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태(洪世泰: 1653~1725)


창랑 홍세태(洪世泰: 1653~1725)                    PDF Download

 

그의 자는 도장(道長), 호는 창랑(滄浪)과 유하(柳下)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서울에 거주하였다. 아버지는 무관 홍익하(洪翊夏)이고, 어머니 강릉유씨(江陵劉氏)는 학생 유천운(劉天雲)의 따님이다.


생애

그는 어머니가 노비였으므로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종의 신분이었다. 이씨 집안의 종이였는데, 그는 5세에 책을 읽을 줄 알았고, 7,8세에 글을 지었다고 한다. 그가 농사일을 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아 주인이 죽이려고 하자,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1634~1684)김석주(金錫胄:1634~1684): 숙종의 외척이다.가 손을 써서 구해주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청성이 은자 100냥을 내고, 동평군(東平郡) 이항(李杭:1660~1701)이항(李杭:1660~1701): 인조의 손자이며, 숭선군(崇善君)의 아들이다.도 은자 100냥을 내어 속량(贖良)시켜 주었다는 일화가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청성군과 동평군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으니, 이들에게 재능을 인정받았다는 것은 당시 사회의 관념상으로 보더라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홍세태는 청성군과 동평군을 아버지처럼 여겼다. 이항이 옥사로 인하여 처형되었을 때, 홍세태는 은혜에 보답하고자 손수 그의 시체를 염하였다고 한다.

노비신분을 면한 중인신분으로 그는 과거를 볼 수 있게 되었고, 1675년(숙종1년)에 잡과인 역과(譯科)에 응시하여 관직을 제수 받았다. 당시 역관이 되려면 외국어를 배우는 사역원(司譯院)에서 공부를 하고,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를 치러야하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경쟁률이 높은 사역원이다 보니, 전·현직 고위 역관들의 추천이 있어야만 입학이 용이했을 뿐만 아니라 주로 대대로 역관을 배출한 집안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홍세태는 역시 이 시험에도 합격하여 중국 사행(使行)의 역관으로 활동하였다.

1682년에는 통신사를 따라서 일본에 다녀온 뒤, 문학에만 몰두하여 가난하게 살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인들의 추천으로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이문학관(吏文學官)과 승문원 제술관(承文院製述官)이문학관(吏文學官)과 승문원 제술관(承文院 製述官): 외국에 보내는 글을 담당하는 전문직. 이문(吏文)은 중국 외교 문서에만 쓰던 글로 조선 사람에게는 매우 어려운 글이었다.을 여러 번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가난한 생활 속에 8남 2녀의 자녀를 모두 잃는 아픔도 겪었다. 중인 신분으로서 사회 제약에 대한 갈등 앞에서 실망한 뒤, 은거하며 자신이 지은 글을 정리하여 책으로 만드는 데 주력하였다.

궁핍한 생활에도 그는 자신의 문집 출간을 위해 베갯속에 은전 70냥을 모았다. 그는 죽기 전에 부인에게 은전 70냥과 편집된 문집원고를 건네며, 간행해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가 생전에 자신이 탐욕 없이 시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덕이라며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그가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지, 6년 뒤에 사위 조창회(趙昌會)와 제자들에 의해 그의 문집 《유하집(柳下集)》 14권이 간행되었다.


