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립(崔岦,1539-1612년)


 

최립(崔岦,1539-1612년)                                        PDF Download

 

최립 초상화
최립 초상화

1539년(중종 34)∼1612년(광해군 4).

선 중기의 문관이며 문인이다.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에 집안이 빈천하여 높은 벼슬까지는 못 올라갔지만,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서, 고풍스럽고 격조 있는 문장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을 위해 명나라와의 교섭에 큰 기여를 하였다.

1539년(1세, 중종 34)에 개성에서 진사 최자양(崔自陽)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 또는 동고(東皐)이다.

1555년(17세, 명종 10)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561년(23세, 명종 16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당시 여러 관리들이 승정원에 있는 초목(草木)과 화석(花石) 40여 종으로 각각 1수의 율시(律詩)를 짓게 하자, 잠깐 동안에 완성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광해군일기․최립의 졸기⌋) 이후 그는 장연현감, 웅진현량, 재령 군수 등 궁벽한 고을을 맡으면서 더욱 문장에 힘을 쏟았는데, 반고의 ⌈한서(漢書)⌋를 수천 번 정독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1577년(39세, 선조 10),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직책은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이었다. 주청사란 현지 상황을 보고하고 필요한 것을 요청하는 사신이다. 질정관은 임시 벼슬로 중국으로 가는 사신과 함께 보냈는데, 중국의 문물, 제도, 사물 등에 관한 의문점을 물어서 알아 오는 관리였다. 사신으로 다녀온 뒤에 그는 재령 군수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해주에 은거하고 있던 율곡 이이와 교류하였다.
최립이 재령 군수로 있었을 때, 율곡에게 쌀 1말 정도를 보낸 적이 있었다. 당시 율곡은 점심을 먹지 않았다. 자제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양식이 떨어져 하루 한 끼만 먹으려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최립이 쌀을 보내 주었는데 받지 않은 것이다. “양식이 없는데 왜 쌀을 거절하십니까?”라고 사람들이 물으니 “국법에 장죄(贓罪, 절도나 뇌물 등으로 남의 것을 훔친 죄)가 매우 엄하여 받은 자도 처벌이 동일하다. 우리나라 수령은 나라에서 주는 곡물이 아니고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대개 수령이 주는 것은 모두 받아서는 안 된다. 최입지(崔立之, 최립)는 어려서부터 나의 벗이니, 만일 자기 집의 물건으로 준다면 어찌 받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최립은 당시 율곡이 해주 석담에 은거하면서 은병정사를 지어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지도하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문장이 ⌈간이집⌋에 들어있다.

1581년(43세, 선조 14)에 굶주린 백성들 구제에 힘썼다. 그 공로로 선조 임금에게 옷감을 하사 받았다. 다시 주청사의 질정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주청사는 명나라 사람들이 태조 이성계의 계보를 잘못 알고 성주(星州)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여 그것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율곡이 제안하였기 때문에 율곡이 주청사로 거론되었으나 박순(朴淳)과 이산해(李山海) 등이 “숙헌(叔獻, 율곡)은 조정을 하루라도 떠날 수 없으니 그 다음 인물을 생각해야 한다.”라고 하여 김계휘가 주청사로 임명되고 최립은 그를 보좌하는 질정관(質正官)이 된 것이다.

1584년(46세, 선조 17). 이 해 1월 16일(음력)에 절친한 벗이자 동료였던 율곡 이이가 사망하였다. 2년 뒤, 호군(護軍)으로 전임하여 있다가 관리들의 시문과 학식을 시험했던 이문정시(吏文庭試)에 장원을 했다. 덕분에 첨지중추부사(정3품 당상)에 올랐다.

