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중(閔鼎重, 1628-1692)


민정중(閔鼎重, 1628-1692)                                 PDF Download

 

민정중은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다. 할아버지는 경주부윤 민기(閔機)이고,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민유중(閔維重)이 동생이다.

1649년(인조 27)에 정시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으로 벼슬에 나가, 예조좌랑·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었다. 직언(直言)으로 뛰어나 사간원정언·사간에 제수되고, 홍문관수찬·교리·응교,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동래부사를 지냈으며, 전라도·충청도·경상도에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소(疏)를 올려 인조 때 역적으로 논죄되어 죽음을 당한 강빈(姜嬪)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강빈이 인조 때에 죄를 받아 폐출되어 죽고 그 자녀는 어린데 모두 제주도로 귀양을 갔으므로 백성들이 안타깝게 여겼다. 신료 중에 감히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못했는데 홀로 맨 먼저 논하였다. 다른 신료들이 깜작 놀랐지만 현종이 그 충직한 것을 알고 죄주지 않았다.

소현세자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왕위에 오르자 14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동생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을 배웠으며 1645년 귀국할 때 천문, 과학, 종교에 관한 많은 서적 등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인조 및 조정 중신들의 반감을 샀고, 이에 인조를 비롯한 조정의 냉대를 받았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병에 걸렸다가 귀국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울러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해야 하는 법을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더욱이 세자빈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세자빈 강 씨를 사가로 폐출시킨 뒤 두 달 뒤 사사했다. 또 소현세자의 세 아들에게도 강빈의 죄를 물어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다. 이 가운데 두 아들은 제주도에서 풍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민정중은 이어서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아버지가 죽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상복을 벗은 뒤 사간원대사간으로 나아갔다. 그 뒤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이조참판·함경도관찰사·홍문관부제학·사헌부대사헌을 거쳐, 1670년(현종 11) 이조·호조·공조의 판서, 한성부윤(漢城府尹)·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등을 역임하였다.

삼사에 재직할 때는 청의(淸議)를 힘써 잡았고, 대사성에 있을 때는 성균관의 증수(增修)와 강과(講課)에 마음을 다해 선비 양성의 효과가 매우 많았다. 또한, 함경도관찰사로 나갔을 때는 그곳의 유풍(儒風)을 크게 일으켰다.

1675년(숙종 1)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허적(許積)·윤휴(尹鑴) 등 남인이 집권하자 서인으로 배척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고, 1679년 장흥(長興)으로 귀양갔다. 이듬해 경신환국으로 송시열 등과 함께 귀양에서 풀려 우의정이 되고, 다시 좌의정에 올라 4년을 지냈다. 이때 호포(戶布) 등 여러 가지 일을 실행하려 했으나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반대에 부딪혔다.

1685년부터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판사(判事)로 물러앉아 국왕을 보필하였다. 그러던 중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자 노론의 중진들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실각하자 관작이 회복되어 양주로 옮겨 장례를 치르고, 뒤에 여주로 옮겨졌다.

 

숙종실록⌋ 18년 조에 민정중의 졸기가 실려 있다. 민정중의 대략을 가늠할 수 있다.

“전(前) 좌의정(左議政) 민정중(閔鼎重)이 벽동(碧潼)의 적소(謫所)에서 졸(卒)했는데, 65세였다. 민정중은 자(字)가 대수(大受)로 사람됨이 영특(英特)하고 강직하여 굴하지 않았으며 예법으로 자신을 신칙하였다. 일찍이 괴과(魁科, 문과 장원)에 올랐고, 극력 청의(淸議)를 붙들었으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제현(諸賢)이 가장 중시하는 바가 되었다. 국자감(國子監)의 장관(長官)이 되어 선비들을 조성해 내는 데에 매우 공효가 있게 되므로, 당시에 정엽(鄭曄) 이후의 제일인 사람이라고 했다.