한시에 뛰어난 재능과 관련된 일화

1) 일본 통신사 수행길에 발휘한 그의 숨은 실력

언어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일본인과 대화할 경우 한시와 그림을 매개로 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다보니, 서얼(庶孼)이나 상민(常民) 출신의 문인과 화가가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통신사절단에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주로 선발되었는데, 홍세태는 시를 잘 짓는다하여 뽑혔다. 일본에 도착한 첫날, 일본인들이 자리다툼까지 하면서 시를 적어달라고 했다. 조삼(朝三)이라는 일본 승려는 첫 기착지인 쓰시마에서 에도까지 안내하면서 틈만 나면 홍세태와 시를 지었다. 홍세태가 일본인들에게 시를 지어주고 받은 원고료가 화원의 그림 값과 같았다고 한다. 홍세태가 일본에서 활약한 일을 《유하집(柳下集)》 말미에 첨부된 정래교(鄭來僑)의 묘지명(墓誌銘)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섬나라 오랑캐들이 종이나 비단을 가지고 와서 시와 글씨를 받아갔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그들이 담처럼 죽 늘어서면, 그는 말에 기대선 채로 마치 비바람이라도 치는 것처럼 써 내려갔다. 그의 글을 얻은 자들은 모두 깊이 간직하여 보배로 삼았으며, 심지어는 문에다 그의 모습을 그리는 자도 있었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의 모습을 문에다 그려두고 볼 정도라면 얼마나 그를 선망하고 존모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홍세태의 문장력도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늘어서서 펼쳐들고 있는 종이나 비단에다 즉석에서 시를 읊어 적어주었다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순발력과 재치를 겸한 문장력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홍세태는 그런 일을 거뜬히 해내었다고 하니, 새삼 그의 문장력에 대한 탁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2) 중국 사신이 뇌물 대신 받아간 그의 시

중국에서 온 사신 행렬을 구경하던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돌을 던진 일로 조정이 한동안 소란하였다. 이는 중국 사신들이 많은 공물을 요구하여 귀한 것을 가져가려고 했기 때문에 누군가가 돌을 던져 생긴 일이다. 중국 사신들이 범인을 잡아오라고 하며 화를 내자, 조정 대신들은 그들이 더 많은 뇌물을 요구해 올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때, 중국 칙사(勅使) 도란(圖蘭)이 부채를 내밀며 조선의 시 한 수를 적어 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시 한 수여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돌을 던져 마음을 굳게 했으니, 시로 풀어 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조정대신들이 서로 미루고 있을 때, 좌의정 최석정(崔錫鼎)이 홍세태를 천거하였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임금은 율시(律詩)를 지어서 칙사에게 주도록 하였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돌은 던져지는 곳에 따라 다르다

돌이 물에 던져지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가 되어

그 퍼짐도 깊고 은은하다

이 시를 받은 중국 칙사 도란은 뇌물을 요구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경종실록(景宗實錄)》 3년 7월 11일조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이 뇌물을 받지 않고 돌아간 적은 근래에 없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공으로 홍세태는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선임되었다가 제술관(製述官)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중국에 보내는 주문(奏文)과 자문(咨文)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고 한다.

 

3) 혹독한 가난도 꺾지 못한 시에 대한 그의 열정

그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 8남 2녀의 자녀를 모두 세상에서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의 문집을 간행(刊行)할 비용을 착실히 마련했다. 문집을 내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신분이 낮은 문인(文人)의 시문을 간행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돈이 생기면 베개닛 속에다 묻어두었다. 이를 두고 《맹자(孟子)》를 팔아서 식구들의 양식을 구했던 이덕무(李德懋)는 그의 저서에서

“어찌 살았을 적에 술과 고기를 사서 일생동안 주린 창자를 채우지 않았던가?”

라고 풍자 아닌 풍자를 한 적이 있다. 홍세태는 시를 쓴 것 못지않게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여겼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시인들을 모아 모임을 만들고, 그 들이 쓴 작품을 엮어 《해동유주(海東遺珠)》란 시집을 만들기도 하였다.

 

강직한 성품과 신분의 굴레

그가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가난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천민출신이라는 신분의 장벽과 강직한 성품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무시하는 자에게는 머리를 숙이는 일이 없었다 한다. 처음 역관에 임명되었을 때, 동료들은 그가 미천한 출신이라 하여 멸시하였다. 중인들을 무시하는 양반들의 도움을 받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사대부들은 그의 신분이 천하다 하여 오만한 태도로 대하였던 것이다. 일본에서 돌아온 통신사들에게 조정에서는 큰 상을 내렸지만, 그는 받지 못했다. ‘천민의 시’라는 이유였다. 그후 그는 역관을 버리고 문장을 짓는 일에 전념하였다. 한편으로는 마음에 맞는 이들과 시회(詩會)를 열고 교유하였다.

