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구(洪在龜:1845~1898)


손지 홍재구(洪在龜:1845~1898)                      PDF Download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자는 사백(思伯), 호는 손지(遜志),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1881년에 일어난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 때 순절한 홍재학(洪在鶴)의 친형이다.

그는 일찍이 아우 홍재학과 함께 양평에 거주하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868년 이항로 사후에는 그 적전(嫡傳)을 계승한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을 사사하고서 그의 사위가 되었다. 1876년에는 김평묵을 따라 가평군 귀곡(龜谷)으로 이주하였다가 1891년에 김평묵이 세상을 뜨자, 횡성(橫城)으로 옮겨가 이곳에서 후학(後學)을 양성하며 일생을 그렇게 보냈다.

그는 또 1876년에 개항(開港)과 관련한 문제를 놓고 조정과 민간에서 논의가 격렬하게 일어나자, 상소의 주최가 되어 유인석(柳麟錫), 윤정구(尹貞求), 유기일(柳基一) 등 화서학파(華西學派) 48인과 함께 <경기강원양도유생논양왜정적잉청절화소(京畿江原兩道儒生論洋倭情迹仍請絶和疏)>를 올려 강화(講和)를 반대하는 상소를 주도적으로 전개하였고, 1880년에는 복합 상소 운동 당시에 상소문을 작성하였으며, 1881년의 신사척사운동 때에는 홍재학이 상소의 주최가 된 <관동유소(關東儒疏)>를 실제로 집필하는 등 화서학파로서 위정척사운동의 전면에서 활약한 바 있고, 1896년 고종(高宗)을 환궁(還宮)시키기 위한 계획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화서학파 중 중암계열(重庵系列)이며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위정척사 이론을 충실히 계승한 인물로, 1886년 이항로의 심설(心說)을 둘러싸고 화서학파 내에 김평묵과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양인을 정점으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유기일(柳基一) 등과 함께 김평묵의 입장을 지지함과 동시에 유인석 등 유중교 계열의 인물들과 극단적인 대립관계를 노골화함으로써 중암(重庵), 성재(省齋) 이후 화서학파의 선두적인 위치에 서 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청일전쟁 이후 일제 침략이 가속화되는 시국 상황에서 유중교 계열의 화서학파 인물들이 적극적인 항일투쟁의 전면에 투신했던 경향과는 처신의 방편을 달리하여, 유기일 등과 함께 ‘자정수의(自靖守義)’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화서학파의 두 파 가운데 한 파인 중암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학문과 행적은 사상사 혹은 독립운동사에서 주목되고 있다. 하지만, 대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은 시문의 대부분은 산일(散逸)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 간찰(簡札)정도만이 강원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현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의 저서로 알려진 《정속신편(正俗新編)》이 있는데, 이는 해외로 밀반출된 사실이 밝혀져 지난 수년 전에 연구논문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현재 프랑스 교육부 직속 파리 제3대학 주관 하에 있는 도서관(Bibliotheque interuniversitaire des Langues orientales)에서 운영하는 고문서고(古文書庫)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책이 국내 학계에 소개된 것은 여진천 신부가 교회사를 연구하면서 2002년 횡성교안(橫城敎案)과 관련된 연구 중 이 책의 소재를 프랑스에서 확인하여 최초로 소개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본격적인 연구가 지연되었고, 전체적인 내용에 대한 고찰보다는 당시 천주교와 서양의 기술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타진하는 정도에 그쳤을 뿐이다. 일부 학계에서는 이 저서를 홍재구가 직접 경험한 천주교의 빠른 유행과 서양기술 등 서세동점(西勢東漸)을 통해 철저한 척사론 입장을 대변한 책으로 소개한 바 있다.

그는 1862년에 발발하였던 진주민란(晉州民亂)이 도화선이 되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농민항쟁(農民抗爭)을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리하여 대외적으로 점차 세력을 키워온 천주교의 교세 확장과 강제적 개항에 따른 외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이질적 문명을 서부열강의 도전으로 인식하고 강력히 외양(外攘)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가 보고 경험한 서양기술의 비판은 주관적 견해가 강한 면도 있다. 그것은 결국 그의 주장이 서양의 기술이 조선백성들의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열강들의 효과적 침략과 천주교 등 문화적 확산에 기인할 뿐이라는 시각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시각은 그 당시에 밀려오는 외세의 변화를 시대의 위기로 보았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그가 저작한 《정속신편(正俗新編)》의 내용에 대하여 학계의 일부 시각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소학(小學)》이나 《대학(大學)》의 학문방법과 대체로 유사한 면이 있기는 하나 그 마지막이 사람의 처세지의(處世之義)를 나타내는 처세를 제외하면 정가(正家)와 거향(居鄕)에 머무르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이 책이 경세적(經世的)인 목적보다는 향리(鄕里)의 주변을 단속하는데 더욱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고 당시 중암의 유배와 함께 중암과 성재, 의암 계열의 학문적 견해로 분화되는 학파의 내적 원인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화서학파의 주요인물로 중암과 성재의 사후에 차지하는 비중이 오히려 대단히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 또는 문집이 한동안 제대로 소개되지 않아 그에 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참고문헌>
《용서고(龍西稿)》, 유기일(柳基一), 1898.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필사본)
《매천야록(梅泉野錄)》,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1955.
《기려수필(騎驢隨筆)》,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195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