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율곡학 인물들

홍천경(洪千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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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경(洪千璟, 1553년〜1632년)은 조선시대 중엽에 남원교수,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 고경명(高敬命) 등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광해군 1년에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김천일 장군을 도와 군량의 수집과 수송을 담당하고 정유재란 때는 권율 장군을 도와 명나라 사신에게 글을 보내거나 의병모집의 격문을 작성하는 등 문서를 관장하였다.

1553년(1세)
명종 8년에 아버지는 홍응복(洪應福)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豊山, 지금의 경북 안동), 자는 군옥(群玉), 호는 반항당(盤恒堂)이다.
어려서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 고경명(高敬命) 등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유학에 조예가 깊고, 충의 정신이 강했다.

1589년(36세)
이해 10월 기축옥사(己丑獄事) 사건이 일어났다.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발로부터 시작된 이 사건은 정여립과 함께 수많은 동인들이 희생을 한 사건이다. 당시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이 이 사건을 조사, 지휘하였는데, 자신 당한 개인적인 원한과 서인들의 집단적인 분노를 이 사건으로 해소하고자 하였다. 동인의 편에 서 있던 윤선도는 자신의 저서 고산유고(제3권)에서 기축옥사와 관련하여 홍천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한 적이 있다.
“기축년(1589년, 선조 22년)에 옥사(獄事)를 조작할 당시에, 위관(委官)인 정철(鄭澈)과 동복(同福)의 소유(疏儒)인 정암수(丁巖壽)와 나주(羅州)의 사인(士人)인 홍천경(洪千璟) 등이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날조하여 비단에 문채를 수놓듯 온갖 방법으로 얽어매었는데, 그때에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거론하여 하나의 죄안(罪案)으로 더 첨가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어찌하여 세월이 오래 지난 오늘에 와서야 이런 말이 있게 되었단 말입니까. 그 말이 진실이 아니고 실로 날조된 것임을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윤선도는 홍천경의 인물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하였다.
“임오년(1582) 연간에 유몽정(柳夢鼎)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을 당시에, 정개청(당시 나주교수羅州敎授)의 제자인 나주 사인(士人) 나덕준(羅德峻)과 나덕윤(羅德潤) 등이 대안동(大安洞)에 서재를 짓고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어느 날 나덕준 등이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고 정개청을 받들어 귀한 손님으로 모셨습니다. 유몽정 나주목사가 이 말을 듣고 가서 참관하면서, 그 성대한 예절의 모습을 찬미하며 탄식하기를 ‘고례(古禮)가 행해지는 광경을 오늘 보게 되었으니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고을은 바로 인재의 부고(府庫)인데 한갓 사장(詞章)만 힘쓰고 있으니, 모름지기 선생 같은 분을 얻어야만 사림의 기풍을 변화시킬 수 있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봉소(封疏)를 올려 위에 아뢰자, 정개청을 제수하여 나주 훈도(羅州訓導)로 삼았습니다.
이에 정개청이 재삼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몸을 일으켜 부임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옛사람들이 전한 스승과 제자의 예법을 엄격하게 행하는 한편, 《소학(小學)》 및 《여씨향약(呂氏鄕約)》 등 성경현전(聖經賢傳)으로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全)》ㆍ《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을 베풀고, 틈틈이 《가례(家禮)》ㆍ《의례(儀禮)》ㆍ《예기(禮記)》 등 제서(諸書)를 가지고 정성스럽게 교도(敎導)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행한 지 1년 남짓 되는 사이에 효제(孝悌)와 예의(禮義)의 기풍이 향당(鄕黨)의 사이에 날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문인(文人) 재자(才子)로서, 한갓 글 짓는 것을 가지고 스스로 높은 체하는 자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조소하고 희롱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교생(校生)인 홍천경(洪千璟)이라는 자가 자신의 글 솜씨를 뽐내며 한 번도 향교(鄕校)에 들어오지 않자, 정개청이 목사(牧使)에게 고하여 회초리로 다스렸으므로 그가 마침내 앙심을 품기에 이르렀는데, 정개청은 이를 개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윤선도는 홍천경이 정여립 모반사건의 조작에 관련되어 있다 증거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아, 정개청이 자주 정여립과 산사에서 만나 모의하면서, ‘누구를 섬긴들 나의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한다면,(이런 일이 있었다고 서인들이 고발한 것임-필자 주) 그 상황에 정말 의심할 만한 점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같은 마을의 홍천경(洪千璟) 등이나 이웃 고을의 정암수(丁巖壽) 등이 몰랐을 리가 결코 없는데, 나주에서 무함하여 보고할 때나 위관(委官)과 함께 죄를 얽어 만들 즈음에 어찌하여 이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문집인 기언(記言)에 「정곤재(개청)의 사적」이 실려 있는데 여기서 허목도 다음과 같이 홍천경을 비판하였다.
“곤재(困齋) 선생 정씨는 휘가 개청(介淸)으로 선조 때의 징사(徵士)이다. 선생은 옛것을 독실하게 믿고 좋아하였는데, 은거하여 글을 가르치니 제자들이 날로 모였다. 선생이 제자를 거느리고 대안학사(大安學舍)에서 향음주(鄕飮酒)의 예를 행하자 목사 유몽정(柳夢鼎)이 가서 보고 감탄하기를 “삼대(三代)의 예가 여기에 있구나!” 하고, 그 훌륭함을 나라에 천거하여 주(州)의 훈도(訓導)로 삼았다. 선생(정개청)은 사제의 예를 엄격히 하여 교육하였는데, 한결같이 《소학(小學)》과 《남전향약(藍田鄕約)》을 따르고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중히 여겼다. (당시) 향교의 생도 중에 홍천경(洪千璟)이란 자가 있었는데, 조소하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므로 목사(나주 목사 유몽정)가 그를 벌주었는데, 도리어 말을 꾸며 내어 비방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1592년(39세)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1537년〜1593년)의 의병에 합류하여 군량의 수집, 수송 등을 담당하였다.

1597년(44세)
일본군들이 다시 침략해왔다.(정유재란) 도원수 권율(權慄)의 부대에 소속되어 문서를 관장하고, 의병모집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1609년(56세)
광해군 1년.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함에 따라 대북파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이 광해군을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었다. 광해군은 직위 초에 당쟁의 폐해를 억제하기 위해서 서인과 남인 측 인사들을 함께 대우하였으나 대북파의 세력은 날로 드세어졌다. 이에 따라 이해 10월 11일 서인에 속했던 홍천경에 대해서 사간원은 광해군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홍천경은 본시 성품이 음흉하고 간특한 사람으로서 어진 선비를 무함하다가 사림(士林)에 죄를 지어 잇달아 정거(停擧, 과거 응시자격 제한)를 당했으니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자입니다. 지난번 복시(覆試) 때에도 공론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또 정거를 당해 첫 날에는 응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곧바로 정거가 풀려 복시에 참여하였습니다. 대체로 정거를 해소하는 규례는 여러 사람의 의논이 합치된 뒤에야 할 수 있는 것인데 몇몇 사람이 멋대로 해소시켰으니, 이것은 옛 규례를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공론을 무시한 것이 그지없습니다. 따라서 그날 해소시키기를 주장한 사관(四館)의 관원들을 모두 파직시키소서.”
이러한 건의를 받고 광해군은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홍천경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하지만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 너무 심하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 어찌 영원히 버릴 수 있겠는가. (과거 응시자격 제한을) 풀어준 사관의 관원을 파직시키는 일에 관해서는 윤허하지 않는다.”
이러한 보고가 있고 3일 뒤 10월 14일 열린 광해군 등극 기념 증광 별시에서 홍천경은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전적, 나주교수, 남원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이해 광해군 일기 10월 14일자 기사 제목은 「등극 증광 별시(登極增廣別試)에 〈응시자에게 책문(策問)을 시험보여〉홍천경(洪千璟) 등 33 명을 뽑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관은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사신(史臣, 사관)은 논한다. 현재 대간이 홍천경의 정거(停擧)를 해소시킨 일에 대해서 사관(四館)을 논핵하고 있는데 천경은 물의를 고려하지 않고 전시(殿試)에 들어갔으니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홍천경이 대인임을 칭찬하는 말이다.