그의 성품과 관련한 사항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그는 남과 구차하게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으나, 그의 실력을 인정하여 먼저 교제를 청하는 이들과는 서로 자유롭게 교유하였다. 세력과 지위를 가지고 압박하는 이에게는 화를 내면서

‘내가 비록 남에게 빌어먹는 신세이기는 하나, 어찌 머리를 숙여서 남의 턱찌꺼기 취급을 당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러한 성품 때문에 그는 실권자로부터 외면을 당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신분의 한계와 강직한 성품으로 인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재능과 남다른 시론(詩論)으로 체계를 세워 조선조의 중인 문학을 대표하는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학계의 정평이다.

 

신분의 제약으로 인한 고통과 좌절의 세월

그는 미천한 신분 때문에 배척당하거나, 좌절을 겪으면서도 꾸준한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삶은 시풍에도 영향을 끼쳐 솔직한 심정을 담아내는 소박한 분위기의 시를 많이 남겼다. 다음 작품에서 그러한 분위기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시제는 <잡흥(雜興)>으로 되어 있으며, 2수 중 제1수이다.

 

시골 전가에 기르는 늙은 암말은                           田家有老牝

애초 천마의 망아지로 태어났으니                       生得天馬駒

용의 갈기 오색 무늬 털을 지녔고                          龍鬐五花文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신골이건만                           神骨世所無

특이함을 볼 줄 모른 촌사람들이                           里閭不見異

서로 빌려가서 섶 달구질 끌게 하니                     爭借駕柴車

귀 늘어뜨려 우양 뒤를 쫓을 뿐이요                     垂耳逐羊牛

종일토록 몇 리 남짓 옮겨갈 뿐이네                     終日數里餘

장안에는 큰 길이 확 뚫려 있건마는                    長安有大道

이 말은 시골에서 생을 마치게 됐네                   此馬終村墟

이 작품은 농가에서 기르는 늙은 암말의 일생을 그려 놓은 것이다. 왜, 하필이면 암말인가? 암말의 이미지는 용맹을 과시하거나 외향을 추구하는 유형이 아니다. 그렇다고 보잘것없는 약해빠지 우양과는 근본적으로 부류가 다르다. 그래서 작자는 자신의 처지를 살짝 대입시켜 놓은 것으로 여겨진다. 용의 갈기에 오색무늬 털을 지닌 데다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신골(神骨)을 지닌 말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장안의 큰길거리를 활보하는 천리마의 삶을 살지 못하고 시골구석에서 섶이나 실어 나르는 달구지를 끌며 귀를 늘어뜨리고 하찮은 우양(牛羊)의 뒤를 따르는 생을 살고 있는 암말의 처지가 곧 자신의 처지와 너무 흡사한 닮은꼴인 것으로 묘사해 놓은 것이다. 결구에서 이대로 생을 마쳐야 하는가 하는 한탄과 회한(悔恨)이 함께 담겨져 있는 것이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한 정황은 다음 작품에서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같은 제목의 제2수 작품을 다시 보기로 한다.

 

한 추녀가 시골 전가 살고 있는데                  田家有醜女

용모가 어쩜 그리도 볼 품 없는지                  容止何齟齬

그래도 비단만은 잘 짤 줄 알아서                  猶能織縑素

밤낮 없이 베틀에 앉아 베를 짜네                 日夜弄機杼

어느 누가 알랴 알뜰살뜰 베를 짜                 誰知用心苦

임금께 가져다 드리고픈 그 마음을             持以獻王所

청루엔 어여쁜 여인 많기는 하여도             靑樓多艷色

남들 기쁘게 하는 말만 할 뿐이니                 工作說人語

이 여인이 추하다고 웃지들 말라                  莫笑此女醜

그대들은 비단일랑 짤 줄도 모르잖나        縑素不出汝

 

