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홍(蔡之洪, 1683~1741)


채지홍(蔡之洪, 1683~1741)                               PDF Download

 

지홍(蔡之洪, 1683~1741)은 조선시대 중기에 활동한 유학자로 권상하(權尙夏)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스승의 영향으로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동문인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이간(李柬), 윤혼(尹焜) 등과 함께 교류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경학,예학을 비롯하여, 역사·천문·지리·상수(象數) 등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실천적인 수양에 힘썼다.

황강영당과 수암사
채지홍의 노력으로 세워진 충북 제천의 황강서원(황강영당과 수암사)

 1683년(1세,숙종9년) 1월 14일, 청주(淸州) 금천리(金川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군범(君範), 호는 봉암(鳳巖)ㆍ삼환재(三患齋)ㆍ봉계(鳳溪)ㆍ사장와(舍藏窩) 등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첨지 중추부사 채영용(蔡領用)이며, 어머니는 유승주(柳承胄)의 딸이다.

1694년(12세,숙종20년) 소과(小科) 초시(初試)에 해당하는 공도시(公都試, 지방에서 열린 과거시험)에서 장원하였다.

1698년(16세,숙종24년) 식년시(式年試) 생원과에 합격하다. 다음해 상주 박씨(尙州朴氏) 박이경(朴履慶)의 딸과 결혼하였다.

1701년(19세,숙종27년) 가을에 청풍(淸風)의 황강(黃江)에 사는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 1641-1721)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해11월,  큰 아들 채복휴(蔡復休)가 출생하였다.

1703년(21세,숙종29년) 속리산(俗離山)을 유람했다. 다음 해 둘째 아들 채익휴(蔡益休)가 태어났다.

1708년(26세,숙종34년) 9월, 스승 권상하를 모시고 화양동(華陽洞)에 가서 우암 송시열을 원향(院享, 서원에 사당을 모셔 놓고 제향 드리는 일)에 참여하였다.
이해 12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1711년(29세,숙종37년) 과거 공부를 하여 출세할 뜻을 버리고 그 뜻을 담아 시( 歎詩)를 지었다.  가을에 스승 권상하로부터 삼환재(三患齋)라는 호를 받았다.
10월에, 권상하의 제자이자 동문인 한원진(韓元震)을 만나 교분을 맺었다. 친구들과 속리산을 유람하며 시를 짓고 이에 대한 글을 남겼다.

1712년(30세,숙종38년) 그간 과거 공부를 위해서 지은 습작들을 모두 없애 버렸다. 가을에 서재를 새로 짓고 사장와(舍藏窩)로 호를 삼았다. 다음 해 가을 동문 윤봉구(尹鳳九)와  교분을 맺고 호서(湖西, 충청도) 지방을 유람하였다.  도중에 이간(李柬), 윤혼(尹焜) 등을 만나 동물들도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가졌는지 하는 금수오상설(禽獸五常說)에 관해서 논하였다.

1715년(33세,숙종41년) 가을, 충청도 충주의 누암(樓巖, 지금의 충주시 가금면창동)에 가 서정호(鄭澔)를 만났다.  함께 ⌈중용⌋에 있는

‘치우치지 않고 기대지 않아,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음
(不偏不倚無過不及)’

이라는 문장에 관해서 논했다. 다음해 아들 채백휴(蔡百休)가 태어났다.  ⌈주서차의(朱書箚疑)⌋를 교정하고, ⌈화양행(華陽行)⌋ 을 지었다.  이해 암행어사 황구하(黃龜河)와  관찰사가 학문과 수행이 뛰어난 선비로 조정에 추천하였다.

1718년(36세,숙종44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나 바로 사직서를 올려 사양하였다.

1721년(39세, 경종1년) 1월, 부친과 함께 송호(松湖)로 이사하였다 . 8월, 스승 권상하가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9월, 시강원(侍講院) 자의(諮議)에 임명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이해 경종의 몸이 약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문제로 조정 안 팎이 시끄러웠는데, 신임사화가 발생하여 노론파가 실각하였다.  채지홍은 소론파의 죄를 논하여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다음해 사헌부의 관리들(소론파)이 채지홍을 비난하는 건의 문을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올렸다.

“자의(諮議) 채지홍(蔡之洪)은 본래 시골 구석의 보잘것 없는 무리로서,  이름을 훔친 상신(相臣, 정승)의 문하에 아첨하고 빌붙어 인연(彙緣)을 맺은 뒤,  천거를 받아 발탁된 뒤 외람되 게궁궐의 관료에 끼게된 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웃고 손가락질 한 것이 오래 되었어도 그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태거(汰去,  죄가 있는 낮은 벼슬 아치를 그 직무에 서쫓아냄)하소서.”

1723년(41세, 경종3년) 1월, 구운산(九雲山)으로 이사하여 은거하면서 후학의 양성에 힘썼다.  봄에 황강(黃江)으로 가서 스승 권상하의 연보를 정리하였다.  겨울,신치운(申致雲)이 근거없이 스승 권상하를 모함하여 스승의 관작이 박탈되었다.  이에 모함에 대응하는 상소문을 올리기 위해서 제자들이 함께 모여 논하였다.  다음해 2월 보령(保寧)에서 이간(李柬), 윤봉구(尹鳳九), 한원진(韓元震), 헌상벽(玄尙璧) 등을 만났다.

