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이학


소라이학

 

소라이 : 궁금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율곡: 어떤 것인지요?

소라이: 고향이 경기도 파주인지요, 강원도 강릉인지요. 태어나신 곳이 강릉이라고 하셔서요.

율곡: 강릉은 외가입니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친정집이지요. 지금은 오죽헌이 자리 잡고 있는 곳입니다. 그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지요. 본가, 즉 아버님 고향은 파주입니다. 지금의 경기도이지요.

소라이: 선생님은 외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한참동안 성장을 하셨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게 된 것인지요? 본가에 가지 않으시고.

율곡: 조선시대에 유학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조선도 독자적인 풍속이 많았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을 외가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어머니 신사임당의 집안은 비교적 안정이 되어 있었고 어머니의 아버지, 그러니까 저희 외할아버지 신명화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유학에 조예가 깊은 분이셨습니다. 아들이 없고 딸들만 있었는데 딸들에게도 유학을 적극적으로 가르치셨지요. 제가 말씀드린 유학은 성리학입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도 공자, 맹자, 주자를 어려서부터 배우신 분입니다. 저는 사실 그런 어머니에게 글과 유학을 배웠습니다.

소라이: 아, 어머님에게 글과 유학 경전을 배우셨다니 역시 한국에서 신사임당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있었군요.

율곡 : 어머님은 그림도 잘 그리셨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고향이?

소라이: 저는 도쿄, 그러니까 에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아버지가 에도 막부에 출근하는 의사였습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쇼군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사들 중 한사람이셨지요. 그래서 어려서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14세 때 까지는요. 그때 저는 하야시 라잔(林羅山) 가문에서 가르치는 정통 성리학을 배우기도 하였지요.

율곡: 그러다가 부친과 함께 유배를 가신 것이 군요.

소라이: 아니요, 엄밀히 말씀드리면 부친과 함께 유배를 당한 것은 아니고요. 부친이 쇼군의 미움을 받아서 부친만 유배를 당한 것이지요. 그런데 가족들 모두를 데리고 유배를 가신 것이지요. 다행히 유배지가 어머니 고향이어서 생각보다는 자유스럽고 편하게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유학에 심취해서 좀 더 깊이 유학을 공부할 수 있었지요.

율곡: 선생님은 일본유학사에서 고문사학파라고 하는 아주 독특하고 독창적인 학파를 세우셨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상세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고문사학파는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상사에서도 매우 주목할 만한 학파입니다.

소라이: 독특하다는 점은 인정을 합니다만, 중국과 조선에서 깊이 연구한 성리학에 대한 깊이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철학적, 추상적인 이론에는 깊이가 없는 것이 제 학문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율곡: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조선에서 최고의 학자그룹에 속한 제 후배학자 다산 정약용도 선생님의 고문사학을 받아들이고 선생님의 학문에 감탄을 한 바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고문사학을 일본의 사상사에서, 즉 일본의 어떤 학문적인 맥락에서 제시하신 것인지요?

소라이: 먼저 고문사학이라는 이름부터 소개를 하겠습니다. 고문사학(古文辭學)이란 말 그대로 옛 글(文)과 단어(辭)를 중시하는 학문입니다. 그러한 옛글과 단어를 잘 연구해서 공자, 맹자를 연구하고 고대의 유학을 연구하자는 학문입니다. 성리학, 그러니까 주자가 만든 학문인 신유학은 비판하지요. 가짜 학문이라고.

율곡: 아, 그런 입장이군요. 그럼 그러한 주장은 갑자기, 하루아침에 선생님이 독자적으로 주장하게 된 것인지요?

소라이: 아닙니다. 에도시대에 그런 주장을 편 사람들이 저를 포함해서 3명이 있었습니다. 거의 동시대에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지요.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1627-1705)라고 하는 학자,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1622-1685), 그리고 제가 그런 주장을 하였습니다. 우리 3사람을 묶어서 고학파(古學派)라고 하고 고학파 3걸이라고도 부릅니다.

율곡: 고학파란 ‘옛날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인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옛날 학문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지요. 고학파가 말하는 옛날이란 바로 공맹시대, 즉 한나라 이전의 옛날을 말합니다. 그 이후 당나라, 송나라 시대의 유학사상은 부정합니다. 주로 주자학을 부정하지요.

율곡: 계속 설명해보시지요.

소라이: 고학파들이 서로 만나서 그런 학문을 하자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지요. 저는 사실 선배 학자인 이토 진사이하고 사이가 썩 좋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실 저 혼자 그분을 좋아하고, 싫어한 것이지만요.

율곡: 어떤 일이 있었는가요?

소라이: 1704년, 제가 39세 되던 해였습니다. 혼자 공부를 하다가 의심난 곳이 생겨서 이토 진사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사실 대선배님이지요. 당시 진사이는 78세였습니다. 저는 편지를 써 보내놓고 줄곧 그 분의 답장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결국 끝내 답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사이 선생’이 편지를 받고도 자신을 무시하여 답장을 해주지 않는다고 분개하며,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저로서는 몹시 큰 상처였지요. 물론 진사이의 책임은 없습니다.

율곡: 왜요?

소라이: 사실 나중에 알고 보니 진사이 선생은 제가 편지를 보낸 그 다음해에 사망했습니다. 제가 편지를 보낼 당시 이미 그분은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진사이가 사망한 후에 그의 아들 이토 토가이가 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제 편지를 자기 아버지 유고집에 실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몹시 분개했습니다. 답장도 안 해주고, 무시했으면서도 유고집에는 실었으니 너무도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 뒤부터 저는 진사이를 맹렬하게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사이를 비판하는 제 문장에 뭔가 진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그런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하

율곡: 진사이의 학문하고 선생님의 고문사학은 학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요?

소라이: 예, 같은 고학파라도 진사이의 학문은 고의학(古義學)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그런 고의학을 고대 문장인 ‘육경(六經)’에 대한 무지와 중국 고대사회에 대한 무지가 만들어낸 학문이라고 비판합니다. 진사이는 ⌈논어⌋ ⌈맹자⌋에 의존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칩니다. 저의 고학(古學), 즉 고문사학은 ‘육경’을 중시하고 그 ‘육경’에 근거하여 학문을 합니다. 육경이란 고대 선왕(先王)의 사적을 옛날의 말, 즉 고문사(古文辭)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 기록으로 공자의 ⌈논어⌋와 ⌈맹자⌋를 읽는 것이지요.

율곡: 명나라에도 고문사학파가 있었지요? 방법이나 지향은 다소 다른 것 같습니다만.

소라이: 그렇습니다. 사실 저의 고문사학은 명나라 고문사학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특히 명나라의 이반룡(李攀龍)과 왕세정(王世貞)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명나라 때 고문사를 주창하고, 진한시대와 그 이전 시대의 문장을 연구하여 시와 문장을 썼습니다. 이들은 당나라 이전의 서적만을 읽고, 그 언어 그대로 모방하여 시문을 쓰자고 했지요.

율곡: 그렇지요. 그런데 나중에 조선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조선의 유학자들은 선생님이 왜 그런 사람들의 방법을 배웠는지 궁금하다고 했지요. 왕세정과 이반룡은 일류급의 문장가가 아닌데, 그들에게 선생님이 방법을 배웠다고 하니 결국 선생님도 별로 훌륭한 인물은 못될 것이라고 하였지요. 하하.

소라이: 하지만 저는 그런 왕세정과 이반룡에게 몹시 감동을 느껴,

“나는 하늘의 은총을 입어 이반룡과 왕세정의 책을 읽고 비로소 고문사라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하늘의 계시와도 같이 매우 중시하였지요. 저는 그들에게서 문장 연습의 방법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대 문장을 연구하여 고전 해석을 하는 방법까지 확대 발전시켰습니다. 그런 지식을 가지고 고대의 정치와 제도, 나아가 사상을 연구하는 아이디어를 얻었던 것이지요. 옛글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옛 도를 규명해야한다는 것이 제가 제창한 고문사학의 핵심적인 주장입니다.

율곡: 흥미로운 방법이군요. 우리 조선에서는 그런 분야의 학문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추상적인 이론과 도덕을 중시하는 성리학 일변도였지요.

소라이: 제 생각으로 고대 성인의 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옛날의 말(古文辭)을 아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말이란 시간에 따라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의 말로 고전을 이해한다면 고전의 참된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율곡: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소라이: 그런 입장에서 육경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옛 제도와 문물을 서술하는 문장의 보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육경을 세밀하게 읽어 거기에 쓰인 말들의 용법에 대해 익히고 또 고대의 구체적인 제도에 관한 지식을 얻은 후에 논어에 나아가야 비로소 공자의 참된 뜻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율곡: 그러면 그러한 방법론으로 유학을 연구하시고, 그것으로 성리학을 비판하시는 것이군요.

소라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학문은 오늘날 학문 기준에서 본다면 정치학에 가깝지요. 주자는 도덕을 잘 닦으면 정치가 잘 다스려진다고 주장합니다. 성리학자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런 주장은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주자학에서는 위정자가 도덕적으로 탁월하다면 천하국가도 잘 다스려진다고 하는데, 저는 위정자가 가지고 있는 주관적, 심정적인 도덕보다도 그의 정치적인 능력과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율곡: 지금 말씀하시는 부분은 우리 조선의 학자들과 많이 다르군요.

소라이: 저는 위정자가 도덕적으로 탁월한 행위에 마음을 쓰는 것은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더 잘 복종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위정자가 정말 도덕적으로 훌륭할 필요는 없습니다.

율곡: 나중에 마루야마 마사오라고 하는 일본의 학자는 선생님의 그 주장을 매우 극찬하여 정치와 도덕이 완전히 분리되어, 도덕의 세계로부터 독립된 정치의 세계가 발견되었다고 지적하기도 하였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러한 주장을 전개하면서 저는 일본 에도시대 의 유학자들을 대거 저의 편으로 끌어 들일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진사이학의 몰락을 유도한 것이지요.

율곡: 일본 에도시대 중엽에 일본 사상계의 주류로 떠오르신 것이지요. 그러나 그 때문에 막부에서는 선생님의 학문을 경계하고, 결국 이단을 금지한다는 정책을 발표하게 되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막부의 ‘관정이학(寬政異學)의 금(禁)’ 정책에 따라 급격히 저의 고문사학파는 세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율곡: 어떻게 갑자기 그런 일이 발생했지요?

소라이: 사실 1790년에 단행된 이단(異端) 금지의 정책은 전국적인 것이 아니고 당시 하야시 라잔의 집안에서 운영하고 있던 학당에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하야시 집안의 학당이라고 하지만 그 집안의 위상이 막부에서 유학과 교육을 담당하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율곡: 하야시 집안의 학당이 당시 공립이었는지요?

소라이: 거의 공립이나 마찬가지였지요. 막부에서 세운. 그 집안사람들은 모두 공무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막부에서 급료를 주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막부와 함께 연합하여, 지방의 각 번에 학당을 설치하게 하여 여 정통 성리학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막부에서 우리 고문사학파를 이단으로 판단하고, 선포한 순간 우리 학파는 순식간에 세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 학자들이 학당의 교사로 취직하기 위해서는 정통 주자학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지요. 뿐만 아니라 막부 내의 관료들도 정통 주자학을 배우는 것이 유리하였기 때문에 이래저래 우리 학파는 그 기운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율곡: 일본의 유학사상사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군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참고로 저희 학파가 몰락한 뒤에 국학파가 등장했습니다. 저희 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국학파는 제가 주장한 고문사학의 방법론을 중시했습니다. 즉 고대 문장에 나온 단어나 문장의 참뜻을 중시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 후대에 집필된 문장을 해석하는 방법을 중시한 것이지요. 단지 저는 중국의 문장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국학파들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의 고대 문장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다릅니다.

율곡: 아,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고문사학과 국학은 일맥상통한 점이 있군요.

소라이의 무사 개혁안


소라이의 무사 개혁안

소라이: 선생님이 조선의 군대 상황과 개선책을 자세히 소개를 해주셨으니 저도 제가 ⌈정담⌋에서 제시한 군대 개선안을 조금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율곡: 예, 참 궁금한 부분입니다.

소라이: 사실, 저의 개혁안에는 군대의 이야기를 모아서 해둔 것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선생님처럼 ‘군정의 개혁’을 별도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일본은 사회전체가 군대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율곡: 사회 전체가 군대조직이라니요?

소라이: 예, 일본에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무사, 농민, 기술자, 상인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무사는 바로 군인입니다. 사회 전체 구조가 이렇기 때문에 별도의 군대가 없다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율곡: 우리 조선에서 사농공상은 글 읽는 선비, 농민, 기술자, 그리고 상인인데 많이 다르군요. 그리고 조선에서 군대는 별도로 존재하지요.

소라이: 제가 제출한 ⌈정담⌋은 모두 4권으로 이루어졌는데, 제1권은 다음과 같습니다.

