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李淞: 생년 미상)


이송(李淞: 생년 미상)                                               PDF Download

 

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무백(茂伯)  또는 고청(孤靑), 호는 노초(老樵) 또는 서림(西林)이다.  그는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지낸 이민곤(李敏坤)의 아들이며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의 문하생이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1756년(영조32)이민곤이 조영국(趙榮國)을 탄핵하다가 북도(北道)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에 금성(金城)의 역사(驛舍)에서 불에 타죽는 참상을 보고,  벼슬에 나아갈 뜻을 단념한 채 서산(西山)에 은거하며 오로지 학문 연마에만 전념하였다. 이송의 그러한 정서와 처절한 심정을 역사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국역일성록》 정조 20년 12월  29일조(條)를 보면 예조(禮曹)에서 충신(忠臣), 효자, 열녀의 별단(別單)에 고쳐서 부표(付標)한 내용이 수록 되어있다.  그 중에 이송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계모를 섬기고 봉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일찍이 그의 아비의 귀양살이를 따라갈 적에 금성(金城)의 역사(驛舍)에 이르러 한밤중에 불이 났는데 그의 아비는 이미 손쓸 수가 없게 되었다.  있었다.  관을 옮겨 장사 지내게 되어서는 묘를 지키면서 울부짖고 옷깃이 다 해졌으며 나물과 과일을 3년간 한번도 입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상기(祥期)가 끝날 때가 되어도 빗질을 하지 않자 머리털과 살갗에 구더기가 생겼고 성묘할 때울 부짖으며 발을 구르자 사나운 호랑이가 와서 지켜주었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 소년의 귀밑머리가 일시에 백색으로 변하고 몸이 점점 쇠약해지더니 병에 걸려 그수명을 더 연장 시키지 못하였다.”

나라에서 충신과 효자와 열녀를 장려하기 위하여 올리는 별단의 내용이니, 없다.

이는 아마도 당시에 효자의 한 표본으로 삼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던 듯하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그의 시문(詩文)  역시 주로 부친 의 글을 차운(次韻)하거나 부친을 그리는 마음을 애절하게 묘사한 내용이 많은 것도 주지할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송은 특히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대체로 이이(李珥)의 이기묘합설(理氣妙合說)을 존중하였으며, 실학의 대가인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등과도 폭넓게 교류하였는데,  박지원, 홍대용과는 동갑 나이로 우의(友誼)가 두터웠다.  그리하여 이송은 실학을 깊이 연구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현실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조정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않고 저술과 연구에만 평생을 바쳤다.

저서로는《노초집(老樵集)》이 있으며, 박지원과 함께 홍대용을 위한〈담헌묘지(湛軒墓誌)〉를 지은 바 있다.

정인보(鄭寅普)가 이송이 지은 담헌의묘표(墓表)를 읽고,

“아 이 글이야 말로 바로 소위 고문(古文)의 전아(典雅)함을 훌륭히 다하였다.”

고 하였다.  그리고 정인보는 <담헌홍덕보묘표(湛軒洪德保墓表)>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긴 글을 남겼다.

“연암(燕巖)이 지은 묘지명과 비교하면 연암은 탕일(宕逸)하며 기이(奇異)한 데가 보이지만,  서림(西林) 은순실(醇實)하고 깊고 아름다우며 그 꽃다운 향내가 멀리 풍긴다.  내가 감히 누가 낫고 누가 못하다는 것을 속단하여 평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글을 볼때 담헌을 아는 면은 서림이 더 깊은 듯하다.  그리고 또 서림의 글은 곡절이 있을 뿐만 아니니 그 홀로 아는데 이르러서는 연암과 어찌 그 우열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서림은 자신이 이미 당시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세속에는 글을 아는 이가 드물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 이름을 들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이 묘표는 다행히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지만,  그가 고심담사(苦心覃思)하여 유현하고 오묘한 것을 끌어내어 놓은 것이 또 이루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할 정도 일텐데,  이것들이 이미 다 흩어져 없어지고 만 것인가?  혹 이것이 사람들 사이에 버려져 있다가 바람에 날리고 서리에 젖어 찢기고 좀먹고 쥐가 물고가서 굴러다니다가 없어지고 만 것인가?  서림은 세상에서 고매한 선비이니, 응당 사후의 영예(榮譽)에 대해 기뻐하고 슬퍼하는 그런 관심은 없겠지만 그의 화려한 유문(遺文)은 다만 일인일가(一人一家)의 정화(精華)를 이루었을 뿐만이 아닌데,  가려져 드러나지 않고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슬픈 일이다.  지금 인보가 종합해 본 서림의 시문(詩文)은 비록 이것 밖에 안 되지만 세상에 글을 아는 이가 있다면 응당 농암(農巖) 이후 4~5명의 문장가에 서림이 그 사이에 들어감을 알 것이다.  그의 법(義法)이 근엄(謹嚴)하고 운용이 급박하거나 번거로움이 없으며,  또 음절이 잘 어울리고 문장이 빛나서 그 뛰어남이 다른이 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이 글에서 정인보는 이송에 대하여 농암 이후의 문장가로 손꼽을 정도로 극찬을 하고 있다.  또한 담헌에 대해서는 이송이 오히려 연암 보다 더 깊이 알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아마도 이송이 1770년(영조46)에 금강산에서 홍대용을 처음 만나 알게 된 후,  늘 함께 다녔던 그런 친분에서 표출된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들은 또 동해(東海) 지역의 유람도 함께 하며 다수의 시 작품을 남겼다.  그 뒤 홍대용이 이송과 산사(山寺)에 같이 가기로 하였는데,  열흘이 못되어 갑자기 홍대용이 죽었다.  그리하여 이송은 그를 애도하며 담헌 묘지(湛軒墓誌)를 지었던 것이다.

그의 저서《노초집(老樵集)》에는 홍대용(洪大容)이 중국에 가는 사신의 일행을 따라 북경에 가서 머물며 교제하였던 중국의 학자 엄성(嚴誠)의 시작품에 대한 서문(序文)이 있고,  논(論)과 잡저(雜著)에는 중국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여 명쾌하고 조리있는 평론을 가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연유로 정인보는 그의 유문(遺文)이 흩어져 버리고 빛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듯하다.

<참고문헌>
《노초집(老樵集)》
《조선고금명현전(朝鮮古今名賢傳)》
《호보(號譜)》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