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로(尹東老)

윤동로(尹東老)                                                         PDF Download

 

윤동로(尹東老, 1550년〜1636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공조좌랑, 울산판관,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율곡 이이(李珥)에게 글을 배웠다. 23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45세 때 관직에 있으면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고 회의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삼도수군통제사의 종사관에 다시 기용되었으나, 사사로이 역마(驛馬)를 사용하였다는 이유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탄핵을 받았다. 또 54세로 울산판관에 재직하고 있을 때는 백성들을 탄압한다는 이유로 처벌되기도 하여 관직 생활이 순탄치 못하였다.

1550년(1세)
명종 5년에 생원 윤언성(尹彦誠)과 조우신(趙又新)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자는 기중(期仲), 호는 수심당(水心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윤수천(尹壽千), 할아버지는 윤임형(尹任衡)이다. 율곡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73년(23세)
선조 6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595년(45세)
선조 28년 사과(司果)로 재직하고 있을 때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96년(46세)
공조좌랑에 임명되었다.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고 공식 회의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6월 11일자로 사헌부에서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탄핵 사유가 적혀있다.
“공조 좌랑 윤동로(尹東老)는 【단정하지 않은 벗을 사귀고 멋대로 처신함】는 자신이 낭관(郞官, 육조六曹의 5・6품 하급 관원)의 반열에 있으면서 일이 많은 이 때에 허락도 받지 않고 사사로이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공식 회의 때마다 앓는다고 핑계하였으니, 파직하도록 명하시기 바랍니다.”

1597년(47세)
일본군이 다시 침략을 해왔다.(정유재란) 이때 그는 삼도수군통제사의 종사관에 다시 기용되었다. 하지만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탄핵을 받았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 해 6월 19일자(음력) 지평 남이신(南以信)이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4도 도체찰사(四道 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장계를 보건대, 통제사의 종사관 윤동로가 개인 일로 노복(奴僕)을 내보낼 때 역마(驛馬)를 지급하기까지 하였고, 도원수의 종사관 김택룡은 작미(作米)하는 것을 감독하기 위해 전라도에 있는데, 해당되는 복마(卜馬) 이외에 외람되게 역의 대마(大馬) 4필을 거느렸습니다. 요즘처럼 각역이 심하게 파괴된 때를 당하여 규정을 어기고 물의를 일으킨 점이 이처럼 극에 이르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윤동로와 김택룡은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조사하소서.”

1604년(54세)
울산판관에 재직하고 있었을 때 백성들을 심히 탄압한다는 이유로 처벌되었다.

1629년(79세)
인조 7년,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파흥군(坡興君)에 봉해졌다.
이기룡(李起龍)이 그린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에 윤동로가 참석한 모습이 보인다. 그는 이해 6월 5일(음력)에 숭례문(崇禮門) 앞에 있던 홍첨추(洪僉樞)의 저택에 열리는 기로회에 참석하여 장수를 기원하는 술상을 받았다. 이 때 참석자들은 윤동로를 포함하여 이인기(李麟奇), 이유간(李惟侃), 이호민(李好閔), 이권(李勸), 홍사효, 강인(姜絪), 이귀(李貴), 서성(徐㨘), 강담(姜紞), 유순익(柳舜翼), 심논(沈惀) 등 모두 12명이었다.

1636년(86세)
인조 14년에 사망하였다. (일설에 1635년에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참고문헌>
선조실록 선조 29년 1596년 6월 11일자 기사
선조실록 선조 30년 1597년 6월 19일자 기사
김용덕, 「윤동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