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1741~1793)


아정 이덕무(李德懋:1741~1793)                      PDF Download

 

1. 이덕무의 생애
아정 이덕무는 정종(定宗)의 서자인 무림군(茂林君)의 10세손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인데, 이 밖에 형암(炯庵), 청장관(靑莊館) 또는 동방일사(東方一士)라는 호도 사용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청장(靑莊)이라는 호는 일명 신천옹(信天翁)으로 불리는 해오라기를 뜻하는데, 이 새는 맑고 깨끗한 물가에 붙박이처럼 서 있다가 다가오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라고 한다. 청장으로 호를 삼은 것은 그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겠다.

그의 아버지는 통덕랑 성호(聖浩)이고, 어머니인 반남박씨(潘南朴氏)는 토산현감 (兔山縣監)을 역임한 사렴(師濂)의 따님이다. 할아버지 필익(必益)은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이덕무 6살 때에 글을 가르치려고 중국 역사책인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혔는데, 1권을 다 배우기도 전에 문리를 터득한 영재였다고 한다. 16세에 수원백씨(水原白氏)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백사굉의 따님과 혼인하였고, 20세 무렵에는 남산 아래 장흥방에서 살았다. 이 무렵 집 근처 남산을 자주 오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많이 지었다.

그는 조선후기 서울 출신의 실학자인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의 한 사람으로,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과 더불어 사가시인(四家詩人) 중 한 사람으로 청나라에까지 문명(文名)을 날렸다. 그가 초기에는 신분상의 서자라는 이유로 경서(經書)로부터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뛰어났음에도 출세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으나 정조의 인재등용 정책에 힘입어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서얼 출신의 뛰어난 학자들을 등용할 때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검서관(檢書官)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박물학에 정통한 그는 사회 경제적 개혁을 주장하기보다는 고증학적인 학문 토대를 마련하여 훗날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등에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가난한 환경 탓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학문에 비상하고 시문에 능하여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사후에 그의 행장을 지은 연암 박지원은 시문에 능한 이덕무를 기리며 “지금 그의 시문을 영원한 내세에 유포하려 하니 후세에 이덕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또한 여기에서 구하리라. 그가 죽은 후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볼까 했으나 얻을 수가 없었다.”라고 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는 청장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호리호리한 큰 키에 단아한 모습, 맑고 빼어난 외모처럼 행동거지에 일정한 법도가 있고 문장과 도학에 전념하여 이욕이나 잡기로 정신을 흩뜨리지 않았으며, 비록 신분은 서자였지만 오직 책 읽는 일을 천명으로 여겼던 듯하다. 가난하여 책을 살 형편은 못되었지만, 굶주림 속에서도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의 책을 베꼈다. 이덕무의 저술총서이자 조선후기 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史實)에 대한 고증부터 역사와 지리, 초목과 곤충,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적편력은 실로 방대하고 다양하여 고증과 박학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은 이서구(李書九)는 그에 대하여 “겉으로는 쌀쌀한 듯이 보이나 안으로 수양을 쌓아 이익과 권세에 흔들리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인물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의 나이 26세 되던 1766년에 대사동으로 이사한 후, 서얼들의 문학동호회인 백탑시파(白塔詩派)의 일원으로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를 비롯하여 홍대용, 박지원, 성대중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적 재능에 비해 신분적 한계로 천거를 받지 못하다가 그의 나이 39세 되던 1779년에 정조의 정책에 의하여 규장각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 기용되면서 벼슬길이 열렸다. 1789년에는 박제가, 백동수와 함께 왕명에 따라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검서관 이후에 사도시주부(司䆃寺主簿),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적성현감(積城縣監) 등을 역임한 바 있다.

 

2. 이덕무의 시세계(詩世界)
1777년에 청나라에서 간행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는 조선 사람으로서 이덕무의 시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 후부터 이덕무의 시가 중국 시단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유득공의 숙부인 유금(柳琴: 1741~1788)이 1776년 중국을 방문하면서 훗날 사가(四家)로 불리게 될 이덕무를 비롯한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4명의 시를 담은 「한객건연집」을 청나라 시인이자 학자로 이름 높았던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에게 소개하였다. 이 시집에 실린 이덕무의 시는 총 99수나 되며 그 내용은 자연과 여정, 인물, 송별, 역사에 이르는 등 다양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중국에 가 본적도 없는 그의 시작품이 먼저 중국 시단에 널리 알려진 셈이다.

