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李縡, 1680-1746)


이재(李縡, 1680-1746)                                           PDF Download

 

재는 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문신이다. 영조 연간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에서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며, 윤봉구(尹鳳九), 송명흠(宋命欽),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심정진은 「제미호선생문(祭渼湖金先生文)」에서 사도의 도통을 논하면서 중국에서는 맹자 이후로 이정과 주자를 들고 동방에서는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을 이어서 도암 이재를 들었다. 그의 문하에 미호 김원행, 역천 송명흠, 녹문 임성주 등 출중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숙종 경신년(1680) 9월 28일에 태어났다. 임신 중에 민부인이 달이 수중에 드는 꿈을 꾸었는데 광채가 방에 가득하였다. 5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중부(仲父) 충숙공이 가르침을 심히 부지런히 하셨고 안으로는 민부인의 인도가 또한 엄격하였다. 일찍이 베틀에 임할 때 실을 짜서 쌓아야만 한 필을 이룬다고 하여 학문도 중간에 멈춰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니 명심하여 실추하지 않고 육예(六藝)와 학업을 일찍 성취하였다.

1702년(숙종 28)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가주서·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어「단종실록」 부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0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문학·정언·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709년 헌납·이조좌랑·북평사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1711년 이조정랑으로 승진, 이어 홍문관의 수찬·부교리·응교·필선·보덕 등을 지내고 집의로 옮겼다. 1715년 병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을 때「가례원류(家禮源流)」의 편찬자를 둘러싸고 시비가 일자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공격하였다. 이후 노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721년(경종 1) 예조참판, 강화부유수,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산릉도감제조에 임명되어 토목의 일을 감독하여 다스리고 그 공로로 가의대부에 가해졌으며 대사헌·동지춘추관사를 겸하다가 실록청당상에 임명되었고, 이조참판에 제수되면서 실록청도청당상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나 소론의 집권으로 삭직되었다.

신축년(1721) 겨울에 경종이 왕세제인 연잉군(훗날 영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소론 측에서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대신들이 백료를 이끌고 명을 거두기를 정청(庭請)했는데 참여하지 않고, “우리 왕께서 만일 병이 없고 후손을 낳을 바람이 있다면 진실로 후사를 미리 세울 필요가 없지만 이미 병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참결(參決, 세제인 영조에게 국정에 참여하여 결정하라는 명)하라는 명을 하였으니 다만 마땅히 받들어야 할 것이지, 어인 일로 억지로 다투어 論執하는가?”하였다. 얼마 후에 신임옥사에서 중부 충숙공 이만성(李晩成)이 조옥(詔獄)에 유폐되어 죽자 예로써 염장(斂葬)하고 인제 골짜기로 들어가 더욱 경전에 힘써 날마다 과정을 두었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해 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 되었으며,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1740년 공조판서, 1741년 좌참찬 겸 예문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여러 해 풍비(風痹)를 앓다가 병인년(1746)에 화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치료에 좋겠다고 하여 이에 가까운 고을의 벗들에게 편지를 써서 이별하였다. 발행(發行)하여 광주에 이르러 병이 심해져서 낙생촌사(樂生村舍)에서 영명했는데, 이때가 10월 28일이었다.

항상 율곡의

‘한 터럭이라도 성인에게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마치지 않은 것이다.’

라는 말을 애송하고

“율곡은 나의 스승이시다.”

했다. 율곡의 明通하고 쇄락한 운치에 스스로 묵묵히 계합한 바가 있었다.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일찍 아버지를 잃은 것을 애통해 하여 모부인을 섬김에 깊은 사랑이 뜻을 봉양하는 효성에 드러났다. 거상(居喪)에 미쳐서는 채소만을 먹고 흡혈(泣血)하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예를 다하여 노쇠한 나이라고 하여 스스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상례를 마치고 나서도 여전히 날마다 선영에 올라가 둘러보며 슬프게 살펴보았다. 말년에는 행보를 하지 못해 매번 견여(肩輿)를 타고 집 뒤의 작은 언덕에 올라가서 묘소를 바라보고 부복하였는데 그 언덕을 첨경대(瞻敬臺)라고 불렀다.

예학(禮學)에도 밝아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암집(陶菴集), 도암과시(陶菴科詩), 사례편람(四禮便覽), 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영조 을미년(1775)에 정조가 서무를 대신해서 들을 때 특별히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하사하여 문정(文正)이라고 하였다.

오희상(吳熙常, 1763-1833)이 이재의 묘표를 짓고 그 마지막에 총괄하여 다음과 같이 밝혀두었다.

“적이 논하건대 유자(儒者)의 일은 세 가지가 있으니 바른 진퇴, 정밀하게 발휘함, 크게 창명(倡明)하는 일이다. 셋이 갖추어진 연후에 비로소 성덕(成德)의 대현에 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선생은 비록 구학에서 뜻을 감추고 은거하였으나 종국(宗國)에 대한 근심은 간절하여 출사와 은거, 말과 침묵이 시대의 오륭(汚隆)에 관계되었다. 의리가 어두워지고 윤리강상이 서지 않으면 차라리 죽더라도 자정(自靖, 스스로 의리에 안주함)하여 후회하지 않았다. 민락(閩洛)이 이미 멀어 미언(微言)이 손상되자 이기와 심성에 대해 어지럽게 쟁송이 모이니, 이에 본원을 연구하고 진체(眞諦)를 지시하여 여러 어지러움을 꺾고 뭇 사람들의 미혹을 열어주었다.

이에 사도(師道)를 높이 들어 가르침을 널리 열고 순순히 인도하사 문채를 성대하게 일으켜 모범은 당시에 성행하였고 공리는 무궁한 후세에 미쳤으니, 체용을 겸전하고 중선을 다 갖추어 진실로 명세(命世)의 유종(儒宗)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런즉 선생은 비록 조정에서 예복을 입고 바르게 서서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초심은 이루지 못했지만 필경에 성취한 바는 이와 같이 탁연하니 과연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옛날 장경부(張敬夫)가 이르길 ‘회옹부자(晦翁夫子)가 한가한 생활을 하면서 학업을 궁구한 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일 것이다.’ 하였으니 거의 먼 후세에도 부절을 합친 듯하다. 오호라 성대하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김동준, 「도암 이재의 삶과 시문학」,「한국한시작가연구」 14호, 2010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