1-1. 국가를 다스리는 근본적인 방법
1-2. 에도 시가지와 무사 거주지에 대한 관리
1-3. 계약직 하인의 관리
1-4. 여행자의 체류에 대한 관리
1-5. 호적
1-6. 여행증명서
1-7. 실직한 무사와 수도승의 관리
1-8. 기녀, 배우, 그리고 거지의 관리
1-9. 세습 하인
1-10. 무사들의 생활방식을 바꿔야한다
1-11. 해상 교통의 관리

여기에서 구태여 군정이라고 말을 할 수 있는 부분은 무사를 언급한 1-2와 1-7, 1-10입니다. 사실은 다른 부분도 무사와 관련된 것들이 많습니다만. 참고로 제2권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2-1. 경제 정책의 중요성
2-2. 조급한 풍습을 바꿔야 한다
2-3. 예법의 제도가 없다
2-4. 막부의 재정
2-5. 영주들의 빈곤을 구제하는 방법
2-6. 무사들의 빈곤을 구제하는 방법
2-7. 물가 문제
2-8. 금은 수량의 감소
2-9. 금전의 대차 거래
2-10. 예법 제도
2-11. 무가의 미곡 저장

이중에서 2-6, 2-11이 무사들과 관련이 있지만 다른 부분 예를 들면 2-2, 2-7, 2-10 등도 무사와 관련된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결국 일본 사회는 무사를 빼고는 성립이 안 되는 것이지요. 모든 사회가 말하자면, 좀 극단적인 표현일 수 있으나 ‘군대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곡: 구체적으로 한 부분을 들어서 소개를 해주시면 선생님의 설명을 더 잘 이해를 할 수 있겠습니다만.

소라이: 그렇게 하지요. 차분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10의 ‘무사들의 생활방식을 바꿔야한다’는 부분을 설명하겠습니다.

율곡: 알겠습니다.

소라이: 에도시대는 1603년에 성립이 되어 당시 제가 정담을 정리하던 1727년경에는 사회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건국의 기상은 사라지고 나태해지고, 사회가 평화로워지면서 사치풍조가 만연하게 되었지요. 즉 무사들의 기백도 사라지고, 그들의 생활이 궁핍하게 되었지요. 원래 무사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르던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무사로서의 신분을 유지하고 막부에서 녹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각종 군사와 관련된 일을 맡았지요. 그리고 관리의 일을 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무사들은 농민과 상인들, 그리고 기술자들이 하지 않은 일을 했지요. 조선에서 관리들 그리고 의사, 학자들의 일을 무사들이 했습니다.

율곡: 무사들의 역할이 의외로 컸군요.

소라이: 그런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궁핍해져 갔습니다. 정부에서 주는 급료는 정해져 있는데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은 자꾸 비싸진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거의가 에도에 집중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막부는 그들을 해산시키 않고 에도의 성 주변에 머물면서 에도 성을 지키고, 에도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 있는 영지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어 다스리게 했습니다. 영지에서 나는 산물이 그들의 월급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영지를 에도에서 살면서 운영을 했지요. 말하자면 그들은 봉건영주이기도 했습니다. 제 개혁안은 그들의 생활을 개선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율곡: 아, 그렇군요.

소라이: 저는 근본적으로 그들 무사들을 지방의 영지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궁극적으로 무사들을 영지에 속박해 두지 않고서는 완전한 관리가 불가능하다고 보았지요. 그리고 무사의 도(道)를 다시 일으키고 세상의 허황된 사치를 억누르며 무가의 빈궁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 외에는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곡: 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요?

소라이: 우선 그들의 생활방식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에도 시가지에 모여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마치 여행자와 같은 생활을 해야만 했지요. 왜냐하면 의식주를 비롯하여 젓가락 하나라도 필요한 물건은 모두 사두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무사들이 에도에서 살고 있다면, 그들은 일 년 간의 급료로 영지에서 받은 쌀을 전부 팔아서 그 대금으로 필요한 물건을 사두고 일 년 동안 그것들을 다 사용해버립니다.

율곡: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소라이: 그렇기 때문에 무사가 정성을 다해서 에도에서 막부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은 결국 모두 상인들의 이익이 되어 버릴 뿐입니다. 그 때문에 에도 상인들은 더욱더 번창하고 무사들은 더욱 궁핍하게 된 것입니다. 또 많은 무사들이 에도의 성 아래에 모여살고 있었기 때문에 화재도 빈번하게 일어났지요. 에도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경우는 부인이나 아이들이 부담이 되고, 가재도구나 귀중품에 마음을 빼앗겨 불을 끄는데 전념할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에도 시민들의 나쁜 풍습이나 유흥가의 풍습이 무사들에게 전염되어 여러모로 에도는 무사들에게 나빴습니다. 오락이 많아 무예나 학문을 가까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율곡: 조선의 한성에서 근무하는 관료들과 상황이 비슷했군요.

소라이: 무사들이 에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의 영지인 농촌 지방에 대한 관리도 나쁘게 되어 그 정도가 매우 심해졌습니다. 옛날에는 농촌의 여기저기에 무사들이 아주 많이 살고 있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농민들이 자기들 멋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백년 이래 영주가 영지에서 살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이 없어져 농민들이 모두 자기 멋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율곡: 조선에서는 지방에 관리들을 조정에서 직접 파견했는데 일본 상황은 그것이 아니었군요. 말하자면 영지의 관리 책임이 영주들에게 있었군요.

소라이: 처음에는 그렇게 했지요. 하지만 막부 직속의 무사(旗本)가 신분이 낮을 경우에는 자기가 살고 있지 않은 영지를 에도에 있으면서 다스린다고 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대리인들(代官)을 파견하더라도 신분이 낮은 젊은 가신(家來)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았지요. 그 결과 나중에는 무사들의 개인 영지까지를 막부가 직접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농민들이 영주를 가볍게 여기게 되어버렸습니다.

율곡: 조선의 상황과 비슷하게 되었군요.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하는 체제이지요.

소라이: 무사들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없어지자 지방의 관리가 문란해졌습니다. 예를 들면 중앙에서 지방에 도박 등에 대한 금지령을 내려도 지방 농민들은 모른 척합니다.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지방에 가서 여러 가지 나쁜 일을 하는데도 농민들은 그들을 고발하지 않습니다.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나면 막부의 행정이나 통치력은 에도만으로 한정되게 되어 농촌까지는 미치지 않습니다. 지방 농촌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무사들이 현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율곡: 그래서 선생님은 그 개선책으로 무사들이 지방에 거주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시는 것이군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무사들이 농촌에 거주한다면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습니다. 맨 첫 번째로 의식주 생활에 경비가 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사들의 살림살이가 다시 회복이 될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치는 가정 내부로부터 시작되는 법입니다. 무사의 부인이 에도에 살고 있으면 차츰차츰 사치에 물들게 되어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병이 들기 때문에 그들의 배에서 나온 아이들은 나약하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율곡: 선생님은 사회 현상에 대해서 분석하는 방법이 저와는 많이 다르군요. 저보다 치밀한 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둘러싼 환경을 예민하게 파악하는 점이 뛰어납니다.

소라이: 무사들 가족이 만약에 농촌에 거주한다면 자기가 옷을 짠다든지 노동을 한다든지 하여 사치도 그렇게 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도 신체가 건강하게 되고 무사의 부인에 어울리는 여성이 될 것 입니다. 남자들도 넓은 들을 여기저기 말을 타고 뛰어다녀서 손과 발이 튼튼하게 될 것이고, 친척들이나 지인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용무가 있을 때도 5리든지, 10리든지 그런 거리를 항상 왕래하기 때문에 말타는 일도 자연스럽게 능숙하게 될 것입니다.

율곡: 그렇지요. 농촌에 살면 사람들이 그렇게 부지런하게 되기 쉽지요. 몸을 많이 움직이니까요.

소라이: 말의 사료도 입수하기 쉽기 때문에 200석이나 300석의 신분이라도 말을 5필이든지, 10필이든지 마음먹기에 따라 잘 키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일도 농촌에 있으면 가능합니다. 평소는 여가 시간이 많고 에도와 달리 다른 즐길만한 일이 없기 때문에 무예나 학문을 공부하기에도 정말 좋은 환경입니다.

율곡: 무사들은 결국 군인들이니 영지에서 살게 되면 군인으로서 많은 이점이 있게 되겠군요. 자연스럽게 훈련을 할 수 있고.

소라이: 예, 그렇습니다. 무사가 지방의 자기 영지에 살고 있으면 백성들도 어려서부터 무사들을 윗사람으로 존경하는 습관이 뼛속까지 스며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지도 잘 다스려지고, 만약에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영지의 농민들을 동원할 때 매우 편합니다. 같이 전쟁터에 나가면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는 일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자기들 영주가 공을 세우는 일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율곡: 그것은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요.

소라이: 현재는 농촌에 영주들이 거주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급 무사가 농촌에 가게 되면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할 위험이 있습니다. 누가 관리감독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곳이 무사들 거주지가 아니니까 무책임해지기도 하지요.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무사는 에도에서 5리 이상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막부에서는 규정을 정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농촌에 영주가 거주하고 있다면 영주가 있는 곳에 가기 때문에 하급 무사들이 자기들 멋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무사들이 농촌에 거주하면 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야산에서 사슴을 사냥하거나 산천을 여기저기 달리고 걷고 하면서, 자기 영지 내의 지리도 잘 알게 됩니다. 험난한 산길도 익숙하게 되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유능한 무사가 될 것입니다.

율곡: 생활 자체가 군대 훈련이 되는 것이지요.

소라이: 제가 조사한 바로는 당시 일본 전체의 무사들 총 숫자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가(武家) 정치로서는 무엇보다도 좋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시마바라(島原)・아마쿠사(天草)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아주 조그마한 성에 농민들이 모여서 농성한 것을 숫자가 많은 서쪽 지방의 영주들이 전부 힘을 합해 전력을 다해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무사들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율곡: 병사들의 수가 감소한 것은 조선과 같군요.

소라이: 에도 막부에서는 처음에 막부가 시작할 때, 무사들과 지방의 영주들을 통제하고 일정 기간을 두고 심사를 하여 영지를 이동시키거나 폐지해버리는 정책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무사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관리를 했지요. 지금은 그런 제도가 오히려 독이 되어서 무사들의 숫자를 줄어 들고 있는 것이지요. 영주들의 힘도 약화되어 있고요.

율곡: 이미 중앙의 힘이 강력해졌으면 거기에 합당한 정책을 펴야겠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지금은 감히 막부에 대항할 영주들이 없습니다. 무사들도 자기 살기가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지 이전 제도를 폐지하고 영주의 밑에 있는 무사들에게도 모두 영지를 주어서 그 영지에 거주를 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병사들의 숫자도 옛날처럼 많아지게 되고, 일본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무사들의 용맹스러운 기풍이 재현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저는 ⌈정담⌋에서 주장했습니다.

율곡: 결국에는 에도 막부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방안이군요. 영지에 무사들을 거주시키는 방법이.

소라이: 그렇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주장을 한 것이지요.

율곡: 선생님의 개혁안을 듣고 보니 선생님은 행정가라기보다는 전략가적인 개혁자이시군요. 저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들고 나오셔서 그것을 바꾸려고 하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제가 제시한 군역의 개혁안은 선생님의 개혁안에 비추어 보면 매우 지엽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군적을 정확히 정리한다든지 군역을 공평하게 하자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주장은 사회 조직 자체를 바꾸자는 것이니 매우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고대 유가의 이상사회를 염두에 두고 그런 발상을 하고 계시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소라이: 예, 근본적으로는 도시화되고 상업화되고 있는 에도사회를 거부하고 그 이전의 사회로 돌아가자고 하는 주장이기도 하지요. 농업을 중시하고 농민을 사회의 기초로 삼는 그런 고대의 사회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율곡: 일본사회의 모범으로, 선생님은 중국 고대를 염두에 두고 계시군요.

소라이: 정확합니다. 하하.

일본 사회


일본 사회

 

율곡: 제가 조선 군대의 문제점을 너무 소상히 지적을 했군요. 왜놈 앞에서요. 하하. 농담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소라이 선생님이 태어나셨는데, 선생님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이란 무엇인가요?

소라이: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저는 일본에 태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에도시대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율곡: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라이: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으킨 전쟁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통해서 일본을 평정하고 휘하의 장수들을 달래서 대륙침략의 야욕을 불태웠지요. 결국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으로 침략한 결과, 자신의 세력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율곡: 그렇군요.

소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 몰락하면서 그와 대립하면서도 협조자의 위치에 서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이 일본 전국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고 에도막부가 성립된 것이지요. 만약에 임진왜란이 없었으면 에도막부가 성립하지 못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 계속 일본을 호령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저의 부친이 에도막부에 봉사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그랬으면 혹시 제가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하.

율곡: 재미있는 상상이군요.

소라이: 혹시 제가 태어났더라도 학문적으로 이 소라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율곡: 왜 그런지요?

소라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세우고 조선처럼 유학으로 일본을 통치하고자 하였습니다. 무사들의 시대를 끝내고 학문과 도덕으로 정치를 하고자 하였지요. 그래서 후지와라 세이카나 하야시 라잔과 함께 유학의 도입을 적극 검토했습니다. 그 결과 하야시 라잔이 막부에 들어와 정치적 학문적인 자문을 하면서 일본 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일본에서 유학, 즉 신유학인 성리학은 하야시 라잔이 막부의 지원을 받아 발전시킨 공로가 큽니다.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있었더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율곡: 오호, 그렇군요.

소라이: 그 외에도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지요. 도자기 기술자들이 임진왜란을 통해서 대거 일본에 들어왔고, 일본은 그 뒤에 도자기 생산국으로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지요. 사실은 그것보다도 더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 성리학입니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다수의 성리학 서적들이 일본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강항과 같은 훌륭한 학자들이 포로로 들어와 일본에 성리학을 전파했습니다. 그런 사정이 없었다면 일본 땅에 성리학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율곡: 그 전에 이미 중국에서 성리학이 전해지지 않았습니까?

소라이: 일부 승려들을 통해서 성리학 서적들이 들어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디에 필요한 것인지는 몰랐지요. 단지 지적 호기심으로 관심을 조금 두는 정도뿐이었습니다. 성리학이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고, 그것이 현실의 생활에 유용한 것이라는 점은 조선에서의 전쟁을 통해서 일본 사람들이 알게 된 사실입니다.

