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철(愼在哲, 1803~1873)


신재철(愼在哲, 1803~1873)                                PDF Download

 

내희(宋來熙, 1791~1867)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금곡(錦谷) 송내희는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1838년(헌종 4)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된 이후 사헌부의 장령(掌令), 집의(執義) 등을 거쳐, 뛰어난 학행을 인정받아 1853년(철종 4)에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에 천거되었다.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1857년부터 10년 가까이 대사헌을 여러 차례 지내고 뒤에 찬선(贊善)에 이르렀다.

송암(松菴) 신재철(愼在哲)은 강원감사 신희남(愼喜男, 1517-1591)의 9세손으로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장헌주(張憲周), 기우만(奇宇萬) 등과 교류하였고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아들인 최영조(崔永祚)가 사위이다. 신재철은 향교 명륜당에서 18년 동안 한학을 강하였고, 설악재(說樂齋)라는 서당을 건립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유집으로 송암유고(松菴遺稿)가 전하는데, 손자 신종봉(愼宗鳳)이 편집해놓은 것을 1963년 증손 신문성(愼文晟)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최익현(崔益鉉)의 서문이 있다.

시는 「입춘(立春)」·「한식(寒食)」·「제석(除夕)」 등 계절에 관한 것, 「우음(偶吟)」·「자탄(自歎)」 등 사상에 관한 것, 「독논어(讀論語)」·「독심경(讀心經)」 등 학문에 관한 것, 「계주(戒酒)」·「성경(誠敬)」 등 수신에 관한 것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서(書) 중 「상금곡선생(上錦谷先生)」은 송내희(宋來熙), 「상노사기장(上蘆沙奇丈)」은 기정진(奇正鎭)과 학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것이다.

잡저 중 「탄세설(歎世說)」은 명(明)나라가 망하고 오랑캐가 중국을 통치함을 탄식하면서 송시열(宋時烈)의 존주대의(尊周大義)를 찬양한 글이다.

한거잡록(閑居雜錄)」은 학행·태극·명덕·학술·사제 등에 대해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한 것이며, 「예설문답(禮說問答)」은 주로 상례에 대하여, 「제의(祭儀)」는 제사지내는 방법과 절차를 적은 글로서 참고자료가 된다.

천열부이씨장(薦烈婦李氏狀)」은 소년과부가 되어 남편의 뒤를 따라 음독자살한 이유혁(李儒赫)의 아내 광산이씨(光山李氏)의 포상을 건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