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열(徐相烈, 1854-1896)


서상열(徐相烈, 1854-1896)                                 PDF Download

 

서상열은 본관이 대구(大丘)이고 일명 상열(相說)이라고도 한다. 자는 경은(敬殷)이고 호는 경암(敬庵)이다. 충청북도 단양 출신이다. 장신(將臣) 문유(文裕)의 증손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릴 때는 지친인 서광범(徐光範, 1859-1897)의 도움을 받았으나 박영효(朴泳孝)와 친히 지냄을 보고 멀리하였다.

서광범은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 등의 영향을 받아 1879년경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과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0년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규장각검교(奎章閣檢校)·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세자시강원 겸 사서(世子侍講院兼司書)·세자시강원 겸 필선(世子侍講院兼弼善)·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등을 지냈다.

1882년 4월 김옥균을 수행해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고 귀국한 뒤 9월 수신사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883년 3월 귀국하였다. 같은 해 6월 보빙사(報聘使) 민영익(閔泳翊)의 종사관으로 미국의 주요 도시 시설을 시찰하고 유럽 각국을 순방하고 다음 이듬해 6월에 귀국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차례의 외유를 통해 개화·자강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1884년 12월 개화당의 일원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서상열은 무과에 급제하였지만 묄렌도르프(Mollendorf,P. G. von, 穆麟德)가 조정에 입사하게 되자 이를 통탄하고 김평묵(金平默)과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는 독일 할레대학에서 법학과 동양어를 전공하고 청나라 주재 독일영사관에서 근무하였다. 1869년 청의 세관리(稅關吏)로 일하다가 이홍장(李鴻章)의 추천으로 조선의 통리아문(統理衙門) 참의(參議) ·협판(協辦)을 역임하면서 외교와 세관업무를 맡았다. 재정고문으로 민씨 세력의 지지를 받았으며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여 재정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당오전 발행은 백성의 고통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주장한 개화파와 대립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김옥균(金玉均)의 개화파에 반대하였고, 민씨 척족세력을 도왔다. 외무협판에 재직 중인 1885년에 이홍장의 압력으로 해임되었고 한국을 떠나 중국 닝보[寧波]에서 죽었다. 한국 역사에 조예가 깊고 만주어에 능통하였다.

김상열의 스승 김평묵은 24세에 이항로를 찾아가 배우고 또 홍직필(洪直弼)을 찾아 배우는 등 학업에 매우 전념하였다. 두 선생을 동시에 따른 관계로 학설은 넓고 온건하였다. 1852년(철종 3) 홍직필이 죽은 뒤로는 다시 이항로의 학설을 따라 심즉리(心卽理)의 설에 기울여졌다. 같은 문하의 유중교(柳重敎)와는 대학의 명덕(明德)을 이로 보느냐 기로 보느냐의 견해 차이로 당시에 큰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74년에 스승의 『화서아언(華西雅言)』을 편집하여 간행했다. 1880년에 선공감가감(繕工監假監)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유중교는 5세에 이항로의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는데, 총명하기가 어른과 같았다. 아이들과 놀기를 싫어하고 다만 경적(經籍)에만 몰두했다. 김평묵(金平默)에게 배우고 21세 때 이항로의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을 편수했다.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886년 이항로의 심설(心說)에 대해 김평묵에게 「논조보화서선생심설(論調補華西先生心說)」을 보냄으로써 사칠논쟁(四七論爭)이나 호락논쟁(湖洛論爭)에 버금가는 대논쟁이 이항로 문하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유중교는 심(心)을 기(氣)로 규정하고 이항로 및 김평묵은 심을 이(理)로 규정함으로써 스승의 설과 정면충돌하게 되었다. 여기에 문인들이 두 갈래로 나누어져 논쟁은 더욱 확대되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1888년에는 두 설을 절충해 「화서선생심설정안(華西先生心說正案)」을 김평묵에게 보냄으로써 잠정적으로 심설 논쟁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의 임종 직전에 문인들에게 정안(正案)의 문자(文字)는 ‘다시 생각해보니 사실과 도리에 모두 맞지 않는다.’ 하여 거두어들일 것을 명함으로써 결국 두 설은 합일을 보지 못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

서상열의 학문을 조정에서 인정하여 선전관을 제수하고 장차 통정(通政)의 계급에 올려 세자의 사부로 초빙하고자 하였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갑신정변 후 세상을 비관하더니 갑오경장의 충격으로 병석에 눕기까지 하였다.

그 뒤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거의할 것을 결심하고 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등과 의병을 일으켜 제천으로 들어가 이필희(李弼熙) 의진(義陣, 의용병의 군진)의 참모가 되었다. 충주·영월을 거쳐 안승우 의진과 회합하여 유인석(柳麟錫)을 만나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그 뒤 제천에서 안승우와 홍사구(洪思九)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진을 강화하려고 영춘·정선을 거쳐 황해도·평안도로 진출하여 모군하려 하였다가 도중에 적과 여러 차례 접전하였는데 낭천(狼川)에서 교전 중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육의사열전(六義士列傳)』
기려수필(騎驢隨筆)』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