1623년(70세)
음력 3월 12일, 광해군이 실각하고 인조가 등극하였다.(인조반정) 그동안 탄압을 받던 서인 일파가 동인의 대북파와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인조)을 옹립하였다.
이해 홍천경은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32년(79세)
인조 10년에 사망하였다.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작으로 반환유집(盤桓遺集)이 있다.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14년에 간행한 시문집으로, 3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문에는 임진왜란에 종군하면서 느낀 점, 그리고 종전 직후의 감회를 읊은 시들이 많다. 전란으로 인한 고통과 그 피폐에 대한 상심을 잘 표현하였다. 그 외에 명나라 사신에게 보낸 글들도 포함되어 임진왜란 당시 지식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적지 않다.
조선시대 문신 양경우(梁慶遇, 1568년〜?)는 홍천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사문 홍천경(洪千璟)의 호는 반환(盤桓)이다. 어릴 적부터 문장을 업(業)으로 삼아 남쪽 지방에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운수가 기이하여 뜻이 어긋나 나이 오십이 지난 후에야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오래지 않아 또 장원으로 급제하여 폐조(廢朝, 광해군) 때에 전라도 벽사 찰방(碧沙察訪)이 되었다. 그때 참의(參議) 이광정(李光庭)이 분사 지조(分司地曹)로서, 홍공(洪公, 홍천경)에게 곡식 모으는 임무를 맡겼는데, 다른 관원보다 훨씬 우수하게 곡식을 모은지라,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인조반정 후에는 시대의 버림을 받아 한 관직도 지내지 못하고 죽었으니, 슬프다.
그는 평생 시 짓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가끔 기특하고 힘이 있었다. 과거 시험장에서 지은 작품은 붓을 휘두름에 바람이 이는 듯하였고, 시어(詩語)는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니 역시 한 시대의 호방한 재주였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1609년 10월 11일 기사
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1609년 10월 14일 기사
허목, 기언제26권 하편 세변(世變), 「정곤재(鄭困齋) 사적」, <한국고전종합DB>
윤선도, 고산유고(孤山遺稿) 권3, <한국고전종합DB>
김용국, 「홍천경(洪千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8
이원구, 「반환유집(盤桓遺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홍천경(洪千璟)의 글씨(서간문)

윤동로(尹東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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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로(尹東老, 1550년〜1636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공조좌랑, 울산판관,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율곡 이이(李珥)에게 글을 배웠다. 23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45세 때 관직에 있으면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고 회의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삼도수군통제사의 종사관에 다시 기용되었으나, 사사로이 역마(驛馬)를 사용하였다는 이유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탄핵을 받았다. 또 54세로 울산판관에 재직하고 있을 때는 백성들을 탄압한다는 이유로 처벌되기도 하여 관직 생활이 순탄치 못하였다.

1550년(1세)
명종 5년에 생원 윤언성(尹彦誠)과 조우신(趙又新)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자는 기중(期仲), 호는 수심당(水心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윤수천(尹壽千), 할아버지는 윤임형(尹任衡)이다. 율곡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73년(23세)
선조 6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595년(45세)
선조 28년 사과(司果)로 재직하고 있을 때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96년(46세)
공조좌랑에 임명되었다.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고 공식 회의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6월 11일자로 사헌부에서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탄핵 사유가 적혀있다.
“공조 좌랑 윤동로(尹東老)는 【단정하지 않은 벗을 사귀고 멋대로 처신함】는 자신이 낭관(郞官, 육조六曹의 5・6품 하급 관원)의 반열에 있으면서 일이 많은 이 때에 허락도 받지 않고 사사로이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공식 회의 때마다 앓는다고 핑계하였으니, 파직하도록 명하시기 바랍니다.”

1597년(47세)
일본군이 다시 침략을 해왔다.(정유재란) 이때 그는 삼도수군통제사의 종사관에 다시 기용되었다. 하지만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탄핵을 받았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 해 6월 19일자(음력) 지평 남이신(南以信)이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4도 도체찰사(四道 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장계를 보건대, 통제사의 종사관 윤동로가 개인 일로 노복(奴僕)을 내보낼 때 역마(驛馬)를 지급하기까지 하였고, 도원수의 종사관 김택룡은 작미(作米)하는 것을 감독하기 위해 전라도에 있는데, 해당되는 복마(卜馬) 이외에 외람되게 역의 대마(大馬) 4필을 거느렸습니다. 요즘처럼 각역이 심하게 파괴된 때를 당하여 규정을 어기고 물의를 일으킨 점이 이처럼 극에 이르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윤동로와 김택룡은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조사하소서.”

1604년(54세)
울산판관에 재직하고 있었을 때 백성들을 심히 탄압한다는 이유로 처벌되었다.

1629년(79세)
인조 7년,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파흥군(坡興君)에 봉해졌다.
이기룡(李起龍)이 그린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에 윤동로가 참석한 모습이 보인다. 그는 이해 6월 5일(음력)에 숭례문(崇禮門) 앞에 있던 홍첨추(洪僉樞)의 저택에 열리는 기로회에 참석하여 장수를 기원하는 술상을 받았다. 이 때 참석자들은 윤동로를 포함하여 이인기(李麟奇), 이유간(李惟侃), 이호민(李好閔), 이권(李勸), 홍사효, 강인(姜絪), 이귀(李貴), 서성(徐㨘), 강담(姜紞), 유순익(柳舜翼), 심논(沈惀) 등 모두 12명이었다.

1636년(86세)
인조 14년에 사망하였다. (일설에 1635년에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참고문헌>
선조실록 선조 29년 1596년 6월 11일자 기사
선조실록 선조 30년 1597년 6월 19일자 기사
김용덕, 「윤동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

유해(兪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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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兪瀣, 1541〜1629)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율곡 이이의 문인이다. 선조 때 식년시에 생원으로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임진왜란 때에는 종묘에 안치된 신주를 모시고 임금을 따라 피난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었다.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867년(고종 4년)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하고, 정려를 세우도록 하였다. 당시 세워진 정려각이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에 보존되어 있다.

1541년(1세)
중중 36년에 참봉(參奉) 유필성(兪必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필성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참봉(參奉)을 지냈다. 유해의 자(字)는 숙부(淑夫), 호(號) 송암(松庵)이다.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76년(35세)
선조 9년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였다.

1592년(51세)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하였다. 이때 그는 종묘서 직장(宗廟署 直長)으로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에 모셔진 신주(神主)를 받들고 어보(御寶)와 제향의 도구 등을 수습하였다. 이어서 권희(權僖), 이산해, 조공규 등과 같이 임금의 뒤를 따라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1593년(52세)
해주(海州)의 백림정(柏林亭)에 신주(神主)를 봉안(奉安)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임명되었다. 이후 왜란이 종료된 뒤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冊錄)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이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1629년(88세)
인조 7년에 사망하였다. 일설에 1631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1867년(고종 4년)에 국가에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하고, 정려를 세우도록 명했다. 시호는 충렬이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에 유해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 충신각(정려각)이 세워져있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이며, 목조와즙(木造瓦葺) 건물로 내부에는 정려비와 현판이 보존되어 있다.

<참고문헌>
김학경, 「유해」,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우리마을 문화재 -홍동 상하금마을 유해 충신문」, <홍주신문>, 2016.8.10.

유공진(柳拱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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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진(柳拱辰, 1547년〜1604년)은 조선시대 종부시정(宗簿寺正), 우승지, 파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1583년 율곡이 동인에 의해서 파면을 당하였을 때, 성균관 생원들을 모아 변호를 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자신도 파면을 당하였다. 하지만 이 일로 선조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동인들이 오히려 유배를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예조정랑, 사헌부 사간 등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군량의 조달과 수송에 큰 공을 세웠으며 전란 중에 공이 큰 문신 16명 중 첫 번째로 뽑혔다.

1547년(1세)
명종 2년, 선원전(璿源殿) 참봉(參奉) 유자(柳滋)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행(李荇)의 딸 덕수 이씨사이에서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백첨(伯瞻), 호는 이탄(鯉灘),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호조 참의에 추증된 유수(柳璲)의 증손이며, 호조 참판에 추증된 유광식(柳光植)의 손자이다.

1570년(23세)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대과를 준비하였다.

1575년(28세)
이즈음 동서 분당이 심화되어 동인과 서인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서울, 경기 지역을 근거지로 한 기호학파와 영남을 근거지로 한 영남학파가 사상적으로도 대립하였다. 서인을 구성한 기호학파의 중심은 이이와 성혼이었으며, 동인을 구성은 영남학파의 중심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었다. 이에 따라 유공진은 자연히 서인에 합류하게 되었다.

1583년(36세)
성균관 생원 462명을 모아 스승인 이이·성혼의 무고를 밝히는 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유공진을 비롯한 백여명의 성균관 학생들이 과거 응시자격을 박탈당하고 유공진은 투옥되었다. 동인들은 병조판서로 있던 율곡 이이를 탄핵하였으나 주도자들이 오히려 비판을 받아 유배를 당하였다.(계미삼찬癸未三竄) 대사간 박승임(朴承任) 등 동인 측 주요 인물들이 선조의 분노를 산 결과 문책, 파직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유공진은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1년(44세)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 이해 서인 우의정 정철(鄭澈)이 세자책봉문제(建儲問題)로 파직을 당하여 강계로 귀양을 가자, 같은 당파라 하여 경원에 유배되었다.
이 당시 선조실록기록에는 사헌부에서 올린 보고서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조 정랑 유공진(柳拱辰)은 인물이 거칠고 용렬하며, 검열 이춘영(李春英)은 인물이 경망스러워 재상의 집을 드나들었으니 이들을 함께 파직시키소서.”
선조 임금은 이에 건의한 대로 처리하라고 명을 내렸다.

1592년(45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철과 함께 풀려났다. 예조정랑에 임명되었으며 세자시강원보덕을 겸하였다.