이 작품에서는 시골 전가에 사는 추녀를 등장시켰다. 이 여인은 추녀이긴 하여도 임금에게 드릴 고운 비단을 짤 줄 아는 중요한 인물로 설정해 놓았다. 이는 자신의 신분이 비록 낮기는 하여도 능력만은 제세경국(濟世經國)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다는 의미를 암묵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흥미로운 것은 후반부의 청루의 얼굴 예쁜 여인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뿐 정작으로 임금에게 필요로 하는 비단 따위는 짤 줄 모른다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얼굴 예쁜 여인들이 상징하는 것은 어떤 대상일까 하는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한 현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 여기에 응축되어 있음직하다. 위의 작품에서는 늙은 암말을 소재로 하여 자신의 처지를 투영시켜 설파하고, 여기에서는 추녀와 어여쁜 여인을 등장시켜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읊은 것이다.

이 두 작품뿐만이 아니라 그의 상당한 작품에서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울분과 한탄을 느끼게 한다. 이렀듯이 그는 길거리 백성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시를 썼다. 그는 늘 시는 쉽게 써야 하며 명리(名利)을 벗어던진 마음으로 시를 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려운 글자나 전고를 사용하지 않고 현실의 괴로움을 표현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임금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위항문학
(委巷文學)의 발달에 끼친 영향

어느 날, 대제학 김창협(金昌協)이 그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 시 가운데 채집되어 간행된 것은 많으나, 위항(委巷)의 시만은 빠져 없어지고 전하지 않으니 애석하다. 그대가 채집해 보라.”

라고 제안을 하였다. 대제학 김창협은 홍세태가 적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홍세태는 시를 쓰고도 가난해서 책을 만들지 못하는 이들의 시를 모아 문집을 만들기로 하였다.

전국 각지를 돌며 시를 모으고, 시사(詩社)를 만들고 여항인(閭巷人)들의 시를 가려서 《해동유주海東遺珠》를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해동유주》라는 제목의 뜻은 ‘우리 동방에서 버림받은 구슬’이란 의미도 되며, ‘우리 동방에서 시선집(詩選集)을 낼 때에 빠뜨렸던 구슬’이란 의미도 된다. 빛도 이름도 없이 땅속에 묻혀버릴 뻔했던 위항시인들의 작품이 그의 덕분에 후세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한편 <김부현(金富賢)과 함께 임준원(林俊元)의 무덤 아래서 짓다[和禮卿西翁墓下作]>라는 시제의 글이 《유하집》 권2에 수록되어 있다.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거친 봉분 풀이 벌써 묵어버렸네                                 荒原草已宿

여길 자소 그대 무덤이라 하는데                                是謂子昭墳

말 멈춰 세워본들 누가 맞아줄까                                駐馬誰迎客

잔 잡아 홀로 그대에게 권하노라                                持杯獨勸君

평생 흔적이 짧은 비석 하나라니                                平生餘短碣

모든 일이 뜬구름과 같을 뿐이네                               萬事一浮雲

두견새도 산 나무 위서 울어대니                                杜宇啼山木

가슴 아파 차마 들을 수가 없네그려                         傷心不忍聞

이 시는 1698년 낙사(洛社)의 중심인물이었던 임준원이 죽은 지 1년이 지난 뒤에 김부현과 함께 그의 무덤을 찾아가서 지은 오언율시(五言律詩)이다. 임준원은 홍세태가 생계가 어려우면 양식을 대어줄 정도로 가깝게 지냈던 동료선배였기에 그의 무덤을 찾은 감회가 남달랐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그가 죽고 없는 그의 무덤에 술잔을 권하며 느끼는 감회를 소박하게 읊어낸 작품이라 하겠다.

