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순(田秉淳)


전병순(田秉淳)                                                              PDF Download

 

1816(순조 16)~1890(고종 27) 조선말기의 학자.

본관은 담양(潭陽)이고, 자는 이숙(彛叔)이며, 호는 부계(扶溪)․겸와(謙窩)이다. 아버지 전석채(田錫采)와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1816년 4월 27일 경상도 함영 안의현 추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노론 낙론계 학자로, 평생 동안 경남 함양에서 강학을 하며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인 유학의 도(道)를 수호하는데 기여한 재야학자이다. 선대로부터 크게 문명을 떨치지 못한 한미한 가문이었으나, 집안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여 이를 가업으로 이어왔다. 아버지 전석채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으나, 학문을 숭상하여 자식들의 교육에 남다른 열정과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타고난 총명함으로 스승의 가르침이 없이 책을 읽을 줄 알았으며, 글방의 스승인 최연중(崔演重)에게 「통감(通鑑)」과 「사기(史記)」 등을 배웠는데, 배운 즉시 이를 모두 외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집안의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아 아버지의 명으로 동생인 전시순(田蓍淳)과 함께 서울에서 강학하고 있던 낙론계의 대학자인 홍직필(洪直弼)에게 나아가 10여년 간 수학하였다. 이때 홍직필의 문하에는 조병덕(趙秉悳)과 임헌회(任憲晦) 등 쟁쟁한 학자들이 수학하고 있었다.

전병순은 스승인 홍직필의 권유로 벼슬할 기회를 가졌으나 사양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는 홍직필이 서거하자 1년 동안 상복을 입어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였으며, 스승의 원고를 널리 수집하여 소휘면(蘇輝冕)을 비롯한 동문들과 함께 「매산집」을 간행하였다. 이처럼 전병순의 사상적 기반은 가학(家學)의 기초 위에 홍직필의 지도를 받아 사상적 심화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전병순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는 할머니에게 효도를 다하여 날마다 일찍 일어나 세숫물을 올리고 잠자리의 춥고 따뜻함을 살폈다. 또한 장례를 치루거나 제사를 올리는 일에는 한결같이 예법에 있는 절차에 따라 처리하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형이 일찍이 작고하여 실질적으로 가문을 이끄는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남녀가 편복으로 안채를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으며, 잘못이 있을 경우 좋은 말로 타이르거나 스스로 뉘우치게 하였다. 나아가 그는 사람을 사귀는데 노소와 귀천의 구분을 두지 않았으며, 말은 행동으로 실천할 것을 힘썼으며, 의복은 항상 검소하나 청결하게 입고 다녔다.

1869년(고종 6년) 스승인 홍직필의 명을 받들어 덕유산의 계곡인 부계에다 정사(精舍)를 짓고, 학생들에게 유학의 경전과 예서를 가르쳤다. 평생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후학을 기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 부계정사에서 강학하다가 1890년 10월 16일에 75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사후 23년이 지난 1912년에 손자인 전범진(田凡鎭)과 전익진(田翼鎭), 문인인 임철규(林哲圭)와 김락종(金洛種) 등이 그가 지은 시문을 수집하여 전우(田愚)의 서문을 받아 「부계집」을 간행하였다.

전병순이 살던 19세기는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 힘에 의해 근대사회로 변해가는 과정으로 조선의 건국이념이자 통치이념이었던 유학, 즉 성리학적 사고가 크게 흔들리는 시기였다. 전병순은 당시의 현실을 난세(亂世)로 규정하고, 이러한 난세에 진정한 유학자로서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고민하고, 선현들의 의리에 따라 처신했다.

그래서 그는 공자의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혼란한 나라에는 머물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거든 나아가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은둔한다”는 처세관을 본받아, 덕유산 자락에 정사를 짓고 학문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또한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다”거나 “몸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면 정치에 대해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스승 홍직필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홍직필의 문하생들은 당대의 현실을 난세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인 위정척사(衛正斥邪)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여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세력과 전면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보다는 물러나 자정(自靖)을 통해 후학을 기르면서 훗날을 도모하였다. 이 때문에 다른 유림의 비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정’적 입장을 취했으며, 전병순 자신도 덕유산 자락의 부계에 정사를 짓고 강학활동에 매진하였다. 이러한 그의 삶과 철학은 그가 지은 시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전병순은 일생동안 수많은 시를 지었지만, 현재 전하는 시는 246제(題) 292수(首)이다. 그는 유학의 도를 삶의 표준으로 삼고 이를 수호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며 살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전병순이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인 유학의 도를 수호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시 몇 편을 소개한다.

 

如何末俗多澆薄 어찌하여 말속이 되어 경박함이 심해졌나.
㥿海滔滔摠亂朱 거만한 파도가 도도하게 지배하여 난주(亂朱)가 되었네.

