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실(鄭實:1701~1776)


정 실(鄭實:1701~1776)                                          PDF Download

 

관은 연일(延日)이며 자는 공화(公華), 호는 염재(念齋)이다. 1701년(숙종27) 충주(忠州)에서 출생하였다. 정철(澈)의 후손으로, 경연(慶演)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호(澔), 아버지는 순하(舜河)이고, 어머니는 김익항(金益炕)의 딸이다.

이재(李載)의 문인으로, 1733년(영조9)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1739년에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교리(校理), 장령(掌令), 정언(正言)을 거쳐, 1748년에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과 응교(應敎), 필선(弼善)을 역임하였다. 1756년에는 안동부사(安東府使), 1761년에는 좌유선(左諭善), 1762년에는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다.

1764년에 강화 유수(江華留守)에 이어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과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대제학(大提學)과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거쳐 1767년에 호조 판서(戶曹判書)와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역임하였다. 1768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이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770년(영조46)에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그는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임금에게 바른말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헌부 지평이 된지 한 달여 만에 올린 상소에서 언론 탄압의 실상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각(臺閣)의 직임은 조정(朝廷)의 기강을 바로잡고 국시(國是)를 주장하는 것이므로 그 위임하여 예우하는 바가 중한데, 오늘날을 보면 과연 어떠합니까? 몇 자의 글을 관례에 따라 써도 문득 방형(邦刑)을 바루라는 명을 내리고, 한 마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장해(瘴海)에 천극(栫棘)하는 법을 가하는 일이 지난해에도 올해에도 잇달았으며, 금정(禁庭)에 붙잡아 들여 고략(拷掠)을 가하기까지 하시니, 이는 성덕(聖德)으로 보아 실로 천고(千古)에 없던 지나친 거조입니다.”

그는 이것 말고도 그 뒤에 국가 운영의 핵심을 조목조목 열거하는 상소를 올렸다. 여기에서 그는 임금의 마음을 바루어 근본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며, 임금이 잘 다스리려면 모두 마음을 바루는 것으로써 지극한 공부로 삼지 않을 수 없고, 신하의 진언(進言) 역시 마음을 바루는 것으로써 요결(要訣)을 삼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게다가 “문을 닫고 음식을 물리치시는 것도 모자라서 언관(言官)을 나국(拿鞫)하기까지 하셨으니”라고 하여 언관에 대한 탄압을 집요하게 지적하였다. 또한 “이것은 이른바 분노하여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공부에 뜻을 더하여 치우치는 흠이 없게 하소서.”라고 하여 영조에게 열심히 수양할 것을 요구하였다.
다시 그는 이 상소를 통해 임금께 도학(道學)을 숭상할 것, 신하를 예로서 대우할 것과 더불어 언로(言路)를 존중할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대각(臺閣)을 중하게 여겨서 언로를 넓히소서. 전하께서는 고언(苦言)하는 자를 싫어하여 욕하고 배척하여 내쫓으시므로, 위에서는 언관(言官)으로 대우하지 않고 아래에서는 언관으로 자처하지 않습니다. 이러고도 어찌 언로가 열려 임금의 궐실(闕失)이 들리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지난 과실을 깊이 경계로 삼으시고 받아들이는 도량을 더욱 넓히시어 뭇사람의 뜻이 위에 전달되게 함으로써 언로가 크게 열리게 하소서.”

