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환(兪莘煥)


유신환(兪莘煥)                                                             PDF Download

 

181801(순조 1)∼1859(철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경형(景衡), 호는 봉서(鳳棲). 1801년 9월 28일에 서울에서 아버지는 현감 유성주(兪星柱)이며, 어머니는 전주유씨(全州柳氏)로 덕보(德普)의 딸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대사헌을 지낸 유언술(兪彦述)이고,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유한순(兪漢純)이다.

아버지 유성주는 학문이 깊고 행실이 독실한 군자풍의 인물이었다. 유신환이 정리한 「선고복원재연보후기(先考復元齋年譜後記)」를 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몸가짐과 효행이 남달랐고 글에 있어서도 명말(明末) 이후의 문자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당시 점차 밀려오던 서양문물에 대하여 매우 배척적인 태도를 지닌 전통적인 명분론에 충실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젊어 파주의 봉서산(鳳棲山) 아래에 살았으므로 학자들이 이를 높여 ‘봉서’선생이라 일컬었다.

유신환이 태어날 때 어머니 유부인은 황룡이 등운(騰雲)하는 꿈을 꾸었는데, 타고난 자질이 단정하고 중후하여 어려서부터 행동거지가 어른과 같았다. 다섯 살 때부터 숙부인 유무환(兪茂煥)에게 나아가 배우니 성취가 빨랐고, 글 읽는 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이 울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효경⌋과 ⌈소학⌋을 통한 뒤로는 한 글자도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의문이나 어려운 곳이 있으면 작은 책자에다 써서 깨우칠 때까지는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으니 어린 시절부터의 독학의 자세를 이에서 볼 수 있다.

김매순(金邁淳)·홍석주(洪奭周)·오희상(吳熙常)을 스승으로 섬겼다. 1844년(헌종 10) 학행으로 추천을 받아 선공감감역이 되고 감찰·사직서령·영희전령(永禧殿令)을 역임하였다. 전의현감으로 부임해서는 황구(黃口)·백골(白骨) 등의 가렴주구의 민폐를 없애고 유학의 학풍을 일으키는 데 힘썼으나, 감찰사의 모함으로 홍천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진력하였다. 윤병정(尹秉鼎)·서응순(徐應淳)·김낙현(金洛鉉)·윤치조(尹致祖)·김윤식(金允植)·남정철(南廷哲) 등의 학자를 길러냈다.

그는 이기신화론(理氣神化論)을 주장한 조선 말기 성리학의 대가로서 유학의 여러 경전과 사서(史書)뿐만 아니라 율력·산수 등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학문에 정통했으며 정치·경제·군사 등의 분야에도 박학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이기신회론’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리는 하나이고 기는 둘이다. 둘이면서 하나인 것은 신(神)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것은 화(化)이다.”

 

그는 현상세계의 근원적 원리인 리는 하나이고 현상에서 작위하는 기(음양)는 둘임을 전제하고, 구체적인 현상세계의 변화를 이끄는 음양이 리라는 하나를 드러내는 것은 ‘신’이고 리가 음양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화’리고 규정한다. 이러한 해석은 율곡이 이기관계를 설명하면서 강조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一)’라는 것을 ‘신화’의 개념으로 해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이기관계를 동태적 측면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리와 기를 단순히 근원적 실체와 현상 세계의 변화 주체로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 근원적 실체가 현현하는 것에 주목하여 이기관계를 구체화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는

“리를 말하고 神을 말하지 않으면 갖추어지지 않고, 神을 말하고 리를 말하지 않으면 밝지 못하다”

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근원적 실체로서의 리에만 주목하고 현상세계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며, 현상세계의 변화에만 주목하여 근원적 원리로서의 리를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제시한 리는 근원적 실체일 뿐만 아니라 현상세계에 편재하며 변화 속에 드러나는 것인 셈이다.

