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회(趙重晦)


조중회(趙重晦)                                                              PDF Download

1711년(숙종 37)∼1782년(정조 6)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익장(益章). 아호는 쓰지 않은 듯. 찾아볼 수가 없다. 단종 때의 충신인 조여(趙旅)의 10대 손으로, 아버지는 영조 때 도승지를 지낸 조영복(趙榮福)이고 어머니는 이만봉(李萬封)의 딸이다. 당시 노론 가운데 낙론을 대표하던 이재(李縡, 1680∼1746)의 문인이다.
조중회는 25세(1736)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관직의 임명은 그 후 3년 뒤인 영조 15년(1739)에 세자시강원의 설서(說書)에 처음으로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후 파직과 체직 및 유배 등의 정치적 굴곡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정조 3년(1779)에 병으로 사직할 때까지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었으며,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더구나 영조 말년에는 육조(六曹)에서 호조와 형조를 제외한 나머지의 판서직을 모두 역임한 바 있는 실력 있는 정치가였다. 그러나 자신의 문집이 남아있지 않아서 그의 학문적 깊이나 성향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와 정조 연간에 조중회에 관한 기사가 모두 134건이나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학자라기보다는 정치가로서의 삶을 살아간 인물로 판단된다. 정조 6년(1782) 4월에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이듬해에 충헌(忠憲)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그의 정치적 여정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사은겸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된 일이다. 그는 영조 27년(1751) 11월 7일에 사은겸동지사의 일원으로 연경으로 떠나 이듬해 4월에 돌아오게 되는데, 그의 나이 만 40세 때의 일이다. 조중회는 사신으로 임명되어 연행의 길을 떠나기 전에 33인이라는 적지 않는 지인들로부터 석별의 정을 담은 전별시문을 받게 된다.
전별시첩」은 1751년(영조 27)에 사은겸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연행을 떠나는 조중회를 송별하는 33인의 시문을 모아 엮은 책이다. ‘전별’의 사전적 의미는 ‘잔치를 베풀어 작별함’의 뜻이니 전별시란 작별을 위한 잔치 석상에서 석별의 정을 담아 지은 시를 말하는 것이다. 「전별시첩」에 실린 시문들은 바로 연행을 떠나기 직전인 그해 10월 말과 11월 초에 쓰여진 것이다.

조선에서 중국으로 파견되는 사신들은 본래 신라와 당나라간의 교류를 통하여 일찍이 개척된 해로로 통행하였다. 즉 황해도의 풍천이나 평안도의 선주에서 배를 타고 황해도를 건너 산동성의 등주로(登州路)를 통해 북경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연행 노정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지방과 산해관을 거쳐 북경에 이르는 육로가 정착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연행노정기(燕行路程記)」에는 이러한 육로의 연행 길이가 총 3,069리에 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성에서 의주까지 1,050리, 의주에서 책문까지 120리, 책문에서 심양까지 445리, 심양에서 산해관까지 787리, 산해관에서 황성(皇城)까지 667리로, 총거리가 3,069리가 된다.

지금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대략 1,200km 정도가 된다. 영조 41∼42년(1765∼1766)의 연행기록인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을 보면, 연행사가 11월 2일에 한성을 출발하여 다음달 27일에 북경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북경에 들어가는 데만 55일이 소요되었고, 하루 평균 59리(22.3km)를 이동한 셈이 된다.
육로의 연행노정은 우리나라의 북부지방을 거쳐 산동에서는 청석령(靑石嶺)․회녕령(會寧嶺)․소석령(小石嶺) 등의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하고, 압록강을 건넌 뒤에도 팔도하(八道河)와 태자하(太子河) 등의 큰 강을 건너야 하는 결코 순탄치 않은 길이었다. 당시에 말과 수레 및 도보에 의존하는 교통수단으로는 대단히 고단하고 위험한 길이었으며, 특히 음력 동짓달에 출발하는 동지사의 경우는 북경(연경)에 이르기까지 한겨울의 추위와 싸워야 했으므로 더욱 험난한 여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연행의 과정을 일기형식으로 작성한 각종 연행록이 현재 수백 종 전래되고 있다. 이들 연행록에는 우리나라의 사신들이 중국의 수도에 가서 그들이 해낸 일, 본 것과 들은 것, 느낀 것, 준 것과 받은 것, 체험한 일 등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연행록의 기사 중에서 연행 중에 겪은 어려움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연행노정의 멀고 험난함과 함께 숙소의 불편함, 허술한 의복, 입에 맞지 않는 음식과 물 등도 연행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뿐만 아니라 조공국(朝貢國)의 사신으로서 겪어야 했던 수모와 심적 부담감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중국 측의 관리로부터 업신여김을 받거나 조선의 사신을 변방의 몽고와 같이 취급하여 대접한 사례가 각종 연행록에는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다.
연행은 대개 5개월 정도 뒤에는 다시 돌아와 헤어졌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는데, 이와 같은 험난한 여정 때문에 먼 지방으로의 부임과도 같은 전별연이 베풀어져 석별의 정을 나눈 것으로 여겨진다.

