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주(任聖周1711~1788)


임성주(任聖周(1711~1788)                                 PDF Download

 

의 본관은 풍천(豐川)이며, 자는 중사(仲思), 호는 녹문(鹿門)으로, 충북 청풍(淸風)에서 태어나고 만년에는 공주의 녹문에서 살았다. 그의 부친은 함흥판관(咸興判官)을 지낸 임적(任適)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호조정랑(戶曹正郎)을 지낸 윤부(尹扶)의 딸이다. 그의 조부인 임의백(任義伯)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과 동문이기도 하다.

녹문은 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 이이(李珥), 이진상(李震相), 기정진(奇正鎭)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손꼽힌다. 조선 후기 성리학이 발전하면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에 대한 동질 여부에 대하여 논쟁이 일어났다. 녹문은 초기에 스승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같다는 이론이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이고, 다르다는 이론이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이다. 조선시대에 이로 인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전자의 인물성동론을 낙론(洛論)이라 하였고 후자의 인물성이론을 호론(湖論)이라 하였다.을 따랐으나 10여 년의 연구를 통해, 호론(湖論)과 낙론(洛論)호론(湖論)과 낙론(洛論):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는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서울 지방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낙론(洛論)이라 하였고,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충청도지방에 살고 있어 호론(湖論)이라고 지칭하였다.을 지양하고, 생의(生意)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또 사람은 모두 같은 기를 타고 나며, 사람의 도덕관념으로 사물을 평가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호락(湖落)의 양론을 기일원론(氣一元論) 입장에서 종합하여 기일분수(氣一分殊)라는 독특한 이론체계로 자신의 학설을 수립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공부에 뜻을 두었으며, 16세 때에는 율곡(栗谷)의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에 깊이 감명을 받아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부친으로부터 직접 글을 배웠는데, 한 번 가르쳐주면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을 보고 집안을 융성케 할 것이라며 그의 부친이 크게 기뻐하였다는 일화도 전해오고 있다. 그는 또 3세 때, 사랑채 벽에다

임사동임사동(任獅同): 녹문의 어릴 적의 이름이다.의 뱃속에 글자 오백 자가 들어있다[任獅同腹中書五百字入]”

라고 크게 썼는가 하면, 13세 때에는 공자의 모습을 그려 집안에 모셔놓고 새벽에 일어나 절을 하고, 부모님께 문안을 올린 뒤에 공부에 임하곤 하였다. 15세 때 아버지의 부임지인 함흥(咸興)에 따라갔다가 관아(官衙)에 있는 기생들의 아리따운 자태를 보고 돌아와 책상머리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놓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도(道)를 밝히는 것만 같지 못하다. 마음속에서 기생을 없애자. 원컨대 요부(堯夫)요부(堯夫): 중국 송나라 학자 소옹(邵雍)의 자이다.를 배우자. 눈은 요사스럽고 간특한 것을 멀리하자.”

이 글을 보면, 조숙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엄숙한 면이 없지 않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또 16세 때는 <자서(自序)>라는 글을 지어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는 한편, 자아의 성찰의 계기로 삼았다고 한다.

“율곡 선생의 글을 여러 편 읽고 나서 여태까지의 내 생각이 너무도 엉뚱했다는 것을 알았고, 선비의 당연한 일이 엄연히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날의 죄는 비록 죽음을 당한다 치더라도 도망할 바가 없다.”

그의 부친이 함흥판관(咸興判官)으로 있을 당시, 기생을 매질한 일로 파직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그의 가족들은 친인척의 집에서 잠시 기거(寄居)하고 있었는데, 이 때 부친이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18세 때 부친상을 당한 후, 견디기 어려운 슬픔과 고뇌에 빠져 맏형 임명주(任命周)의 허락을 받아 홀어머니를 모시고 청주 옥화대(玉花臺)로 낙향하였다. 이때 그의 맏형은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으므로, 형제들의 교육은 둘째인 그가 맡았다. 그의 형제자매 5남 2녀 중 여동생 윤지당의 재능을 간파하고 유학경전과 역사서 등을 가르쳤다. 그의 여동생은 당대 이름을 떨친 여성 성리학자로 조선말까지 알려졌던 인물이다.

녹문은 19세 때, 서울 근교에서 강학하던 도암(陶菴) 이재(李縡)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부친을 여의고 청주에서 본격적으로 학문 연구를 시작했을 때, 주변 학자들과 교유(交遊)를 하였다. 33세 때 어머니의 뜻에 따라 사마시(司馬試)에 응시를 하여 합격함으로써 관직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제수 받은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 洗馬)는 세자의 경호를 맡은 말단직이었으나, 종종 세자를 위한 강연에 입시(入侍)하곤 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대신들이 서로 녹문의 학행(學行)이 뛰어난 것으로 천거하자, 영조(英祖)가 세손(世孫)을 교육하도록 하였다.

이 후, 외직(外職)으로 발령을 받아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였다. 그가 부임했던 고을은 규모도 작고 오지여서 토호(土豪)들의 횡포가 심한 곳이었다. 부임 직후, 녹문은 백징(白徵)백징(白徵): 백골징포(白骨徵布)의 준말로, 농지가 아닌 곳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던 일을 일컫는다.을 가하는 폐단을 해결하는데 나섰다. 이외에도 진상품(進上品)을 나르는 부역과 수행원들을 접대하는데 따른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등 여러 치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민생안정(民生安定)을 위한 행정과 함께 교육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는 또 군자당(君子堂)을 설치하여 고을 유생들에게 학문을 독려하는가 하면, 관청 서리(胥吏)들에 대한 교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지방행정의 문란으로 여러 폐단을 목격했던 터라, 부임한 첫 해에 당장 서리들에게 전횡을 경계하는 글을 지어 게시하였다. 녹문의 행장(行狀)에서 그의 치적(治績)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년이 지나지 않아 교화시키기 어렵다던 아전과 백성들이 또한 죄를 부끄러워하고 선을 귀히 여길 줄 알아서 송사가 점차 줄어들고 옥의 감방이 여러 번 비게 되었다.”

이는 비록 작은 오지(奧地)의 고을수령을 맡았지만, 적극적으로 책무를 다했던 결과였다. 그러나 그는 임실현감(任實縣監)으로 재직할 당시, 그의 형과 동생의 연이은 죽음으로 낙향을 결심하고,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서 다시 녹문에 은거하고 말았다. 그의 저서로는 <녹려잡지(鹿廬雜識)>, <산록(散錄)> 등의 작품이 수록된 《녹문집(鹿門集)》이 전한다.

<참고문헌>
– 《녹문집(鹿門集)》
– 《임성주의 생의 철학》, 한길사, 1995.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