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우수(閔遇洙, 1694~1756)


민우수(閔遇洙, 1694~1756)                               PDF Download

 

우수(閔遇洙, 1694~1756)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손자이며, 숙종의 부인 인현왕후의 오빠 문충공(文忠公) 민진후(閔鎭厚)의 아들이다.  김창협과 권상하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문장과 글씨를 잘 썼다.
1721년 신임사화로 노론의 관료들이 차례로 사형을 당하는 것을 보고 관직에 대한 꿈을 접고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나중에 성균관좨주, 세자찬선, 원손보양관 등을 지냈다.

1694년(1세,숙종20년) 12월 28일 서울 안국동에서 문충공(文忠公)  민진후(閔鎭厚, 1659-1720)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손자이며,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외증손이다.  어머니는 정경 부인(貞敬夫人)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현감덕로(德老)의 딸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암(貞庵), 혹은 섬촌(蟾村)이다.

1709년(16세,숙종35년) 윤경적(尹景績)의 딸과 결혼하였다.

1714년(21세,숙종40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김창집(圃陰 金昌緝)에게 글을 배웠는데,  이즈음부터는 농암(農巖) 김창협과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  김창협은 민우수의 아버지 민진후와는 동서 지간이다.  두 사람의 장인이 이단상(李端相, 1628-1669)이다.  민우수에게 김창협은 이모부인 셈이다.

1716년(23세,숙종42년) ⌈가례원류(家禮源流)⌋에 대한 분란이 생기자 소론파 인윤증(尹拯)을 공격하는 선비들의 상소문을 주도하였다. 이 일로 숙종은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에서 송시열이 옳다고 판단하게되었다.
이후 친구 김신겸(金信謙, 1693-1738)과 함께 호서 지방(충청도지역)의 산수를 유람하였다. 스승 권상하를 찾아가 유교경전(經傳)의 의심스러운 부분을 질문하였다.

1721년(28세, 경종1년) 전 년에 부친상을 당했다.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이해에 즉위한 경종이 몸이 약해 그의 동생 연잉군(후일의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웠다.  이 일은 노론과 소론의 정치싸움으로 번졌는데 결국 왕세제 대리 청정을 주장한 노론의 4대신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등이 사형을 당했다. 옥중에 있던 처남 윤지술(尹志述)이 사망하고,  작은 아버지 민진원(閔鎭遠)과 매부김광택(金光澤)이 유배형을 당했다.  민우수는 이러한 일을 계기로 벼슬을 단념 하고 여주로 돌아가 유교경전(經傳) 연구에 힘썼다.

1726년(33세,영조2년) 봉릉참봉(奉陵參奉), 세자세마(世子洗馬), 명릉참봉 등에 임명되었다.  탕평책이 국론으로 정해지자 그러한 정책에 반대하고 관직을 사양하였다.  전년에 진사 김신겸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산수를 즐기면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자 강원도 영월의 산중으로 들어갔는데,  그와 함께 유숙기(兪肅基), 이봉상(李鳳祥) 등과 더불어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명덕설(明德說) 등을 강의하고 토론하였다.

1731년(38세,영조7년) 은거하면서 집을 짓고 다음과 같은 시( ⌈정암집 ⌋ 1권樹屋)를 지었다.

樹屋幽棲好  집을 지었네,  조용히 살기 좋은 곳에.
蒲床宴坐宜  왕골로 만든 자리, 편안히 앉기 좋네.
鴻濛上皇意  아득한 기운은 태상황  복희의 마음이요
寂默老禪癡  적막함은 늙은 선승의 어리석음이네.
旭日盈黃卷  아침 햇빛은 누런 책위에 가득차고
閒花照墨池  꽃잎은 벼루 안의 연못에 비치네.
淸明本來氣  청명은 원래 오는 절기이지만
不待夜中知  기다리지 않아도 밤이 되면 알겠네.

1739년(46세,영조15년) 형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이후1743년에는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1748년에는 경기도 유생 침빈(沈 䚔 ) 등이 상소문을 올려 민우수와 함께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등 조정에 불러들일 것을 호소하였으나 임금은 거부하였다.

1750년(57세,영조26년) 봄에 통정대부에 올라 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여름에 아들 민백첨(閔百瞻)이 사망하였다.  겨울에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1751년(58세,영조27년)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성균관좨주, 세자찬선(世子贊善) 등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10월에는 특명으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54년(61세,영조30년) 시강원 서연관,시강원 참선, 공조참판겸성균관좨주에 임명되었다가 , 9월에 원손보양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가르치던 제자 김양행(金亮行, 1715-1779)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다.  그는 가깝게 지내던 친구 김신겸(金信謙)의 아들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여 예학과 역학에 밝았다.  김양행은 이듬해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나중에 이조참의에 이르렀으며,  정조 때는 형조참판을 지냈다.  그가 가르친  제자로 이우신(李友信)·민치복(閔致福)·박준원(朴準源)  등이 있다.

1755년(62세,영조31년) 부인 윤씨가 사망하였다.  이해 3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756년(63세,영조32년) 가을에 사망했다. 여주섬락리(蟾樂里)에 장사지냈다.
저서로 ⌈정암집 ⌋ 16권이 있다.  그는 대명의리를 중시하고, 특히 노론의 원칙과 의리를 중요시 하였다.  일생동안 주로 재야유학자로서의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관직도 대부분 그러한 성격의 것이 많았다.
2년뒤,  자헌대부 좌참찬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정암집』16권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元)이다.  그의 묘는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 능말뒤쪽 구릉에 있다.

<참고자료>
⌈민우수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 한국의 지식콘텐츠
김은정, ⌈정암 민우수의 삶과 한시⌋, ⌈한국한시작가연구⌋17,2013.
윤혁동, ⌈민우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