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석(宋瑚錫, 1693-1756)


송호석(宋瑚錫, 1693-1756)                                  PDF Download

 

호석은 자가 자는 기여(器汝), 호는 몽와(蒙窩)이고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증조부는 송격(宋格)이고, 조부는 송지희(宋之熺)이며, 부친은 송득규(宋得奎)이다.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심경연의(心經演義)』를 저술하였으며, 『몽와유고(夢窩遺藁)』 5권이 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고, 모친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모친이 연로하자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며 기쁘게 해드렸다. 가난한 중에도 제수는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모친을 봉양하는 데에는 온갖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잘못된 일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아서 과실이 있는 자들은 함부로 집으로 드나들지 못했다.

도암 이재가 한천에서 강학을 할 적에 병들고 가난하여 이재의 문하에 직접 나아가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글을 올려 질문하였는데 경전의 뜻을 밝힌 것이 많았다. 이재가 직접 면대하지 않더라도 글을 통해 학문을 논하는 것은 옛날의 도리하고 하면서 오늘날의 군자로 허여하고 위기무실(爲己務實) 네 글자로 권면하였다.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 송호석의 행장을 지었는데, 그의 문집인 『이재유고(頤齋遺藁)』 卷18에 「몽와처사송공행장(蒙窩處士宋公行狀)」으로 전해진다.

황윤석은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 1759년(영조 35) 진사시에 합격, 1766년에 은일(隱逸)로서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고, 뒤이어 사포서(司圃署)의 직장·별제를 거쳐 익위사의 익찬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779년(정조 3)에 목천현감이 되었다가 다음해 사퇴하였고, 1786년전생서(典牲署)의 주부를 거쳐 전의현감(全義縣監)이 되었다가 그 다음해에 사퇴하였다.

그의 학문은 실학시대의 학풍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인데, 처음에는 이학(理學)의 공부에 힘쓰고 『주역』을 비롯한 경서의 연구도 하였으나, 북경을 거쳐서 전래된 서구의 지식을 받아 이를 소개한 공이 크고, 또 종래의 이학과 서구의 새 지식과의 조화를 시도한 점이 특색이다.

송호석의 손자인 송상은(宋相殷)이 승문원 정자로 있을 적에 조부의 문집 ⌈몽와유고(蒙窩遺稿)⌋를 간행하려고 하면서, 김종후(金鍾厚, 1721-1780)에게 서문을 부탁한다.

김종후는 송호석의 학문은 궁리‧정심‧수신‧정가(窮理正心修身正家)의 올바른 법도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조금의 가식도 없다고 평한다.

또한 인물성오상을 논할 적에 주자가 논한

“위치가 다르면 이치의 발용도 동일하지 않다(所居之位不同則其理之用不一)”,

“명덕은 심과 성의 합일이다(明德合心性)”,

“마음은 리를 탑재한 기이다(心爲載理之氣)”

등을 가져와 변론한 내용은 탁견이라고 평한다.
송호석은 평생토록 도암 이재를 앙모하였고, 이재가 졸하자 제자의 예를 다했다고 적었다. 송호석이 비록 병들어 이재 문하에 나아가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지만 편지로 올린 질문을 이재가 크게 허여하였고, 이재와 송호석이 면대하여 가르침을 수수하지는 못했지만 틀림없는 사제간이라고 했다.

아울러 송윤석이 보내준 「몽와처사송공행장(蒙窩處士宋公行狀)」을 읽으니 송호석의 학문과 인품이 출중함을 잘 알겠다고 했다.

김종후는 민우수(閔遇洙, 1694-1756)의 문인이고, 민우수는 김창협과 권상하의 문인이다. 그리고 이재는 김창협의 문인이다.
<참고문헌>
황윤석(黃胤錫), 이재유고(頤齋遺藁)
김종후(金鍾厚), 본암집(本庵集)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