 

이 시는 선배인 운소(雲巢) 어른의 시에 차운한 것으로, 나날이 변해가는 시속(時俗)에 대한 염려와 함께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유학뿐이라는 확신을 드러내고 있다. 첫 구절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는 유학의 삼강오륜이 우리의 전통적인 풍속인데,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과 함께 전래된 건전하지 못하고 사악한 가르침(邪敎)이 범람하면서 인심이 점점 경박해져가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둘째 구절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제국주의 세력들의 모습과 이들의 지배하에 놓인 조선의 현실모습이다. 서구로부터 들어온 기독교들이 점점 그 세력을 확대하여 ‘위로는 임금과 부모의 분별도 없고, 아래로는 부부의 구별도 없으며, 남녀가 동석하여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말세의 풍속으로 변화되어, 소중화(小中華)의 전통을 지켜온 조선의 백성들이 여기에 차츰 동화되어 가면서 전통적 가치를 잃어가는 현실이다. 그는 공자의 “잡색인 자줏빛이 원색인 붉은 빛을 없애는 것을 미워하며, 정나라의 음란한 음악이 바른 아악(雅樂)을 문란케 하는 것을 미워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임금과 부모도 몰라보고 남녀의 구별도 없는 외설적’인 사악한 가르침의 폐해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서 ‘소중화’는 명나라가 오랑캐인 청나라에 망하여 인륜과 예의 등 문명의 도가 무너지게 되어 유일한 문화국가가 조선뿐이라는 자긍심을 갖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조선 말기 지식인들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 ‘존왕양이’와 ‘위정척사’를 주장한 것은 예의정신과 화이사상에 근거한 존화양이(尊華攘夷)로 집약할 수 있다. ‘존화양이’는 중화(중국)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줄여서 화이론(華夷論)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화이사상은 공자의 춘추의리를 계승한 도덕주의 문명사관으로, 주자는 공자의 춘추의리를 13세기 중국이 요나라와 금나라 등 북방족에 밀리어 존망의 기로에 선 남송(南宋) 시기에 구국항쟁의 기치를 들었던 화이사상으로 재창조하였다.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을 건국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의 지식인들도 오랑캐로 여긴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의 침략에 굴복하자, 중화문화의 본산으로 존숭했던 명나라가 멸망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국가의 존재 이유를 재확인하고 청나라에 대한 항쟁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화이사상을 계승하고 부각시켰다.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하자, 조선의 유학자들은 조선이 세상에 유일한 문화민족이라는 자존의식을 지니고 ‘소중화’로 자칭하였으며, 이 문화적 자존의식과 주체성으로 오랑캐인 청나라에 당한 굴욕과 수치를 극복할 수 있는 국민적 공감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선 말기에는 외세의 침략에 맞설 수 있는 대응 논리로서 ‘존왕양이’와 ‘위정척사’를 기치로 내걸고 외세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배척하여 자주국가를 공고히 하고자 하여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에 수많은 유학자들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지만, 무력을 앞세운 외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이에 민족의 문화적 자존과 주체성을 지키려는 유학자들은 의병운동에 참여하여 목숨을 잃거나 스스로 무력감에 빠져 목숨을 끊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俯仰乾坤歎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며 탄식하노라.
吾身不再生 우리의 몸은 다시 태어날 수 없는 것
人何自暴棄 사람들은 어찌 자포자기하는가.

 

이 시는 화서학파를 비롯한 위정척사파들의 의병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통분하여 부모가 남겨주신 몸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목숨을 끊는 이를 비판한 것이다. 신체발부는 부모가 남겨주신 것으로 머리카락 하나라도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인데, 하물며 목숨을 함부로 끊는 것은 유학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의식은 동문인 전우(田愚)에게도 찾아볼 수 있다. 전우는 “오백년 종사를 보존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3천년의 전통을 계승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하여, 도를 계승하고 후세에 전수하는 일이 진정한 유학자의 일이라고 여겼다. 더 나아가 전병순은 비록 지금 유학의 도가 어두워가지만 반드시 밝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孜孜勿謂前程遠 부지런히 힘쓰며 앞길이 멀다고 말하지 말라
期到斯文百尺間 사문이 백천간두에 이른 때라네.

 

이 시는 유학의 연구에 더욱 정신하여 유학의 도가 다시 꽃피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처럼 전병순이 살았던 19세기는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의 힘에 의해 근대사회로 변해가는 과정으로, 조선의 건국이념이자 통치이념이었던 유학의 정통성이 흔들리는 시기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유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로서의 길을 삶의 표준으로 삼아 이를 수호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며, 몸소 도의(道義)를 지키며 후진양성에 힘써 미래의 밝은 세상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며 살았다. 이에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그리고 일제와의 통상조약(1876)이라는 대변고의 위기 속에서 위정척사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재야의 유학자로서 유학의 도를 지키기를 고집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부계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계 전병순의 생애와 시문학 일고」(이동재, 「한문교육연구」32, 한국한문교육학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