼슬에서 퇴임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인근의 주민들이 소식을 듣고 노광두가 기거할 수 있는 사랑채를 지어 주기를 청했으나 이것만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백성의 부담을 들어주고자 초가집으로 건립하도록 하였는데 1823년의 일이다.  안채의 건립연도는 알 수 없으나 마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증언과 노석규의 이거 시기를 보면 적어도 1745년경에는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830년에 노광두가 가묘를 창건하였으며 1945년에 안채를 중수하였다. 노참판고택은 평촌천의 좌측에 있는 개평마을의 동쪽부분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고택은 남북으로 긴 대지에 북쪽인 뒤에서부터 사당, 안채, 사랑채, 대문채가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현재 담장이 없어 별도의 영역은 구분되지 않고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좌측부터 부엌 1칸,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1칸, 툇마루가 딸린 마루방 1칸,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1칸이며, 배면에도 0.5칸의 툇칸이 있어 겹집구조이다.  공포양식은 장여수장집이며 상부가구는 도리가 다섯 개인 5량가이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우진각지붕이다. 평면은 좌측부터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2칸, 마루 1칸,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포양식은 장여수장집이며 상부가구는 도리가 세 개인 3량가이다. 사랑채의 지붕은 초가였지만 시멘트일식기와로 바뀌었으며 현재는 기와집으로 교체되었다.

「감모재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 노광두(盧光斗)의 시문집. 2권 1책. 목활자본. 그의 아들 노기수(盧箕壽)의 편집을 거쳐, 1922년 증손인 노근영(盧近泳)과 노종한(盧鍾漢) 등이 간행하였다. 권말에 족손(族孫)인 노보현(盧普鉉)과 노근영의 발문이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연세대학교 도서관·부산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 시 36수, 소(疏) 4편, 서(序) 10편, 기(記) 6편, 발(跋) 3편, 상량문 제2편, 제문 7편, 행장 3편, 묘갈명 4편, 봉안문 1편, 권2는 부록으로 연보, 사제문(賜祭文)·행장·묘갈명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소 중 「사지평소(辭持平疏)」는 1821년(순조 21)에 올린 사직소로, 당시 환곡(還穀)의 폐단이 매우 심함을 특히 함양과 안의의 현황을 들어 지적하고 그 시정책을 제시하였다. 「사호조참판소(辭戶曹參判疏)」에서는 임금의 도리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방책을 언급하고, 아울러 언로(言路)를 넓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영모단기(永慕壇記)」는 임진왜란 때 이운(李蕓)과 함께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진주에서 전사한 참봉 안흥종(安興琮)과, 정유재란 때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봉사(奉事) 안헌(安憲) 부자의 장렬한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영모단의 기문(記文)이다.

[참고문헌]

「철종실록(哲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감모재집(感慕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