1593년(46세)
사헌부사간·사복시정·홍문관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즈음 조정은 광해군을 중심으로 한 분조(分朝, 별도의 조정)를 구성하였다. 유공진은 대신들과 함께 이를 취소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총독에게 올린 상소문의 대략 내용은 최립의 간이집에 다음과 소개되어 있다.
“삼가 살피건대, 일본은 우리나라와 그동안 관계가 서로 나빴던 것도 아니고, 서로 원망을 맺을 만한 일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에서는 자기들의 섬을 텅 비워 둔 채 군대를 총동원하여 소국(小邦, 우리나라)을 침입해서는 거의 몇 년 동안이나 화란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의 뜻이 또 노략질로만 끝내려는 것이 아니라, 기필코 우리나라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난 뒤에 우리의 땅을 병탄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수중(水中) 동물로서 육지의 해안을 따라 서식하고 있는 교룡(蛟龍)이나 악어(鰐魚)처럼 흉맹한 족속이라고나 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소국으로 말하면, 거의 2백 년 동안이나 아무 일없이 태평한 시대에 살고 있었으므로, 대비해 놓은 것이라고 해야 겨우 좀도둑의 도발을 막는 정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처럼 졸지에 지탱하지 못한 채 여지없이 패하여 나라를 잃어버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대체로 왜적이 바라는 형세가 십중팔구는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멀리 굽어 살펴 주시는 (명나라의) 황제 폐하의 신령스러운 위엄에 힘입어 대군(大軍)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듯 소방을 구원하러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평양성(平壤城)에 육박해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사이에 승리를 거두고 수복하자, 왜적이 비로소 깜짝 놀라면서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도성을 점거하고 있던 자들도 그때부터 도망갈 마음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강화(講和)하자는 주장이 빚어지게 되었는데, 사실은 그들이 마음속으로 진정 원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요, 단지 군대의 위협을 완화시켜 보려는 술책일 뿐으로서, 잠깐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힘을 길러 독기(毒氣)를 부리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략)
지금 소국의 형편으로 말하면, 팔도(八道)의 지방 어느 곳에도 밥 짓는 연기를 볼 수 없는 가운데, 겨우 살아남은 자들 역시 천 명 중에 열 사람밖에 되지 않고 백 명 중에 한 사람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두 해 동안이나 농사를 거의 망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지금에 와서도 아직 농사지을 엄두를 아예 못 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왜적의 칼날에 이미 목숨을 잃은 백성들이야 말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지금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들까지도 굶어 죽는 시체가 날이 갈수록 더욱 쌓여만 가는 가운데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장차 모두 죽게 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다시 시일을 끌며 왜적과 대치하게 될 경우, 병력을 유지하고 식량을 마련하여 자력(自力)으로 구원받을 길은 전혀 없습니다.
(중략)
오늘날 소국의 양식이 부족한 것으로 말하면, 대개 병화(兵火)가 처음 일어났을 때보다도 심각합니다. 그래서 구병(舊兵)이나 신병(新兵)을 막론하고, 소국을 구원하러 온 군대에게 어떻게 공급할 도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해에 산동(山東)의 곡식을 보내 주신다는 허락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에는 아직도 운송해 오지 못한 곡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먼 지방에서 운송하다가 혹 뒤늦게 도착한다면 제때에 조달해서 쓸 수가 없을 것이니, 우선 요동(遼東)의 제위(諸衛)와 금주(金州) 등에 비축해 놓은 양식 수만 섬 정도를 꺼내어 중국의 가까운 곳에서 소국의 가까운 곳으로 보내도록 해 주시는 것이 어떨까 하고 감히 요청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하여 얼음이 풀리기 시작할 때부터 배에 실어서 소국의 연해(沿海) 지방에 교대로 풀어 놓게 한다면, 군대가 당장 먹을 식량이 떨어지는 걱정은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다음에는 또 계속해서 대대적으로 군대와 양식을 조발(調發)해서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모등이 이미, 앞으로 몇 만의 군대와 양식이 필요할지 노야의 마음속에 이미 분명히 계책이 서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린 이상, 감히 누누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장군께서 저희들의 발언을 중하게 여겨 주시리라고 감히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바야흐로 구제할 일을 깊이 생각하고 계실 이때에 혹 한 가지라도 도움이 될 말씀을 들려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이렇게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간절히 바라는 절박한 심정을 가누지 못한 채 죽음을 무릅쓰고 두 번 절하며 말씀을 올립니다.”

1594년(47세)
홍문관 응교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양명학 신봉자 이요(李瑤)를 불러들여 그 이론을 경청하고 있음을 우려하는 의견서를 올렸다. 선조 임금이 ‘앞으로 유의하겠다’는 답변을 하였다.

1596년(49세)
사섬시정(司贍寺正), 승문원 판교 등에 임명되었다.

1599년(52세)
관동지방의 사정에 밝다는 이유로 강원도의 조도 겸 독운어사(調度兼督運御史)에 임명되었다. 이에 군량의 조달과 수송에 큰 공을 세웠다. 이후에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임명되고, 전공을 인정받아 숙마(熟馬) 한 필을 하사받았다.

1600년(53세)
비변사에서 전란 중에 공이 큰 문신 16명을 선발할 때 첫 번째로 뽑혔다. 승정원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601년(54세)
산릉도감 도청, 동부승지, 우승지 등에 임명되어 측근에서 임금을 모셨다.

1602년(55세)
동래부사로 임명되었으나 70이 넘은 부친을 봉양한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후 서울에 가까운 파주목사로 임명되었다.

1603년(56세)
세자책봉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임명되었다. 세자책봉을 위해 명나라에 갈 예정이었으나 당시 명나라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출발하지 못했다.

1604년(57세)
이해 1월에 서천(舒川)군수로 좌천을 당하였다. 이에 사임을 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4월 25일, 사망하였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유족으로 안동 권씨 부인과 두 아들, 두 딸이 있다. 첫째 아들은 현감과 호조 정랑을 지냈고, 둘째 아들은 사용(司勇)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선조 24년 1591년 윤 3월 6일 기사
최립, 간이집 제4권, 「사행문록(四行文錄)」, <고전종합DB>
정하명, 「유공진(柳拱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년
진주류씨 대종회, 「승지공 류공진」, 진주류씨 역대인물전, 2006년

이경진(李景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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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진(李景震, 1559년〜1594년)은 조선시대 선조 때의 문신이자 학자로, 황해도 해주 사람이다. 남부 참봉(南部參奉) 이선(李璿, 1524〜1570)의 아들이자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조카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율곡 이이의 부인 노씨를 모시고 고향으로 피난을 가기도 하였으나 향년 34세로 난중에 사망하였다.

1559년(1세)
아버지 참봉 이선(李璿)과 어머니는 종사랑(從仕郎) 곽연성(郭連城)의 딸 곽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이다. 율곡 이이(李珥)의 조카로, 율곡의 친형인 이선(李璿, 1524〜1570)의 아들이다. 성혼(成渾)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자는 성보(誠甫)이다. 본관은 덕수(德水)로 지금의 경기도 개풍이다. 이경진의 동생으로 이경항(李景恒)과 조덕용(趙德容)에게 시집을 간 누이가 있다. 동생 이경향도 성혼에게 배웠으며 참봉을 지냈다.

1564년(5세)
아버지 이선(李璿)이 과거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이후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임명되었다.

1570년(11세)
부친 이선이 사망하였다. 향년 46세였다. 이선은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4남 3녀 가운데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字)는 백헌(伯獻), 호는 죽곡(竹谷)이다. 1551년(명종 6년) 당시 한강의 수운을 담당하는 수운판관(水運判官)의 직위에 있던 아버지 이원수를 따라 동생인 이이와 함께 세곡을 운반하기 위해 평안도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이원수가 권씨를 후처로 들이자 이선은 아버지와 갈등을 빚어 한동안 회덕(懷德, 지금의 대전 대덕구 지역)으로 옮겨가 살기도 했다.

1584년(25세)
이해 2월(음력)에 작은 아버지 율곡 이이가 사망하였다.

1585년(26세)
선조 18년. 동인 정여립(鄭汝立) 등이 율곡 이이를 근거 없이 비난하였다. 이에 이경진은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려 율곡을 옹호하였다.
“신이 듣건대, 정여립(鄭汝立)이 경연에서 신의 숙부(叔父)인 이이를 비방하여 배척했다고 합니다. 이에 신은 놀랍고 괴이하여 스스로 ‘세상에 어찌 이런 경우도 있는가? 다른 사람이 비난했다고 하면 말할 것이 없겠지만 정여립은 반드시 그럴 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집안에 있는 편지를 열람하여 정여립이 숙부에게 보낸 편지를 찾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하 중략) 또 하나의 편지가 있는데, 그 대략을 말씀드리면 ‘생각건대 우리 임금께서 여러 의견을 물리치고 존형(尊兄, 율곡 이이)을 여러 사람들이 미워하는 가운데서 발탁하여 총재(冢宰)로 임용하여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한(漢)·당(唐) 이래 있지 않았던 성대한 일이다. 그것을 보고 듣는 사람이 누군들 감격하지 않았을까마는 저(정여립)의 기쁨이 더욱 컸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는 이이가 조정에 돌아온 뒤의 일입니다. 이 때부터 이이가 죽을 때까지는 겨우 한 달 사이인데, 어찌 (정여립과 이이 사이에) 절교(絶交)한 편지가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상소문을 읽고 선조 임금은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정여립의 행위는 인정에 가깝지 않아서 내가 처음에는 혹 떠도는 말에서 나온 것인가 여겼었는데, 뒤에 들으니 과연 헛말이 아니었으므로 그가 반측 무상(反側無狀, 배신을 잘하는)한 자라고 전교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절교해야 할 까닭이 없다면 비록 다른 사람이 스스로 절교했다 한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절교 여부에 대해서는 더욱 변명할 필요가 없다.”

1587년(28세)
율곡 이이의 문인인 이귀(李貴)가 율곡을 변호하는 상소문(변무소辨誣疏)을 올렸으나 중도에 전달되지 않아 이경진이 대신 전달하였다. 아울러 율곡 이이가 시류(時流)에 휩쓸리지 않는 인물임을 천명하였다.