율곡: 참 신기한 일이군요. 성리학의 의미를 몰랐다니.

소라이: 조선의 정치 체제를 잘 알게 되고 성리학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일본은 주자학의 진면목을 알게 된 것이지요.

율곡: 그런 주자를 선생님은 비판을 했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주자학이 들어오고 나서 주자학은 막부와 하야시 라잔 집안에서 적극 연구하는 관변학문이 되었습니다. 과거시험이 별도로 없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은 자유스럽게 주자학 관련 서적을 읽었습니다.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요.

율곡: 조선과는 다른 상황이군요.

소라이: 일본 지식인들은 주자학을 알고 나서, 그 뒤에 등장하는 양명학을 알게 되었습니다. 양명학은 상대적으로 일본 지식인들에게 적극 수용되었습니다. 너무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주자학보다는 일본의 상황에 더 어울리는 학문이 양명학이었지요. 일본인들의 심성에 양명학이 더 와 닿았지요. 무사들이 주류인 일본에서 단순한 주장을 펼치는 양명학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양명학에 심취한 대표적인 학자가 나카에 도쥬(中江藤樹, 1608년∼1648년)이지요.

율곡: 조선에서 양명학은 많은 배척을 받았습니다. 퇴계 선생도 적극 비판을 하고 많은 유학자들이 배척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그와 달리, 양명학이 점점 더 세력을 떨쳐 명치유신 시기에는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들었습니다.

소라이: 그렇습니다. 만약 양명학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명치유신이 그렇게 빨리 성공했을지도 의문입니다. 양명학도 그렇지만 고학, 그리고 제가 주창한 고문사학도 일본에 전해진 주자학, 양명학을 바탕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앞서 그런 학문들이 없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학문입니다. 그리고 국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국학은 주자학이 변형된 것이라고 할 정도로, 주자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형성된 학문입니다. 그러니 사실 근대 일본의 형성은 멀리는 조선에서 들어온 성리학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키지 않고 조선에서 그런 학문을 들여오지 못했다면 근대 일본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율곡: 대단한 사건이었군요. 임진왜란은.

소라이: 그러므로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저에게는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고 전제 조건입니다. 없었으면 모든 것이 설명이 안 되지요.

율곡: 아하, 그렇군요.

율곡의 군정 개혁


율곡의 군정 개혁

 

소라이: 그럼 군대와 관련된 선생님의 개혁안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아무래도 군대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무사, 즉 사무라이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저도 마찬가지지요. 선생님의 군정개혁안이 가장 흥미롭습니다.

율곡: ⌈만언봉사(萬言封事)⌋는 1574년에 지어 올렸지요. 상소문입니다. 만자정도 되는 글이기에 그렇게 불립니다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년 전의 일이지요. 당시 저는 우부승지(右副承旨)였습니다.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承政院) 소속이었지요. 만약 우리 임금 선조가 이때부터 저의 제안에 따라 군정(軍政)을 개혁했더라면 임진왜란과 같은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사 발생하였더라도 경복궁이 불타고 임금이 압록강 부근까지 도망가는 사태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조선의 군대에 다음과 같은 4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했습니다.

1) 장수들이 병사들을 착취한다.
2) 병사를 먼 곳으로 보내 근무시킨다.
3) 군역과 관련된 착취가 심하다.
4) 병사를 관리하는 장부가 엉망이다.

소라이: 선생님 개혁안을 보니 역시 선생님은 행정가이십니다. 군사 행정에 관심이 많으셨군요. 군인들을 관리하는 장부라든지 군역과 관련된 세금에 관심이 있으셨군요.

율곡: 아 그런가요?

소라이: 위에 제시한 4가지 것은 혹시 선생님이 제시하였을 수도 있는 10만 양병설과는 다소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위에 제시한 방안은 소극적인 군사개혁안이라고 한다면 10만 양병설은 적극적인 것입니다. 몇 년 뒤에 쳐들어오게 되는 일본군에 맞서려면 역시 10만 양병설과 같은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하지요.

율곡: 그렇습니다만, 만언봉사를 올릴 때는 그런 문제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소라이: 첫 번째 ‘장수들이 군인들을 착취한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신지요?

율곡: 조선의 법에는 병사(兵使)·수사(水使)·첨사(僉使)·만호(萬戶)·권관(權管) 등의 벼슬을 설치해 놓고 그들이 먹고살 녹봉은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기 밑에 있는 군인들을 통하여 생계를 해결하였습니다. 변방의 장수들이 사병들을 착취하는 폐단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지요. 그리고 국법이 느슨해지자 그런 폐단이 더욱 기승을 부려 탐욕하고 포악한 짓이 점점 더 성행했습니다.

소라이: 구체적으로 그런 폐단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요?

율곡: 사병들 가운데 누가 근무가 힘들다고 생각하여 군복무 대신에 면포(綿布)를 바치고 싶다고 하면 그 위의 장수는 기뻐하면서 그것을 허락합니다. 그것을 보고 주위의 사병들도 서로 나서서 면포로 군복무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소라이: 그럼 실지로 근무할 수 있는 군인들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율곡: 그렇지요. 병역 근무를 면제받은 사람들이 늘어나면 정작 수비를 해야 할 진지에 군인들이 비게 됩니다.

소라이: 그럼 위에서는 그것을 모릅니까?

율곡: 상부에서 조사 나오면 장수들은 다 대처방법이 있습니다. 근처에 사는 백성들을 불러들여서 가짜로 점호(點呼)를 대신 받게 합니다. 지역을 순시하며 검열하러 나오는 관리는 그 숫자만을 조사합니다. 진짜와 가짜를 따지지 않습니다.

소라이: 그래서 맨 첫 번째로 장수들이 사병들을 착취한다고 하셨군요.

율곡: 그렇지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다음과 같이 건의를 했지요.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옛 제도를 개혁하여 새로운 규정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모든 병영(兵營)·수영(水營)·진(鎭)·보(堡)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고을의 장부에 올라 있는 것 이외의 곡식을 적절히 헤아려 변방 장수의 양식으로 넉넉하게 제공해야 합니다. 만약 그 고을의 곡식만으로 부족하면 이웃 고을의 곡식을 거두어서라도 반드시 변방의 장수들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소라이: 장수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으니 사병을 착취하고 뇌물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선생님 말씀대로 해서 생계가 가능하게 한 뒤에는, 아무래도 그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겠지요.

율곡: 그렇지요. 그런 다음에 조정에서 법을 엄격하게 정하여, 장수들이 병사들로부터 한 톨의 쌀이라도 받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건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변방 군대의 검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개선책을 제시했다.

“검열할 때는 단지 군사들을 호명하여 부재자의 유무를 조사하는 일에만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무기 상태를 검열하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예를 시험해서, 군사들이 훈련이 잘되어 있는지 못한지를 가지고 지휘관의 성적을 매겨 보고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전처럼 재물을 받고 병사를 풀어놓아 보냈다가 발각되면 뇌물죄로 다스리게 하십시오.”

소라이: 그렇지요. 그렇게 되면 명목상으로만 일시적으로 군인인체 하는 사람들을 잡아낼 수 있겠지요. 그러면 두 번째 제안 즉, ‘병사를 먼 곳으로 보내 근무시킨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율곡: 그 점은 조선의 군대에서 정말 큰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조정에서는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의 병사들을 자기가 사는 지방에서 근무하게 하지 않습니다. 가는 데 며칠이 걸리는 곳에 보내기도 하고, 혹은 천리 밖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그래야 군대 생활을 충실히 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런데 그 때문에 그곳의 풍토에 익숙지 않아 병에 걸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현지에 있는 장수의 학대에 떨고, 또 그 지방 토박이 병사들의 횡포에 곤욕을 치르는 일이 많지요.

또 객지에서 추위와 고통을 겪고 굶주리는 것과 배를 채우는 것도 일정치 않는데, 남쪽지방 출신 군인으로서 북쪽 국경에서 근무를 서야 하는 경우는 현지의 기후에 적응을 못해 고생이 더욱 심합니다. 여위고 병들어 몸도 가누지 못하여 얼굴빛은 제 색깔이 아닌 경우가 많고, 만약 이들이 적군을 만나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무너질 것입니다.

소라이: 선생님은 북쪽 국경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셨군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쳐들어온 부산 쪽이나 남해 쪽은 관심을 두지 않으셨는지요?

율곡: 아무래도 조선은 바다에서 들어오는 적병보다는 북쪽 국경지대에서 들어오는 오랑캐들이 많았기 때문에 저도 은연중에 그런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소라이: 일본에서 침략해 들어오는 경우는 생각을 못하셨군요. 선생님 글을 읽어보면 황해도 기병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곡: 그렇지요, 황해도 기병으로 평안도에 가서 경비 근무를 서는 사람의 경우를 소개했지요. 그런 군역을 대신할 사람 한 명을 보내는 비용이 면포 30필∼40필 정도입니다. 그 정도의 면포라면 시골에 사는 백성 몇 가구가 생산해야 하는 양이지요.

소라이: 황해도 기병이 평안도로 가서 근무하는 경우를 설명하셨습니다. 일본군이 임진왜란 때, 쳐들어 왔을 때, 황해도 기병이 남쪽으로 가서 일본군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 때 조선의 기병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지요.

율곡: 그렇지요. 저는 실지 전쟁을 해보지 않아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를 상상하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기병이 말을 끌고 너무 멀리까지 가서 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불합리하다고만 판단을 했지요. 그리고 조선은 인구 분포상 인구가 남쪽이 많고 북쪽이 적어서 군인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라이: 그럼 그 점에 대한 선생님의 개선안은 무엇이었는지요?

율곡: 저는 전략상 요충지에서 경비근무를 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고을 출신의 병사들을 모아서 배치를 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만약에 그 고을 출신의 병졸이 부족할 경우에는 인근 마을에 배정해서 차출해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전략상 요충지에서 복역할 때는 그에게 부과되는 여러 종류의 부역을 모두 폐지하고, 오직 요충지에서 방비하는 군역만 수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먼 곳에 와서 부역하는 수고로움이 없도록 하는 한편, 순번을 나누어 번갈아 가면서 쉬도록 하자, 이렇게 제안을 했지요.

소라이: 그럼 선생님이 아까 말씀하셨던 조선의 인구분포하고는 모순되는 이야기인데요.

율곡: 아, 그것은 전체적인 흐름이나 경향이 그렇다는 것이고 세부적으로는 북쪽이라도 각 지역에 자기 지역을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구는 있지요. 그 인구를 활용하자는 것이지요. 물론 인구가 적은 곳은 그 지역의 대부분의 인구가 국방에 전념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소라이: 선생님의 제안 중에는 역시 활쏘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곡: 예 그렇지요. 국경의 경비를 건의하면서 그런 건의를 했지요. 만약 국경의 경비가 허술해질까 걱정된다면, 국경의 수령들에게 명령을 내려 백성들에게 활쏘기를 익히게 하자, 그리고 3개월에 한 번씩 시험을 보아 화살을 많이 적중시키는 자는 상을 후하게 주고, 두 번 일등을 차지한 자는 그 가족의 부역을 면제해 주자, 만약에 다섯 번이나 일등을 차지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군졸의 경우는 군관(軍官)으로 특별히 임명하자, 그런 제안을 했지요.

소라이: 일본에서 전투에 많이 등장하는 소총, 즉 임진왜란 때 많이 사용했던 조총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하셨는지요?

율곡: 조선에도 화승총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활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라…. 일본의 사정은 잘 몰랐습니다.

소라이: 선생님은 군사 전략가가 아니고 행정가이시기 때문에 전투에 대해서 그렇게 소상히 아실 필요는 없었겠지요. 그리고 알아야 할 필요도 없으셨고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선생님의 군사 관련 제안을 보고 느낀 점은 선생님이 전쟁의 전문가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점이 크게 느껴집니다. 선생님이 국방의 최고 책임자가 되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직책에 오래 계시지 못하였다는 사실도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율곡: 그 때는 제가 이미 몸이 쇠약해져서…

소라이: 조선에서는 관리를 임명할 때 전문성을 중요시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리학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전쟁의 전문가가 될 수 있고, 기술을 배우면 누구나 잘 할 수 있다고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생각하지요?

율곡: 그렇지요.

소라이: 기술은 배우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전쟁은 전문가들이 하지 않으면 적을 이기기가 어려운 큰 사업이며, 매우 기술적인 사업입니다만.

율곡: 그 점은 동감을 합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건국 이래 기술을 중시하지 않았으며, 또 무인들의 무술을 크게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이 영향을 주어 제가 병조판서에 까지 올라간 것이겠지요.

소라이: 세 번째로 선생님이 제시한 ‘군역과 관련된 착취가 심하다’는 점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율곡: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천민을 제외한 평민 성인 남자, 즉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良人)은 두 가지 부역의 의무를 지니고 지닙니다. 하나는 병역의무인 군역(軍役)이고 다른 하나는 일시적으로 토목공사나 물자 수송 등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요역(徭役)입니다. 그 중에서 군역과 관련된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지요.

소라이: 선생님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이전에 ⌈동호문답⌋(1569년)에서도 지적을 하시고 ⌈만언봉사⌋에서도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선생님이 그 점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걱정을 많이 하셨다는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율곡: 그렇지요. 조선에서는 이른바 정군(正軍, 정병正兵이라 칭하기도 함)·보솔(保率, 정병이 거느리던 병사)·나장(羅將)·조례(皀隸) 등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정식 군인이나 관리가 아닌데 말입니다. 단지 백성일 뿐인데 어떤 자는 1년에 한 번의 당번을 맡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몇 차례나 당번을 맡습니다. 규칙이 없는 것이지요.