일생의 흔적을 담은 짧은 비석하나가 외롭게 서있을 뿐이니 그저 떠가는 구름인 냥하여 허전한 심사를 가눌 길 없는데, 그러한 심정을 아는지 마는지 때마침 울어대는 두견새 소리는 차마 들을 수가 없다고 했다. 마치 보잘것없이 죽은 위항인의 한과 친했던 사람을 잃은 자신의 슬픔을 더욱 돋우는 것만 같아서이다. 아마도 임준원을 잃은 슬픔과 위항인의 신분적 한계에서 오는 한스러움과 슬픔이 컷을 것이기 때문에 두견새 소리의 파장은 가슴을 파고드는 아픔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그는 같은 처지의 위항인의 실정을 시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제자 정민교가 일자리를 찾아 떠날 때, 아래와 같은 글을 지어 주었다. 그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목은 <계통 정민교를 전송하며 지어준 서문[送鄭季通敏僑序]>으로 되어 있으며, 《유하집》 권9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군자의 도리를 배우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재주가 있고 없는 것은 나에게 달렸고, 그 재주를 쓰고 쓰지 않는 것은 남에게 달렸다.
나는 내가 간직하고 있는 것을 실천할 뿐이니, 어찌 남에게 달린 것 때문에 궁하고 통하며 기뻐하고 슬퍼하다가 내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을 폐기해서야 되겠는가.

[嗚呼, 士生斯世, 不學君子之道則其何以爲人也. 才不才在我, 用不用在人, 吾且爲在我者而已. 豈可以在人者, 爲之窮通欣戚而廢我之所得於天者乎.]”

 

라고 하여, 철저하게 자신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사람노릇을 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군자의 도리를 배워야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조 때 문신 조현명(趙顯命)은

“간이(簡易) 최립(崔岦)과 더불어 조선의 빼어난 위항시인(委巷詩人)으로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과 견줄만하다”

라는 평을 남겼고, 여러 사대부들과 돈을 모아서 홍세태를 위해서 묘표를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창랑 홍세태의 묘는 흔적도 없고 묘표 또한 간 곳을 알 길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가 69세 되던 해에 자서전적인 시 <염곡칠가(鹽谷七歌)>를 지었는데, 그 첫번째 작품을 잠시 감상해 보기로 한다.

 

손이여! 손이여! 그대의 자가 도장이라지
有客有客字道長

제 말로는 평생 강개한 뜻을 지녔다는데
自謂平生志慨忼

일만 권 책 다 읽어서 어디에다 쓸 것인가
讀書萬卷何所用

늙어가니 웅대한 포부도 풀더미에 떨어졌네
遲暮雄圖落草莽

누가 천리마에게 소금수레를 끌게 하였나
誰敎騏驥伏鹽車

태항산이 너무 높아 올라갈 수조차 없구나
太行山高不可上

아아! 첫번째 노래를 부르려 하니
嗚呼一歌兮歌欲發

밝은 해를 뜬 구름이 문득 가려버리네
白日浮雲忽陰結

 

이 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자기와 같은 천리마에게 소금수레나 끌게 하는 사회가 바로 그가 인식한 현실이었다. 웅대한 포부를 지닌 데다 일만 권에 달하는 책을 읽어서 세상을 구제할 포부를 지녔다한들 쓸데가 없음에 대한 한탄의 읊조림이 되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제자들에게도 천기(天機)를 잘 보전하여 시를 지으라고 권유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그 마지막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땅엔 풀도 없이 도시 근처 집이라서
地不生草宅近市

온종일 시끌벅적 귀가 먹먹할 뿐이네
終日嘵嘵錮人耳

아침나절 문을 나서 큰길에 임했더니
朝來出門臨大道

서로 만난 사람마다 이게 누구냐고 묻네
車馬相逢問誰是

짧은 옷이 겸연쩍어 더는 가지 못하고서
短衣怵惕不敢前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더니 노자가 있네
歸臥床頭有老子

아아, 일곱 번째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니
嗚呼七歌兮歌復歌

슬픔도 기쁨도 천명을 따를 뿐 무엇을 하랴
哀樂從天可奈何

이 글에서 보았듯이 그는 세상일에 대하여 완전히 외면하거나 생각을 끊어버린 것이 아니라 늘 관심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쉽게 받아들여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모든 것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모두 천명이 정해 준 대로 따를 뿐이라는 말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 끝 구절은 마치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맨 끝 구절을 연상케 하는 여운이 있다. 이렀듯이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을 괴롭혀 오던 신분적 한계와 가난이라는 굴레를 오로지 뛰어난 문학적 성취 하나로 타개해 왔던 듯하다. 그에 대한 정서는 그저 그가 남긴 여러 작품을 통해 어렴풋이 가늠할 뿐이다.