1591년(32세)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592년(33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작은 어머니인 이이의 부인 노씨(盧氏)를 모시고 고향 해주로 피난하였다. 노씨 부인이 적에게 화를 당하자 양덕현(陽德縣)으로 갔다가 다음해에 해주석담(海州石潭)으로 돌아갔다.

1593년(34세)
스승인 우계 성혼으로부터 강학을 받았다.

1594년(35세)
정월에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임명되었다. 난중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19권, 1585년 6월 16일자 기사
박정자, 「이경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년

임탁(任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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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탁(任鐸, 1544년〜1593년)은 조선시대 상서원직장, 제술관, 도감랑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선조 9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행실이 독실하여 주변 선비들이 추종하였다.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율곡과 우계가 탄핵을 받았을 때 그는 성균관의 유생들을 모아 변호하다 그 역시 탄핵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소모관(召募官)에 임명되어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지에서 병사와 군량을 모집하였다. 선조 임금의 가마를 호위하여 도성으로 돌아온 뒤에는 명나라 장수들의 접대와 전후 처리에 전념하다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1544년(1세)
중종 39년 11월 원주목사 임몽신(任夢臣)과 송씨 부인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豊川, 황해도 송화), 자는 사진(士振)이다. 할아버지는 내섬시 정(內贍寺正)을 지낸 임정(任楨),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임유손(任由遜), 고조할아버지는 수안 군수(遂安郡守)를 역임한 임한(任漢)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그는 성품이 아주 강직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품행과 몸가짐이 매우 분명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독실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서 교제를 하였다.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매우 흥미를 가졌으나 집안의 어버이가 늙어서 과거 시험에 전념하느라 학문에 매진할 수가 없었다.
임탁은 어려서 할아버지 참판공의 집에서 자랐다. 참판공은 그의 착한 행실을 사랑하여 글을 지을 때 ‘효동(孝童)’이라 불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여막을 짓고 무덤 곁에서 지내면서 밥을 먹지 않고 죽을 먹으며 슬프게 통곡하였다. 뒤에 할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때도 역시 예를 다하였다.
어머니가 연로하여 실명을 하고, 병이 위독해져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지냈는데, 임탁은 밤낮없이 눈물을 흘리고 의원을 찾아다니며 약방문을 물었으며, 직접 인분을 맛보며 간호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1576년(32세)
선조 9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행실이 독실하여 주변 선비들이 추종하였다.

1583년(39세)
율곡 이이가 소인배들의 모함으로 삼사(三司)의 비판을 받았다. 이이를 변호한 성혼도 탄핵을 받자 유생들과 함께 이에 항의 소를 올렸다. 이때 임탁은 성균관장의(成均館掌議)로 있으면서 성균관의 여러 학생들을 모아 공동으로 상소를 올리고 율곡을 변호하였다. 이 덕분에 그는 반대파들의 비판을 받고 삼사의 탄핵을 받았다.

1587년(43세)
이조의 천거로 동몽교관(童蒙敎官), 와서별제(瓦署別提) 등에 임명되었다. 그가 동몽교관으로 있었을 때, 유성룡(柳成龍, 1542년〜1607년)은 드러내놓고 배척하고 화를 내기도 하였다.(선조수정실록 1587년 9월 1일 기사) 유성룡은 문신이며 성리학자로 승문원 권지부정자, 의정부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이황의 제자로 조목(趙穆), 김성일 등과 함께 글을 배웠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시험 합격하여 관료로 등용된 뒤에는 이산해와 가깝게 지내 동인으로 활동하여 서인들과는 대립하였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경험한 뒤에는 온건파인 남인을 형성하고 강경파였던 이산해와 결별하였다.

1590년(46세)
이즈음 임탁에 대해 좋게 여기지 않는 자가 춘관(春官)을 관장하게 되어 그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한참이 시일이 지난 뒤에 다시 별제(瓦署別提)에 임명되었다.

1592년(48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소모관(召募官)에 임명되어 군사 모집의 임무를 맡아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지에서 병사와 군량을 모집하였다.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에 임명되었다.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방한하였을 때, 내빈사(來賓使) 윤근수(尹根壽)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이들을 맞았다.

1593년(49세)
선조 임금의 가마를 호위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도감(都監)의 낭관(都監郎)에 임명되었다.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느라 오랫동안 수고를 한 탓에 몸이 상하여 다음 해 3월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집안은 궁핍하여 장례용품을 구할 수 없었다. 겨우 친척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양주(楊州)의 도혈리(陶穴里) 사곡촌(笥谷村)에 장사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신씨와 3남 2녀를 두었다. 신씨는 고령(高靈)의 충의위(忠義衛) 신맹영(申孟瀛)의 딸이며, 목사(牧使) 신영철(申永澈)의 증손녀이다. 장남 임헌지(任獻之)는 진사이며, 차남 임면지(任勉之)는 일찍 사망하였고, 삼남 임뇌지(任賚之)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장녀는 진사 권길(權佶)에게 시집갔으며고, 차녀는 부사 한인(韓訒)에게 시집갔다.
김상헌은 묘지명에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공은 평생토록 검소하여 세속의 화려한 습속이 전혀 없었다. 꿋꿋하고 묵중하여 고요한 방에 나아가 똑바른 자세로 엄연하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비리를 청탁하지 못하였다. 성품이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친한 사람의 경우에는 위급함을 반드시 구해 주었고, 어진 사람일 경우에는 비록 소원한 사이더라도 급한 데 달려가기를 친한 사람과 같이 하였다. 일찍이 회시(會試)의 대책(對策)에서 이름이 선발자 명단에 들어 있었는데, 시험을 주관하는 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옳지 못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다른 사람의 시권(試卷, 답안지)을 뽑고 공의 시권을 탈락시켰다. 이에 그 말을 들은 자들이 ‘의당 올라가야 하는데 떨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만은 홀로 얼굴빛과 말투에 드러내지 않았다.”

<참고자료>
권오호, 「임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
김상헌(金尙憲), 청음집(제34권 묘지명), <한국고전종합DB>

조광현(趙光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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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현(趙光玹, 1553년〜1635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의병장이다. 선조 임금 때 진사가 되었으며 제릉참봉(齊陵參奉), 금성현령(金城縣令) 등에 임명되었다. 그는 동생과 함께 율곡(栗谷) 이이(李珥)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어 동문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이 동인의 공격을 받아 탄핵을 당하였을 때는 이귀(李貴) 등과 상소문을 올려 적극 변호하다 자신도 탄핵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싸우고, 선조 임금을 수행하며 의주까지 가는데 공을 세워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정묘호란 때도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553(1세)
명종 8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계진(季珍), 호는 금탄(琴灘)이다.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문하생 중 가장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부친은 여절교위(勵節校尉)‧참봉 조사필(趙士弼)이며, 형은 조광숙(趙光琡), 동생은 조광위(趙光瑋)이다. 동생과 함께 율곡(栗谷) 이이(李珥)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율곡에게 글을 배울 때 그는 학문에 조예가 깊어 율곡의 칭찬을 들었으며 수백명의 율곡 문하생 중에 가장 주목을 받았다.

1582년(29세)
선조 15에 과거 식년시(式年試)에서 합격하여 2등으로 진사가 되었다.

1585년(32세)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成渾) 등이 동인의 공격을 받아 탄핵을 당하자 그들을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후 제릉참봉(齊陵參奉)과 금성현령(金城縣令) 등을 지냈다.

