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탁(任鐸)

임탁(任鐸)                                                                     PDF Download

 

임탁(任鐸, 1544년〜1593년)은 조선시대 상서원직장, 제술관, 도감랑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선조 9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행실이 독실하여 주변 선비들이 추종하였다.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율곡과 우계가 탄핵을 받았을 때 그는 성균관의 유생들을 모아 변호하다 그 역시 탄핵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소모관(召募官)에 임명되어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지에서 병사와 군량을 모집하였다. 선조 임금의 가마를 호위하여 도성으로 돌아온 뒤에는 명나라 장수들의 접대와 전후 처리에 전념하다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1544년(1세)
중종 39년 11월 원주목사 임몽신(任夢臣)과 송씨 부인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豊川, 황해도 송화), 자는 사진(士振)이다. 할아버지는 내섬시 정(內贍寺正)을 지낸 임정(任楨),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임유손(任由遜), 고조할아버지는 수안 군수(遂安郡守)를 역임한 임한(任漢)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그는 성품이 아주 강직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품행과 몸가짐이 매우 분명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독실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서 교제를 하였다.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매우 흥미를 가졌으나 집안의 어버이가 늙어서 과거 시험에 전념하느라 학문에 매진할 수가 없었다.
임탁은 어려서 할아버지 참판공의 집에서 자랐다. 참판공은 그의 착한 행실을 사랑하여 글을 지을 때 ‘효동(孝童)’이라 불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여막을 짓고 무덤 곁에서 지내면서 밥을 먹지 않고 죽을 먹으며 슬프게 통곡하였다. 뒤에 할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때도 역시 예를 다하였다.
어머니가 연로하여 실명을 하고, 병이 위독해져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지냈는데, 임탁은 밤낮없이 눈물을 흘리고 의원을 찾아다니며 약방문을 물었으며, 직접 인분을 맛보며 간호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1576년(32세)
선조 9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행실이 독실하여 주변 선비들이 추종하였다.

1583년(39세)
율곡 이이가 소인배들의 모함으로 삼사(三司)의 비판을 받았다. 이이를 변호한 성혼도 탄핵을 받자 유생들과 함께 이에 항의 소를 올렸다. 이때 임탁은 성균관장의(成均館掌議)로 있으면서 성균관의 여러 학생들을 모아 공동으로 상소를 올리고 율곡을 변호하였다. 이 덕분에 그는 반대파들의 비판을 받고 삼사의 탄핵을 받았다.

1587년(43세)
이조의 천거로 동몽교관(童蒙敎官), 와서별제(瓦署別提) 등에 임명되었다. 그가 동몽교관으로 있었을 때, 유성룡(柳成龍, 1542년〜1607년)은 드러내놓고 배척하고 화를 내기도 하였다.(선조수정실록 1587년 9월 1일 기사) 유성룡은 문신이며 성리학자로 승문원 권지부정자, 의정부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이황의 제자로 조목(趙穆), 김성일 등과 함께 글을 배웠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시험 합격하여 관료로 등용된 뒤에는 이산해와 가깝게 지내 동인으로 활동하여 서인들과는 대립하였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경험한 뒤에는 온건파인 남인을 형성하고 강경파였던 이산해와 결별하였다.

1590년(46세)
이즈음 임탁에 대해 좋게 여기지 않는 자가 춘관(春官)을 관장하게 되어 그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한참이 시일이 지난 뒤에 다시 별제(瓦署別提)에 임명되었다.

1592년(48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소모관(召募官)에 임명되어 군사 모집의 임무를 맡아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지에서 병사와 군량을 모집하였다.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에 임명되었다.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방한하였을 때, 내빈사(來賓使) 윤근수(尹根壽)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이들을 맞았다.

1593년(49세)
선조 임금의 가마를 호위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도감(都監)의 낭관(都監郎)에 임명되었다.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느라 오랫동안 수고를 한 탓에 몸이 상하여 다음 해 3월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집안은 궁핍하여 장례용품을 구할 수 없었다. 겨우 친척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양주(楊州)의 도혈리(陶穴里) 사곡촌(笥谷村)에 장사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신씨와 3남 2녀를 두었다. 신씨는 고령(高靈)의 충의위(忠義衛) 신맹영(申孟瀛)의 딸이며, 목사(牧使) 신영철(申永澈)의 증손녀이다. 장남 임헌지(任獻之)는 진사이며, 차남 임면지(任勉之)는 일찍 사망하였고, 삼남 임뇌지(任賚之)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장녀는 진사 권길(權佶)에게 시집갔으며고, 차녀는 부사 한인(韓訒)에게 시집갔다.
김상헌은 묘지명에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공은 평생토록 검소하여 세속의 화려한 습속이 전혀 없었다. 꿋꿋하고 묵중하여 고요한 방에 나아가 똑바른 자세로 엄연하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비리를 청탁하지 못하였다. 성품이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친한 사람의 경우에는 위급함을 반드시 구해 주었고, 어진 사람일 경우에는 비록 소원한 사이더라도 급한 데 달려가기를 친한 사람과 같이 하였다. 일찍이 회시(會試)의 대책(對策)에서 이름이 선발자 명단에 들어 있었는데, 시험을 주관하는 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옳지 못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다른 사람의 시권(試卷, 답안지)을 뽑고 공의 시권을 탈락시켰다. 이에 그 말을 들은 자들이 ‘의당 올라가야 하는데 떨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만은 홀로 얼굴빛과 말투에 드러내지 않았다.”

<참고자료>
권오호, 「임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
김상헌(金尙憲), 청음집(제34권 묘지명),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