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선(申箕善: 1851~1909)


양원 신기선(申箕善: 1851~1909)                    PDF Download

 

그는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그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언여(言汝), 호는 양원(陽園)· 노봉(蘆峰)이다. 희조(羲朝)의 아들인 그는 임헌회(任憲晦)의 수제자로, 개화파(開化派)이면서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대립관계에 있었으며, 단재 신채호(申采浩)에게 영향을 준 인물이다. 그는 동료이자 친구인 신성우(申星雨)가 자신의 손자인 신채호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맡겨오자, 그에게 많은 책을 읽게 하여 개화에 눈을 뜨게 하였고 그를 성균관에 입학시켜 진보적 유학경향을 접한 뒤 유교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1877년 대과별시(大科別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1878년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고 1879년에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를 역임하였으며 1881년에는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 등을 지냈다. 1882년에 통리기무아문 주사(統理機務衙門主事)를 거쳐, 다시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이 되어 기무처(機務處)에 나아가 수시로 영의정과 국정을 의논하였다. 관제개혁(官制改革) 때 통리내무아문 참의(統理內務衙門參議)가 되었다. 개화당(開化黨) 인물들과 밀접하게 교류했기 때문에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개화당 내각에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문에 1886년에 전라도 여도(呂島)에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을 배소(配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제도)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풀려나 호조 참판을 거쳐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공무대신(工務大臣)이 되었다. 1895년 군부대신(軍部大臣)에 임명되면서 육군부장(陸軍副將)이 되었고,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을 역임하였다.

1896년에 항일의병(抗日義兵)의 항전(抗戰)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가 되어 지방에 내려가 선유활동을 하였다. 학부대신(學部大臣)이 된 뒤에 단발령, 양복 착용, 국문과 태양력(太陽曆) 사용, 청나라에 대한 조공폐지(朝貢廢止) 등을 반대하다가 독립협회(獨立協會)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얼마 뒤 사직하였다. 1897년에 다시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을 지냈다. 1898년에 법부대신(法部大臣)이 되었을 때 나륙법(拏戮法)과 대역참형(大逆斬刑)을 복구하려다 다시 독립협회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고, 탄핵되어 면직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9년에 또다시 학부대신에 임명되었다.

그 뒤 의정부 참정을 역임하고, 1900년에는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과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을 역임하였다. 1901년에 비서원경(秘書院卿)과 법부대신과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을 역임하고, 1902년에는 군부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1903년에 철도원 총재(鐵道院總裁)가 되었으며, 1904년 보안회(保安會)의 회장이 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게 붙잡히기도 하였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을 거쳐 1905년에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을 역임하고, 1906년에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를 역임하였으며, 1907년에는 장례원 경(掌禮院卿)과 수학원장(修學院長) 등을 지냈다. 같은 해에 민병석(閔丙奭), 이용직(李容稙) 등과 함께 유도(儒道)로써 체(體)를 삼고 신학문으로 용(用)을 삼아 신구사상(新舊思想)의 합일을 목적으로 하는 대동학회(大東學會)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저서로는 《양원집(陽園集)》과 《유학경위儒學經緯》가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양원집(陽園集)》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실록(高宗實錄)》
《양원집(陽園集)》
《대한제국관원이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신기선(申箕善)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연구>, 권오영, 청계사학,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