1587년(34세)
조광현은 이귀(李貴) 등과 함께 스승 이이가 억울하게 모함을 받는 일을 변호하기 위해서 상소를 하였다. 당시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이 점차 치열해지고 율곡과 우계가 동인들의 근거 없는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관리들이 중간에서 상소문을 막았는데 율곡 이이의 조카 이경진(李景震)이 다시 상소문을 작성하여 조광현 등이 올린 상소문과 같이 올렸다. 임금이 이귀를 불러 “너의 상소문을 보니 ‘경박하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다투어 일어나 억지로 말을 끌어다 붙였습니다. 당시 심의겸(沈義謙,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역자주)의 문을 출입하면서 조석으로 서로 어울렸고, 노비처럼 비굴한 태도를 가진 무리들이 몸을 굽혀 들어가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고 하였다. 또 ‘전일 심의겸에게 달려가 아부하던 무리들이 일시에 동인(東人)들에게 정성을 바치면서
1587년에 올린 조광현의 상소문(<伸寃牛栗兩先生疏>)
반기를 들고 심의겸을 공격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도대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감추는 일이 없는 것이 옛날의 도리이다. 너는 낱낱이 들어 대답하라.”고 명했다. 이에 이귀는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
“세상을 떠난 스승 이이는 평생을 참됨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번 시론(時論)에 거슬리자 그릇된 비방이 백출(百出)하여 그것이 날마다 새롭게 생기고 불어났습니다. 이는 인심이 날로 격해져 사론(士論)이 허물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은 은혜를 헤아리지 않고 다만 이이(李珥)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성세(聖世)에 밝힐 수 있다면 신이 비록 만 번 죄를 받아 죽더라도 역시 마음에 달게 여기겠습니다. 성상(聖上)께서 하문하신 전교를 보니, 이는 바로 저희들이 가슴에 품은 말을 모두 속이지 않고 아뢸 기회입니다. 신들이 상소문에서 이른바 ‘경박하고 나서기 좋아한다.’는 사람은 백유양(白惟讓)ㆍ노직(盧稙)ㆍ송언신(宋言愼)ㆍ이호민(李好閔)ㆍ노직(盧稷)입니다. 이런 무리들에 대해 만약 두루 진달(進達)하고자 한다면 어찌 이 몇 사람에 그치겠습니까. 전일에는 심의겸과 관계를 맺고 있다가 그가 권세를 잃자 도리어 심의겸을 공격한 자들은 박근원(朴謹元)ㆍ송응개(宋應漑)ㆍ윤의중(尹毅中)입니다. 이 자들의 경우는 족히 이를 것도 없거니와 또 심의겸과 서로 아는 처지로 이이에 비할 바가 아닌 자로서는 이산해(李山海)와 같은 자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만일 심의겸을 알았다는 이유로 이이의 죄를 삼는다면 먼저 이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 옳습니다. 단지 시론(時論)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들을 공격하지 아니하고 이이만을 논죄하니, 이것이 과연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겠습니까. 신들이 이산해(李山海)에게 유감이 있는 것은 이이가 심의겸과 같이 결탁하여 함께 일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산해는 반드시 알 것인데, 이산해는 이이와 평생을 사귀어 온 벗이건만 이이가 무고당하는 것을 좌시하며 지금까지 임금님의 앞에서 그 본심을 밝히는 말 한마디도 없습니다. 이는 필시 구원(九原)의 혼령이 유감스러워할 일입니다. 이산해가 심의겸에게 준 시(詩)에 따르면 ”봄이 찾아온 서울에서 거듭 서찰을 받아 보고, 산길 어두운 밤에도 익숙히 서로 맞이하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심의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글이겠습니까? 이것이 신들이 상소문에서 이른바 ‘조석으로 서로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노비처럼 비굴한 태도를 지녔다.’는 자는 정희적(鄭熙積)입니다.”
선조 임금이 이 글을 읽고 ‘너희들의 뜻을 잘 알았다’고 답하였다.

1592년(39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형인 참봉 조광윤(趙光玧)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월천군(月川君)의 군사와 호응하여 적들을 참획(斬獲)한 공을 세웠다. 또 선조 임금을 보위하여 의주까지 가는데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601년(48세)
11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627년(74세)
인조 5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1635년(82세)
사망하였다. 아들로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한 조종전(趙宗傳)과 조종칙(趙宗侙)이 있다. 해주(海州)의 소현서원(紹賢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금탄유고(琴灘遺稿)』가 있다.

<참고자료>
선조실록, 1587년 3월 7일, 8일자 기사
김동섭, 「조광현(趙光玹)」,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심예겸(沈禮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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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예겸(沈禮謙, 1537년~1598년)은 조선시대 중엽에 활동한 관리이자 학자이다. 선조 3년 식년시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한 뒤, 관직에 나아가 한산군수, 성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병조판서를 지낸 심충겸(沈忠謙)의 형이며, 판중추부사,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심열(沈悅)의 양아버지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군량 보급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명나라 군대에 군량을 제때에 보급하지 못한 책임으로 곤장을 맞은 적이 있으며 나중에 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하였다.

1537년(1세)
중종 32년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송, 자(字)는 문숙(文叔)이다. 형제는 위로 형 둘이 있으며 아래로 동생 다섯이 있다.
젊어서 영일 정씨 정숙(鄭潚)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1569년(32세)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아들 심열(沈悅, 1569년〜1646년)을 낳았다. 심열은 나중에 심예겸의 양자로 들어왔는데, 성장한 뒤 과거에 합격하여 판중추부사,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학이(學而), 호는 남파(南坡),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저서로 남파상국집(南坡相國集)이 있다.

1570년(33세)
선조 3년 식년시에 생원(生員) 3등으로 합격하였다.

1571년(34세)
우계 성혼이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년〜1546년)의 행장에 대해서 물어와 답해 주었다. 우계집 속집 제6권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송도(松都)에 사는 안경창(安慶昌)이 ‘집에 화담 선생의 행장이 있다’고 하기에 가져다 읽어 보니, 기재한 내용이 자세히 구비되지 못하였고 또 글에 오자가 많았으며, 문체가 기전체(紀傳體)이고 행장이 아니었다. 누가 지은 것인지 몰랐는데 뒤에 심문숙(沈文叔 심예겸沈禮謙)에게 물어보니 관찰사 박민헌(朴民獻)이 찬(撰)한 것이라고 하였다.”

1584년(47세)
우계 성혼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답신을 온 편지 속에 다음과 같은 글이 들어 있었다.
“이제 성은(聖恩)을 입어 품계를 뛰어넘어 크게 발탁되었으니, 황공하고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비가 비록 실제보다 지나치게 소문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나 또한 마땅히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뜻을 지켜 스스로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다만 놀랍고 두려울 뿐이니, 또한 일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작은 벼슬을 사양하고 큰 벼슬을 받는 것은 의리상 편안하지 못하니, 이 사이에 마땅히 제대로 조처해야 거의 한쪽에 치우치지 않을 것입니다.”

1586년(49세)
한산군수에 임명되었다.

1589년(52세)
아들 심열이 과거 시험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55세)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심예겸은 개성부(開城府)에 재직할 때였다. 그는 군량보급(軍糧補給)에 공을 세워 나중에 성천부사(成川府使)에 임명되었다.
이 당시 10월경에 심예겸 등이 모은 의병들을 지휘할 사람을 두고 진중에서 논의가 벌어졌다. 이 자리에 정창연, 윤두수, 이산보, 그리고 선조 임금 등이 있었다. 정창연(鄭昌衍)이 이렇게 제안했다.
“이정형(李廷馨)ㆍ김지(金漬)ㆍ심예겸(沈禮謙)이 군사를 모았는데 군중(軍中)에서 명망이 있는 사람을 장수로 삼을 것을 동궁(왕세자, 즉 광해군)에게 호소하였던 바, 동궁이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성혼을 불러 장수를 삼으면 어떻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군중이 호소해 온 바에 따라 하는 것이 옳다.’ 하였습니다. 이는 동궁께서 하신 일이 아닙니다.”
이에 이산보는 이렇게 제안하였다.
“이강(李綱)은 정승에는 합당하나 장수에는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성혼은 보도(輔導, 보좌)에는 합당하지만 장수에는 합당하지 못합니다.”
윤두수는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직접 창과 방패를 잡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우는 것이 바로 장수의 임무입니다.”
선조 임금은 이들 대신들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1593년(56세)
아들 심열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심열은 성균관전적 등 삼사의 요직을 거쳐, 경기도·황해도·경상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이해 7월 심예겸은 간원(諫院)의 탄핵을 받아 파직을 당하였다. 이때 간원이 임금에게 건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천(信川, 황해도 신천)지방은 쇠잔(衰殘)함이 너무 심한데, 새로 군수가 된 박명립(朴名立)은 나이가 많고 성질이 느려 회복의 책임을 감당할 수 없으니, 교체하시고 각별히 유능한 사람을 골라 임명하소서. 성천 부사(成川府使) 심예겸(沈禮謙)은 전에 개성 경력(開城經歷)이 되었을 적에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일이 있었으니, 파직하시고 유능한 사람으로 교체하시기 바랍니다.”
선조는 이러한 의견에 따라 심예겸을 파직하였다.
개성 경력으로 있을 때 심예겸이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대동야승에 다음과 같은 야사가 전해져 온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의) 대군이 개성부에 이르러 매우 오래 있었는데 군량이 이미 다 되었다. 오직 수로를 따라 마른 풀을 강화도에서 가져오고, 또 배로 충청도와 전라도의 마초를 운반하여 조금씩 도착하였는데, 오는 대로 다 떨어지니 그 형세가 더욱 급하였다. 하루는 여러 장수들이 양식이 모자란다고 구실을 삼아 (명나라) 제독에게 회군을 청하니 제독이 매우 성내었다. 제독은 체찰사 유성룡ㆍ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ㆍ경기좌도 감사 이정형(李廷馨) 등을 뜰아래에 무릎 꿇리고 큰소리로 힐책하며 군법을 가하려 하였는데, 유성룡이 사죄하기를 마다 않고 눈물을 흘릴 뿐이니, 제독이 민망히 여기며 명나라의 여러 장수들에게로 화를 돌려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예전 서하(西夏)에 종군하였을 때에는 군중에서 수일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도 감히 돌아가자고 말하지 못하였는데 끝내는 큰 공을 이루었다. 지금 조선에 와서 우연히 수일간 양식을 대지 못하였는데 어찌 감히 문득 돌아가자고 하느냐. 너희들은 가려면 가라. 나는 적을 멸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요, 오직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가지고 갈 뿐이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유성룡 등이 사례하고 물러 나와서 시기에 맞지 않게 양곡을 방출한 죄로 개성 경력(經歷) 심예겸(沈禮謙)을 곤장으로 때렸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전라도에서 바다로 수송해 오는 쌀과 콩 2만 2천여 석과 황해도에서 수송해 오는 마초 수만 석이 후서강(後西江)에 닿아서 겨우 무사하게 되었다. 이날 저녁에 제독이 총병 장세작을 시켜 유성룡 등을 불러 위로하고 또 군사(軍事)를 의논하였다.
유성룡이 직접 지은 징비록에도 심의겸이 곤장을 맞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

1598(61세)
사망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참고자료>
선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대동야승(「재조번방지」), <한국고전종합DB>
한국학중앙연구원, 「심예겸 인물정보」, 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김신호, 「심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8.
성혼, 우계집 속집 제6권, <한국고전종합DB>

이정립(李廷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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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립(李廷立, 1556년∼1595년)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 동부승지, 형조 참의, 인천 부사, 한성부 좌윤, 대사성 등을 지냈다. 이덕형과 이이첨의 일족이며, 과거 합격 동기인 이덕형, 이항복과 함께 경연에서 임금에게 통사강목을 강의하여 ‘3학사’의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최립(崔岦), 박순(朴淳),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기축옥사 때에는 사건을 처리하는데 공을 세우고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임금을 호위하는데 참여하였으며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보존하는데 큰 공을 세워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다.