소라이: 그것은 매우 불공평한 군역이군요.

율곡: 그래서 저는 ‘해당 관청이 잘 판단해서 규칙을 정하여 순번이 많은 자는 횟수를 줄이고 적은 자는 늘여야 한다. 모든 부역을 순번대로 번갈아 쉬게 하고 골고루 근무하게 하여 누구는 너무 괴롭고, 누구는 너무 편안한 폐단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하면 도망한 백성들이 다시 모이고, 권세 있는 집안에 스스로 노비가 되어 들어가, 부역을 피하는 잔꾀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서울과 지방의 양역(良役, 양인들의 부역, 즉 요역과 군역)은 그 명목이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조례(皁隷)와 나장(羅將) 등의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큰 고역을 치르고 있지요. 사실 관청의 경호나 경비 등 잡일을 하는 조례(皁隷)나 죄인의 압송이나 매질을 담당하는 나장(羅將)은 천인에 속한 사람들이 담당합니다. 일반 평민이 조례나 나장이라는 군역을 맡게 되면 실지로 그 일은 하지 않고 면포만 대신 냅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향리가 그 일을 주선하면서, 그러니까 다른 천인에게 그 일을 맡기면서 대신 세 사람분의 면포를 받아갑니다.

소라이: 참으로 부조리하군요.

율곡: 그래서 저는 이른바 조례(皁隷)나 나장(羅將) 등은 제각기 소속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 그러한 이름을 다 폐지하여 모두 보병으로 바꾸라, 그리고 군역을 면제받는 대신 납부하는 면포는 병조(兵曹)에 직접 납부하게 하고, 병조에서는 각 관청에서 부역을 치르는 사람의 수를 헤아려 면포를 지급하게 하라, 그러면 폐단이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국가에서 직접 행정관청의 말단 요원을 관리하는 것이지요.

소라이: 그런 부조리는 일본에서도 조금은 존재합니다. 아무래도 근대식의 관료시스템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율곡: 마지막으로 네 번째, ‘병사를 관리하는 장부가 엉망이다’라는 항목을 소개하지요.

소라이: 예, 군인들의 관리와 관련된 사항이군요.

율곡: 1573년경에 조정에서 20여년 만에 다시 군적(軍籍)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의 숫자가 20년 전보다 적고, 병역 의무자(閒丁)의 숫자 또한 매우 적었습니다. 실지로 군인들의 숫자가 많이 줄어든 것입니다.

소라이: 왜 군졸의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었을까요?

율곡: 결국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이 더욱 심해진 것입니다. 그만큼 조선의 경제적인 상황이 위급해진 것이지요. 급히 구제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가 텅 빌 형세였습니다. 그런데 관청에서 군적을 만들 때 군인의 숫자를 줄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실제로 그만큼의 군인이 있어야하기 때문이지요. 만약에 외부에서 적군이 침략해 들어온다면 반드시 그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숫자에 현실의 장정이 부족한 것이지요.

소라이: 그럼 인구가 줄어든 것인가요?

율곡: 그렇습니다. 연좌제라는 나쁜 제도 때문에 농촌 마을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일족절린(一族切鄰)의 폐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면 지금 여기에 세금 때문에 도망친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지요. 그럼 그 사람 때문에 관리들은 그 친척과 이웃에게 그의 세금을 거둡니다. 그럼 그 친척과 이웃이 감당할 수 없게 되지요. 그럼 그들이 또 도망칩니다. 그러면 관리들은 다시 그 친척의 친척과 이웃의 이웃에게 도망친 사람들의 세금을 부담시킵니다.

소라이: 이른바 연좌제라는 것이지요. 일본에도 그런 제도가 있습니다. 저도 그것을 염려하여 반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율곡: 그렇게 한 사람이 도망치면 재앙이 천 가구에까지 파급되어 그 형세는 갈수록 심해져 종국에는 백성이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100가구가 되던 마을이 지금은 10가구도 없고, 작년에는 10가구가 되던 마을이 지금은 한 집도 없게 됩니다. 마을이 쓸쓸해지고 민가의 밥 짓는 연기가 아득히 끊어져 그렇지 않은 곳이 없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마을이 하나둘 사라진 것이지요.

소라이: 그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선생님의 해법은 무엇인지요?

율곡: 백성들이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은 모두가 절박하여 부득이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저들이 비록 간사하다고 할지라도 만약 생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누가 떠돌아다니는 고통을 기꺼이 선택하겠습니까? 만약 일족절린(一族切鄰)의 관습으로 피해를 당할 근심이 없고 자신이 자신의 군역만 책임지게 된다면, 백성들이 삶을 편안하게 여기고 자신의 생업을 즐기게 될 것입니다.(⌈동호문답⌋)

그래서 저는 정확한 군적(軍籍)을 만들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소라이: 그것은 당연한 논리이지요.

율곡: 예, 군적을 만드는 일을 실제의 군인 수를 확보하는데 힘써야지 억지로 채우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병역 의무자라고 해도 15세가 안된 소년들은 이름과 나이만을 별도의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해당하는 나이가 되면 군적에 편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품팔이나 거지는 군적에서 삭제하라고 제안했습니다.(⌈만언봉사⌋)

소라이: ⌈동호문답⌋에서도 그러한 주장을 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율곡: 예, 그렇습니다. 관청에서 가끔 인구조사를 하여 군적을 만드는데 그 군적을 허위로 사병수를 부풀려 만든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지요. 백성들이 너무 곤궁하여 각 지방의 마을이 무너지고 있는데, 그것을 군적에 반영하고 있지 않다고 본 것입니다. 관청에서는 허위로 사병을 늘린 뒤에, 그런 가짜 사병들의 몫에 해당하는 면포를 그 주변 친척들에게 부과하여 재물을 착취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실지로 전쟁이 나서 급하게 군대라도 출동하는 일이 생기게 되면, 누가 전쟁에 나서겠습니까? 사람이 없는데. 그동안 대신 면포를 내주던 친척들이 창을 메고 나서지 못할 것이고, 군포로 받은 면포를 가지고도 결국은 사람이 없어 사병을 모집하지 못할 것이 뻔한데, 무엇 때문에 허위 장부를 만들어 백성들이 피해를 받게 합니까?

소라이: 그럼 선생님이 ⌈동호문답⌋에서 제시한 개혁안은 무엇인지요?

율곡: 예, 각 고을에 명령을 내려 장부에 올라 있지 않은 장정을 찾아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자라는 군사에 충당하고, 장부에 올라있는데도 입대하지 않은 인원을 모두 차출해 정규군에 입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군사를 담당한 관리가 그 사무를 총괄하여 실제의 수효를 파악하게 되면, 군적을 담당하는 관청을 따로 설치하지 않더라도 군적은 이미 완성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실제 숫자만 기록하게 하고 허위 명단은 다 지워버려야 한다고 했지요.

소라이: 만약 그렇게 해서도 실지로 필요한 병사들이 부족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율곡: 만약 병사들이 부족하여 여러 곳의 군역에 대응할 수가 없을 경우에는 현재 자신의 차례가 되어 교대 근무를 하러 들어가는 병사들의 수를 줄여야 하지요. 그래도 부족할 때는 방비가 허술해도 큰 지장이 없는 곳의 군인들 수를 줄이면 됩니다. 그래도 부족한 경우에는 남쪽 지방에서 겨울철에 요충지를 방비하는 병사들의 수를 적절히 줄이자고 했습니다. 만약에 그래도 부족할 경우에는 면포를 바쳐 병역을 면제받는 보병(步兵)의 수를 반으로 줄여서 군사적 요충지를 방비하는 곳의 군인으로 보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라이: 그렇지요. 적은 수의 장정에 맞추어 변방의 수비를 조정해 나가야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역시 남쪽에서 들어오는 적, 즉 일본 쪽의 침략을 크게 생각하지 않으신 것은 분명합니다. 병사들이 부족하면 남쪽 지방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의 수를 줄일 생각을 하셨으니 말입니다. 비록 겨울철이라는 조건을 달기는 하셨지만 선생님의 머릿속에는 북쪽 변경의 수비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하.

조선 사회


조선 사회

 

율곡: 그렇기는 하지요. 그것 말고도 당시는 소위 동인들이 임금 곁에 있어서 저에 대한 시기와 모함이 심했지요. 제 말년이 순탄치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살아 있었더라면 저에게 글을 배운 정여립이 난을 일으킬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난을 일으켰을 리가 없고 저를 따르던 서인들이 그렇게 몰고 갔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건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소라이: 그 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서인, 동인이라는 말도 생소합니다.

율곡: 제가 조정에서 활동하던 때에 붕당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서인, 동인 이렇게요. 서인이란 1575년경 일겁니다. 그동안 조정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훈구파와 낙향하여 지방에서 유지가 되거나 글을 읽는 선비들을 지칭하는 사림파가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제외한 젊은 관료들이 두 파로 나뉘어 경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쪽은 동인이라 하고 다른 한 쪽은 서인이라 칭했지요. 동인은 비교적 강하게 훈구파나 사림파를 비판하고 서인은 비교적 온건했습니다. 서인파에 속한 사람들은 기존의 권력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지요.

소라이: 아 그렇습니까?

율곡: 서인들의 중심에 심의겸이라는 인물이 있었으며 저와 제 친구, 그리고 정철도 서인들의 주동자라는 의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들과 가까이하기는 했으나 나중에는 그것을 후회하고 붕당 자체를 비판했습니다. 임금에게는 붕당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시라고 건의도 많이 했습니다.

소라이: 그런 배경으로 정여립의 사건이 발생했군요.

율곡: 1582년에 저는 병조판서로 임명된 직후에 과로로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관직을 물러나 요양을 하고 있었는데 동인들은 저를 계속 비난하고 공격을 했지요. 하지만 저는 서인의 대표로 있는 심의겸을 비판하고 당쟁의 갈등을 없애려고 노력을 했지요. 친한 서인 쪽 지인들에게 여러 모로 호소도 하고 부탁도 하였지만, 이미 동인들과 서인들 사이에 갈등의 골이 너무 깊었습니다. 동인들은 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이 더욱 심해졌고요.

소라이: 동인과 서인 사이에 끼여서 곤욕을 치루셨군요.

율곡: 정여립은 그 미묘한 시기인 1583년에 이조전랑 후보가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이조판서였습니다. 그리고 정여립은 저의 제자이기도 했으니 저에게는 좋은 일이었으나 저는 그의 임명을 반대했습니다. 그 사람은 좀 과격한 면이 있었지요.

소라이: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은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셨지요.

율곡: 그렇습니다. 그 뒤에 일어난 정여립 사건을 기축옥사(己丑獄死, 1589년)라고 부릅니다. 정여립은 다소 과격한 성격이라 저는 그가 큰 직책을 맡는 일을 반대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원한을 산 것 같습니다. 그는 원래 저와 가깝게 지내다 나중에 멀어졌습니다. 그는 제가 가깝게 지낸 사람들 중에 서인당 사람들이 많다고 비판을 하기도 했지요. 제가 죽은 뒤에는 더욱 저를 비판하고 서인 쪽 사람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동인 편에 섰지요. 이러한 사실을 선조 임금이 알고 싫어했습니다. 특히 경연의 자리에서 저를 노골적으로 비판한 사실이 임금의 마음을 거슬려 그가 곤욕을 치뤘습니다.

소라이: 그랬군요. 그래서 그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당시 동인들 중에는 호남 사람들도 많았는데 정여립은 전라도로 내려가 거기에서 지냈습니다. 나중(1587년)에 그는 호남에 나타난 왜구를 소탕하고 무술을 연마하며 대동계를 조직하여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난을 일으킨다는 의심을 받은 것이지요. 서인들은 또 그것을 계기로 그를 반란자로 낙인찍고 관련자들을 대거 죽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정여립 사건입니다. 관련자들이라고 해도 거의가 다 동인들입니다.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아마도 제가 살아 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소라이: 그렇더라도 동인과 서인들 사이에서 선생님이 편하게 고향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노후를 편안하게 즐길 상황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점점 더 동인, 서인의 경쟁이 치열했을 테니까요.

율곡: 그렇겠지요. 그리고 차츰 일본의 침략 움직임도 심해져서 조정의 생활이 많이 바빴겠지요. 저는 말년에 병조판서를 맡았습니다. 전쟁 준비도 저의 책임이 되었겠지요. 제가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더라도 저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제일 전방에 서야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10년쯤 더 살았더라면, 선생님 말씀대로 예측할 수 없는 재난에 처해 말년에 고생만 하다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소라이: 선생님 연표를 보니 저와 선생님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율곡: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라이: 저는 소위 임진왜란 이후 사람이고, 선생님은 임진왜란 이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분로쿠 전쟁(文禄の役, 1592-1593)이라고 부르고 정유재란을 게이초 전쟁(慶長の役, 1597-1598)이라고 부릅니다만. 선생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8년 전에 사망했고 저는 임진왜란이 모두 끝나고 68년이 지난 뒤에 태어났습니다.

율곡: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올 것이라는 예측은 조정에서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관리들을 파견하여 일본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지요.

소라이: 그랬는데 동인의 보고와 서인의 보고가 달랐다고 들었습니다. 한쪽은 일본이 침략을 해올 것이라고 보고하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그렇지요. 1589년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조선통신사를 보내기로 조정에서는 결정했지요. 그런데 정여립 사건이 일어난 그 다음해 1590년에야 통신사들을 파견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2년 전입니다. 그리고 1년 뒤에 통신사들이 돌아왔습니다. 통신사 대표로 간 사람은 황윤길로 서인쪽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서 반드시 침략을 해올 것이라고 보고를 하였지요. 그러나 부대표로 간 통신사는 일본이 침략을 해오지 않을 것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렇게 똑똑한 인물이 못되고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요. 이렇게 보고한 부대표는 김성일로 동인 쪽 사람입니다. 이렇게 의견이 나뉘면서 조정은 동인쪽 말만을 믿고 전쟁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이지요.

