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행(金文行, 1701-1754)-2


김문행(金文行, 1701-1754)-2                            PDF Download

 

김문행은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사빈(士彬), 호는 화음(華陰)이다. 증조부는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고, 조부는 김창국(金昌國)이며, 부친은 돈녕도정(敦寧都正)을 지낸 김치겸(金致謙)이다.

증조부 김수증은 1670년(현종 11)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리에 복거(卜居 : 살만한 곳을 가려져 정함)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그 뒤 1675년(숙종 1) 동생 김수항(金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이때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하여 그곳을 곡운(谷雲)이라 이름 짓고 곡운구곡(谷雲九曲)을 경영하였다.

그 후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김수항 등이 죽자 화음동(華蔭洞)에 들어가 정사를 짓기 시작했다. 1694년 갑술옥사 후 다시 관직에 임명되어 한성부 좌윤, 공조 참판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퇴한 뒤 세상을 피해 화악산(華嶽山) 골짜기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조부 김창국은 숙종의 후궁인 영빈김씨(寧嬪金氏)의 아버지이다. 1681년(숙종 7)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 빙고별감(氷庫別監)이 되었다. 장악원주부·첨정·의금부도사·공조좌랑(工曹左郞) 등을 지냈으며, 이후 동궁의 시위를 담당하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익찬(翊贊)이 되었다. 또 익위(翊衛)·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 등을 지냈으며, 이후 외직으로 나가 여러 고을의 현감과 군수를 지냈다. 1707년(숙종 33)에는 관직이 통훈대부(通訓大夫) 성천부사(成川副使)에 이르렀다

 

부친 김치겸은 김창흡의 아들인데, 김창국(金昌國)이 두 딸을 낳고 아들이 없으므로 종제(從弟) 김창흡(金昌翕)의 아들인 김치겸(金致謙)을 후사로 삼았다.

김문행은 1726년(영조 2)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었다. 1746년(영조 2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 2등으로 급제하여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다음해인 1747년 수찬(修撰), 겸사서(兼司書), 겸문학(兼文學), 부교리, 응교(應敎)를 역임했다. 1748년에는 사간(司諫), 보덕(輔德), 익선(翊善) 및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을 역임했다. 1753년에는 승지(承旨)에 올랐고, 좌승지(左承旨)와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김문행과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인연도 언급할 만하다. 황윤석은 자는 영수(永叟)이고 호는 이재(頤齋)로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배워 널리 백가에 통하였다. 특히 수학과 천문에 당대 제일의 학자로 평가받았다. 『이재유고(頤齋遺稿)』·『이재속고(頤齋續稿)』·『이수신편(理藪新編)』·『자지록(恣知錄)』이 있다. 이 중 『이재유고』에 「자모변(字母辨)」·「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 등이 있어 국어학사의 연구대상이 되며, 운학에 대한 연구는 『이수신편』에 실려 있다.

처음 황윤석이 김문행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자 과거에 전념할 것이 아닌 것을 알고 경학을 공부한다면 재종제인 김원행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소개하여 황윤석이 김원행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곳에서 만난 홍대용과 절친한 우정을 나눈다.

 

구한말에 대원군이 ⌈이수신편(理藪新編)⌋을 구한 적이 있었다. 대원군이 이 책을 수소문한다는 소문을 접한 황윤석(黃胤錫)의 6대 후손은 집에 보관되어 있던 ⌈이수신편(理藪新編)⌋을 가지고 서울 운현궁으로 찾아가 바쳤다. 대원군이

“네 소원이 무엇이냐?”

라고 하자,

“전라도 순창 회문산(回文山)에 있는 명당인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에 묘를 한자리 쓰는 것이 소원입니다.”

라고 했다. 다섯 신선이 모여 바둑을 두고 있는 형상이라고 알려진 이 묏자리는 당시 호남 최고의 음택지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이 자리는 만일사(萬日寺)라고 하는 절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만일사(萬日寺)는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위하여 기도를 했다고 전해지는 절이다. 이성계가 무학을 만나러 만일사(萬日寺)에 왔다가 절 아래의 동네에서 고추장을 맛보았는데 이 고추장이 바로 오늘날 순창이 고추장의 명소로 알려지게 된 계기이다. 결국 대원군의 명에 의하여 만일사(萬日寺)는 산 아래쪽으로 이전해야만 했고, 원래 있던 절 자리에 황씨 집안이 묘를 쓰게 되었다.

 

<참고자료>

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