1556년(1세)
명종 11년에 판결사(判決事) 이시무(李時茂)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정립의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좌랑 이수겸(李守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찰방(察訪, 역에서 근무하는 관리)을 지냈던 이이건(李以乾)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 의원군(義原君) 이억(李億)의 딸이다.

1566년(11세)
최립(崔岦)에게 한서(漢書)를 배웠다.

1569년(14세)
박순(朴淳)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문공부를 하였다.

1576년(21세)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다.

1580년(25세)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 예조 좌랑, 정언, 병조 좌랑,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문과 별시에 을과 1위로 급제한 사람이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었는데 이덕형은 친척으로 집안 동생이었다. 이덕형은 나중에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백사 이항복도 이때 문과에 급제하여 과거 합격 동기가 되었다.

1581년(26세)
선능(宣陵)의 제관(祭官)에 임명되었다.

1582년(27세)
6월, 수찬의 직위에 있었을 때, 대제학이었던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오억령(吳億齡) 등과 함께 임금의 <통감강목(通鑑綱目)> 강독을 맡게 되었다. 이정립은 이때부터 이덕형, 이항복과 함께 삼학사(三學士)로 주위의 칭송을 받게 되었다. 이즈음 사관(史官)이 되고, 예조좌랑, 정언에 임명되었다. 또 율곡의 추천을 받아 이항복, 이덕형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이 되어 호당(湖堂)에 들어가 독서에 전념하였다.

1583년(28세)
이조 좌랑, 경상우도 점마관(點馬官) 등에 임명되었다.

1584년(29세)
호남 규황어사(救荒御史)에 임명되었다.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상황을 조사하여 보고하고 조치하였다. 이후 복귀하여 병조 좌랑이 되었다.

1585년(30세)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1587년(32세)
경상도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금산 군수(金山郡守) 김협, 풍기 군수(豊基郡守) 김대명(金大鳴)은 불법 문서(不法文書)를 포착하여 파직시켰고, 개령 현감(開寧縣監) 박무(朴懋)는 탐욕이 많고 백성을 학대했기 때문에 파직하였다. 3월 2일(음력) 서울로 돌아와 임금에게 보고하니 선조는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적과 맞서 응변할 적에는 마땅히 적의 용병(用兵)하는 형세를 잘 알아 대응해야 한다. 적(왜군)은 이미 손죽도(損竹島)에서 승리하고 또 선산도(仙山島)에서 약탈하였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타고 바로 변경의 성을 침범하기는 그 형세가 매우 용이하다. 그런데도 바깥 바다에 계속 체류하고 여러 섬에 나누어 정박하면서 오래도록 쳐들어오지 않아 그 실정을 측량하기가 어려우니, 이를 참작하여 아뢸 것을 비변사에 이르라. 그리고 계속적으로 정병(精兵)을 보내 주고 적을 방어할 모든 기구들이 이미 정리되어 있는지의 여부도 병조에 이르라.”
이에 이정립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지금의 왜변(倭變, 왜군들의 변고)은 우연히 변경을 침범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전선(戰船)을 넉넉히 준비하여 대거 침입했습니다. 고풍손(高風孫)이 전한 대로 사을화동(沙乙火同)의 소행이란 것이 이미 빈 말이 아닙니다. 한 번 교전하고서 선박을 불태우고 장수를 죽였으니 곧바로 침범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날을 지체하면서 진격도 후퇴도 않기 때문에 그 실정을 가늠하지 못할 듯 하지만 어찌 심원(深遠)하여 알기 어려운 계책이야 있겠습니까. 전선을 나누어 정박시켜 의심스럽게 만들어서 우리 측이 한 곳에 병력을 집중토록 한 다음 가만히 다른 변경을 치려는 것이 하나요, 먼 곳에 있는 섬으로 물러나 숨었다가 우리가 원병을 계속 보내는 것을 기다려 일시에 거사하며 멀리 떨어진 변경에 출몰하면서 진보(鎭堡)의 형세를 살펴 허술한 틈을 타 갑자기 공격하려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적과 대응하는 곳은 방어가 그다지 허술하지는 않은데 본도(本道)에서 우려할 만한 곳은 가리포(加里浦)ㆍ진도(珍島)ㆍ제주(濟州) 등 3읍과 법성창(法聖倉)ㆍ군산창(群山倉)입니다. 그러나 본도의 방책(方策)에 진작 정해진 규칙이 있으니, 반드시 이미 조치하였을 것입니다. 정병은 현재 당상(堂上)ㆍ당하(堂下)의 무신(武臣)과 녹명인(錄名人) 및 잡류(雜類)ㆍ공ㆍ사천(公私賤)으로 활쏘기에 능한 사람을 벌써 선발해서 대오를 나누고 짐을 꾸려 명을 기다리게 하였으며, 궁시(弓矢)와 총통(銃筒)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부족한 것은 철갑(鐵甲)과 철환(鐵丸)이나 현재 만들고 있습니다.”
임금은 이에 알았다고 답하였다.

1589년(34세)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에 사간(司諫)자격으로 활동하였다.

1590년(35세)
장령이 되었으며, 여름에 기축옥사를 처리한 공으로 공신(平難功臣, 평난공신)이 되었다.

1591년(36세)
집의, 직제학, 동부승지, 형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인천 부사(府使)로 나가 부모를 봉양하였다.

1592년(37세)
4월 13일(음력, 양력으로는 5월 23일), 왜란이 발생하였다. 700여척의 함선에 2여명의 왜군들이 부산진으로 밀려들어왔다. 이윽고 그 숫자는 5만이 되었고, 나중에는 20만 대군으로 불어났다. 이정립은 예조참의로 왕을 호위하는데 참여하여 개성까지 갔다. 임금의 행차가 개성을 지나 황해도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종묘와 사직의 위패(廟社主)’가 개성에 남아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선조가 크게 놀라 즉시 모셔 오라고 명하였다. 개성에는 이미 적군이 들어와 있어서 위험하였으나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에 들어가 종묘사직의 위판을 모시고 나와 일행이 있는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중전(中殿)과 동궁(東宮, 왕세자)을 모시고 곡산(谷山)으로 갔다. 이즈음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나있었다.

1594년(39세)
한성부 우윤, 좌윤, 승문원 제조 등에 임명되었다. 이즈음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부임하였다. 12월에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다.

1595년(40세)
병으로 사직하였다. 4월, 명나라 사신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었으나 부임을 지체한 죄로 비판을 받았다. 이해 가을, 휴가를 얻어 장인을 이장하였다. 이 직후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유족으로 부인 전의(全義)이씨(승지 이순인李純仁의 딸)가 있으며 세 아들이 있다. 광주(廣州) 구천리 선영에 장사를 지냈다. 1601년에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현종 11년인 1670년에 ‘문희(文僖)’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계은집』이 있다. 「계은집에 대한 서(敍)」가 이항복의 백사집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자정(子政) 이정립(李廷立)이 작고한 지 벌써 23년이 되었다. 그 동안에 두 번이나 병화(兵火)를 겪었는데도 그의 유문(遺文)이 점차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국가의 모든 중요한 전적들도 잿더미가 되어 버렸는데, 유독 이 글만은 없어지지 않았으니, 비유하자면 진시황(秦始皇)이 천하의 서적들을 불태우고 난 뒤에 공자의 구택(舊宅) 벽 속에서 고문상서(古文尙書)가 나온 것과 같다.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한 번 보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다. 일찍이 듣건대, 정이(程頤)의 말에, “사람들은 말을 글로 아름답게 꾸미고자 한다. 글로 꾸며 놓으면 사랑스럽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전해지는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이 틀림없구나.
하루는 그의 아들 이진담(李眞聃)이 와서 나에게 그 유문을 보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와 오랫동안 종유하시고 또 서로 잘 아는 분으로는 의당 장인(丈人)만한 분이 없으니, 저를 위하여 문집을 간행하게 해 주시고, 또 한 마디 말을 첫머리에 얹어서 후세에 빛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마침내 받아서 읽어 보니, 그가 언론(言論)을 세운 것이나 문사(文辭)를 발한 것이 모두 우리 친구들 사이에 서로 술을 마시며 흥겹게 읊조린 유적(遺迹)들이다. 그런데 그 때의 사람과 일이 전혀 남아 있는 것이 없건만, 오직 나 한 사람만이 외로이 홀로 남아 있어, 마치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백 번 바뀌어도 노선(老仙, 이정립을 의미함)은 죽지 않고 웃으며 금적(金狄, 금으로 만든 동상)을 어루만지면서 오랜 세월을 상기하여 감탄을 일으킨 일과 같으니,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정(이정립)이 물건(物)은 좋아하는 것이 없어, 성색(聲色)ㆍ완호(玩好)와 생산 작업에 대해서는 마치 어린애와 같다. 그러나 유독 서책은 기욕(嗜欲, 즐기고 좋아하는 것)처럼 즐기어, 날마다 자시(子時) 이후에는 반드시 일어나 의복을 정제하고 글을 송독(誦讀)하면서 날이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평생에 저술한 글이 매우 많았으므로,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옛 사람 중에 글을 많이 저술한 이도 나와 같이 많은 사람은 없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대체로 백분의 일에 불과하니, 다만 대롱 구멍으로 표범의 무늬 하나를 보는 셈일 뿐이다. 아!