그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불의와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묵묵히 참고 기다려왔다는 것을 그나마 그의 작품 속에서 가슴 아리도록 체험할 수가 있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지하에서 그는 흡사 소금수레를 끌며 태항산을 오르는 천리마처럼 언젠가 백락을 만나 우렁찬 울음을 터트릴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상상을 잠시 해본다. 끝으로 그의 작품 <견흥(遣興)>을 감상해 보기로 한다. 이 작품은 그의 문집인 《유하집(柳下集)》 권6에 수록되어 있다.

 

오늘도 예외 없이 저녁이 되었는데                  今日亦已夕

홀로 가는 구름은 어디로 가고 있나                 孤雲何所歸

문을 닫고 외려 홀로 누워 지내려니                 閉門還獨臥

세상과는 짐짓 거리를 둘 뿐이어라                  與世故相違

세밑 되어가니 수척해진 산이 많고                  歲暮山多瘦

숲이 깊어선지 국화도 드물게 피었네            村深菊亦稀

처마 난간에 잘 새가 날아와서는                       簷間有宿鳥

뜻을 정했는지 놀라서 나는 일이 없네           意定不驚飛

어느 날이고 저녁이 없는 날이 없다. 또한 아침이 없는 날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작자는 굳이 저녁이 왔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인생에도 황혼이 왔음을 암시하였을 법하다. 게다다 떠가는 구름은 또한 어떤 의미인가. 역시 자신의 처지가 정처 없이 떠가는 듯한 심상을 가탁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싶다. 그러나 세상과의 괴리감은 여전히 자신과의 좁혀질 수 없는 간격임을 작자는 알고 있다. 그래서 홀로 문을 닫고 들어앉아 세상을 외면하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렇다고 계절의 변화까지를 외면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겨울이 와서 수척해진 산의 모습이 의연한 기상으로 다가왔을 법하고, 몇 떨기 안 되는 국화꽃이 숲속에 피어서 자신을 향해 방긋 웃는 모습을 포착했을 법하다. 무엇보다 작자가 여기에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감지하게 된 것은 미련(尾聯)에 잘 새가 날아와서 뜻을 굳히고 더 이상 놀라서 날아가지 않으려한다는 표현은 작자와의 교감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이 그의 작품 하나하나가 깊은 감성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성(文學性)을 내포하고 있다. 누구나 오랜 시간을 두고 음미해 볼 수 있는 글들이기에 주변의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아울러 그의 생애와 관련하여 천부적인 그의 재능이 발휘되지 못한 점에 대하여는 애틋한 연민의 정을 가져본다.

<참고문헌>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승정원일(承政院日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 황재(黃梓).
《고산유고(孤山遺稿)》, 윤선도(尹善道).
《농암집(農巖集)》, 김창협(金昌協).
《동사록(東槎錄)》, 홍우재(洪禹載).
《동사일기(東槎日記)》, 이의현(李宜顯).
《만기요람(萬機要覽)》, 서영보(徐榮輔).
《명곡집(明谷集)》, 최석정(崔錫鼎).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서유문(徐有聞).
《성호사설(星湖僿說)》, 이익(李瀷).
《완암집(浣巖集)》, 정내교(鄭來僑).
《유하집(柳下集)》, 홍세태(洪世泰).
《임하필기(林下筆記)》, 이유원(李裕元).
《청성잡기(靑城雜記)》, 성대중(成大中)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이덕무(李德懋).
《해동유주(海東遺珠)》, 홍세태(洪世泰).
《홍재전서(弘齋全書)》, 정조대왕(正祖大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