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후(金鍾厚, 1721-1780)


김종후(金鍾厚, 1721-1780)                                  PDF Download

 

종후는 자는 자정(子靜)이고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호는 본암(本庵) 또는 진재(眞齋)이다. 할아버지는 참판 김희로(金希魯)이고, 아버지는 시직(侍直) 김치만(金致萬)이며, 동생이 김종수(金鍾秀, 1728-1799)이다. 민우수(閔遇洙, 1694-1756)의 문인이다.

스승 정암(貞庵) 민우수는 20세 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21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김창협과 권상하의 문인이다. 후에 1743년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1750년 통정(通政)으로 승차(陞差)하면서 공조참의 겸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었다. 1751년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성균관좨주·세자찬선(世子贊善)·원손보양관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종후의 동생 김종수는 1768년(영조 4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조정랑, 부수찬(副修撰)을 지내고, 왕세손 필선(弼善)으로 성실히 보좌하였다. 이 때 외척의 정치 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뒷날 정치의 제1의리로 삼은 정조의 지극한 신임을 받았다.

영조가 죽자 행장찬집당상(行狀纂輯堂上)이 되었고, 그 뒤 승지·경기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쳐, 규장각의 제도가 정비되면서 제학에 임명되었다. 1781년(정조 5) 대제학에 올랐고, 그 뒤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1789년 우의정에 올랐다.

1792년에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가 올라와 사도세자를 위한 토역(討逆)을 주장하자, 예전에 정조와 대담했던 내용인 “순(舜)·주공(周公)과 같은 대공지정(大公至正)의 도리로서 부모를 섬김이 효도”라는 소를 올려 이 논의를 가라앉혔다. 임성주(任聖周)·윤시동(尹蓍東)·김상묵(金尙默) 등과 친하게 교유했다. 정조는 윤시동·채제공과 더불어 3인을 자신의 의리를 조제하는 탕평의 기둥으로 지적하였다.

김종후는 어려서부터 사부(詞賦)에 능하여 문명이 있었고, 1741년(영조 17) 생원이 된 뒤부터는 성리학자로 알려졌다. 1776년 지평(持平)에 이어 장령(掌令)·경연관을 역임하였다. 이에 177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령이 되고 경연관을 거쳐 자의(諮議)에 이르렀다.

그는 영조대 신임사화 때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를 궁지에 몰아넣은 홍계희(洪啓禧)·김상로(金尙魯)‧김구주(金龜柱)와 입장을 같이 하였고, 장헌세자의 장인인 홍봉한(洪鳳漢)을 공격하였다. 그 뒤 김구주가 제거되자 원빈(元嬪)의 오빠인 세도가 홍국영(洪國榮)을 따랐다. 다시 원빈이 죽고 홍국영이 물러나자 소를 올려, 그에게 기만당하였다고 변명하였다.

정조 4년(1780)에 김종후의 졸기가 기록되어 있다. <정조실록>은 정조가 죽은 지 6개월 뒤인 1800년(순조 1) 12월에 이병모(李秉模)를 실록총재관(實錄憁裁官)으로 임명하고, 편찬에 착수해 1805년 8월에 완성되었다. 총재관은 이병모·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서매수(徐邁修)였는데, 김종후에 대한 평가가 매우 박하다.

“장령 김종후(金鍾厚)가 졸하였다. 김종후의 자는 백고(伯高)인데, 우의정 김구(金構)의 증손(曾孫)이며 김종수(金鍾秀)의 형이다. 영조 때 경학과 품행으로 천거되었고 지금 주상이 즉위하여 경연관으로 누차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항상 명의(名義)를 가지고 스스로 자랑하였었는데, 홍국영(洪國榮)이 축출될 적에 상소하여 보류하기를 요청하면서 몹시 사리에 어긋난 말을 하였으므로 식자들이 그의 창피함을 비웃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특별히 은전을 베풀 것을 명하였다. 그에게 본암집(本庵集)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저서로는 『본암집』이 있고, 편서로 『가례집고(家禮集考)』, 『청풍세고(淸風世稿)』가 있다.
본암집(本庵集)』은 심환지(沈煥之)의 서문이 있고, 서(書)는 그의 스승인 민우수(閔遇洙)와 동문인 김자정(金子靜)·이경사(李敬思)·원인손(元仁孫)·홍자순(洪子順)·신광온(申光蘊)·임성주(任聖周)·강규(康逵)·이홍렴(李弘廉)·김원행(金元行) 등과 주고받은 서신이다. 주로 『대학』·『논어』·『맹자』·『주례』 등 경전에 관한 것과 태극·영(靈)·음양오행·성(性) 등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잡저에도 「심기질변(心氣質辨)」 등 성리학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가례집고(家禮集考)』는 『가례』를 본문으로 삼고, 삼례(三禮: 儀禮·周禮·禮記)와 그 밖의 경전(經傳), 그리고 유학 및 그 이외의 여러 사상계열의 고전과 역사관계의 저술에서는 물론, 패림소설류(稗林小說類)에서까지 『가례』의 예절과 관계되는 사항을 두루 모아놓았다. 유교관계의 문헌에만 국한하지 않고 여러 분야의 자료까지 동원하여 사례의 관계사항을 추출해서 모아놓은 일은 전통적인 예절의 본질과 발달사정을 넓은 시야에서 고찰하고자 한 폭넓은 시야의 작업이기도 했다. 제자 임육(任焴)이 1801년(순조 1)에 간행했지만 널리 유포되어 이용되지는 못했다.

청풍세고(淸風世稿)』는 조선 후기의 학자 김극형(金克亨)·김징(金澄)·김구(金構) 등 삼대의 시문집으로 1779년(정조 3)에 동생 김종수(金鍾秀)와 합편하여 간행하였다. 이들은 김극형의 5대손이다. 권두에 김양행(金亮行)의 서문이 있다. 권1은 김극형의 『사천집(沙川集)』, 2·3은 김징의 『감지당집(坎止堂集)』, 권4는 김구의 『충헌집(忠憲集)』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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