<참고자료>
선조실록 선조 20년 3월 2일 기사
이항복, 백사집 제2권 서(敍), <한국고전종합DB, 고전번역서>
「이정립 행력」,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인물연표, <한국의 지식콘텐츠>
이재범, 「이정립(李廷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

안민학(安敏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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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학(安敏學, 1542년〜1601년)은 서울 남산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풍애(楓崖)다. 19세 때 향시에 장원을 한 뒤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 공부에 뜻을 두었으나 율곡 이이의 눈에 띄어 추천을 받아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감찰, 대흥·아산·현풍·태인 등지의 현감을 두루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소모사(召募使)에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에서 군량과 말, 군사 등을 모집하여 북쪽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아산 근방에서 병을 얻어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하고 유성룡(柳成龍)에게 병사들과 군량을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문장이 뛰어난 그는 저서 풍애집(楓崖集)을 남겼다. 일찍이 그는 30대에 부인과 사별하였는데 당시 한글로 쓴 애도문이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 충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애도문은 구어체의 산문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한글 연구와 조선시대 한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542년(1세)
안민학은 중종 37년 9월 17일,(음력) 서울 남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습지(習之) 혹은 이습(而習)이고, 호는 풍애(楓崖)이다. 안민학의 부친은 찰방 안담(安曇)이다. 안담의 자는 태허(太虛), 호는 송애(松厓)이다. 안민학은 9세 경 때부터 소학, 효경 등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의 모습은 기골이 장대하고 의연하여 쉽게 범접하지 못할 바가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또래와 노는 것을 즐기지 않고 항상 독서에 침잠하여 의젓한 모습이었다.
어려서 박사엄(朴思奄)을 스승으로 모시고 글을 배웠다.

1560년(19세)
향시(鄕試)에 장원을 하였다. 하지만 회시(會試)에 응시하지 않고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그는 과거시험 공부가 학자들의 병폐라고 우습게 여기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대신 역사서, 제자백가 서적을 비롯하여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 성리학 관련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화려하고 담백한 그의 문장은 일가를 이루었으며 필법 역시 훌륭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와 교류하기를 원했다.

1561년(20세)
이즈음 학행(學行)이 주변에 알려져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원릉참봉(元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해 현풍(玄風)의 곽씨(郭氏)와 결혼하였다.(문집총간인물연표 「안민학 행력」) 다른 기록에 따르면 1567년(명종 22)에 결혼하였다고 한다.(구수영 「안민학의 애도문 고」와 최웅환의 논문 「16세기『안민학 애도문』의 판독과 구문분석」 참조) 곽씨 부인은 1554년 생으로 신랑보다는 12살 아래이며, 할아버지는 승지 안방(安邦)이고, 아버지는 곽개(郭凱)이다. 일찍 부친과 사별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1564년(23세)
부친상을 당하였다.

1566년(25세)
사암(思菴) 박순(朴淳)을 모시고 학문을 배웠다. 율곡 이이,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년〜1598년)을 비롯하여 정철(鄭澈), 이지함(李之菡), 고경명(高敬命) 등과 교류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학문은 대체로 율곡 이이와 성혼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또 필법이 뛰어났다.

1571년(30세)
우계 성혼과 함께 천마산을 유람하고 영통사에 머물렀다. 화담(花潭)을 방문하여 서경덕(徐敬德)의 묘를 참배하였다.

1573년(32세)
주변의 추천을 받아 건원능(健元陵)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율곡 이이가 재차 천거하여 희능(禧陵) 참봉이 되었다. 그러나 몇 개월 뒤 벼슬을 버리고 파주로 돌아왔다. 이해에 사직 참봉에 임명되었다.

1576년(35세)
이해 3월,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는 율곡을 배웅하였다. 5월 8일에 부인 곽씨가 지난해 유산을 한 뒤 중병을 얻어 끝내 회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향년 23세였다. 곽씨 부인과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부인의 시신은 부인의 유언대로 파주의 친정 선산에 안장하였다. 이때 한글로 쓴 애도문이 최근에 백자 명기류(明器類, 장사지낼 때 죽은 사람과 함께 무덤 속에 묻는 그릇)와 함께 발굴되어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243호로 지정되었다. 부인 곽씨의 무덤에서 발굴된 이 애도문에서 안민학은 곽씨가 편모슬하에서 자라다 자신과 결혼하여 함께 생활했던 일들을 회상하고 어려운 형편 탓에 아내를 잘 챙겨주지 못한 지아비로서의 자책과 회한, 그리고 아내를 향한 그리움을 절절히 표현하였다.
안민학이 곽씨 부인의 시신을 옆에 두고 한글로 써내려간 애도문은 다음과 같다.(최웅환의 번역문 참고. 일부 단어는 쉬운 말로 고침)

늙은이 안민학은 아내 곽씨 영전에 고하노라.
나는 임인생(1542년)이고 자네는 갑인생(1554년)으로 정묘년(1567년) 열엿셋날(16일) 합궁하니 그 때가 나는 스물다섯이고 자네는 나이 열 셋일 적에, 나도 아비 없는 궁핍한 과부의 자식이고 자네도 궁핍한 과부의 자식으로서 서로 만나니 자네는 아이요 나는 어른이오나 뜻이 어려서부터 독실하지 못한 유학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므로 부부유별(夫婦有別)이 사람의 도에 중요하므로 너무 친하거나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여 자네와 내가 함께 친하게 말인들 하며 밝은 곳에서 밥을 먹은 때인들 있었던가.
내가 자네에게 밤이나 낮이나 매번 가르치되, 어머님께 봉양을 지성으로 하고 지아비에게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부인네 도리라고 하여 이르던 시간이 십년을 함께 살아서 바라는 것이었네. 그대가 내 뜻을 아니 받들고자 할까마는 궁한 집에 과부 어머님 위에 있고 나는 항상 오활하고 옹졸하여 가사 쪽으로는 아주 챙기지 못하였으나 외로운 시어머님께 봉양하고 하는 정이 지극하였도다. 이것을 어찌할까. 자기 입을 의복도 못하고 행여 실을 뽑아도 나를 해줄 것이라 하고 그대는 겨울이라도 아무런 저고리 하나 하고 검은 겉옷 하나나 하고 눕덥(누더기) 치마만 하고 바지도 벗고 차가운 구들에서 너절한 자리하고서 견디니 인내가 독하기야 이 위에 있을까. 그대 점점 자라 키도 커가니 내가 그대 외양을 희롱하였구나. 내 말하되 나라서 그대를 길러 내었으니 나를 더욱이 공경하라고 한 시간이 그대라고 해서 넋이 된들 잊을 것인가.
내 벗도 있어서 서울에 있으니 내 어머니를 번거롭게 하여 헛이름을 얻어 두 번에 이르기까지 공도(公道)로 참봉을 하니 내가 내 몸을 돌아보니 너무도 부끄러워 다니고자 하는 뜻이 없는 줄을 그대가 사뭇 알기 때문에 조금도 그것으로 기뻐하는 뜻이 없고 내 매번 그대에게 말하되, 어머님이 하도 내가 그리 하기를 바라시니 마지못하여도 나중이면 파주나 아무데나 산수 있는데 가서 새집을 짓고 대나무를 이을망정 붕천(崩天, 하늘이 무너짐)을 시름하고 수석간(水石間)에 가서 살다가 죽자하니, 그대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들으니 내가 매번 그랬지.
물욕이 적은 사람은 그대 같은 사람이었도다. 그리하여 매양 살 땅을 못 얻고 하더니 어찌하여 내 몸에 죄앙이 쌓여서 병을 든 나는 살았고 병 없던 그대는 백년해로 할 언약을 저버리고 홀연히 하루아침에 어디로 가신 것인고. 이 말을 이르건데 천지가 무궁하고 우주가 공활할 따름이로세. 차라리 죽어 가서 그대와 넋이나 함께 다녀 이 언약을 이루고자 하나 홀어머니 공경하여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내 서러운 뜻을 이룰까.
그대 오륙년 전부터 매번 심열이 있어 봄이면 자다가도 코가 시린 냉수를 달라하고 혓바늘 돋고 하니 그대 명은 되게 박하여 모자간에 변도 만나고 나도 성질이 사나워 그것으로 그대 마음 쓰게 한 것이 많았네. 그것도 너무 성정을 몰라 조그마한 일이라도 그냥 두어라고 하지 않으니 그리하여 병이 많이 들고 겨울이면 의복도 그리 너절하니 아이를 구월에 낳은 후 부터는 조리도 잘못하니 더욱 병이 들어 나중에는 을축년 유월부터는 아랫 자식(셋째 아이)이 들어서 다시 기운이 편치 아니하니 누울락 일어날락 하고 음식도 데면데면히 먹고 하니 나나 그대 어머님이 다 태기라고 하여 또 아들일까 하여 기뻐 말하니 그렇다고 하더니, 그러므로 나 믿어서 약 끝끝내 못하고 그해 (자네가) 팔월 추석 때 홍주의 아버지 묘제 하러 가서 그로 인하여 유산하고 구월 스무날 후에야 온 그대 병이 중하여 있으니 그 때부터야 진짜 병인 줄 알아 의약을 시작하였으나 그대가 약을 아니 먹으니 가까스로 인삼과 형개산을 설흔 복 넘게 먹었으나 벌써 병이 깊어 있고 그대 명이 그만한 것도 인력으로 어찌 할까.
그렇게 병들게 한 것은 내가 남편이 되어서 그런 것이니 다시 이 한 넋이 대답할까. 자식이 둘이 있으니 딸이 집안을 다스릴 것이거니와 아들이나 제 목숨이 길어 살아나면 이는 그대 비록 죽어도 그대 이어가고 우리 다 죽은 후라고 해도 자손이 있어 제사라고 하는 것이 이루어지겠지. 울적하네. 죽지 아니하여 살아 있으면 사나이 일생을 무얼 서러워하면서 그저 살까.
내 뜻은 자식이 있으니 그대 삼년을 지내고 양첩(양인의 딸을 첩으로 삼음)이나 하여 그대 자식을 후에 어려운 일 없게 하고자 하네마는 노친이 계시니 일을 마침내 어머니 마음대로 몰아 갈 것이나 반드시 내 뜻대로 삼년 째 기다리마. 장가인들 반드시 아니 들리라 할까하네. 그대 위해서 한 해를 상복을 입네. 첩이나 장가나 해도 기다렸다하지 상복을 벗은 후에 바로 할까. 아들이 살아나면 그대 조상 봉사를 전부 맡기고 그대의 기물을 전부 두 자식에게 나누어주고 나는 쓰지 말고자 하네.
그대 죽을 때에 그대 파주 그대 아버님 분묘 근처에다가 묻으라 하니. 이는 나 죽은 후에 부디 내가 홍주(안씨 집안) 선영에 갈 것이니. 이제 그대를 시랑 아버님(장인어른) 곁에다가 묻을 것이로되 내 죽기 전에는 외로운 혼이 될 것이오. 파주도 아주 버릴 것이니 그대 임종에 이르던 말을 쫒아 파주로 하려 하니 내가 거기에 들기 어렵네. 내 곧 (죽어서) 홍주로 가 들면 아들은 부모를 각기 묻는 것이 되며 우린들 죽어서나 한 곳에 갈까. 이 일 이제 필치 못할 것이네. 내가 병든 것이 이리 한없는 절망을 보고 얼마나 오래되어서 죽을꼬. 아니 죽을 적에는 꿈에나 자주 보이고 서러운 뜻 말하소.
나는 그대 어머님 향하여 그대 (사정을) 주지하고 조금은 내 (일을) 덜까. 다른 자식들이 봉양하면 자네가 사뢸 일을 (내가) 아니할까. 그대 어머님과 자식들은 내가 살이 있으니 어련히 할까. 잊고 가셨음이 망망하고 서럽고 그리운 정이야 평생을 잇는다 한들 끝이 있을까. 이제 처리하는 일만 하네. 죽었다 한들 정령이 있으면 모를까.
너무너무 한없이 슬프고 슬퍼서 붓 잡아 쓴다고 하나 정신이 없어 글자도 틀리고 떨어지며 말도 차서 없으니 자세히 보소. 집안일은 승지 아주버님과 장령 아주버님이 하여 주시네. 벗들도 진정하여 돌아보네. (여기부터는 한문으로 씀) 말이 여기에 이르니 오랫동안 서럽게 울고 죽고 싶네. 병자 오월초십일. 입관시 함께 묻네.

