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원(金聲遠,생년 미상-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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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미상(?)∼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구(景久), 호는 송산(松山)으로 증조부는 형조판서 김정(金淨)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충암(沖菴) 선생이라고 불렀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유학자이며 의병장인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행실이 있었고, 크고 작은 일에 관계없이 반드시 조헌에게 물어 그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스승은 그를 특별히 사랑하여 “너는 성품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조명현의 후손이니 더욱 힘쓰라.”라고 하였으므로 김성원이 마음을 다하여 그를 따랐다. 스승인 조헌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헌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때 늙은 부모가 살아 있었으므로 가족이 전투에 참여하지 말 것을 말렸으나 김성원이 듣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백성은 아버지와 스승과 임금에게서 생육(生育)되었으므로 한결같이 섬기고 죽어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데, 더구나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피난을 갔으니 어찌 사사로움을 돌아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금산군의 서쪽 경계에서 적과 하루 종일 싸워 적이 거의 패배할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나 아군의 후원세력이 없어 조헌과 함께 전사하였다.

당시 금산(錦山)의 왜군이 충청도 일대로 세력을 넓힐 기세라는 소식을 듣고, 곧장 금산으로 가서 왜군에게 함락된 금산의 10리 밖에 이르렀다. 당초 호남 순찰사 권율(權慄)과 합세하여 적을 협공할 계획이었으나, 권율로부터 그 기일을 미루자는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왜군은 이미 조헌이 거느린 의병의 약점을 알고 역습해 왔다. 그의 군사는 역전 분투하여 왜군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으나 많은 수를 대적하지 못하여 조헌과 7백의사가 전멸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을 회복하게 된다.

처음에 김성원이 집을 떠날 때 집안사람들이 울며 말하기를,

“혹 불행한 일이 있게 되거든 의대(衣帶)에 표시하여 가족들이 알게 하십시오.”

라고 하니 김성원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평생 동안 배우고 익힌 것이 충(忠)과 의(義)뿐이므로, 장부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면 모래밭에 주검을 버려야 할 뿐이거늘 어찌 거두어 묻는 일에 마음을 두겠는가?”

라고 하였다. 김성원이 죽을 때에 나이가 스물 여덟이었는데, 그의 주검을 찾지 못하여 의총(義塚), 즉 의국열사의 시신을 수습하여 하나의 무덤에 함께 묻었다. 그 앞에 윤근수(尹根壽)가 쓴 큰 비석이 있는데, 김성원의 이름을 특별히 드러내었다.

그가 데려갔던 종 몽해(夢亥)가 죽은 시체들 속에 몸을 감추어서 살아남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인이 군전(軍前)에 나아가니 조야(趙爺)가 일찍이 그 곁에 두고서 크고 작은 일을 자문하였다. 일이 급하게 되자 장하(帳下)의 선비 중에 조야를 만류하여 도피하기를 청한 자가 있었으나 조야가 우리 주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우리들에게는 오늘 죽음이 있을 뿐이니 의리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적이 과연 장하에 난입하므로 우리 주인이 몸으로 조야를 막아 가리고서 활을 당겨 적 여섯을 쏘아 죽이니 적이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다시 활을 쏘려 하자 활시위가 끊어지고 활이 부러졌으나 오히려 발을 돌리지 않으니, 적이 드디어 우리 주인을 베고 조야까지 베었다.”

라고 하였다.

예전에 중국의 주희는 난공자(欒共子)의

“백성은 아버지와 스승, 임금에게서 생육되었으므로 한결같이 섬겨야 한다”

라고 한 말을 ⌈소학⌋의 글에 실었다. 난공자는 춘추시대 진(晉)나라 난성(欒成)의 시호이다. 난성이 애후(哀侯)를 보좌하였는데, 무공(戊公)이 도성을 공격하여 애후를 죽이고 난성을 불러 상경(上卿)을 삼으려 하자,

“생육시켜 준 은혜에 보답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다”

라고 사양하여 응하지 않고 싸우다가 죽었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두 가지 도리를 다하기를 바랄 수 없으므로 스승을 좇는 도리는 쓸데없다 하여 드디어 폐기하게 되었으니, 그 이치가 또한 절로 그러하다. 김성원으로 말하면 스승을 섬기는 도리에 부족한 것이 없었으니, 그 임금과 아버지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다. 아! 아름답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