소라이: 일본은 사실 오랫동안 조선 침략을 준비했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활동한 전국시대(1467-1603) 전체가 사실은 전쟁 준비 시기나 마찬가지였지요. 일본 전체가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니까요. 말하자면 전쟁 연습을 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미리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시고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10만양병설 말씀이지요? 요즘은 그것이 제 주장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저는 오래전의 일이라 잘 모르겠고요. 하하. 어쨌거나 저는 말년에 국방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조정에 군정의 개혁과 혹시 있을지 모를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기 소개


자기 소개

 

율곡 : 처음 뵙겠습니다. 그런데 사회자는 없는 모양이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율곡: 우리 둘이 직접 대화를 나누는 형식인가요?

소라이: 예, 무슨 사회자가 필요하겠습니까? 선생님과 제가 돌아가면   서 사회를 보면 되지요.

율곡: 아하, 그렇지요. 소라이 선생님은 역시 실용주의자이십니다. 주최 측의 의도를 잘 파악하시고 금방 이해를 하시네요. 저는 아무래도 격식을 차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소라이: 선생님은 과연 조선의 유학자이십니다. 정통 유학을 받아들인 조선인들은 그렇게 예의와 격식을 중시한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일본인들은 무사 정신을 중시합니다. 무사들은 아무래도 실용적이지요. 예의나 격식 보다는 실질적인 것을 중요시하지요.

율곡: 그렇습니까?

소라이: 나이가 아무래도 어린 제가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겠습니다.

율곡: 그러시지요.

소라이: 저는 일본 에도시대의 유학자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입니다. 저는 1666년에 태어나서 1728년에 사망했습니다. 인간의 세상에서 62년을 살았지요.

율곡: 저보다는 오래 사셨군요. 저는 조선의 유학자 율곡 이이입니다. 저는 1536년(음력)에 태어나서 1584년에 사망했습니다. 저는 선생님보다 더 젊어서 하늘로 돌아왔습니다. 48년을 살았지요. 환갑을 지내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소라이: 선생님은 저보다 100년 쯤 전에 활동을 하셨군요.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보면 130살 앞선 분이십니다. 제가 준비한 저의 간략한 연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1세 1536년 에도(江戶)에서 출생
 14세 1679년 부친이 막부로부터 질책을 당하여 칩거명령을 받음
온 가족이 외가가 있는 가즈사노(上総)지방으로 이사
 27세 1692년 부친이 사면을 받아 에도로 돌아옴
소라이, 학당을 개설하여 유학자로서 활동함
 31세 1696년 5대 쇼군(徳川綱吉)의 측근에게 발탁되어 자문이 됨
500석의 녹봉을 받고, 이해 11월에 결혼
 40세 1705년 부인 사망
 44세 1709년 쇼군 쓰나요시가 사망, 후원자 야나기사와 요시야스 실각함
소라이도 관직을 물러남. 니혼바시에 학당 개설
 48세 1713년 재혼하였으나 2년 후에 재혼한 부인 사망
 49세 1714년 ⌈훤원수필(蘐園隨筆)⌋발간
 52세 1717년 ⌈학칙(學則)⌋, ⌈변도(弁道)⌋, ⌈변명(弁名)⌋ 등 초고 완성
 53세 1718년 ⌈논어징(論語徵)⌋완성. ⌈대학해(大學解)⌋, ⌈중용해⌋ 집필
 57세 1722년  제8대 쇼군 요시무네(徳川吉宗, 재임: 1716-1745)의 신임받음
쇼군의 자문이 되어 자주 비밀스러운 자문에 응하고 면담함
 62세 1727년 쇼군에게 정치 개혁안 ⌈정담(政談)⌋을 완성하여 제출
 63세 1728년  월 19일에 사망

 

율곡: 저보다 15년을 더 사셨으니, 역시 훌륭하신 업적을 많이 남기셨군요. 50대에 참 많은 성과를 이루셨군요. 부럽습니다. 제 연표를 보여드리지요.

 1세 1666년 12월 26일(음력), 강원도 강릉 외가에서 태어남
 6세 1542년 전년에 한양 본가로 돌아와 어머니 사임당에게 글을 배움
 12세 1548년 진사 초시에 합격함
 15세 1551년 어머니 신사임당이 별세함
 18세 1554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 심취.
다음해 강릉 외가에서 유학공부
 20세 1556년 한성시에 장원으로 급제함.
다음해 노씨 부인과 결혼
 22세 1558년 별시에 ⌈천도책⌋으로 장원급제함
 25세 1561년 부친 이원수가 별세함
 28세 1564년 생원시 장원급제 후 여러 관직을 역임.
구도장원공이라 불림
 32세 1568년 천수사 서장관으로 명나라 다녀옴.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됨
 33세 1569년 선조 부름으로 조정에 들어가 ⌈동호문답⌋을 지어 올림
 34세 1570년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처가인 해주에 은거
 35세 1571년 청주 목사로 부임하여 서원향약을 실시
 36세 1572년 병으로 사직하고 다시 해주에 가서 은거
 38세 1574년 우부승지에 임명, ⌈만언봉사⌋를 올림, 황해도 관찰사 임명
 39세 1575년 병으로 파주 율곡으로 돌아옴.
⌈성학집요⌋를 올림
 41세 1577년 ⌈격몽요결⌋을 완성함.
해주 석담에서 생활
 42세 1578년 해주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제자를 양성.
만언소를 올림
 43세 1579년 ⌈소학집주⌋를 완성. 다음해 ⌈기자실기⌋를 편찬
 45세 1581년 대사헌 예문관 제학을 겸임, 대제학을 지냄. 경연일기 완성
 47세 1583년 병조판서를 지냄.
⌈시무육조⌋를 올림
 48세 1584년 서울 대사동에서 사망함

 

소라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란 무엇인지요?

율곡: 자주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했다는 뜻입니다.

소라이: 대단하시군요. 일본에도 과거시험이 있었더라면 저도 도전해 보았을 텐데, 일본에는 과거 시험이 없습니다.

율곡: 그럼 어떻게 관리를 임명하는지요?

소라이: 그냥 알음알음으로, 소개를 하고 추천을 하여 관직에 나가지요. 선생님은 30대 이후에 참으로 다양하고 많은 관직생활을 하셨군요. 그래서 병을 얻으신 건지요?

율곡: 예, 많이 바쁜 생활을 했지만, 병은 그것보다 저희 집안 내력인 듯합니다. 어머님도 아버님도 일찍 돌아가셨으니까요. 아버님은 환갑 때까지는 사셨습니다만, 저도 병이 염려되어 자주, 낙향을 하고자 조정에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계속 중앙에서 저를 새로운 관직에 임명하고 찾으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쁘게 살았지요.

소라이: 선생님 연표를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낙향하셔서 10년 정도 더 사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요. 많은 관직경험과 해박한 경전 지식을 활용하여 정말 훌륭한 업적이 나왔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듭니다.

율곡: 다 하늘의 뜻이지요. 하늘이 그렇게만 살라고 명을 내리신 것을 제가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제가 죽은 뒤에 사람들이 저를 많이 기억해주는 것만으로 만족을 삼아야지요.

소라이: 한국의 화폐 5,000원권에 선생님의 모습이 실려 있고, 또 50,000원권에 선생님 어머님의 모습이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선생님은 성공한 인생을 사신 거지요. 사실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부러울 뿐입니다.

율곡: 선생님도 훌륭한 생애를 살지 않으셨습니까? 일본 사상사에서 최고의 학자로 후대 사람들이 칭송하고 있으니 저도 부럽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최고의 유학자로 퇴계 이황 선생님을 손에 꼽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에서 그런 존재이니, 제가 부러워할 대상입니다. 저는 2인자까지는 평가가 되기도 하지만 최고는 못됩니다. 그렇게 평가를 받고 있지요. 아무래도 제 학문이 번뜩이는 것은 있지만 충분히 익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저도 퇴계 선생님 같이 70세까지는 아니더라도, 60세 정도까지는 살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하하.

소라이: 천명은 미묘한 것이지요. 일찍 돌아가신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선생님을 더 그리워하게 하고, 더 흠모하게 한 점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을 보면 오래오래 살아서 자신의 좋은 명성을 갉아먹고 후인들에게 폐만 끼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예측할 수 없는 재난에 처해 말년에 고생만 하다 사망한 경우도 있습니다.

내 아이 이렇게 키우자


내 아이 이렇게 키우자

주자의 『동몽수지』
율곡 선생의 『소아수지』는 남송 때의 주자(朱熹, 1130~1200)의 『동몽수지(童蒙須知)』와 이름이 거의 같다. 동몽(童蒙)이란 어린이를 말하니, 뜻으로 보면 책 제목이 거의 같다고 하겠다. 『동몽수지』의 내용을 보면 ⑴의복과 신발말과 걸음걸이주변정리와 청소 책 읽고 글자 쓰는 일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일로 되어 있다. 비록 목차는 다르지만 선생의 이 책과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선생은 아마도 주자의 『동몽수지』를 보고 느낀 바가 있어 그것에 자극받아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몽수지』도 그렇지만 이 책은 더 간략하다. 앞서 소개한 17개의 항목을 보면 주자의 그것과 큰 차별이 보이지 않으나, 다만 주자가 개인생활을 영역별로 나누어 기술한 반면 선생의 것은 통합해서 대체로 가족과 교우 관계를 중심 중심으로 기술하고, 개인 영역은 소략하다. 그러니까 주자의 그것보다 인간관계에 더 중점을 두었다고 하겠다. 이 두 책을 상세히 비교하면 주자의 그것과 선생의 아동 교육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은 1577년에 『격몽요결』을 편찬한다. 그 서문에서 한두 명의 학생들이 따라와 묻고 배우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공부의 방향을 잡고 공부에 착수하게 하려고 썼다고 말하고 있다. 『소아수지』를 언제 썼는지 알 수는 없으나 내용의 논리나 조직적 체계를 보면, 이 『격몽요결』에 앞서 저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격몽요결』이 『소아수지』에서 말한 것을 좀 더 구체화 하고 영역별로 조직화시켜서 쓴 것으로 보며, 주자의 『동몽수지』를 넘어서 그만의 체계적인 교육적 견해를 피력한 책으로 본다.

고리타분한 유학자의 말이라고?

흔히 유학자들의 말을 전하면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시큰둥한 반응이다. 유학이 전근대적 가부장제도의 근원으로 여겨서 한국사회의 온갖 비리의 원인제공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이른바 진보적 인사들 중에서도 폐단이나 폐습을 비판할 때 한결같이 유교의 영향이라고 지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극단적인 사례로서 유학을 오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유교경전의 하나인 『역경』, 이른바 『주역』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아는 바이지만, 역을 공부하는 핵심은 때[時]와 형세[勢]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자로 말하면 시세(時勢)를 아는 것이라 하겠다. 또 『중용』을 보면 ‘시중(時中)’을 강조한다. 시중이란 해당되는 때에 가장 적중한 실천행위나 앎을 가리킨다. 두 경전의 공통점은 바로 시(時)라는 때에 있다.

율곡 선생은 조선중기의 정치가이자 철학자·교육자이다. 선생의 말이 21세기 오늘날 백퍼센트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앞에서 말한 시세를 몰라도 너무 모른 것이다. 또 옛날의 유학자가 말한 것이어서 모두 케케묵고 고리타분한 말로 여겨서도 안 된다.
따라서 필자가 앞서 해설한 『소아수지』도 이런 태도를 따른 것이다. 물론 얼마나 때에 맞게 풀이했는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지만, 선생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따른 것은 아니다. 다만 선생이 살았던 당시와 오늘의 입장을 비교해서 지금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점을 말했을 뿐이다. 따라서 옛날 사람의 말이라고 다 케케묵은 것도 아니고 반면에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다. 그것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해서 현재의 우리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필요하다. 필자가 선생의 글에서 취한 입장도 그러하지만, 오늘날에 맞게 얼마나 잘 해석했는지는 독자의 평가에 달려있다.

21세기 더욱 요구되는 바른 인성

우리가 옛 것을 살펴보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단순히 옛 것을 알고 싶은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나 힌트를 얻기 위해서이다. 지금 현실에 도움이 안 된다면 옛것을 알아서 무엇에 쓰겠는가?
잘 알다시피 우리는 지금 제4차 산업혁명에 진입하였다. 모든 일을 기계나 로봇이 대체해 나가고 있다. 인간은 직장에서 점점 쫓겨나 할 일을 잃어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내 아이가 어떻게 살아남을까? 당장의 입시를 위해 강제된 알량한 영어나 수학 문제 푸는 재주만으로 그런 세상을 극복해나갈 수 있을까?

앞서 서두에서 말했다시피 미래 사회에 가장 요구되는 인간의 능력은 뭐니 뭐니 해도 창의성이다. 그리고 그 창의성마저도 다른 인성적 요소와 결합하여 발휘된다. 이른바 호기심·인내심·집중력·자발성·자신감·정직성·개방성·독자성·협동성·진취성·적극성·친화성·포용성 등과 결합하여야 온전히 발휘된다.