1577년(36세)
전주 이씨(李氏)와 재혼을 하였다. 이씨 부인과는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다.

1580년(39세)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었다.

1582년(41세)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 또 갑자기 청양(靑陽)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대흥 현감에 임명되었다.

1583년(42세)
이해 여름 사헌부가 임금 선조에게 안민학에 대한 파면을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
“대흥 현감(大興縣監) 안민학은 불효(不孝)하고, 부제(不悌, 윗사람을 존중하지 않음)한 사람으로서 감히 헛된 욕심을 가져 내심을 속이고 거짓을 행하여 과거에 응할 재주도 없는 주제에 과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또 말재주로 사람들을 헐뜯되 날로 그것이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는 것이라 여기며, 권세가들을 쫓아다니면서 요즘의 정치를 평론하는 등 그의 평소의 마음 씀씀이와 행한 짓들이 극히 예의가 없습니다. 그가 처음에는 재주와 행실로 벼슬을 취득하였고 나중에는 부지런히 주선을 행하여 높은 벼슬까지 올랐으므로 세상의 여론이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선조는 “아뢴 대로 하되 안민학에 대하여는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그 후 임금이 대신에게 물었는데 대신이 모른다고 대답하자 직위 교체만을 명하였다.
당시 사헌부는 서인을 배척하는 관료들이 장악한 것으로 보이며 율곡과 성혼 등을 따랐던 안민학은 그들의 눈엣가시가 되었던 것 같다. 안민학은 특히 정여립에게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아산현감으로 옮기게 되었다.

1584년(43세)
1월, 율곡이 사망하여 곡(哭)을 하였다. 2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이 다음해 의주목사(義州牧使) 서익(徐益)이 상소를 올렸는데, 안민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전에 (동인들이) 이이를 공격할 때 안민학(安敏學)과 이배달(李培達)이 이이의 문하에 왕래하였다는 이유로 부도(不道)라는 명목을 붙여 공격하더니, 이번에도 이 수단을 쓰고 있습니다. 안민학과 이배달의 사람됨에 대해서 신은 사실 잘 모르지만 이산보와 같은 경우는 하늘이 부여한 품성을 온전히 지니고 있으며 충후(忠厚)하고 조심스러운 것이 그 집안의 법도입니다. 그의 계부(季父)인 이지함(李之涵)도 일찍이 경외 받던 사람이었으니, 이와 같은 어진 선비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말을 더듬는 병이 있어 말에 문채(文彩)가 없기 때문에 남에게 말을 듣고 있으니, 아마도 이 때문인 듯합니다. 신은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깊이 살피소서.”

1586년(45세)
현풍 현감이 되었다.

1590년(49세)
태인 현감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11월, 견책을 받아 전주로 돌아갔다.

1592년(51세)
3월에 전주에서 홍주의 신평(新平, 지금의 당진시 신평면)으로 갔다. 이해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성(金城, 지금의 담양) 산곡(山谷)으로 피난하였다. 임금이 피난을 갔다는 소식을 듣고 행재소(行在所, 임금의 임시거처)로 달려갔다. 일설에는 세자 진영으로 들어가 사어(司禦)가 되어 수개월을 머물렀다고 한다. 이윽고 소모사(召募使, 의병을 모으는 임시 관직)에 임명되어 양호(兩湖, 충청과 전라)로 내려갔다.

1593년(52세)
광주(光州)로 내려가 먼저 사람을 보내 고경명(高敬命)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후 인근지역에서 군량 수천석과 말 수백필, 그리고 수천명의 병사들을 모집하여 북상하여 아산에 진을 쳤으나 병으로 더 이상 진군할 수가 없었다. 이에 조정의 명령에 따라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에게 이들을 맡기고 행재소로 가서 임금을 모셨다. 당시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정철(鄭澈)을 전송하였다. 5월경, 병으로 사직을 하고 홍주(洪州)의 신평으로 돌아갔다.
이해 가을, 양주(閬州) 성안에서 살았다. 10월에 조헌(趙憲)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1594년(53세)
1월, 소무관(召撫官)으로 여러 지방을 돌아보고 홍주 신평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해 10월, 정철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다음해 봄에 송익필과 함께 고산(高山) 이영원(李榮元)을 방문하였다.

1596년(55세)
이해 가을부터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1601년(60세)
8월 13일, 병으로 홍주 신평 호월당(湖月堂)에서 사망하였다. 홍주 대진(大津, 당진군 송옥면 고대리)의 선영에 장사 지냈다. 다음해 그는 이조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1910년에 규장각 제학(提學)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풍애집(楓崖集, 楓崖先生集)이 있다. 풍애집은 2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738년(영조 14)에 후손 안세광(安世光)이 편집, 간행하였다. 제1권에는 시 91수가 실렸으며, 제2권에는 제문, 잡저, 기(記), 서(書) 등이 실려 있다. 잡저 중에는 「심학론(心學論)」, 「하도낙서설(河圖洛書說)」, 「근사록설문(近思錄設問)」, 「대학서절해(大學序節解)」등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 1책에는 안민학의 연보, 행장, 비문 등이 실려 있다.

<참고자료>
선조실록 선조 16년(1583) 8월 3일자 기사, 선조 18년(1585) 5월 28일 기사
이태진, 「안민학(安敏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년
「안민학 행력」,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인물연표, <한국의 지식 콘텐츠>
이동술, 「풍애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년
천기영, 「죽음도 막지 못한 사랑, 시간을 거슬러 활짝」, 디트뉴스24(http://www.dtnews24.com/), 2018.08.23.
구수영, 「안민학의 애도문 고」, 백제연구10, 1979
최웅환, 「16세기『안민학 애도문』의 판독과 구문분석」, 국어교육연구31,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