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지(李器之:1690∼1722)


이기지(李器之:1690∼1722)                               PDF Download

 

의본관은전주(全州), 자는사안(士安),호는일암(一庵)이다. 조선경종(景宗) 때노론(老論)의영수(領袖)였던좌의정이이명(李頤命)의아들이며판서김만중(金萬重)의외손이다. 1715년(숙종41)에26세의나이로진사시(進士試)에합격하였다.

신임사화(辛壬士禍) 당시에4대신의한사람이었던그의아버지이이명이연잉군(延礽君)시절의영조(英祖)를세제(世弟)로책봉(冊封)할것을주장하다가목호룡(睦虎龍)의무고(誣告)를받아거제도(巨濟島)로유배되었으며, 이기지역시이사건에연루되어남원(南原)으로유배되었다가다시서울로압송되었는데심문을받던중고문으로인하여옥사하였다.
그뒤1725년(영조1)에비로소신원(伸冤)되고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추증(追贈)되었다.

1720 고부사행(告訃使行) (왕의 승하를 알리는 사신) 으로 북경에 갈 때 함께 자제군관(사신을 호위하며 보좌하는 군관의 신분이었으나 실제는 문인 학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의자격으로수행하였다.  이때 서양 문물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일기 형식을 빌어 기록으로 남겼는데 섬세한 관찰력이 수반되어 여느 기록들에 비하여 변별력을 갖는다《이기지의 일암연기 연구》. 김동건. 22p~23p)

그의 아버지가 처음에는 연행에 대한 체험을 자세히 적어 보려 했다가 아들이 쓴 기록을 보고 더이상 쓰지 않고 접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하루에 수십리, 수백리를 가는 일정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또 북경에서 천주당(天主堂)을 방문하고 서양 선교사들과 처음으로 만났다.

후대의 다른 연행록의 저자들 보다도 천주당을 빈번하게 방문하며 선교사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당시 천주당은 서양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서양 선교사들과 친밀한 유대 관계를 맺으며 서양의 음식을 처음 맛보기도하고,  그림과 천문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문물을 보고서 양선교사들과 필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보고들은 것을 자신의 연행록에 남겼다.  그의 연행록인 《일암연기(一庵燕記)》에는 서양화(西洋畵)에 대한 관심과 천문(天文), 역법(曆法), 북경 선교사 들과의 교류 내용 등 다른 연행록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자료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북경에 머무는동안 이기지는 천주당을 방문했던 일을 표로 작성하여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기록에는 방문한 날짜와 선물로 받은 물건, 대화 내용 등을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서양 선교사들이 대접하기 위해 내온 음식들에 대해서도 먹어 본 맛과 느낌을 적고,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질문했던 내용도 적혀 있다.  빵을 먹어 본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드럽고 달았으며 입에 들어 가자마자 녹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맛이었다.  만드는 방법을 묻자, 사탕과 계란, 밀가루로 만든다 고했다.

새로운 문물에 대한 경이로운 느낌이 그대로 전해 오는 듯하다.  따라서 그는 빵을 맛 본 최초의 조선인 이었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청나라때에 명·청대의 유명한 서화(書畵)가 활발하게 거래 되었다.  그러다보니 모사품도 적지 않았고,  검증되지 않은 채로 무분별하게 연행한 사신들을 통해 조선으로 유입된 것들도 상당수 있었던 듯하다.  그는 서화에 대한 안목도 여느 중국인보다 뛰어났다.  지인이 어느날 상당한 수의 서화를 가지고 와서 그에게 보이자 그 서화들이 모두 모사 작품임을 식별해 냈다는 일화도있다.
이처럼 서화에 뛰어난 식견을 지녔던 그는 서양그림에도 특별한 관심을가졌다. 서양그림을 보고 서양화법(西洋畫法)의 사실적 묘사에 주목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가 처음 대했던 서양화는 종교적인 내용의 그림이었다.  천주당 벽화의 정밀한 묘사와  입체적인 구도는 그가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화법이 었던것이다.

그는 서양 화첩을 보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책을 펼치면 갑자기 벌레와  물고기가꿈 틀거리며 움직이거나 날아 올라 마치 손에 잡힐 듯 했으며, 원근과고저의 형상을 볼 수 있게했다.  솜씨의 교묘함이 조물주를 능가할 만하다.”

라고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교회 병풍에 그려진“두 날개가 있는것” 에 대해 물어 “천신이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지만 이 신이 몸을 지켜 준다.”는 대답을 듣기도 했다. 이는 모두 그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기록들을 통하여 서화에 대한 뛰어난 안목을 지녔던 이기지를 새삼 떠올려 보게 된다.

그는 이것 말고도 다양한 분야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천주당(天主堂)을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들과 천문, 과학에 대하여 나눈 대화의 내용 또한 주목해 볼만하다. 특히 혼천의(渾天儀)를 보고 선교사와  나눈 대화기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폭넓은 식견을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동양과 서양이 서로 다른 역법(曆法)의 우월성에 대하여 토론을 하면서 자신이 이해하고 있던 동양의 역법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의 기록을 잠시 보면,

“내가 물었다.‘ 서양의 북쪽 끝에 하지(夏至)에는 낮만있고 밤이 없으며,  동지(冬至)에는 밤만 있고 낮이 없습니까?’ 하자,  그 사람이 깜짝 놀라 말이 없다가 연달아 명확하다며 칭찬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서양 선교사가 내어준 종이로 만든 혼천의를 돌려 보면서 그 원리를 이해한 이기지는 동양 천문 우주관의 결점을 파악하고 확인한 후 그 느낌을

“비로소 만고의 비루함을 씻게 되었다.”

라고적어놓았다.

이기지는 연행하는 내내 천주당을 자주 방문코자 하였다. 그가 천주당에서 서양문물을 살펴보면서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서양인 선교사가 조선 사신 일행이 묵는 처소를 방문하고 자명종을 예물로 선물했다.  그는 자명종에 쓰인 서양숫자(로마자)에 대하여 자세히 물었다.
그리고 4일 후에는 선교사들 앞에서 써 보이자,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모두 놀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그는 의문점이 있으면 직접방문하여 묻기도하고,  서양화 책을 빌려 달라고 부탁을 하는가 하면 자신의 관소에 선교사들을 초대하기도 하였다.  이기지는 이와  같이 서양 학문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열정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던 인물 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