한객건연집」이 소개되고 2년 뒤에 이덕무는 연행단을 따라 중국을 방문했다. 이미 지명도를 쌓은 이덕무는 반정균을 비롯하여 이조원의 동생인 이정원, 기균, 옹방강, 축덕린 등 청조의 문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고, 이들을 통해 그의 시명(詩名)은 청조 시단에서 더욱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조원은 이덕무의 시를 가리켜 “건실하고 격조를 갖추어 네 사람 중에서 가장 노련하다”고 평가했다.

시에 대한 그의 재주는 정조(正祖)도 익히 인정하였다. 한번은 정조가 규장각 신하들을 불러놓고 「성시전도(城市全圖)」에 대한 백운시(百韻詩)를 짓게 하여 각각 점수를 매겼는데, 이덕무가 1등을 차지했다. 정조는 “신광하의 시는 소리가 나는 그림 같고, 박제가의 시는 말하는 그림이며, 이만수의 시는 좋고, 윤필병의 시는 풍성하고, 이덕무의 시는 우아하고, 유득공의 시는 온통 그림 같다.”고 평하였다. 정조는 이덕무의 시권(詩卷)에 우아하다는 의미의 ‘아(雅)’자를 썼는데, 이후로 이덕무는 아정(雅亭)이라는 호를 지어 사용하게 되었다.

 

3. 이덕무의 교우관계(交友關係)
청나라에 소개된 「한객건연집」의 저자들인 이덕무․유득공․박제가․이서구는 백탑파 혹은 이용후생파로 불리는 실학자이며, 지기(知己)의 정을 쌓은 벗이기도 하다. 특히 박제가와 유득공과는 서자라는 비슷한 처지에서 오는 신분적 공감대가(이) 있었다. 이덕무가 천애지기(天涯知己) 박제가를 알게 된 것은 24세 되던 1764년이다. 이덕무의 처남인 무인 출신 백동수의 집에 갔다가 현판 위에 써진 박제가의 ‘초어정(樵漁亭)’이라는 글씨를 인상 깊게 본 것이다. 3년 후 이덕무는 백동수의 집에서 박제가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그와의 첫 만남을 두고 “너무 맘에 들어 즐거움을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을 정도로 기뻐했다. 이덕무와 박제가의 우정은 1793년 이덕무가 죽을 때까지 근 30년간 이어졌다. 30년 동안 이덕무가 있는 곳엔 박제가가 있었고 박제가가 있는 곳엔 항상 이덕무가 있었다.

가녀리고 큰 키의 이덕무는 고상하고 조용했던 반면에, 박제가는 작은 키에 박력있고 자기 주장과 고집이 강한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외모와 성격은 달랐지만, 뜻이 맞았고 항상 서로를 그리워했다. 눈이 내린 어느 겨울 날, 착암 유연옥의 집에서 해금 연주를 듣던 박제가는 한밤중에 자신의 벗 이덕무가 보고 싶어졌다. 다음의 글은 그의 저서 「정유각집(貞蕤閣集)」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올 적엔 달빛이 희미했었는데 취중에 눈은 깊이도 쌓였네. 이러한 때 친구가 곁에 있지 않으면 장차 무엇으로 견딜 것인가. 내게는 즐겨 읽던 「이소」가 있으니 그대는 해금을 안고 야심한 밤 문을 나서 이덕무를 찾아가세.”

 

