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림(李普林)-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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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고종 7)∼1972년. 근현대의 유학자.

경상남도 김해 출신. 본관은 전주. 자는 제경(濟卿), 호는 월헌(月軒)이다. 중종의 다섯 번째 아들인 덕양군(德陽君) 기(岐)의 후손이다. 경종조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여주에서 김해로 피난한 이춘흥(李春興)의 7대손이다.

이보림은 조선의 국운이 기울여 가던 1903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골상이 비범한데다가 행동이 단정하여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않고 항상 어른들 곁에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응대하거나 무릎을 꿇고 절하는 법도를 익혔다. 그래서 조부 농은공(農隱公)이 사랑하고 아껴서 조상의 무덤 아래에 제숙소(齊肅所)를 짓고, 거기에 선생(서당의 훈장)을 불러서 가르쳤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한문의 구두(띄어 읽기)를 뗄 줄 알았으며, 청소년의 나이에 이미 경전과 역사서의 서적을 대략 섭렵하였다.

한문은 오늘날 글처럼 띄어쓰기가 이루어져 있지 않고 모든 글자가 붙어 있기 때문에 문장과 문장 사이 또는 구절과 구절 사이를 적당히 끊어 읽을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이보림이 어려서 ‘구두를 뗄 줄 알았다’는 말은 어느 정도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였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라고 할 때,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가 아니라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고 문장을 구분해볼 줄 알았다는 것이다. 또한 경전은 주로 유가의 기본 경전인 사사(四書)와 오경(五經)을 가리킨다. ‘사서’는 『논어』․『맹자』․『대학』․ 『중용』을 말하고, ‘오경’은 『시경』․『서경』․『예기』․『역경』․『춘추』를 말한다. 특히 『대학』과 『중용』은 원래 『예기』 속의 두 편명을 각각 독립시켜 별도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중국 송대의 주희는 이들 사서를 자기 식으로 해석하여 ≪사서집주≫라고 하고, 다른 모든 경서류보다 먼저 배워야 하는 책으로 규정하였다.

이보림은 1920년 봄에 부친의 명을 받들어 서해의 계화도로 은거하여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간재(艮齋, 1841∼1922)를 찾아뵙고, 거기에 모여든 수많은 학자들과 함께 수학함으로써 간재 문하의 제자가 되었다. 간재는 영남의 곽종석(郭鍾錫, 1846∼1919)과 함께 조선 말기를 장식한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이다. 전우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엄혹한 한말 시절에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전우 문하에서 특히 서진영(徐震英)․권순명(權純命)․유영선(柳永善) 등과 뜻이 맞아서 침식을 잊으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전우가 죽자, 변산의 진계정사로 가서 서진영을 따라 배웠는데, 서진영 역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마침내 오진영(吳震英)이 강학하던 호서의 망화재로 가서 수년 동안 그를 모시고 학문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강화되어 단발령을 내리고 호적을 새로 고치는 등 일제의 핍박이 가속화되자, 이보림은 당시의 시세를 통탄하며

“우리가 오늘날 구차스럽게 살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니, 오직 수사선도(守死善道) 네 글자의 부적을 이마에 붙여두어야 하겠다.”

라고 하였다. ‘수사선도’는 죽음을 무릅쓰고 훌륭한 도를 지킨다는 뜻으로, 공자의 『논어』「태백」편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는 배우는 즐거움을 말하여

“독실하게 진리를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죽음으로 선한 도를 지키며,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부하고 귀한 것이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라고 하였다.

이보림은 공자의 이 구절을 인용하여 공자와 맹자 이래 3000년간 전해지는 유교의 도학정신을 지켜나갈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도학정신을 지켜나가는 일이 조선의 500년 사직을 지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이에

“도를 세우는 일은 선왕의 법복(法服)을 입고, 선왕의 법언(法言)을 말하며, 선왕의 도덕을 실행함에 있으니, 지금 세상에 살면서 옛 날의 도를 밝히는 것이 곧 그것이다”

라고 강조한다. 여기에서 ‘옛날의 도’는 공자와 맹자 이래 전해져 내려오는 유학의 도학정신을 말한다. 이러한 수도(守道)의 정신에서 당시 힘을 떨치던 일본이나 서구열강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배척하였다. 이에 서재를 열어 원근의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집이 좁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이보림은 일생을 통하여 시속의 변화에 영합하지 않고 의연하게 전통을 지키려는 신념으로 일관했다.