1592년(54세, 선조 25), 9월 9일에 공주목사로 임명되었다가, 부임 전에 갑자기 전주 부윤으로 전임되었다. 이해 4월 13일(음력)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 20여만 명이 침략해왔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순식간에 함락되자, 선조는 왕실 가족과 관리들을 거느리고 급히 의주로 피난을 갔다. 최립이 나중에 중국 사신으로 가 중국 조정에 올린 글을 보면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이라는 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땅을 마주 보고 있는 관계로, 마치 산속에 살 때에는 승냥이나 호랑이를 경계하고 들에 거처할 때에는 독사나 이무기를 조심해야 하는 것처럼 그들에 대해서 대비를 해놓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자행하는 소규모의 도발을 막는 정도의 것일 뿐이었는데, 이번에 그들이 자기네 소굴을 텅 비워 둔 채 온 힘을 다하여 쳐들어올 줄은 일찍이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맞이한 이 사태야말로 참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졸지에 나라를 지탱하지 못한 채 팔도가 유린을 당하고 삼도(三都)가 함락되고 말았으며, 그들의 칼날이 휩쓸고 지나가는 곳마다 온통 잿더미가 된 가운데 나라에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저희 군주가 이러한 때를 당하여 종묘와 사직을 위해 죽지도 못한 채 신주(神主)를 받들고 서쪽 지방으로 파월(播越)하여 중화(中華)의 경계 선상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던 것은, 천지 부모와 같은 황상(皇上)께서 분명히 아무 죄도 없는 나라가 멸망당하는 것을 차마 보고 계시지만은 않을 것이요, 난폭한 왜적이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에 대하여 크게 노하시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간이집」 제4권 「四行文錄」)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도움을 청하는 다급한 마음이 절절이 드러나 있는 문장이다. 전쟁 중에 최립은 주로 평양과 의주의 임시 조정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명나라와 교섭하는 외교문서를 작성하였다.

1593년(55세, 선조 26), 1월(음력)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송응창 등이 이끄는 4만여 대군이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일본군은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최립은 이해에 전주부윤을 거쳐 승문원 제조에 임명되었다. 또 주청사의 질정관이 되어 명나라에 방문하여 외교 활동을 하였다.

1594년(56세, 선조 27)에 주청사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가서 외교활동을 하였다. 이후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다.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종료된 뒤에도 그는 세 번이나 명나라에 가서 외교활동을 하였다. 최립은 당시 일류 문장가로 인정을 받았는데, 특히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하여 중국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한편 명나라의 고문사파(古文辭派) 문장가 왕세정(王世貞, 1526-1590)을 만나 문장을 논하기도 하였다.

1599년(61세, 선조 32)에 여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그 다음해는 용산에 거처하며 당시의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였다. 1601년에는 평양에 간이당을 지어 그곳에 거처하였다.

1603년(65세, 선조 36). 최립은 역학(易學)에 매우 심취하였다. 그 자신은 스스로 역학의 본지를 터득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조정에서⌈주역(周易)⌋ 교정의 책임을 맡기려고 하자 상소하여 외직을 얻어 그 일을 마칠 수 있게 해주기를 간청했다. 그 결과 간성(杆城)의 군수가 되었는데, 부임하자 ⌈주역⌋ 교정에 전념하고 관청의 사무는 외면하여 사람들의 원망이 잦았다. 그때마다 그는 ‘이곳에 온 것은 나의 책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책은 드디어 완성이 되었으나 통설과 다소 괴리되었기 때문에 널리 유통되지는 못하였다.(⌈광해군일기․최립의 졸기」)

1606년(68세, 선조 39)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강릉부사를 지내고 형조참판이 되어 사직했다. 그 뒤 평양에 은거했다. 1608년 이후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한양 자택에서 지내다가 개성으로 거처를 옮겨 여생을 보냈다.

1612년(74세, 광해군 4)에 사망하였다. 문집으로는 ⌈간이집⌋이 있으며, 그 외에 시를 배우는 사람들을 위해서 쓴 ⌈십가근체시(十家近體詩)⌋, ⌈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등이 있다. 역학(易學)도 깊이 있게 연구하여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 등 2권의 저서가 있다.
최립은 시를 잘 지었는데, 그의 시는 억세고 날카롭고 다음과 같이 소리가 담겨있는 특징이 있었다.

풍경소리 잦아들자 돌구멍에 새벽 샘물이 똑똑 떨어지고(磬殘石竇晨泉滴)
등불이 솔바람에 꺼지자 밤 사슴이 울고 있다.(燈剪松風夜鹿啼)

당시 사람들은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차천로(車天輅)의 시와 한호(韓濩)의 글씨, 그리고 그의 문장을 들었다. 또 이이,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윤탁연, 송익필 등과 함께 조선시대 8대 문장가로 꼽히기도 한다. 우아하고 간결한 그의 문장은 당시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왕세정 일파의 고문사파의 문장을 따랐다. 특히 그 문장은 평이한 문장체를 거부하고 선진시대의 문장을 모방한 의고문체(擬古文體)였는데, 한유(韓愈)와 비교되기도 하였다. 그의 문장은 처음에 반고(班固)와 한유(韓愈)를 본받아 따랐지만, 만년에는 구양순의 문장을 몹시 좋아하여 항상 그의 글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광해군일기․최립의 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