이 두 사람은 1778년 중국 연행에도 함께 갔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고, 1779년에는 규장각 검서관에 동시에 등용되어 십 수년간 동료의 정을 나누었다. 잦은 숙직과 힘든 근무 속에서도 두 사람은 의지해가며 규장각 도서들을 편찬해냈다. 실재로 이덕무는 박제가 보다 9살이나 연상이었으나, 이들에게는 나이 차이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아주 가난한 삶을 살았다. 하루는 빈곤을 겪던 이덕무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집안에서 가장 값비싼 것을 팔았는데, 그것이 「맹자(孟子)」라는 책이었다. 글을 하는 선비가 책을 내다 판다는 것은 가지고 있던 전부를 내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덕무는 책을 팔아 밥을 해먹고는 유득공을 찾아가 크게 자랑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유득공 또한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그대가 옳다’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이덕무와 함께 술을 마셨다. 이덕무와 유득공은,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左丘明)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술잔을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밤새 술을 마시며 맹자와 좌구명을 칭송하였다. 1년 내내 굶주리며 책을 읽기만 한다고 해서 살 방도가 나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책을 팔아 끼니를 마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의 이 말에는 평생 글을 읽어봐야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었던 서얼들의 신분적 한계를 자조적(自嘲的)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기구한 현실을 유쾌하고 장난스런 태도로 승화시켰고, 또한 세상의 출세와 명예로부터 한 꺼풀 벗어나 자유인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지닌 학문적인 성향과 타고난 기질의 호방함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4. 이덕무의 죽음과 저술
아정 이덕무는 1793년 1월 25일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본래 체력이 약한 데다가 규장각 검서관 생활에서 오는 고된 직무와 생활고에 따른 감기와 함께 폐렴 증상이 겹치면서 타계한 것이다. 갑작스런 비보를 들은 박제가와 이서구, 박지원, 남공철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를 기리는 글을 지었고, 정조는 내탕금(內帑金) 5백 냥을 하사하여 그의 유고(遺稿)를 간행하게 하고 아들 광규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차했다.

이덕무의 박학다식은 이용후생파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가난하여 책을 사 볼 수 없어 집에는 비록 책이 없었으나, 책을 쌓아 둔 것과 다름없었다. 평생 동안 읽은 책이 거의 2만여 권이 넘었고, 손수 베낀 파리만큼 작다는 승두세자(蠅頭細字) 또한 수백 권으로서 자획이 방정하며 아무리 바빠도 속자(俗字)를 전혀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쓴 책은 10여 종에 달하였는데, “나의 글이 진귀하지 못한 것이라, 한번 남에게 보이면 사흘 동안 부끄러워진다. 상자 속에 깊숙이 넣어 두었는데 스스로 나올 날이 있을 것이다.”하여 처음 쓴 초집(初集)의 이름을 「영처고(嬰處稿)」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청장이라는 물새 이름을 자호(自號)로 삼은 뜻을 유념하여 두 번째 문집을 「청장관고(靑莊館稿)」라 이름을 붙였다. 또한 듣는 대로 쓰고 보는 대로 쓰고 말하는 대로 쓰고 생각하는 대로 썼다는 의미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예절에 관한 「사소절(士小節)」 등이 있고, 그 외에 「청비록(淸脾錄)」, 「기년아람(紀年兒覽)」, 「청정국지(蜻蜓國志)」, 「앙엽기(盎葉記)」,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예기억(禮記臆)」, 「송사보전(宋史補傳)」,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등이 있다.

 

5. 이덕무의 세계관
아정 이덕무와 박제가는 북경 연행 중에 유리창을 중국 문인들과 만나는 장소로 삼았다. 이덕무는 박제가와 달리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후기 특히 18세기는 실학자들의 중국 방문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홍대용을 비롯하여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와 같은 연암 주변 인물들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중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연행록(燕行錄)」을 남겼는데, 이덕무는 「입연기(入燕記)」라는 「연행록」을 남겼다. 「입연기」는 1778년 3월 17일 서울을 출발하여, 윤6월 14일 의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연행록이다.

이덕무는 중국을 다녀온 연암파 실학자들과 달리 청나라 왕조의 지배체제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인물이다. 박제가와 절친한 사이였지만, 이덕무는 그의 친청적(親淸的)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을 다녀왔지만, 조선 선비들이 청나라를 오랑캐로 폄하하는 것을 비판한 박지원·박제가와는 서로 다른 중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덕무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중국은 중국일 따름이고 조선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으니, 중원만 모두 옳겠는가? 비록 도회지와 시골의 구분은 있을지 몰라도 모름지기 평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홍대용과 박지원, 박제가와는 또 다른 자국 중심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그는 청나라와 조선을 자주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인식하였다. 사실 청나라에 대한 이덕무의 인식은 전통적인 보수성향을 띠면서도 자국 중심적이고 평등한 것으로 점차 변화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대명의리(大明義理)와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생각이 팽배했던 시기에 조선 선비들이 가졌던 청나라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이덕무를 통해 읽을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연암집(燕巖集)」
「귀사당집(歸思堂集)」
「국조보감(國朝寶鑑)」
「이덕무의 실학사상」(이성무, 「향토서울」31, 1967)
「네이버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