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상(吳熙常)1763∼1833


오희상(吳熙常)                                                             PDF Download

 

1763(영조 39)∼1833(순조 33). 조선 후기의 문신.

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老洲)이다. 오진주(吳晋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제학 오원(吳瑗)이고, 아버지는 대제학 오재순(吳載純)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의 딸이다. 1781년(19살)에 그의 숙부인 예조판서 오재소(吳載紹, 1739~1811)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형 오윤상(吳允常, 1746~1783)에게 수학하였는데, 오윤상은 당시에 김원행(金元行)과 김량행(金亮行) 등으로부터 경학으로 촉망받았던 학자였다. 자라면서 육적(六籍)에 더욱 힘을 썼고, 특히 중용에 각고의 노력을 하였으며 의심나는 것은 오윤상에게 질문하여 분명해질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다.

그는 옛 성현을 스스로 기약하였고, 공부는 순서에 따라 정밀함을 다하고 침잠하여 깊은 이치를 밝히고 찾았으며, 특히 자득(自得)을 주로 하였고 헌장(憲章)을 삼가 지켰다. 그래서 천착하고 새로운 것을 내세우거나 섭렵하여 외면(外面)에 힘쓰는 것을 가장 경계하였다. 또한 학문을 하는 데는 마땅히 경학을 먼저 하고 예학은 그 뒤이며, 예의 쓰임은 더욱 일상에서의 실천이 절실하다고 하였다.

일찍이 이연평(李延平)의 ‘묵좌징심(黙坐澄心)’이라는 말을 좋아하여 간혹 눈을 감고 정좌하여 심(心)과 리(理)가 하나되는 묘리(妙理)를 체험하곤 하였다. 평소에 의리의 분변에 엄하여 천리와 인욕은 공과 사로 나뉘는 것이니 마땅히 한 칼에 두 동강을 내듯이 막힌 곳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일 조금이라도 계고(計較)한다면 이미 그 속에 빠진 것이라고 하였다.

선유들 중에 특히 이이와 김창협을 존모하였는데, 김창협에 대해서는 ‘은미한 것을 드러내어 계왕개래(繼往開來), 즉 지나간 과거의 일을 계승하고 다가오는 미래를 여는 공이 있으니 마땅히 이이와 함께 공자의 사당에서 배향해야 한다’고 하였다. 교유도 적었고 문밖의 출입도 극히 드물었으나, 사우관계에 있어서만은 적극적이어서 김량행(金亮行)․심정진(沈定鎭)․박윤원(朴胤源)․이직보(李直輔)에 대해서는 존경해서 섬겼다. 특히 민치복(閔致福)과는 우의가 가장 돈독하였는데,

“형(오윤상)을 잃은 뒤로는 오직 민치복에 의지하고 받은 도움이 가장 많았다. 그리하여 내가 아는 바로 이 리의 본체를 실제로 통견함이 있는 자는 오직 민치복 한 사람 뿐이다”

라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였다. 항상 학자들에게 먼저 명성과 실질을 분변할 것을 가르치면서

“모름지기 자기를 위하거나 다른 사람을 위하는 위기위인(爲己爲人)의 구분을 확실히 하여야만 거의 도에 들어가는데 헤매지 않을 것”

이라고 주장하였다.

