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兪瀣)

유해(兪瀣)                                                            PDF Download

 

유해(兪瀣, 1541〜1629)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율곡 이이의 문인이다. 선조 때 식년시에 생원으로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임진왜란 때에는 종묘에 안치된 신주를 모시고 임금을 따라 피난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었다.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867년(고종 4년)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하고, 정려를 세우도록 하였다. 당시 세워진 정려각이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에 보존되어 있다.

1541년(1세)
중중 36년에 참봉(參奉) 유필성(兪必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필성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참봉(參奉)을 지냈다. 유해의 자(字)는 숙부(淑夫), 호(號) 송암(松庵)이다.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76년(35세)
선조 9년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였다.

1592년(51세)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하였다. 이때 그는 종묘서 직장(宗廟署 直長)으로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에 모셔진 신주(神主)를 받들고 어보(御寶)와 제향의 도구 등을 수습하였다. 이어서 권희(權僖), 이산해, 조공규 등과 같이 임금의 뒤를 따라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1593년(52세)
해주(海州)의 백림정(柏林亭)에 신주(神主)를 봉안(奉安)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임명되었다. 이후 왜란이 종료된 뒤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冊錄)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이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1629년(88세)
인조 7년에 사망하였다. 일설에 1631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1867년(고종 4년)에 국가에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하고, 정려를 세우도록 명했다. 시호는 충렬이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에 유해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 충신각(정려각)이 세워져있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이며, 목조와즙(木造瓦葺) 건물로 내부에는 정려비와 현판이 보존되어 있다.

<참고문헌>
김학경, 「유해」,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우리마을 문화재 -홍동 상하금마을 유해 충신문」, <홍주신문>, 2016.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