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구(李承龜:1865~1931)


이승구(李承龜:1865~1931)                                 PDF Download

 

북 괴산(槐山) 사람이다.  유인석(柳麟錫) 의진에 군자금(軍資金)을 지원하고,  의병 대장 이강년(李康䄵)이 순국(殉國)하였을 때 제문을 지었다.
1895년에 일제는 국모(國母)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더니,  이어서 친일정권(親日政權)을 사주하여 단발령(斷髮令)과 복제개혁(服制改革)을 강행하였다.  이에 우리의 민중과 유생들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친일정권에 항거하였다.
그 가운데도 유인석 의진은 다른 의병진과는 달리 전투력을 갖춘 의병으로 가장 활발하게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승구는 유인석 의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뒤에서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지원하여 의병들이 대일 항전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후 을미의병이 해체되고 유인석 의진이 만주로 망명하였을 때에도 그는 계속해서 유인석과 연계를 맺고 활동을 지원하였다.  이후 일제는 1904년 2월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여 침략을 본격화 하였으며,  마침내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자주적 외교권을 박탈하고,  이듬해 1월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우리나라를 준식민지 상황으로 몰고 갔다.

이에 격분한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항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7년 7월에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에 따라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우리 군대는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운동은 급기야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 되어 갔다.  그때 이승구는 유인석과 이강년 등과 함께 거의를 하고자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부모의 병환이 위중하여 동참하지 못하였다.  의병대장 이강년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지금의 일은 먼저 내적(內賊)을 토멸한 후에 타적(他賊)을 의논해야할 때 입니다.…중략…
형은 거상(居喪) 중이라 감히 같이 고생할 것을 바랄 수는 없지만 참진(參陣)한 것이나 그 요체는 한가지입니다.”

라고 하면서 의거에 동참하지 못한 그를 위로하였다.

이는 그들의 친분 관계가 각별 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거니와,  그 뒤 1908년에 이강년이 순국(殉國)하자 그가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의병장의 업적을 기릴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친분 관계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생사를 함께하겠다는 의기가 투합된 나머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우국충정(憂國衷情)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높이 사서 정부에서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하였다.

<참고자료>
군자금기부자명단
위당선생삼세록(박한설편, 1983) 177면
의암문하동문록
벽진이씨대동보(1962) 2편108면
운강이강년의서신(1907.6월)
치당이승구유고(간행년도미상) 하권57·77면
국가보훈처자료(http://www.mpva.go.kr/narasar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