전별시첩」에는 시문을 읽을 수 없는 마지막 장을 제외하고 모두 32장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를 형식별로 나누어 보면, 7언시가 20장, 오언시가 4장, 문장이 8장이다. 이들 시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골라 내용을 소개한다.

남쪽 고을에도 눈바람부니 걱정되어 잠못이루는데
南城風雪耿無眠

가만히 셈해보니 살져 누린내 난지가 백년도 지났네.
黙筭腥膻過百年

진중하게 수레와 말을 몰아도 늦지는 말아야 하니
珍重使車驅莫緩

우두커니 서서 중원소식 돌아와 전해주길 기다리네.
中原消息竚歸傳

이것은 맨 첫 장에 수록된 목곡(牧谷) 이기진(李箕鎭)의 시이다. 이 시의 작가인 이기진은 조중회가 여행을 떠나기 2년 전 같은 계절에 동지사로 중국을 다녀온 사람이다. 험난한 여정과 한겨울의 추위를 이미 경험한 바 있는 그로서 아끼는 후배에 대한 걱정과 배려를 시에 담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걱정뿐만 아니라,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연행사절을 이끌되 너무 늦게 움직여 북경에 도착하는데 차질을 빚어서도 안된다는 충고도 잊지 않고 있다. 또한 마지막 구절에서는 무사히 연행에서 돌아와 재회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마계풀 자라나는 추운 겨울에 그대는 수레를 이끌고
薊野寒生學士車

눈 내린 아침에 의관을 갖추고 오랑캐에게 절을 하네.
朝衣推雪拜穹廬

옥하관의 밤을 밝히는 외로운 등불
玉河館裡孤燈夜

문득 예전에 대궐에서 올린 상소문이 생각나네.
應憶天門舊上書

이것은 병조판서 직을 수행하고 있던 진암(晉庵) 이천보(李天輔)의 시이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건국한지 9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이천보는 청의 조정을 오랑캐라고 표현하여 명나라를 흠모하고 북방 민족이 건국한 청나라에는 굴복하지 않겠다는 속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공문서가 아닌 사적인 시문이나 서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여릉의 송백에 저녁 구름이 얽히고
驪陵松柏暮雲縈

천추에 남은 한이 가슴에 맺혀 평온하지 못하네.
遺恨千秋鬱未平

해마다 가죽과 비단을 실고 헛되이 달려가 절하니
皮弊年年空走拜

험한 일하는 사신들은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네.
不知何處有荊卿

이것은 조중회와 나아가 동갑인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의 시이다.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에 매년 조공을 바쳐야 하는 못마땅함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연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주는 격려나 안부보다는 작가 자신이 그간 품어왔던 심정을 토로하는 듯한 내용이다.
전별시의 내용은 주로 험난한 여정을 출발하는 사신에게 용기를 가지라는 격려의 내용, 조선의 사신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충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북방의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에 조공을 바쳐야하는 데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내용이 적지 않게 보인다. 이로써 명나라를 흠모하고 병자호란으로 당했던 굴욕이 오랜 원한이 되어 당시까지도 선비들의 가슴에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조중회 贐行 <餞別詩帖>에 관한 연구」(김동환, 「서지학연구」45, 서지학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