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공진(柳拱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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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진(柳拱辰, 1547년〜1604년)은 조선시대 종부시정(宗簿寺正), 우승지, 파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1583년 율곡이 동인에 의해서 파면을 당하였을 때, 성균관 생원들을 모아 변호를 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자신도 파면을 당하였다. 하지만 이 일로 선조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동인들이 오히려 유배를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예조정랑, 사헌부 사간 등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군량의 조달과 수송에 큰 공을 세웠으며 전란 중에 공이 큰 문신 16명 중 첫 번째로 뽑혔다.

1547년(1세)
명종 2년, 선원전(璿源殿) 참봉(參奉) 유자(柳滋)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행(李荇)의 딸 덕수 이씨사이에서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백첨(伯瞻), 호는 이탄(鯉灘),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호조 참의에 추증된 유수(柳璲)의 증손이며, 호조 참판에 추증된 유광식(柳光植)의 손자이다.

1570년(23세)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대과를 준비하였다.

1575년(28세)
이즈음 동서 분당이 심화되어 동인과 서인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서울, 경기 지역을 근거지로 한 기호학파와 영남을 근거지로 한 영남학파가 사상적으로도 대립하였다. 서인을 구성한 기호학파의 중심은 이이와 성혼이었으며, 동인을 구성은 영남학파의 중심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었다. 이에 따라 유공진은 자연히 서인에 합류하게 되었다.

1583년(36세)
성균관 생원 462명을 모아 스승인 이이·성혼의 무고를 밝히는 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유공진을 비롯한 백여명의 성균관 학생들이 과거 응시자격을 박탈당하고 유공진은 투옥되었다. 동인들은 병조판서로 있던 율곡 이이를 탄핵하였으나 주도자들이 오히려 비판을 받아 유배를 당하였다.(계미삼찬癸未三竄) 대사간 박승임(朴承任) 등 동인 측 주요 인물들이 선조의 분노를 산 결과 문책, 파직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유공진은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1년(44세)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 이해 서인 우의정 정철(鄭澈)이 세자책봉문제(建儲問題)로 파직을 당하여 강계로 귀양을 가자, 같은 당파라 하여 경원에 유배되었다.
이 당시 선조실록기록에는 사헌부에서 올린 보고서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조 정랑 유공진(柳拱辰)은 인물이 거칠고 용렬하며, 검열 이춘영(李春英)은 인물이 경망스러워 재상의 집을 드나들었으니 이들을 함께 파직시키소서.”
선조 임금은 이에 건의한 대로 처리하라고 명을 내렸다.

1592년(45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철과 함께 풀려났다. 예조정랑에 임명되었으며 세자시강원보덕을 겸하였다.