이런 의미에서 선생이 부모나 윗사람에게 공손하게 대하고 형제끼리 다투지 않고 친구와 싸우지 말라는 것은 친화성이나 협동성 그리고 인내심이나 포용성을 키우는 것과 관계되는 일이 아닌가? 방심하지 않고 배우는 일에 집중하는 것은 집중력과 호기심과 인내심을 기르는 일이 아닌가? 더욱이 잘못을 숨기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직성과 관련되고, 나쁜 친구와 어울리지 않는 것은 독자성과 자신감의 함양과도 관련이 된다.
더구나 앞서 서두에서 말했지만 회사의 CEO나 대학의 인사담당 책임자가 경력사원이나 신임교수를 선발할 때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평가 항목이 바로 이 인성 요소이니, 인성을 따지는 문제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진행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을 신뢰하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타인 배려

사실 어느 사회에서나 인성이 좋은 사람을 선호하는 것은 그가 타인을 잘 배려하고, 남을 속이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가치이다. 그래서 선생이 말한 부모의 일을 곧장 이행하거나 윗사람에게 공손하거나 형제끼리 다투지 않거나 친구와 싸우지 않는 일은 지금도 중요한 보편적 도덕규범이다. 그런 아이가 자라서 나중에 사회에 나갔을 때 친화성이 있고 남을 배려하지 않겠는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우리사회는 경쟁이 심하다보니 남을 배려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심지어 학교에서 자기보다 성적이 좋은 아이는 질투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심하면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이런 경쟁체제에서 부모가 학교 성적만을 강조하게 되면 아이 또한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현실의 제도가 어쩔 수 없이 경쟁을 조장하더라도, 부모는 그 해독과 문제점을 알아서 그 제도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최소화시켜야 한다. 학교가 그걸 해결해 준다면야 더 이상 바랄 수 없겠지만, 현재의 학교 여건상 그걸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그런 영향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겉으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다가도 속으로는 질시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물론 그 성공이 정당하더라고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부조리의 결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도 주위의 성공한 사람보다 자신들에게 호의적이며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을 훨씬 선호한다. 인터넷 댓글을 보라. 그래서 남을 배려하고 남과 협동하는 사람이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훨씬 건강하고 성공적으로 살 가능성이 높다. 인생의 가치를 돈이나 지위로 따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내 아이에게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능력을 어떻게 자라게 할 것인가? 그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자매와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런 다음 마을에 나가 어른에게 공손하며 친구들과 싸우지 않고 잘 사귀며 지내면서 그런 능력이 점차 확장되고 단단해진다. 그래서 유가들은 일찍이 이점을 간파하고 부모에 대한 효도나 형제끼리 우애나 웃어른에 대한 공경을 강조해 왔다.
반면에 아이의 기를 죽인다고 야단쳐야 할 때 야단치지 않고, 부모에게 함부로 대해도 그냥 넘어가고, 아이가 아파트 위층에서 밤늦게 뛰고 떠들어도 제지하지 않고, 친구와 싸울 때 자기 아이편만 들고, 나와 상관없다고 이웃 어른께 인사도 안하고, 학교 선생님이 조금만 실수해도 비방하고 따지며, 아이가 보는 앞에서 친척과 경제적 문제로 싸우는 일 등은 모두 아이가 자라서 타인을 배려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치명타의 역할을 한다. 두려운 일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던가?

아이의 부모는 지식보다 지혜를 가져야

젊은 부모들은 아이를 키우는 데 경험이 별로 없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 전에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한다는 교육프로그램이 전무한 이유도 있겠지만, 직장 다니면서 먹고 살기에 바빠서 그걸 생각해 볼 여유가 없어는 게 더 큰 이유일지 모르겠다.
요즘은 거의 맞벌이 부부라서 아이를 낳게 되면 노부모가 있으면 또 모르되, 대개 아이 보는 사람을 두다가 어린이집 같은 곳에 맡긴다. 아이가 좀 자라면 유치원에 보내고 이어서 초등학교로 올라간다. 그러니까 아이의 인성 또는 인격이 형성되는 중요한 대부분의 시기를 남에게 맡겨버리는 꼴이 된다. 이것은 어쩌면 현대 교육환경의 비극일지 모르겠다. 설령 아이를 돌볼 수 있는 노부모가 있다고 해도, 노부모에게 교육적 역할을 거의 기대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것은 또 아이에게 옛날식 가치관의 나쁜 영향을 고려한 선입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젊은 부부가 아이에게 어떤 좋은 교육적 환경을 만들어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옆에서 보지 않는 한 직접 알 길은 없다. 다만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사들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그 교사들도 학부모의 부정적인 영향을 좀처럼 말하지 않는다. 학부모가 갑이 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금기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름의 방식대로 아이를 키우다가 성인으로 자라게 하는데, 그 과정에서 성공한 경우는 극소수이고 나머지는 평범한 청년으로 자라고, 최악의 경우는 아이가 삐뚤어져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그때 가서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 그 사례로서 부모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울의 S대학 출신이면서도 이렇게 자녀를 제대로 키우지 못해 후회한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도 수없이 본 적이 있다. 연구자들에게는 그것이 생생한 교육 자료이다.

이런 까닭은 자녀교육이 일회성이기 때문이다. 젊은 부부에게는 자녀 교육에 대한 주변에서 듣거나 본 나름의 정보와 지식은 있겠지만, 자녀를 미리 낳아 길러보지 않았기 때문에 경험은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 옛날처럼 아이를 많이 낳아 기른다면 노인들의 경험도 있고 또 먼저 키운 아이의 경험을 살려 나중에 아이를 잘 키울 수 있겠지만, 요즘은 그게 불가능하다. 경험이 없기 때문에 지혜도 부족하다.
흔히 회사 경영을 많이 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지혜란 경험과 지식의 결합이라고. 지혜의 특성을 잘 지적했다고 본다. 바로 여기서 젊은 부부들이 경청해야 할 일이 있다. 자신들의 경험이 부족하니까 남의 경험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가깝게는 노부모부터 멀리는 강좌나 책을 통해서 앞서 자녀를 성공적으로 키운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귀농해 처음 농사를 짓는 사람이 오랫동안 농사를 지은 농부의 자문을 구하듯이, 그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겸손한 부부는 자녀를 훌륭하게 키울 것이다.

내 아이를 행복하게 하라

어렸을 때 불행하게 자란 아이는 커서 행복한 사람이 되기 무척 어렵다. 필자는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무척 많이 보아왔다. 아이가 설령 부모의 기대에 못 미쳐 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결코 야단쳐서는 안 된다. 아이 자신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인데 그게 야단쳐서 해결될 문제인가? 부모는 아이의 두뇌가 자연스럽게 발달하도록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이렇게 지적인 성장이 느리다면 대신 육체적 성장이나 정서적 성장을 돕고 고려해 보는 것도 중요한 방법이다. 운동을 시켜 보거나 예능 방면의 기초로서 음악이나 미술·무용 등의 활동을 시켜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굳이 운동선수나 예술가를 키우는 일이 아닐지라도. 문제는 무얼 시키든지 아이가 즐거워하며 행복감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일에 아이가 행복감을 느꼈다면 성공의 씨앗은 싹튼 셈이다. 그 행복감을 계속 유지하도록 도와주고 관리해주면 아이는 스스로 자라기 때문이다.

나쁜 친구와 어울리며 멋 부릴 때


나쁜 친구와 어울리며 멋 부릴 때

 

사귀는 친구 때문에
잘못해서 야단맞을 때 아이는 친구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교실에서 잘못하여 지적당할 때도 자기는 가만히 있었는데 친구가 건드려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을 미루어 보면 집에 가서 부모에게도 그렇게 말하거나 행동할 공산이 크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저학년 아이들의 수준에 해당된다. 이때 부모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아이가 좀 자라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이 되면 친구 탓을 하기보다 친구를 따라 부모 몰래 딴 짓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좋은 친구를 사귄다면야 걱정 없겠지만, 몰래 어디로 놀러가거나 오락실 따위에 출입하는 것은 그나마 작은 문제이고, 불량배들과 어울려 담배나 술을 입에 대기도 하고,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청소년 범죄에 가담하기도 한다. 이런 일을 어떻게 예방하여야 할까? 특히 맞벌이 부부의 자녀로서 집안에 아이를 돌보거나 감독할 사람이 없을 경우 이런 위험에 노출되기가 쉽다. 또 한 부모 가정이나 부모 없이 조부모가 양육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불량배들은 그런 가정 출신의 아이들을 노린다고 봐야한다.

선생이 쓴 『소아수지』의 한자 ‘小我須知’는 ‘아이들이 알아야 할 것’이라고 옮길 수 있지만, 아이들이 어떻게 그것을 이해하고 실천하겠는가? 그것을 교육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이들에게 주지시켜야 할 것’ 다시 말해 교육을 통해 어린이들이 체득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보면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그래서 친구나 남을 대하는 문제에 대해서 선생은 이렇게 경계시킨다.

〔16〕한가하고 일없는 사람을 대하기 좋아하고 잡설을 일삼아 본업을 그만 두는 일(好對閒人, 雜說廢業)

한가하고 일없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놀기 좋아하고 술과 시와 풍류를 즐기는 부류가 아닐까? 때로는 한량이라 일컫기도 했지만 요즘말로 말하면 문학과 예술에 취향이 있거나 몰두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친구이든 나이든 어른이든 상관없이 아이가 이런 사람을 따르는 것을 경계했다. 더구나 예술이나 문학에 종사하게 되면 여러 가지 이론이나 생각이 있을 터, 그것을 잡설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본업이란 도학, 곧 성리학을 공부하는 일을 말할 것이다. 당시는 문학이나 예술이 오늘날처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서 시를 짓는 사람이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또 글씨나 서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경치 좋은 곳에 몰려다니면서 각자의 시를 읊기도 하고 그것을 평하기도 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선생과 같은 도학자의 눈에는 그것이 좋아 보일 리 만무하다.
그래서 이글의 행간에는 남을 따르는 문제 곧 친구사귀는 문제가 들어 있다. 자기 나이를 기준으로 보아 다섯 살 위아래는 친구가 될 수 있으니까, 나이 어린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해당될 것이다.

내 아니는 어떤 기준으로 친구를 사귈까?

오늘날 사람들이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외모일까? 아니면 가정의 배경일까? 상대방의 인간성 때문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같이 한 경험 때문일까? 한 가지로 정해 답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필자가 사귀는 친구의 경우도 같이 한 경험, 곧 같은 학교에서 배웠다는 점과 서로에게 어울리는 인간성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떤 기준에서 사귈까? 논리상 위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동네에 살거나 같은 학교나 학원에 다녀서, 나와 같이 잘 놀아주고 먹는 것도 사주어서, 마음이 착하고 내게 잘 대해 주어서, 나보다 능력(힘, 주먹)이 뛰어나서 사귀는 것으로 보인다. 대개 자기중심적이다.
그런데 현대의 경쟁하는 사회에 살다보니 영악한 사람들이 사귀는 것은 다소 의도적이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거나 돈 많은 부자이거나 권력주변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사귀려고 한다. 그래서 대형교회에 출석하여 은근히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도 하고, 향우회나 동창회 등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모두 자신의 이득을 위해 사람을 사귄다고 하겠으니, 아이들처럼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친구의 덕을 사귄다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그 사람의 덕(德)을 사귀는 것으로 여겨왔다. 『동몽선습』에 이른 말이 보인다.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그 사람의 덕을 사귀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를 사귈 때에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골라야 한다. 혹시라도 사귀면서 놀 때 학문과 덕을 닦는 일에 함께하지 않고, 단지 기뻐하고 버릇없이 친하며 장난하고 농담하는 것을 친하다고 여긴다면, 어찌 친구 관계가 오래가겠으며 멀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붕우유신」)

 

친구 사귀는 기준이 명확하다. 바로 덕이 있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사귀라고 당부하는 것도 바로 여기서 근원한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친구 사귀는 것이 이러한가? 덕이 있든 없든 먼저 자기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을 친구로 사귀지 않는가? 어른이 되어서도 이러면 혹 누가 나쁜 마음으로 접근해도 쉽게 넘어가 사기를 당할 소지는 충분히 있지 않은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선생도 친구를 사귀는 문제에 대해서 『격몽요결』에서 이렇게 경계하고 있다.

친구를 사귈 때에는 반드시 배우기를 좋아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며 행동이 반듯하고 엄격하며 정직하고 참된 사람을 고른다. 그런 친구와 함께 생활하며 친구가 행동을 바로잡고 조심하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나의 결점을 줄여나간다. 만약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고 나약하며 아첨하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친구로 사귀어서는 안 된다

(「접인장」).

‘친구는 나의 거울’이라는 말도 이와 관련되는데, 나의 단점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친구가 좋은 친구이다. 나의 잘못된 비밀을 숨겨주고 나쁜 곳에서 함께 놀며 나의 기분만 맞춰주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다. 결국 유유상종하게 되니 나도 그 사람처럼 되어버리고, 결국은 실패한 인생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젊은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노인들은 인생을 이렇게 산 사람의 말로가 비참하게 된 모습을 살아오면서 많이 보게 된다. 이 또한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멋 부리고 낭비할 때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대개의 아이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멋 부리고 시간과 돈을 낭비할 때가 많다. 아이돌 가수나 연예인 흉내를 내느라 머리 꾸미고 화장하며 몸치장 하느라 시간과 돈을 허비한다.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한번 눈여겨보라!
부모들은 아이들이 이러면 안 좋은 줄 알면서도,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으면 또래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할까봐 울며 겨자 먹기로 내버려 둔다. 어른들도 어렸을 때 연예인을 흉내 내고 다 이래 봤으니 한 때의 문제라고 가벼이 보아 귀엽게 넘어갈 수 있다.
선생이 살았을 당시도 배우는 자들이 이렇게 본업을 망각하고 다른 데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선생은 다음과 같이 경계한다.

