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상(李麟祥: 1710~1760)


이인상(李麟祥: 1710~1760)                                 PDF Download

 

의 자는 원령(元零), 호는 능호관(凌壺觀) 보산자(寶山子)· 보산인(寶山人)· 종강칩부(鍾岡蟄夫)· 뇌상관(雷象觀)· 운담인(雲潭人)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증조부 이민계(李敏啓)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의 서자(庶子)였다.  그가 9세 때에 아버지 이정지(李挺之)가 34세의 나이로 죽자,  어머니와 함께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삼촌인 이최지(李最之)로부터 글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유년기(幼年期)를 보내고 22세 때 서울로 올라와서 26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이후 38세 때까지 관직생활을 하였다.  덕수장씨(德水張氏)를 아내로 맞이하여 4남 1녀를 두었는데, 그의 친구인 송문흠(宋文欽)과 신소(申韶)가 집을 마련해 주었고 송문흠은 이를 “능호관(凌壺觀)” 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호(壺)자는 방호(方壺),  곧 방장(方丈)이라는 뜻 이므로 결국 자신의 집은 방장산(方丈山)의 경관을 뛰어 넘는다는 뜻을 갖는다.

38세 때인 1747년에는 중앙관직에 있다가 경상남 도함양군(咸陽郡) 의 사근찰방(沙斤察訪)으로 나갔다.  41세 때인 1750년에는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장호원읍(長湖院邑)에 위치한 음죽현감(陰竹縣監)에 부임하였다.  음죽현감으로 있으면서 강직한 성품 때문에 관찰사와 다투고서는 관직에서 떠났다.
42세 때인 1751년에는 친구 이윤영(李胤永)이 은거하고 있는 단양(丹陽)을 찾아가 은거하고자 하였으나 오래 있지는 못하였다.  다시 음죽현 서쪽설성(雪城)의 종강(鍾崗)에 칩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곳에 지은 정자는 “종강모루(鍾崗茅樓)”라고 이름을 지었다.  48세 때인 1757년에 부인을 잃고 51세 때인 1760년에 자신의 생을 마감하였다.

이인상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인 화가(文人畵家)이자 서예가(書藝家)로 알려져 있다.  그가 교류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도암은 스스로

“정암(靜庵)과 율곡(栗谷)은 나의 스승이다”

라고 말하며 깊이 사숙(私淑)했던 인물이다.  또한 이인상이 사숙했던 인물로는 삼연(三淵) 김창협(金昌協)과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등의 노론계 학자들이었다.
율곡의 문하에 김장생이 있었고 김장생의 문하에 송시열이 있었으며 송시열의 문하에 김창협과 이희조가 있었다.  그 역시 노론의 학맥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와 교유했던 인물로 “능호관기”를 써 주었던 송문흠을 비롯하여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이윤영(李胤永) 이있다.  송문흠은 그의 형 송명흠(宋明欽)과 함께 도암의 제자이다.  이윤영은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이인상의 그림에 화제(畫題)를 많이썼다.  또한 신소(申韶), 오찬(吳瓚)과도 정치적 입장이나 문예적 인삶의 자세를 공유하였다.  이외에도 당대에 시서(詩書)에 명성이있었던 황경원(黃景源),  평안관찰사,  대제학,  좌의정을 지낸 문장가 였던 김종수(金鍾秀),  이조판서를 지낸 이최중(李最中)이 있었다.  또 광산 김씨 가문의 김순택(金純澤),  김무택(金茂澤) , 김양택(金陽澤),  김상악(金相岳),  김상숙(金相肅)과도 평생 동안 교유하였다.

이인상은 시서화(詩書畵)는 물론 전각(篆刻)에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다.  이미 당대에 많은 문인들이 그의 글씨와 그림에 대하여 인정하는 평가를 남겼다. 후대의 인물 김정희(金正喜) 역시 높은 감식안 으로 그의 예법(隷法)과 화법(畫法)에 문자기(文字氣)가 있다고 말하였다. 특히 김정희와 이윤영은 집안 대대로 인척관계를 맺고 있어서 그 교류하는 양상인 남다른 면이 있었다.

이인상은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이니, 부모의 원수는 의리에 있어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

라고 하여 ‘반청의식(反淸意識)’을 가졌다. ‘대명 의리론(大明義理論)’를 견지함으로써 복수하려는 의리를 지키는 것이 사대부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고조부 이경여가 대표적인 반청주의자로서 심양에 억류되었던 사실이 있었던 것도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대명의리론’과 관련하여 옛것을 좋아하는 상징적문화  행위는 북벌(北伐論)이 쇠퇴하 는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생각의 반영으로 고동(古董) 수집과 감상에의 취향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가 추구한 고(古)의 의미를 풀어보면, 역사적으로는 ‘선진(先秦)시대 이전’을 가리키고,  도덕적으로는 ‘세속적 가치와의 비타협’을,  정치적 차원으로는‘ 사대부적 처신과 의리의 강조’로,  문예적 차원으로는 ‘고문과 고동(古董)의 애호’로 드러났다.

그의 친구인 청천자(靑川子) 임경주(任敬周)에 따르면 이인상은 문(文)과 도(道)를 병행했던 까닭에,  문장가와 도학자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문장가는 그에게 도에 힘쓰면 문에 전력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며,  도학자는 그에게 외식(外飾)하는 문이 아니라 본질이 되는 도에 힘쓰라고 말했다고 한다.  임경주의 이러한 말을 참고하면 이인상은 문(文)과 도(道)를 모 두중시했던 이유로 도학가와 문장가 모두에게 공격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즉 도학과 예술을 엄격히 구분하는 기준으로는,  도학에 전일하지 않는 인물로 간주되거나 문학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물로 이해 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와 사귀며 편지를 주고 받을 때는 비교하는 마음을 일체 경계 해야하며,  잘난 체하는 마음을 일체 경계 해야하고,  잘못을 숨기는 마음을 일체 경계 해야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우(交友)에서 경계 해야 할 마음가짐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이는 곧 비교하는 마음,  잘난 체하는 마음, 잘못을 숨기는 마음이다.  이 세 가지를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도의에 입각한 교우를 위해서는 사귐을 맺은 두사람 사이에‘ 진실한 마음을 수반한 상호 수평적 관계’가 전제 되어야함을 말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겠다.

이인상과 그 친구들의 문예 취향(文藝趣向)은 이른바 동시대 경화사족(京華士族)과는 뚜렷한 거리를 두고 있다.  조선후기 경화사족은 일반적으로 서울에 거주하면서 많 은재력을 바탕으로 서화고동(書畫古董)과 서적(書籍)을 모으며 자신들의 품격있는 삶을 지향하였다.  그러나이 인상과 그 친구들은 경세적(警世的)인 성격을 띠고 있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인상은 서얼 출신(庶孼出身) 이었으나 사대부들과의 폭넓은 교유를 하였으며 아울러 사회적 약자들에게 까지 도관심을 나타냈었다.  일반적인 은일자(隱逸者)로 불리는 것을 꺼렸으며 현실과의 문제를 끊임 없이 고민했던 예술가 이자 문인이었다.

그의 문집으로는《능호집(凌壺集)》, 필사본《뇌상관집(雷象觀集)》, 또
다른 필사본으로《뇌상관고(雷象觀藁)》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