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량좌(羅良佐, 1638~1710)


나량좌(羅良佐, 1638~1710)                               PDF Download

 

량좌(羅良佐, 1638~1710)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관직에는 큰뜻을 두지않고 학문과 수양에 전념한 인물이다.  문장은많이 남기지 않았다.  윤선거(尹宣擧),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윤선거가 송시열등 서인의 모함으로 죄를 얻자 적극 변호하다 유배형을 당하였다.

1638년(1세, 인조16년)에 태어났다. 부친은 해주목사를 지낸 나성두(羅星斗)이며,  모친은 판서 김남중(金南重)의 딸이다.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현도(顯道), 호는 명촌(明村)이다.  경기도 과천의 명촌리(明村里)에서 살았기 때문에 ‘명촌거사’  혹은 ‘명촌’ 을  호로 사용했다.

1657년(20세,효종8년) 부친의 소개로 윤선거(尹宣擧, 1610-1669)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시작했다.  부친은 당시 충청도 이산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윤선거는 김집의 제자이며,  생원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났을 때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서 성문을 지키다가 점령 당하였는데,  아내는 자살하였고,  자신은 평민의 복장을 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나중에 이일을 후회하여 평생관직에 나가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만 매진하였다.  소론(少論)의 영수로 활동한 윤증(尹拯, 1629-1714)의 아버지 이기도하다. 이러한 스승의 밑에서 나량좌 역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수양에만 전념하였다.  나량좌는 나중에 송시열, 송준길에게도 배웠는데, 스승 윤선거를 변호하면서 송시열과 극단적으로 멀어지게 된다.

1677년(40세,숙종3년) 40이 넘은 나이에 송준길의 추천으로 희릉참봉(禧陵參奉)· 동몽교관· 상의원 주부의 벼슬을 받았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83년(46세,숙종9년) 평강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잠시 근무하다 사직하였다.

1685년(48세,숙종11년) 공조좌랑, 충청도도사, 종친부전부, 삭녕군수 등에 임명 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87년(50세,숙종13년) 3월 19일 몇사람과 함께 스승 윤선거가 죄없이 모함을 받았다고 상소를 하였다.  임금은 이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몹시 책망하였는데 상소의 내용은 주로 다음과 같았다.

“윤선거가 진심으로 세상을 근심했던 말들은 그 당시에는 비록 서로맞지 않았었더라도 오늘날에는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개 윤선거가 친구와  절교하는 방법은 본래 송시열이 절교하는 것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이미 윤휴(尹鑴)와 절교 하였더라도 송시열과는 맞게 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진실로 절교를 했거나 안했거나 시비를 가릴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데도 누구를 두려워하고 누구의 추궁에 몰려서 겉으로는 절교했다고 하면서 실지로는 절교하지 않은 것이라 할수 있겠습니까?  만일 송시열을 두려워하고 그의 추궁에 몰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구태여 무엇하러 여러 차례 송시열에게 너무 심하게 윤휴를 몰아 세우지 말라고 권하다가 도리어 송시열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겠습니까?”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윤휴(尹鑴, 1617-1680) 그리고 윤선거(1610-1669)는 서로가 잘 아는 사이였다.  남인에 속한 윤휴는 “진리를 주자만 알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냐?” 면서 주자의 경전 주해에 반하여 새로운 해석을 하자 송시열이 그를 주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갔다.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윤휴와 관계를 끊겠다고 약속하며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빠져 나왔으나 실질적으로 관계를 끊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나중에 알려져 송시열 일파의 지탄을 받은 것이다.  이에 나량좌는 스승 윤선거의 편에 서서 그가 죄없이 모함을 받았다고 상소를 한것이다.
이러한 상소를 올린 사람들은 모두 벌을 받았다.  죄목은 스승을 위한다고 변명하면서 사실은 그것에 가탁하여 국가 원로인 송시열을 욕보였다는 것이다.  나량좌는 평안도 영변으로 유배 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송시열은 당시 임금에게 석방을 건의하면서 이렇게 상소를 하였다.

“그가 스승을 위하여 변호를 한 것은 용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물며 미친 듯이 크게 외치고 분노 하였는데,  그것은 웃을 일이지 노여워 할 만한 일은 못됩니다.  또 듣건대 그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다하니, 마땅히 불쌍하게 여기는 생각이 있어야겠습니다.”

1689년(52세,숙종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자형인 김수항(金壽恒)과 매제인 이사명(李師命, 1647-1689)이 극형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혼자서 먼길을 달려가 이들의 상을 치르고 돌아왔다.
‘기사환국’이란 기사년에 즉 1689년에 서인들이 실권을 잡고 있던정 국의 상황이 크게 바뀐 사건이다. 숙종은 오랫 동안 아들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소의 장씨(昭儀張氏)에게서 왕자를 보았다. 숙종은 몹시 기뻐하며, 그 왕자를 원자(元子)로 삼고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는데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이 반대하였다.  그들의 영수인 송시열도 상소를 올려 적극 반대했다. 숙종은 자신을 지지해준 남인들의 여론을 등에 없고,  송시열을 제주도에 유배 시킨뒤,  사약을 내려 죽였다.  송시열의 의견을 따르던 서인들도 처벌을 하였는데,  김수항, 이사명도 그일로 희생이 된 것이다.
이후 서인들 대신 남인들이 실권을 잡게 되었다.

1696년(59세,숙종22년) 노학재(老學齋)를 짓고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학문에 매진하였다.

1706년(69세,숙종32년)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장령이란 사헌부(司憲府)의 정사품(正四品) 관직으로, 감찰(監察)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다.  주위 사람들이 만년에 절개를 허물지말고 더욱 굳건히 지킬 것을 당부하여 그말에 따랐다.  이후 둔재(遯齋)라는 서재를 짓고 조용히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다.

1710년(73세,숙종36년)에 사망하였다.  저서로는『명촌잡록(明村雜錄)』이있다. ⌈숙종실록(보궐정오) ⌋ 9월 28일자에 그의 졸기(卒記)가이렇게 실렸다.

“전(前) 장령 나량좌가 사망하였다.  그는 천성이 순박하면서도 진실되고,  품행이 순수하면서도 독실하였다.  일찍이 윤선거에게 배웠는데 스승의 말을 깊이 믿었으며, 스승이 죽은 후에는 무함(誣陷)을 받은스승을 위해 변론(辨論)하여 그 시비(是非)를 세상에 밝게 드러나게 하였다.  문장은 비록 조금 떨어지지만, 순수한 마음과 굳센 지조는 옛사람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지은 잡록(雜錄)에는 진실을 잃은 말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취(取)하지 않았다.  추천을 받아 사헌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사망하였다.”

당시는 당파싸움으로 날을 지새던 시기였기 때문에 졸기를 지은 사관도 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졸기의 내용에서 알아 볼 수 있다.

<참고자료>
최영성, 명제윤증과명촌나량좌, ⌈유학연구⌋15,2007.8
유병용, 나량좌,<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