한편 여기에서 그 시대의 단발령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한다. 일본은 한국인의 정신과 반일정서를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단발령을 단행하였다. 한국에는 머리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에서 유래된 것이다. 많은 선비들은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을 자를 수는 없다’고 분개하여 정부가 강행하려는 단발령에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물론 이보림은 단발을 거부하는 당위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보림은 단발령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무릇 신체발부는 모두 부모님의 소유이니 그 소중함은 머리카락이든 몸이든 한 가지인데, 이제 머리카락과 몸을 그렇게까지 구분하느냐’고 질문하였다. 이보림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몸이 비록 중하지만 실은 일개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머리 위의 터럭 하나에는 중화(華)와 오랑캐(夷)의 구분이 걸려있다. 그 소중함이 어찌 몸의 백배 정도뿐이겠는가. 무릇 오랑캐(夷)는 곧 사람이 아닌 짐승이다. 머리카락이 남아 있으면 몸이야 비록 죽더라도 중화(華)의 명분은 남아있고, 머리카락을 깎으면 몸이 비록 살아남더라도 짐승이란 명분이 이미 성립된다. 부모의 소중한 몸을 짐승과 같은 곳으로 돌리는 것이 과연 옳겠는가. 오호라. 내 머리카락 하나를 보존할 수 있으면 비록 몸이 천번만번 부서져 조각날지라도 삶과 죽음에 유감이 없을 것이다. 다만 몸을 보존하는 것을 중하게 여겨서 짐승과 같은 지경으로 돌아가는 것에 비한다면 어찌 하늘과 땅의 차이만 있겠는가.”

이것은 어떤 사람이 ‘손발을 자를지언정 두발을 자를 수 없다’는 당시의 시속에 대해, 손발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고 두발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인데, 어째서 손발을 자르는 것은 괜찮고 두발을 자르는 것은 안된다고 하는지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이보림은 두발은 중화에 해당하고 몸은 오랑캐에 해당한다는 화이(華夷)의 관계로써 대답한다. 몸은 오랑캐와 같은 짐승의 명분에 해당하고 머리카락은 중화의 명분에 해당하기 때문에 ‘손발을 자를지언정 두발은 자를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보림은 ‘화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높다란 관을 쓰고 상투를 틀고 비녀 꽃은 것은 화(華)요, 머리를 깎고 이마를 밀어버리는 것은 이(吏)이다. 사당을 세워서 조상을 제사하는 것은 ‘화’이고, 시신을 불사르고 제사를 폐하는 것은 ‘이’이다. 동성과 혼인하지 않는 것은 ‘화’이고, 형수 제수나 누이와 관계하는 것은 ‘이’이다. 폐백을 받지 않고서는 친하지 아니함은 ‘화’이고, 남녀가 스스로 짝을 구하는 것은 ‘이’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은 ‘화’이지만, 아버지와 군주를 시해하는 것은 ‘이’이다. 이런 것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오호라. 요즈음은 어찌 된 세상인지 ‘이’로써 ‘화’를 어지럽히며, ‘화’이면서 ‘이’로 들어가니, 이는 천하의 첫 번째 큰 변괴이다. 무릇 의리를 가진 자라면 ‘이’를 물리치는데 급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글을 통해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삶에는 시대를 넘어서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고, 이러한 가치를 굳게 지키는 것이 지식인의 본분이라는 신념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보림은 해방 후 강상윤리를 지키며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다가 1972년 70세로 세상을 마쳤다. 저서로는 『월헌집』16권이 있다. 1986년에 고향의 유림들이 김해시 장유의 덕정에 명휘사(明輝祠)를 건립하여 그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참고문헌]: 「월헌 이보림의 생애와 학문」(정경주, 『간재학논총』4, 간재학회, 20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월헌선생문집』(보경문화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