당시 유림에서는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의 논쟁이 격화되었다. 호서의 학자들은 그들의 주장인 인물성부동론(人物性不同論)을 천명하기 위해 화양서원(華陽書院)의 묘정에다 송시열(宋時烈)의 말인 ‘밀개성신(蜜豈性信)’이라는 문장으로 비를 세우려 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이 문구가 반드시 ‘인물성부동론’의 논증이 될 수 없으며, 이 논쟁의 귀추가 확실히 밝혀진 것이 아님을 들어 비석의 건립을 반대해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유신환이 강학할 때에 학자들과 강론하며 토론했던 문회당(文會堂)을 소개한다. 문회당이란 이름은 「논어연」 「안연」편의 ‘이문회우(以文會友), 이우보인(以友輔仁)’의 문구에서 두 글자를 딴 것이다. 실제 이곳에 명문의 자제들이 모여 학문을 담론하였다. 그는 38세 이후 세상을 뜰 때까지 20여년 가운데 벼슬에 몸담았던 몇 해를 빼고는 줄곧 이곳에서 학문과 예술을 논하였으니 날마다 문밖에 신이 늘 가득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드나들던 인사들은 대개 당대의 덕업과 문학으로 세상에 일컬어진 인물들로, 윤병정(尹秉鼎)․윤병익(尹秉益)․서응순(徐應淳)․박홍수(朴洪壽)․이응진(李應辰)․김락현(金洛鉉)․민영목(閔泳穆)․윤치조(尹致祖)․윤치담(尹致聃)․민태호(閔台鎬)․민규호(閔奎鎬)․김만식(金晩植)․김윤식(金允植)․한장석(韓章錫)․남정철(南廷哲) 등이 그 두드러진 인물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박홍수․서응순․윤병익․윤치담 등이 더욱 두각을 드러내 ‘유문사현(兪門四賢)’의 이름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관료층의 문인학자들로 대부분 유신환의 ‘문회당’에서의 강론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문인의 예를 갖추었다. 저서로는 「봉서집」·「패동수언(浿東粹言)」·「동유연원(東儒淵源)」 등이 있다. 대사헌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봉서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유신환의 시문집이다. 8권 4책으로 석인본이다. 1909년 문인 서응순(徐應淳)이 교정하고 김윤식(金允植)이 편집한 것을 아들 유치병(兪致秉)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학진(金鶴鎭)의 서문과 권말에 김윤식의 발문이 있다. 현재 규장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2에는 서(書) 50편, 권3·4에는 서(序) 12편, 기 5편, 발 2편, 제(題) 7편, 인(引) 1편, 명 4편, 잠 1편, 제문 5편, 애사 2편, 잡저 9편, 권5·6에는 잡저 29편과 독서기(讀書記), 권7·8은 독서기·묘지·묘갈·행장·연보후기·사행기(事行記)·전서(傳書)·시, 부록으로 행장·묘지명·시장(諡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서(書)는 주로 경전의 훈고(訓詁)와 학문에 관한 논답(論答) 및 성리학에 관한 논변이 대부분이다. 잡저 중 「대학호오의리설(大學好惡義利說)」·「중용귀신대(中庸鬼神對)」·「천인찬(天人囋)」·「설시소서(說詩小序)」·「홍범연(洪範演)」등의 글은 모두 「대학」·「중용」·「시경」·「서경」 등의 경서에 대한 새롭고 독창적인 이론을 전개한 것이다.

그는 경세학(經世學)에 있어서도 탁월한 식견을 가졌다. 「책문(策問)」 두 편은 전정(田政)과 관방(關防)에 관한 이론이다. 「시무편(時務篇)」에서는 개혁하여야 할 급선무가 군정징색(軍丁徵索)과 서얼금고(庶孽禁固)의 폐단이라 하여 상당히 진보적인 주장을 하였다.

 

[참고문헌]: 「봉서집(鳳棲集)」,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49), 「한국철학사」(유명종, 일신사, 198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봉서 유신환의 철학사상 연구」(「민족문화연구」제54집,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1), 「조선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권오영, 돌베개, 200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