〔17〕초서 쓰기를 좋아하고 함부로 끼적거려 종이만 더럽힐 때(好作草書, 亂筆汚紙)

초서(草書)란 서체의 하나로 한자를 흘려 쓴 글씨이다. 필자는 몇 십 년 한문을 공부해 왔지만 초서를 못 읽는다. 초서는 글자가 까다로워 다시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서로 적인 옛 문헌에서 보통의 한자로 옮기는 작업을 탈초(脫草)라 부르는데, 이 분야의 전문가는 희귀하다.
그런데 왜 초서 쓰기를 좋아했을까? 붓으로 한자로 문장을 많이 쓰다보면 획수가 복잡하고, 또 자주 나오는 한자를 자연스럽게 그 획수를 생략해서 쓰게 되면서 초서가 유용하게 되었다. 아마 초서도 그런 필요성에서 생겨났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초서가 서예로서 하나의 예술 분야로 자리 잡고, 또 못난 어떤 이들은 남에게 자랑하기 위하여 초서를 갈겨댔다. 초서를 모르는 사람을 문맹자로 만들고서는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바로 선생은 아이들이 인간의 덕보다는 이런 잔재주에 마음이 빼앗기는 것을 경계했다. 선생이 살았던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의 시대정신에서 볼 때 당연한 말씀이다. 그러나 성리학자라고 해서 필요에 따라 초서를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선생의 경우 즐기지 않았다고 믿어주어야 할 것 같다.

창작과 예술 교육

선생이 살았을 때의 시대정신에서 볼 때 선생의 말은 타당성이 있고, 게다가 친구 사귀는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가하고 일없는 사람’과 ‘잡설’이나 ‘초서’가 상징하는 예술이나 문학에 대해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성리학이 뒷받침하고 농업이 주된 생산양식인 전근대적 사회에서 만사를 근본적인 도덕의 잣대로 볼 때는 예술이나 문학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그 도덕률이나 그것이 반영된 인간 사유에 의해 제한을 받기 마련이다. 근본주의적 신학자에게는 인간의 행위가 대부분 타락한 욕망의 발로로 보이듯이, 도덕만을 모든 행위의 준칙으로 삼을 경우 모두 천리를 위반한 인욕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가? 모든 것이 사욕을 위한 것으로 되어버린 지 오래되지 않았는가? 바로 여기서 오늘날 우리가 취해야 할 나름의 기준과 태도가 필요하다. 사실 문학이나 예술이 근엄한 도덕군자에게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그 또한 인간사회에 필요한 요소이니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단지 모두에게 보편적인 도덕률이 필요하듯이 문학이나 예술 또한 이 보편성에서 멀어지면 방종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이 또한 보편적 도덕률이라는 이름으로 제한해서도 안 되며, 그 보편적 도덕률도 예술가나 문학가의 자율에 맡겨진 것뿐이다.

따라서 내 아이가 초서를 쓰든 본업을 팽개치고 잡설을 일삼아도 문제될 것은 없다. 잡설에 능통해 유명 작가가 될 수도 있고, 초서를 잘 써 서예가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이제 그런 근엄한 도덕률에서 해방된 지 오래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예술가가 된들 누가 천한 직업이라 비웃지도 않을 것이고, 작가가 된들 잡학을 한다고 절대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예술가나 작가도 윤리학자처럼 똑같이 대우받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당신의 아이가 종이를 끼적거리며 더럽혀도 괜찮고, 초서쓰기를 좋아한다면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할 것이다.

유행에 민감한 내 아이

그러니 내 아이가 유행 따라 연예인의 흉내를 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도 청소년이었을 때 그랬으니 다 한때 지나가는 바람이니 하고 내버려 두는가? 아니면 본업을 팽개치고 쓸데없는 일에 매달린다고 야단치는가?
필자는 지나치지 않다면 전자의 입장을 지지한다. 필자의 딸도 중학교 때인가 그룹사운드 가수들의 모습에 빠져 베이스기타와 앰프가 달린 스피커를 사 달라고 조른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하다가 말겠지 하고 큰맘 먹고 사 주었다. 그랬더니 한두 달 하다가 그만두었다. 또 한 번은 어떤 코스프레에 참여한다고 가위로 천을 자르고 재봉틀로 박고 야단을 치더니 그것도 한두 번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 뒤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였고, 지금은 나름 원하는 직장에 잘 다니고 있다.

아이들은 유행에 민감하다. 지나쳐서 본업을 망치지 않는다면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경험은 결코 경험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훗날 큰 자산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큰 안목에서 볼 때 쓸데없는 일은 없다. 다만 지나치면 다른 일에 방해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설령 본업이 아닌 그 쓸데없는 일에 더 빠진다면 그것 또한 본업이 될 수 있다. 부모의 현명한 판단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방심하고 멍청하며 잘못을 숨길 때


방심하고 멍청하며 잘못을 숨길 때

조는 아이
요즘에도 학교에서 조는 아이가 있을까? 당연히 있을 것이다. 이것은 초등학생보다도 중학생 이상인 아이들에게 해당될 게 확실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수면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개 밤늦게까지 학원공부나 보충공부를 하느라 늦게 자고 또 새벽같이 일어나 학교에 등교하기 때문이다.
한 때 이런 괴담도 있었다. 학원에서 학교보다 잘 가르치니 학교에서 배울 게 없어서 차라리 잠을 잔다는 소문이 그것이다. 정말로 이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중학교에 근무하는 후배 교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막무가내로 엎드려 자는 아이가 있다고 한다. 교사가 깨우면 되레 화를 내고, 야단치면 대들기까지 한다고 한다. 무서워서 야단치기도 어렵단다. 차라리 내버려 두는 게 서로 간에 암묵적 합의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교육현장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따지지는 않겠지만, 공부시간에 조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사실 필자도 졸음을 참을 수 없어 졸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그때는 선생님에게 발각될까봐 조심해서 오른 손으로 머리를 짚는 척 눈을 가리고 듣는 척 했다. 졸았던 원인은 공부 때문이다. 밤늦도록 공부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또 공부하고 게다가 자취생 처지로서 먹는 것도 부실했으니 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객이 전도된 일이기는 해도 학원 공부 때문은 아니다.

초등학생의 경우에는 특별한 경우를 빼고 아이들의 발달과정에서 볼 때 조는 일은 거의 없다. 조는 일보다 장난치거나 떠드는 일이 더 많다. 어쩌다 조는 경우에는 대개 무슨 사정으로 전날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이다. 좀 거시기한 일이지만 밤새껏 동영상 보다가 잠을 설쳐 조는 녀석들도 어쩌다 있다.
그런데 이렇게 공부시간에 조는 일은 요즘에만 있는 일은 아닌 모양이다. 율곡 선생이 살았던 당시에도 공부시간에 멍하니 앉아 졸았던 모양이다. 그러서 선생은 이렇게 경계했다.

〔14〕마음을 놓아버리고 멍하니 낮에도 앉아서 조는 일(放心昏昧, 晝亦坐睡)
방심하는 내 아이

‘마음을 놓아버리다’의 원문은 방심(放心)이다. 오늘날도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방심하지 말라고. 이 말은 원래 『맹자』에 등장하는데,

“사람들은 닭이나 개를 놓아두면 찾을 줄 알면서도 본심을 놓아버리고도 찾을 줄 모른다

(「고자상」).”

에서 온 말이다. 여기서 본심이란 인간의 선한 성품으로서 갖춰졌다고 여긴 인(仁)과 의(義)를 보존한 마음이다. 그러니까 한 곳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주로 쓰이는 요즘 말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선생이 말한 방심은 『맹자』의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단지 공부하는 일에만 방심하고 앉아 존다고 말한 것 같지는 않다. 이점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격몽요결』을 들여다보자.

일이 있으면 이치대로 일에 대응하고 책을 읽을 때는 정성으로 이치를 연구한다. 이 두 가지 일 외에는 조용히 앉아 이 본래의 착한 마음을 모아서 고요하게 하여 어지럽게 일어나는 잡념이 없게 하고, 밝고 밝게 하여 어두워지는 잘못이 없게 해야 한다. 이른바 경(敬)을 가지고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 이와 같다

(「지신장」).

방심하지 않는 방법으로서 경(敬)을 말했다. 경은 성리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의 상태로서 한곳에 집중해서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다. 일종의 감찰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마음으로 본래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깨어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더라도 오늘날은 집중하지 않고 멍하니 졸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늘 깨어서 선한 본성을 갖춘 본심을 잘 유지하라고 한들 그것을 따를 아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경험적으로 볼 때 누가 믿겠는가? 물론 그 반대로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래서 학생이 낮에 특히 공부시간에 조는 것은 방심한 일은 틀림없다. 공부하는 사람이든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든 사업하는 사람이든 일하는 중에는 멍하니 있으면 안 된다. 물론 졸아서도 안 된다. 그러나 사람인 이상 멍할 때도 필요하다. 요즘말로 ‘멍 때린다’고 하는데, 그럴 때가 필요하다. 우리의 두뇌는 무조건 많이 쑤셔 집어넣는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학습과 휴식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진행되어야 잘 작동된다. 그래서 그 휴식시간에 멍하게 있을 필요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멍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모든 시름과 걱정을 다 잊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방심하지 말라는 선생의 의도는 공부할 때는 집중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매사에 인간의 착한 본성이 발휘되는 마음 상태를 깨어있어 잘 유지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후자가 더 선생의 뜻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절실히 경계할 것이 있다. 선생은 이렇게 지적한다.

 

〔15〕부족함을 비호하고 잘못을 숨기며 말에 진정성이 없을 때(護短匿過,言語不實)
믿음이 안 가는 아이

멍청하게 있거나 낮에 조는 것보다 자기의 부족한 점을 변명하거나 잘못을 숨기여 말에 진정성이 없는 것이 실제로는 도덕적으로 더 위험하고, 인성도 좋지 않다. 참으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 같이 자란 동무들 가운데도 이런 아이가 있었다. 또 필자는 교사로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이 있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면 간혹 실제로 믿음이 안 가는 아이가 있었다. 자기가 잘못하고도 늘 다른 아이의 탓으로 돌리거나 변명하고, 제 딴엔 결정적 증거가 없다고 판단되면 아니라고 우기는 일이 그것이다. 아이가 상습적으로 이러면 더 이상 야단치거나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진다. 다만 불미스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할 뿐이다.

경험적으로 볼 때 이런 일을 고치려면 아이가 자라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할 능력으로서 도덕성이 성장하도록 기다려야 한다. 어릴 때는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되돌아보아 반성할 정도로 정신적 능력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야단치거나 혼내서 못하게 하는 것은 잠시 그런 행동을 보류하게 만들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만두게 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사실 아이가 이런 것은 어릴 때의 양육과정에서 최초의 그리고 그 이후 연속해사 그런 행위가 자신에게 이로움이 되었던 나쁜 경험을 시작으로 학습된 결과 때문이다. 쉽게 말해 거짓말하고 남을 속여서 나름의 이득을 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런 시도에 실패하고 그 벌로서 야단을 맞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유아기 때는 대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한다. 네 것 내 것의 구분이 불분명하며 거짓말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모른 채 자신의 욕구나 욕망만 충족시키려고 한다. 그 욕망의 대상이 대개 먹는 것이나 노는 장난감 따위이다. 그때 부모나 누군가가 그런 행위가 나왔을 때 분명하게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분해 주어야 한다. 내 것이 아니라면 주인의 허락을 받게 하고, 거짓말을 못하게 해야 한다. 그때 부모가 애매모호한 태도로 때로는 아이의 편을 들어 옹호하면 그런 도덕적 사태를 잘못 해결하는 학습을 하게 되고, 그것이 누적되면 믿음이 안 가는 아이로 성장하게 된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홀로 있을 때도 삼가다

배우는 학생만이 아니라 인간인 이상 누구나 정직해야 한다고 다들 알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학교에서 도덕시간에 그토록 정직을 강조해도,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할 때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주 보이는 것은 인간이 정직하게 사는 것이 참으로 힘들어 보이기도 하다.
물론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할 때가 있다. 여기서 거짓말이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도적한 동기에서 비롯한 정직하지 못한 행위를 말한다. 적어도 언론에 등장하는 비리를 저지른 고위급 인사나 온갖 사기로 입건되어 처벌받는 사람들만 보아도, 우리 사회에 정직하지 못한 일이 얼마나 퍼져 있는지 가히 짐작이 가도고 남는다. 게다가 보통사람들이 세금을 정직하게 내지 않는 탈세나 위장전입으로 저지르는 온갖 비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율곡 선생은 이렇게 사람이 정직하지 못할 것을 경계하여 이렇게 말한다.

마땅히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 겉과 속이 한결같아야 한다. 남이 보지 못하는 깊숙한 곳에 있더라도 마치 훤히 드러난 것처럼 행동할 것이요, 혼자 있더라도 여러 사람과 같이 있는 것처럼 여겨, 푸른 하늘에 밝은 해를 보듯이 남이 내 마음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신장」).

이런 가르침은 『대학』에서도 보인다. 바로 신독(愼獨)이 그것인데, 이것은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삼간다는 뜻이다. 소인배들은 남이 못 보거나 혼자 있을 때는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러다가 남 앞에서는 안 그런 척 근엄하게 행동한다. 이것은 표리가 어긋나는 행위로서 위선이다. 그래서 선생은 겉과 속이 한결같아야 한다고 한다. 겉과 속이 다르면 남이 알까 두렵다.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홀로 남몰래 했다고 자기만 알고 남이 모른다고 여기는 데 있다.