1593년(46세)
사헌부사간·사복시정·홍문관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즈음 조정은 광해군을 중심으로 한 분조(分朝, 별도의 조정)를 구성하였다. 유공진은 대신들과 함께 이를 취소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총독에게 올린 상소문의 대략 내용은 최립의 간이집에 다음과 소개되어 있다.
“삼가 살피건대, 일본은 우리나라와 그동안 관계가 서로 나빴던 것도 아니고, 서로 원망을 맺을 만한 일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에서는 자기들의 섬을 텅 비워 둔 채 군대를 총동원하여 소국(小邦, 우리나라)을 침입해서는 거의 몇 년 동안이나 화란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의 뜻이 또 노략질로만 끝내려는 것이 아니라, 기필코 우리나라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난 뒤에 우리의 땅을 병탄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수중(水中) 동물로서 육지의 해안을 따라 서식하고 있는 교룡(蛟龍)이나 악어(鰐魚)처럼 흉맹한 족속이라고나 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소국으로 말하면, 거의 2백 년 동안이나 아무 일없이 태평한 시대에 살고 있었으므로, 대비해 놓은 것이라고 해야 겨우 좀도둑의 도발을 막는 정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처럼 졸지에 지탱하지 못한 채 여지없이 패하여 나라를 잃어버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대체로 왜적이 바라는 형세가 십중팔구는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멀리 굽어 살펴 주시는 (명나라의) 황제 폐하의 신령스러운 위엄에 힘입어 대군(大軍)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듯 소방을 구원하러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평양성(平壤城)에 육박해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사이에 승리를 거두고 수복하자, 왜적이 비로소 깜짝 놀라면서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도성을 점거하고 있던 자들도 그때부터 도망갈 마음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강화(講和)하자는 주장이 빚어지게 되었는데, 사실은 그들이 마음속으로 진정 원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요, 단지 군대의 위협을 완화시켜 보려는 술책일 뿐으로서, 잠깐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힘을 길러 독기(毒氣)를 부리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략)
지금 소국의 형편으로 말하면, 팔도(八道)의 지방 어느 곳에도 밥 짓는 연기를 볼 수 없는 가운데, 겨우 살아남은 자들 역시 천 명 중에 열 사람밖에 되지 않고 백 명 중에 한 사람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두 해 동안이나 농사를 거의 망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지금에 와서도 아직 농사지을 엄두를 아예 못 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왜적의 칼날에 이미 목숨을 잃은 백성들이야 말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지금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들까지도 굶어 죽는 시체가 날이 갈수록 더욱 쌓여만 가는 가운데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장차 모두 죽게 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다시 시일을 끌며 왜적과 대치하게 될 경우, 병력을 유지하고 식량을 마련하여 자력(自力)으로 구원받을 길은 전혀 없습니다.
(중략)
오늘날 소국의 양식이 부족한 것으로 말하면, 대개 병화(兵火)가 처음 일어났을 때보다도 심각합니다. 그래서 구병(舊兵)이나 신병(新兵)을 막론하고, 소국을 구원하러 온 군대에게 어떻게 공급할 도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해에 산동(山東)의 곡식을 보내 주신다는 허락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에는 아직도 운송해 오지 못한 곡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먼 지방에서 운송하다가 혹 뒤늦게 도착한다면 제때에 조달해서 쓸 수가 없을 것이니, 우선 요동(遼東)의 제위(諸衛)와 금주(金州) 등에 비축해 놓은 양식 수만 섬 정도를 꺼내어 중국의 가까운 곳에서 소국의 가까운 곳으로 보내도록 해 주시는 것이 어떨까 하고 감히 요청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하여 얼음이 풀리기 시작할 때부터 배에 실어서 소국의 연해(沿海) 지방에 교대로 풀어 놓게 한다면, 군대가 당장 먹을 식량이 떨어지는 걱정은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다음에는 또 계속해서 대대적으로 군대와 양식을 조발(調發)해서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모등이 이미, 앞으로 몇 만의 군대와 양식이 필요할지 노야의 마음속에 이미 분명히 계책이 서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린 이상, 감히 누누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장군께서 저희들의 발언을 중하게 여겨 주시리라고 감히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바야흐로 구제할 일을 깊이 생각하고 계실 이때에 혹 한 가지라도 도움이 될 말씀을 들려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이렇게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간절히 바라는 절박한 심정을 가누지 못한 채 죽음을 무릅쓰고 두 번 절하며 말씀을 올립니다.”

1594년(47세)
홍문관 응교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양명학 신봉자 이요(李瑤)를 불러들여 그 이론을 경청하고 있음을 우려하는 의견서를 올렸다. 선조 임금이 ‘앞으로 유의하겠다’는 답변을 하였다.

1596년(49세)
사섬시정(司贍寺正), 승문원 판교 등에 임명되었다.

1599년(52세)
관동지방의 사정에 밝다는 이유로 강원도의 조도 겸 독운어사(調度兼督運御史)에 임명되었다. 이에 군량의 조달과 수송에 큰 공을 세웠다. 이후에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임명되고, 전공을 인정받아 숙마(熟馬) 한 필을 하사받았다.

1600년(53세)
비변사에서 전란 중에 공이 큰 문신 16명을 선발할 때 첫 번째로 뽑혔다. 승정원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601년(54세)
산릉도감 도청, 동부승지, 우승지 등에 임명되어 측근에서 임금을 모셨다.

1602년(55세)
동래부사로 임명되었으나 70이 넘은 부친을 봉양한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후 서울에 가까운 파주목사로 임명되었다.

1603년(56세)
세자책봉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임명되었다. 세자책봉을 위해 명나라에 갈 예정이었으나 당시 명나라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출발하지 못했다.

1604년(57세)
이해 1월에 서천(舒川)군수로 좌천을 당하였다. 이에 사임을 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4월 25일, 사망하였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유족으로 안동 권씨 부인과 두 아들, 두 딸이 있다. 첫째 아들은 현감과 호조 정랑을 지냈고, 둘째 아들은 사용(司勇)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선조 24년 1591년 윤 3월 6일 기사
최립, 간이집 제4권, 「사행문록(四行文錄)」, <고전종합DB>
정하명, 「유공진(柳拱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년
진주류씨 대종회, 「승지공 류공진」, 진주류씨 역대인물전, 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