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명(李頤命:1658~1722)


이이명(李頤命:1658~1722)                                PDF Download

 

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지인(智仁)· 양숙(養叔), 호는 소재(疎齋)이다.  세종(世宗)의 서자(庶子)인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의 후손으로,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의 손자이며,  생부(生父)는 대사헌을 지낸 이민적(李敏迪)인데 지평 이민채(李敏采)의 양자가 되었다.  생부가 홍문관(弘文館)책을 읽게 한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어머니는 창원 황씨(昌原黃氏)인데 의주 부윤 황일호(黃一皓)의 딸이다.

외조부는 박장원(朴長遠)이며,  장인은 김만중(金萬重)이다.  당색으로는 서인(西人) 이었다가 그후 노론(老論)이 되었다.
숙종(肅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기용된 후 1680년(숙종6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을과(乙科)에 급제하고 168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재차 급제하여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때 사형당한 이사명(李師命)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남인(南人)들에게 집중 공격을 받았다.  기사환국때 송시열(宋時烈)등과 함께 죽은 형이 정치적으로 신원(伸冤)되지 못하자,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으면서 1698년 이를 문제삼았다가 공주(公州)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석방 되었지만 1701년이 되어서야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으며 그 뒤에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여러벼슬을두루거친후에1706년(숙종32년)에우의정(右議政)에제수되고, 1708년(숙종34년)에좌의정(左議政)과영의정(領議政)을역임하였다.

이이명은 숙종(肅宗)을 섬김에 다른 신하들 보다도 인정을 많이 받았다.
1710년(숙종36년)에 내의원(內醫院)것이 전후로 11년이나 된다.  그의 정성을 아름답게 여긴 숙종이
“내 병을 근심하는 자는 경(卿) 한 사람뿐이다.” 라고 까지하였다. 1717년 숙종의 임종 직전에 홀로 임금을 마주하였을 때 소론이 지지하는 세자(世子) 곧 훗날 경종(景宗)에게 불리한 말을 하고 노론이 지지하는 연잉군(延礽君) 곧 훗날 영조(英祖)를 지지하였다 하여 소론과 남인들로부터 불만을 샀다.  이 당시 노론의 영수인 이이명이 숙종과 독대한 내용은 숙종 이사관(史官)들을 교묘하게 따돌렸기 때 문에《실록(實錄)》에 전하지 않는다.  숙종이 승하(昇遐)하자,  그가 고부사(告訃使)의 자격으로 청(淸)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돌아왔다.

포르투갈 신부 사우레즈 등을 만나 교유(交遊)하면서 천주교(天主敎)· 천문(天文)· 역산(曆算)· 지리(地理) 등에 관한 책을 가지고 이듬해 돌아와 국내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당시 연경에는 네 군데의 천주교 회당이 있었고 신부들이 상주하며서 양과학과 종교를 전파하고 있었다.  이때에 아들 이기지(李器之)가 함 께동행하였는데, 사우레즈 등에게 서양식 계란 떡,  지금의 카스텔라를 대접받았다.  숙종의 주치의 이시필(李時弼)도 동행했었는데, 훗날 귀국하여 서양식 계란 떡을 만들어 보려하였으나 그 맛을 내는 것은 실패하였다고 한다.

당시 글루텐 성분이 적은 우리의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었으나 제대로 부풀어 오르지 않은 까닭이었다. 노론(老論)의 영수(領袖)인 그가 실생활에 긴요하게 사용되는 벽돌을 이용한 온돌 개발과 풀무를 이용하여 열효율을 높이고자 했던것과 외발수레의 사용 등 청나라의 문물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특기 할 만하다.

노론을 주도하며 주자도통주의(朱子道通主義)에 기반을 둔 정치이념을 적극 실현하고자 하였고,  서양의 학술 사상(學術思想)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던 그는 또 일찍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서양문물(西洋文物)과 지도(地圖) 입수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요동(遼東)과북 경(北京)에 이르는 지형의 군사 형세를 그리고,  관방(關防)에 관련된 내용을 기록한 국방 지도인<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를 만들어 숙종에게 올렸다.  이 지도는 청나라에서 구입한《주승필람(籌勝必覽)》안에 들어있는 <요계관방도>와,  모사한<산동해방지도(山東海防地圖)>에 우리나라 관방의 중요 부분을 더하여 제작한 것이다.

그는 또 양반 사대부에게도 군포(軍布)를 징수해야 한다고 주청한 바있는데,  그의 주장은,  이들 역시 조선의 백성이므로 양민(良民)들과 동등하게 병역(兵役)을 적용하고,  병역 을징발하거나 군포와 호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곧 남인(南人)과 서인(西人) 모두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런가하면 1721년(경종1년)에는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와  종부제(從父弟)인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과 함께 어전에서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할 것을 주청하다가 소론의 반대 로그 결정 이철회되자,  유봉휘(柳鳳輝) 등의 탄핵을 받고 남해(南海)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들 세명과 함께 이이명을 포함하여 노론 사대신(四大臣)이라고한다.  이러한 와중에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  즉 노론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고변을 계기로,  8개월 동안 국문(鞫問)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다음해 인1722년(경종2년)에 체포되어 한강 나루에 이르러 사사(賜死)되었다. 그의 시신은 공주(公州) 죽곡(竹谷)에 장사 지냈다.  이를 역사에서는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부른다.  이때에 노론의 많은 인물들이 화를 입었다.  아들 이기지도 1721년에 죽음을 맞이하여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그 뒤 1725년(영조원년)에 적신(賊臣)을 주벌(誅罰)하고 군흉(群兇)을 귀양보내는 한편, 충성을 포상하고 죽음을 애도하는 은전(恩典)을 크게 베풀게 됨에 따라 그의 벼슬이 회복되었고 시호가 내려졌으며 과천(果川)의 사충서원(四忠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1727년(영조3년)에 임천(林川) 옥곡(玉谷)에 묘를 다시 써서 장사지냈다.

저서 및 작품으로는 《소재집(疎齋集)》20권과 <강역관계도설(疆域關係圖說)>· <동국강역도설(東國疆域圖說)>· <양역변통사의(良役變通私議)>· <전산촬요(田算撮要)>· <강도삼충전(江都三忠傳)>·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