그 뒤 다른 관직에 뽑혀서도 그대로 겸임하고 있고 체직되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 교도(敎導)하여 선비들의 풍습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관북(關北)을 안찰(按察)할 적에 북쪽의 풍속은 오로지 무예(武藝)만 숭상하고 문사(文事)에는 소홀하여 진실로 친상사장(親上死長,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상(上)에 나와 있는 말인데, 곧 친상(親上)은 평소에 윗사람을 친애하는 것이고, 사장(死長)은 위난(危難)을 당했을 적에 어른을 위해 죽는 것임) 하는 의리에 어두우므로, 비록 재질과 능력이 강건(强健)하여도 쓸 데가 없었다. 드디어 자신이 솔선시범(率先示範)하며 선비들의 교화(敎化)를 크게 천명(闡明)하므로, 얼마 되지 않아서 빈빈(彬彬, 문채와 바탕이 함께 갖추어져 찬란한 모양) 해져 볼 만하게 되었다.

그 뒤에 윤휴(尹鑴)와 허적(許積)이 나라의 일을 맡아 보게 되면서 남쪽 변방으로 귀양을 갔는데 비록 배척받는 가운데 있었지만 여망(輿望)은 더욱 높아져서 오늘날의 진요옹(陳了翁)이나 유원성(劉元城) 같은 사람이라고 일컬어졌다. 경신년의 경화(更化, 고쳐서 새롭게 함) 때에는 제일 먼저 태부(台府, 의정부)에 들어오므로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 있는 몇 해 동안 한결같이 임금의 덕을 바로잡는 것과 선비들의 공론을 붙잡기에 주력하고, 여타의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만년(晩年)에는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반하는 것을 보자 김수항(金壽恒)과 함께 입대(入對)하여 옳음과 그름을 구별하여 밝히므로 세상의 도의(道義)가 더욱 힘입는 바가 있게 되었다. 기사년의 변(變, 기사환국) 뒤에는 뭇 간신들이 기필코 죽이려고 하면서도 오히려 돌아보며 두렵게 여기는 바가 있어 실행하지 못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였는데, 뒤에 관작(官爵)을 복구하고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고 하였다.”

 

이재가 지은 비명이 ⌈국조인물고⌋에 실려 있는데, 이 또한 민정중의 대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공은 사람됨이 엄준(嚴峻)하고 광명(光明)하며 그 학문은 경(敬)을 첫째로 삼되 감언(敢言)을 좋아하며 훌륭한 행실을 닦아서 사대부를 이끌었다. 처음에 진사(進士)로서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한 것이 22세 때인데, 이때 효종이 새로 즉위하였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고 예조 좌랑(禮曹佐郞)ㆍ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로 옮겼는데, 직언(直言)이 있으면 임금이 아름답게 여기고 삼갔다. ……

일찍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지기(志氣)가 매우 날카로우시나 한결같이 확고한 실속이 없고, 규모가 크기는 하시나 거꾸로 되어 자주 바꾸는 과실이 있으며, 깊은 궁궐에 오래 계시어 마음 편히 지내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시니, 근본을 세워서 정치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고 감사하였다. ……

의정부의 천거로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나갔다. 동래부는 왜인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는데 왜인은 본디 교활하고 사납거니와, 약속을 범하면 공이 한결같이 법대로 처리하므로 왜인의 원한이 심하였다. 일찍이 연음(宴飮) 때에 칼을 뽑아 공의 좌석에 던졌으나 공이 움직이지 않으니, 모두 관문(館門)을 함부로 나가는 것을 공이 군사를 시켜 막았는데, 왜인이 그 뒤로는 두려워하여 감히 공을 범하지 못하였다.”

저서로는 『노봉문집(老峯文集)』·『노봉연중설화(老峯筵中說話)』 등이 전하며, 글씨로는 「우상이완비(右相李浣碑)」·「개성부유수민심언표(開城副留守閔審言表)」·「개심사대웅전편액(開心寺大雄殿扁額)」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노봉문집⌋은 12권 6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 등과 주고받은 서간에서는 성리학에서 의심나는 대목을 문답식으로 토론하고, 당시 당쟁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시폐 등을 역설해 저자의 정치적인 사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당시 당쟁의 핵이었던 예론(禮論)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잡저 가운데 「임진유문」은 임진왜란 때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 정발(鄭撥)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활동상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까지 자세하게 묘사해 그들의 충절을 현양하였다.

연행일기」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동안의 일기로 우리나라에서 청나라까지 가는 노정을 명확하게 표시하였고 중국의 풍속과 문화·제도·생활 상태 등 변모해가는 대륙의 정세를 하나하나 묘사하였다. 이 「연행일기」는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 견주어 볼만한 작품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보다 먼저 쓰였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국역국조인물고
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