1725년(43세,영조1년) 부인 박씨(朴氏)의 상을 당하였다.  3월에,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 부솔(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을 청하였다.  겨울에,  민진원(閔鎭遠)의 요청으로 경연관(經筵官)으로 임명 되었으나 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몇 개월 뒤 부여 현감으로 임명 되었으나 역시 사퇴하였다.

1726년(44세,영조2년) 2월, 임금이 특명으로 불렀으나 사직 을희망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아울러 스승 권상하에 관해 무고함을 변호하였다.  이해 12월, 황강서원(黃江書院)이 준공되자, 동문들의 요청으로 서원의 일을 맡았다.  서원에는 스승 권상하와 스승의 스승인 송시열(1607∼1689)을 모셨다.
나중에 권상하의 제자인 한원진(1682∼1751), 윤봉구(1681∼1767), 권욱 등도 이곳에 모셔졌다.  권상하는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사망하자 그의 유품을 거두고,  유언에 따라 화양동에 만동비와 명나라 신종황제의 은혜를 기리는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숙종이 나중에 권상하를 우의정과 좌의정을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관직에 취임하지 않았다.

1727년(45세,영조3년) 5월에 부여 현감(縣監)에 임명되었다.  그러나곧바로 사직을 청하고 하직인사를 하기 위해서 영조 임금을 알현하였다.  그 자리에서 임금이 이렇게 말했다.

“성인(聖人)이 이르기를,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은 어른이 되어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산 속에서 유학을 공부하 는사람이 또 어찌 세상을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내가 듣기에 경연관(채지홍)이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부임한다 하는데, 외읍이 서울 안보다 못하니 반드시 아비를 모시고 와서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경연에 출입하도록 하라.”

채지홍은 자신의 학문이 보잘것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어 마음을 바르게 하여 뜻을 성실히 하는 일이 중요함을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임금은 기쁜 마음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임금이 다시 불러서 궁궐에 들어갔다.  경연의 자리에서 ⌈심경(心經)⌋을 읽고 있었는데, 특별히 채지홍을 불러 함께 하도록 한 것이다. 임금이 글뜻을 아뢰도록하니,  채지홍이 대답하였다.
그리고 다시 채지홍이 간언을 받아들이고 사사로움을 없애시라는 당부의 말을 올리니, 임금이 그 뜻이 절실하다고 칭찬하였다.  채지홍은 뒤에 ⌈효경(孝經)⌋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8월, 황산(黃山)을 유람하고 죽림서원(竹林書院)에 가서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의 영전에 인사를 올렸다.

1728년(46세,영조4년)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다.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련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반란이었다.  반란이 일어난 주요 지역이 경상도(영남) 이었기 때문에 영남 란(嶺南亂) 이라고도 불렸다.  채지홍은 고을 선비들과 함께 격문( 상당산성격문(上黨山城檄文))을 붙여 반란자들을 회유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6월에 청산(靑山) 현감(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상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1731년(49세,영조7년)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키기 이전에 진천(鎭川)에 투숙한 사실을 듣고도 보고하지 않았다고 정언(正言) 민정(閔珽)의 탄핵을 받았다.

1733년(51세,영조9년) 3월, 도명산사(道明山寺)에 머물면서 조용히 책을 읽었다.

1735년(53세,영조11년) 2월에진천(鎭川)의봉암(鳳巖)으로이주하였다. 다음해역학십이도(易學十二圖)와 세심요결(洗心要訣) 을지었다. 가을에, 정호(鄭澔)가사망하여곡을하였다.

1739년(57세,영조15년) 섬촌(蟾村) 민우수(閔遇洙, 1694~1756)를 만나 성리학에 대해서 강론하였다.  민우수는 당시 46세로 은거하다 형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1740년(58세,영조16년) 2월, 호서지방의 여러명 승지를 유람하고 1백 여편의 시를 남겼다.  3월에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문을 올려 사양하고,  교체를 요청하였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등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고 동유록(東遊錄) 을지었다.  6월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사어(司禦)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다음달 다시 공홍도(公洪道, 충청도) 도사(都事)에 임명되었는데,  취임한 뒤 다시  사퇴하였다.

1741년(59세,영조17년) 7월에 화양(華陽)의 채운암(綵雲菴)에 머물면서 ⌈독학전보(讀學塡補)⌋, ⌈성리관규(性理管窺) ⌋를 정리, 마무리했다. ⌈독학전보⌋는 35권 18책으로 자신이 40여 년간 여러 서적을 읽으면서 ⌈대학⌋의  3강령 8조목과 상통하는 문장을 골라 편찬 한 것이다.  이는 주희가 ⌈대학⌋을 잘 읽고 다른 경전으로 보완한다면 모든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한 말에 따른 것이다.
이해 10월 6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1755년 윤봉구(尹鳳九)가 묘지(墓誌)를 짓고, 이후 김원행(金元行)이 행장을 지었다. 1783년 아들 채백휴(蔡百休)가 상산(常山, 진천鎭川) 지장사(地藏寺)에서 ⌈성리관규(性理管窺)⌋ 4권, 문집15권( ⌈봉암집(鳳巖集)⌋), 연보 등 2권 총합 21권을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참고자료>
⌈국조보감⌋ 권58.
채지홍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  한국의 지식콘텐츠(www.krpia.co.kr.)
이순두, ⌈독학전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민식, ⌈채지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