특별한 사승 관계가 없는 그는 선배 학자들의 사상을 취사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이이(李珥)·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등과 이재(李縡)·김원행(金元行) 등의 성리설을 따르고, 한원진(韓元震)·임성주(任聖周)의 학설을 주기(主氣) 일면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주리(主理)·주기(主氣)의 경향을 취하여 한편으로 치우치는 두 갈래의 관점에 모두 반대하면서 불리(不離)·부잡(不雜)을 말하여 절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리(理)를 근본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또한 리와 기를 인식하는 방법에는 리로부터 기를 추론하는 것과 기로부터 리를 추론하는 두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주돈이(周敦頤)의 태극설(太極說)은 리로부터 기를 추론한 것이고, 장재(張載)의 태허설(太虛說)은 기로부터 리를 추론한 것이지만, 그 궁극에서는 한가지로 이기일체(理氣一體)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기의 혼일(渾一)한 상태를 말하면서 불리(不離)·부잡(不雜)의 양면성을 강조하지만, 리는 스스로 기에 즉(卽)하면서도 기가 아니고 형체가 없으면서도 유위(有爲)하는 묘(妙)가 있다고 하였다.
‘불리와 부잡’은 리와 기의 떨어질 수도 없고 섞일 수도 없는 관계를 의미한다. 즉 현상계는 이기가 함께 작용이지만, 그 중에서 주(主)와 본(本)이 되는 것은 리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이기를 합하면서 리를 주로 하는 사상은 대체로 이재(李縡)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사단(四端)·칠정(七情)에 관해서는 김창협의 학설을 적극 지지하고, 성(性)에만 본연(本然)과 기질(氣質)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심(心)도 본연과 기질로 나눌 수 있으며, 또한 기에도 본연이 있는데 그 본연의 자리를 신(神)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서는 인심·도심이 성(性)의 올바름에 근원하거나, 혹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나는 차이가 있지만, 모두 발동한 뒤를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마음이 감응하지 않을 때 진체(眞體)의 근본은 담일(湛一)하고 영소(靈昭)·활화(活化)하여 리와 합치된다고 하면서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의 입장을 말하였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는 사람(人)과 사물(物)은 근본적으로 리가 같을 뿐만 아니라 신(神)도 동일하다고 전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동일하지 않게 나타나는 이유는 형기(形氣) 때문이라 하여, 호론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반대하고, 낙론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일원분수(一原分殊)에 의하여 설명하였다.

오희상과 교유한 적이 있는 홍직필은 오희상의 학문과 사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즉

“마음을 비우고 뜻을 너그럽게 하여 자기의 견해를 세우지 않고 글로 인하여 의(義)를 따랐다.……또한 세상의 유학자들이 주기(主氣)의 의론이 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고 오류를 전파하여 장차 이단의 근거가 되어 리가 기의 주인이 되는 뜻이 어두워졌다. 선생은 ‘리’자를 발휘하여 정자와 주자 이래로 이 이치를 드러내어 힘들게 부식(扶植)한 참 이치가 이에 다시 밝혀졌으니 그 공은 성대하다고 이를 수 있다.……조예가 이른 것이 탁연히 400년 오도의 결국이었다.”

홍직필은 오희상의 학문을 400년 유학의 결국(結局)이라는 찬사로써 표현하였으며, 문인인 유신환(兪莘煥)은

“선생의 학문은 무적무막(無適無莫)하여 이미 높고 또한 낮으며 이미 넓고 또한 간략하였다. 선생의 도는 불리부잡(不離不雜)하였으며 이미 나타나고 또한 감추었으며 이미 흩어졌고 또한 합하여 심중에 쌓인 것이 바깥으로 발하여 아래에서 배워서 위에 도달했다”

라고 평가하였다.

한편 정치적 경력을 보면, 1800년에 서용보(徐龍輔)의 추천으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장릉참봉(長陵參奉)·돈녕부참봉·한성부주부·황해도도사·사어(司禦) 등을 지낸 뒤, 1818년 경연관·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광주(廣州)의 징악산(徵嶽山)에 은거하였다. 이 동안 지평(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승지 및 이조·형조·공조의 참의, 1829년 세손부(世孫傅), 1832년 찬선(贊善) 등에 임명되었으나 환로는 그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기에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에 신하로써 임금을 섬김에 몸을 지키는 것이 최상이고 보은(報恩)은 다음이라고까지 말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는 특히 양모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의 권고에 힘입은 것이었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이황과 이이의 양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절충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며, 주리(主理)·주기(主氣)의 양설에 대해서는 주리설을 옹호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독서수기(讀書隨記)⌋․⌈노주집(老洲集)⌋ 등이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인데, ‘道德博文曰文, 主義行德曰元’이라는 시법(諡法)에 의거한 것이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매산집(梅山集)⌋, ⌈한국유학사(韓國儒學史)⌋(배종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