“숨기는 것처럼 잘 드러난 것도 없다.”

는 격언을 생각해보라. 소인들이 아무리 숨겨도 그의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남이 다 아는 것을 정작 숨기는 그 자신만 모르기도 한다. 단지 사람들이 입 다물고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남이 모를 것이라고 여기고 있을 뿐이다.
인생을 헛살지 않았다면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둘러보라. 그들의 인생이나 삶이 어땠는지 조금만 어울려 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않은가? 숨긴다고 숨겨지는 일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선생은 차라리

“푸른 하늘에 밝은 해를 보듯이 남이 내 마음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고 말했는지 모른다. 어차피 다 보이거나 들통 나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 아이가 멍청하게 보이는가?

모든 아이들 심지어 육체적으로 다 성숙한 성인마저도 정신적 능력은 성장한다. 심하게 말해 다 늙어죽을 때까지도 사람 하기에 따라서는 그 능력이 성장하는 사람도 있다.
내 아이가 이웃집 다른 아이에 비해 수학문제를 많이 풀지 못해서 멍청하다고 여기지는 않는가? 국어책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또 아이들과 놀면서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했다고 속상해 하지는 않는가? 그랬다면 당신은 한국의 다수 학부모가 그렇듯이 그 특유의 조바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렸을 때 이웃집 아이보다 내 아이의 학습능력이 뒤 떨어져 외고나 과학고 등에 못 들어가고, 그래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못 들어갔다고 해서 아이의 능력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랬다면 실패를 실패로 받아들인 당신이나 당신의 아이는 정말로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이 될 것이다. 기껏해야 인생 이십 대 초·중반의 상황을 긴 인생의 승부처로 삼는 것 자체가 불행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인 능력이나 도덕성 등은 나이가 들어도 더 발달한다. 그 실패를 실패라 여기지 않고 다만 성장이 늦다고 여겨 꾸준히 경험하고 학습한다면, 종국에는 그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을 능가하게 된다. 필자는 그런 분들을 무수히 봐 왔다. 필자 자신을 되돌아 봐도 그렇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국어책에 등장하는 글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수업을 통해서나 참고서에서 말해주는 것 외에는 내 스스로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수많은 경험을 쌓아 책을 읽으니 그 정도의 글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비록 잘 나갔던 또래 아이들보다 느렸지만, 지적 이해력이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는가? 다만 인간의 인지발달을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에 평가하여 평생을 좌우하도록 만든 사회의 시스템이 좀 원망스럽긴 해도, 인생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긴 안목으로 내 아이의 성장을 기다려 주고 또 격려해서 도전시킬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내 아이가 게으르고 독서에 소홀할 때


내 아이가 게으르고 독서에 소홀할 때

 

아이가 독서의 즐거움을 아는가?
지난 수년 사이 도서관이 참 많이 생겼다. 필자가 쓴 책의 작가로서 초청을 받아 강의를 하러 다니면서 보면 생각보다 크고 작은 도서관이 많이 생겼다. 아마도 지방자치단체의 장들이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거나 자신의 실적을 위해 그렇게 크고 작은 도서관을 만든 모양이다. 그리고 주5일제 수업을 하다 보니 토요일에 아이들이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토요일 도서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곳도 있다.

그런데 강의를 다니면서 그 내막을 자세히 들어다 보면, 학생이 좋아해서 프로그램에 참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부모의 성화나 권유에 못 이겨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마저도 대부분 3~4학년 정도이고, 5~6학년 아이들은 가뭄에 콩 나듯이 보이곤 했다.
이런 상황은 우연이 아니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책을 쓰면서 출판사로부터 꼭 요청받는 사항이 있다. 책의 난이도를 3~4학년 수준에 맞게 써달라는 점이다. 왜 초등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면서 5~6학년 수준으로 올리지 않은지 의문을 가졌지만, 금방 그 실태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 학년이 되면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기 때문에 독서할 시간이 없단다. 그래서 입시에 도움이 되는 영어나 수학 위주로 선행학습을 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이 학년이 되면 아이들은 책 읽기를 대개 싫어한다. 그 원인은 간단하다. 지식 위주의 문제풀이 학습을 시키다보니 아이들이 흥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책보다 더 재미있고 자극적인 일이 좀 많은가? 그러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이런 상황이 되풀이 된다. 대학교에 가서 비로소 책을 읽고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부닥치는데, 독서력이 부족하여 숱한 어려움을 겪는다. 우연히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죽하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필자의 철학동화도 대학교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겠는가?

물론 예외는 있다. 초등하교 고학년이 되어서도 그리고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독서력이 왕성한 아이들이 더러 있다. 필자는 그런 학생이 입시에 실패했다는 얘기를 거의 들어 본적이 없다. 왜 그럴까?
아무튼 그 옛날에도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독서할 것을 권장했다. 이와 관련해 선생도 아이들에 경계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12〕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며 게을러 책을 읽지 않는 것(蚤寐晚起, 怠惰不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

선생의 생각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을 좋게 본 것 같다. 그런데 예전에 아이들이 공부했던 초등학교 저학년 바른생활 또는 도덕책을 보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착한 어린이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이와 약간 상반 된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늦게까지 자지 않고 독서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아닌지 따져 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성인의 경우 늦게까지 독서하고 일찍 일어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물론 선생의 우려대로 아이들이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일’은 도덕적 차원을 떠나서 볼 때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 일찍 자면 일찍 일어나는 게 상례인데, 그렇지 못하다면 어떤 건강이나 습관상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 선생의 희망사항은 이치에 옳을까? 아이들은 선생의 희망과 달리 대개 늦게 자면 십중팔구 늦게 일어난다. 예전에 늦게 일어나 지각하는 아이들을 보면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거나 게임하다가 그런 경우가 더러 있었다. 지각은 하지 않았으나 늦게 일어났으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준비물로 못 챙겨 허둥대다가 엄마가 대신 갖다 주는 일도 가끔 있었다.
이러니 선생의 말을 잘못된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선생이 말처럼 ‘늦게 잔다’고 할 때의 시간적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해가 떨어지면 금방 깜깜해진다. 호롱불이나 등잔불이 없으면 아무 활동도 할 수 없다. 해가 긴 여름철이면 모르지만, 겨울철이라면 오후 5시만 되어도 벌써 컴컴해진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오후 9시만 되어도 밤이 꽤 오래된 것이다. 필자도 어렸을 때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9시 정도는 아이들에게는 깊은 밤이다. 그러니까 선생이 아이들이 늦게 잔다는 것도 적어도 오늘날 기준으로 볼 때 10시를 넘지 않을 것 같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10시 정도면 초저녁이니 옛날로 보면 더 늦게 잔다고 하겠다.
아무튼 선생의 말을 잠만 자지 말고 열심히 독서하라는 말로 보아도 되지만, 요즘말로 하면 늦게까지 텔레비전이나 스마트 폰 너무 오래 보지 말고 책 좀 읽으라고 하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선생의 속뜻은 독서할 시간을 많이 가지라는 의미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경계한다.

 

〔13〕독서할 때 서로 돌아보며 잡담하는 것(讀書之時, 相顧雜談)

독서 할 때 서로 돌아보며 잡담한다는 것은 여럿이 함께 책을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이 여럿이 함께 공부하는 곳이란 대개 서당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누가 아이들을 모아 놓고 글을 읽게 했을 것이다.
이걸 보면 오늘날 학교 교실에서 담임교사가 책을 읽게 하거나 토론이나 토의를 위해 어떤 텍스트를 미리 읽어보게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럴 때 그걸 읽지 않고 잡담하면 되겠는가? 따라서 이런 일을 금하는 것은 예나지금이나 변함없는 일이다.

내 아이이게 무얼 읽힐까?

그러니 독서 자체를 반대할 사람은 없겠다. 문제는 무얼 읽느냐이다. 선생이 독서를 강조했다고 해서 지금의 입장에서 독서를 말하면 좀 문제가 있다. 이점을 좀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선생이 독서에 대해 얼마나 강조하느냐 하는 점은 『격몽요결』에 「독서장」라는 글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선생은 여기서 독서를 하는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배우는 자는 항상 이 마음을 보존하여 외부의 사물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이치를 연구하고 선을 밝힌 뒤에야 마땅히 행할 길이 분명하게 눈앞에 있어서 진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길에 들어가는 것은 이치를 연구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은 독서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성현들이 마음 쓴 자취와 선을 본받고 악을 경계하는 것이 모두 책이 있기 때문이다

(「독서장」).

 

결국 독서란 선한 이치를 연구하기 위함이며, 그 이치를 알아야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한 이치는 성현들이 남긴 자취에 있기 때문에 독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선생은 무엇을 읽어야 할지 여기서 밝히고 있다. 그 독서의 순서는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예경』, 『서경』, 『역경』, 『춘추』과 송 대 성리학자들이 남긴 글을 읽으라고 권고하고 있다. 모두 유교경전이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읽는 것과 차이가 있다. 이것들은 지금 우리가 의무적으로 읽어야 할 책은 아니다. 그냥 하나의 고전으로서 읽어야 할 책들이다. 더구나 이 책들을 어린이들이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다. 이것을 어린이들의 수준에 맞게 발췌하여 재해석해서 풀이해주는 것은 몰라도 원전 그대로 절대로 읽힐 수 없다. 동양철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사서(四書)는 몰라도 오경까지 통달하기는 매우 벅차다.

오늘날 아이들이 읽어야 할 책들은 대개 권장도서 목록이라 하여 게시하고 있는데, 이것도 합당한지 의문이다. 선정위원의 전공이나 능력을 감안할 때 그렇다. 영역별 주제별 도서가 무척 많기 때문에 학부모들도 선정해 골라주기에는 매우 벅차다. 게다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 좀 많은가? 지금 출판 시장은 어른들이 책을 잘 읽지 않으니까 어린이들을 위한 책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읽든 안 읽든 좋아하든 싫어하든 입소문이나 남의 말을 듣고 책을 사주니까 그렇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아닌지는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아이의 수준에 맞는 책이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왜 책을 읽어야 할까?

독서의 필요성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말해왔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말하면 식상할 것이다. 해서 남들이 말하는 것은 생략하고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말해보려고 한다.
선생은 책을 읽는 이유를 선한 이치를 탐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것에만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것은 물론이요, 즐거움을 얻거나 위로를 받기 위해서 읽기도 한다. 그런 것을 위해 독서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것 외에 책을 읽는 이유가 또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필자가 살아오면서 해 온 독서의 이유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물어보기 위해 책을 읽는 일이다. 우리가 살다보면 물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크게는 세상이 왜 이렇게 부조리 한지, 내세는 있는지,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인지, 리더의 역할은 어떤 것인지, 행복하게 사는 것이란 어떤 삶인지,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건강하게 살려면 무얼 먹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제의식을 갖고 독서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물음이 진지할수록 진지한 답을 얻을 수 있고, 건성으로 물으면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그 답을 쉽게 얻으면 쉽게 잊어버리고 힘들고 고생해서 얻으면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이처럼 독서는 물음의 답을 찾는 과정이다. 바쁘고 젊을수록 더 물어야 한다. 필자도 소싯적에 큰 물음을 갖고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답을 깨닫고 얼마나 기뻤던지 나도 모르게 덩실덩실 춤을 춘 적이 있다. 독서의 기쁨은 그런데서 오고, 그래서 책을 더 읽게 된다.
나이가 들면 직장에서 은퇴하고 몸도 쇠하고 할 일이 없어 자칫 뒷방 늙은이로 취급받기 일쑤다. 이럴수록 깨달음을 통한 지혜가 있어야 노후가 빛날 수 있다. 깨달음이란 사색을 통해서 얻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독서를 통해서 얻기도 한다. 책의 저자는 별 생각 없이 말했는데도, 독자가 어떤 문제를 두고 갖은 고민했다면 저자의 사소한 말 때문에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그것도 독서의 매력 가운데 하나이다.

어떻게 읽을까?

독서의 방법에 대해서 쓴 책이 많다. 옛날 사람이 쓴 것도 있고 요즘 사람들이 쓴 것도 있다. 그런 것을 참고하면 되겠기에 여기서 그걸 새삼스럽게 말하지 않겠다. 다만 『격몽요결』에서 말한 선생의 방법을 소개하면 이렇다.

무릇 책을 읽을 때에는 하나의 책을 숙독하여 그 의미를 다 깨달아 꿰뚫어서 의문이 없어야 한다. 그런 뒤에 다른 책을 읽어야 하고, 많이 읽기를 탐하거나 빨리 얻으려고 이 책 저 책 섭렵하지 말아야 한다

(「독서장」).

선생은 다독보다 정독을 권장했다. 도덕적 지식을 구하므로 이렇게 권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내용에 따라 다독할 때도 있고 정독할 때도 있다. 그러니 어느 한쪽에 매달릴 필요는 없겠다.
여기서 좀 더 창의적으로 상상력을 계발하는 독서법을 소개해보겠다. 예전에 아이들에게 많은 써 먹은 방법을 응용하는 것인데, 가령 이야기의 결말로 끝맺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상상해 보라는 식이다. 그냥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묻는 방식이다.

더 나아가 흥부와 놀부가 훗날 어떻게 살았는지, 나무꾼과 선녀가 각각 어떻게 살았는지 묻는 방식에서 좀 더 진행해 작가의 의도를 묻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왜 콩쥐 팥쥐 이야기에는 아버지의 역할이 빠져 있는지, 해와 달이 이미 있었는데 오누이가 호랑이를 피해 하늘에 올라가 해와 달이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등을 따져서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생각해보는 것 등이 그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 얼마나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럴 듯하게 인과관계가 연결되게 말하면 최상이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나 행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