정실(鄭實)의 이러한 강직한 태도가 영조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정실이 한 대신을 논핵한 일로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그를 구명하기 위하여 1744년(영조20)에 정언 이형만(李衡萬)이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실(鄭實)은 한 대신을 논했다가 장기(瘴氣)가 있는 바닷가로 귀양가서 1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의당 성세(聖世)에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민백상(閔百祥)이 귀양간 것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또한 아비를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한 것이었습니다. 아! 대신은 진실로 전하께서 예모로 대우하는 사람이며 정실은 전하의 삼사(三司)이고 민백상은 민형수(閔亨洙)의 아들입니다.
대신의 지위가 높은 것을 돌아보고 두려워하여 삼사에 있는 사람이 감히 그 일에 대해 논하지 못하고 아들이 된 사람이 감히 아비를 위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하지 못한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조중회(趙重晦)를 죄준 이래로 한 사람도 다시 조중회의 일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는 데 대해 신은 실로 상심하고 있습니다.
대저 조중회의 상소는 어리석어서 성인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의 마음만은 성실하여 다른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때 전하께서 한마디 하교하시기를, ‘너의 말은 지나친 것이다.’ 하였다면, 상하가 모두 무사했을 것인데 도리어 천고에 없던 지나친 거조를 하심으로써 일국의 신민들로 하여금 놀라운 나머지 죽고 싶게 만들었으니, 아!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옛날 우리 효종(孝宗)께서는 일 때문에 김홍욱(金弘郁)을 죄주면서 구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사죄로 다스리겠다고 한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는데도 이내 다시 마음이 편치 않아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어떤 간신(諫臣)이 대각에 나와서 간하니, 효종께서 기뻐하여 일어나서 말하기를, ‘국가가 비로소 망하지 않겠다.’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대성인(大聖人)이 세도(世道)를 걱정하고 언관을 격려하는 뜻으로 전고(前古)에 으뜸인 일입니다.
지난번 전하께서 조중회에 대해 노하신 것은 본디 성조(聖祖)께서 당일 노하였던 것만 못했는데도 여러 신하들은 혼이 나가고 기가 죽어서 전하께서 ‘사죄에 해당시켜야 한다.’고 하면 여러 신하들도 ‘사죄에 해당시켜야 합니다.’라고 하고, 전하께서 ‘마땅히 살려야 한다.’고 하면 여러 신하들도 ‘마땅히 살려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국가에 급박한 일이 있으면 다시 절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세 신하의 죄를 사면하여 주시어 일세(一世)로 하여금 성의(聖意)를 환히 알게 하소서.”

영조는 이 상소문을 읽고 대노하여 이형만까지 기장현(機張縣)으로 귀양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이 상소를 받아들였다 하여 승지까지 체직시켰다. 이를 보면 정실에 대한 정조의 노여움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뒤에 정실을 구명하려는 신료들의 노력은 계속 이어졌는데, 같은 해 비변사 회의에서 조현명(趙顯命)이 문언박(文彦傳) 문언박(文彦傳:1006~1097): 북송(北宋) 때의 재상. 자(字)는 관부(貫夫).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있다가 어사(御史) 당개(唐介)의 탄핵으로 지방으로 쫓겨났으나, 재차 재상으로 복귀하였다. 뒤에 문언박이 당개를 임금으로 추대하면서 이르기를 “당개가 비록 풍문을 잘못 들은 것은 있어도 또한 신의 병통을 많이 맞추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의 고사를 원용하여 정실(鄭實)과 민백상(閔百祥)을 방면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이때에도 영조는 민백상만 방면하고 정실의 방면은 거절하였으니, 정실에 대한 분노가 쉬 수그러들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뒤 정실에 대한 영조의 분노는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좋은 사부(師傅)에게 교육시키려는 마음에서 누그러진 듯하다. 1748년(영조24)에 사도세자가 14살 때 세자의 스승을 새로 정하는 의논이 있었다. 이 때 좌의정 조현명이 정실 등 6인으로 하여금 진강(進講)하게 할 것을 청하자, 영조가 윤허하였다. 이는 학자로서 정실의 능력이 당시에 크게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정실은 보덕(輔德), 문학(文學), 응교(應敎), 필선(弼善)의 직책을 역임하면서 세자의 교육에 힘썼으며, 세자에게 네 조목(條目) 네 조목(條目): 과정(課程)은 반드시 엄격하게 하고, 송독(誦讀)은 반드시 입에 익게 하며, 남에게 묻는 것에 인색하지 말고, 중도에 그만두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자, 동궁이 가납하였다는 기사를 말한다. 《영조실록 69권, 영조25년 2월 18일 병신조(丙申條)》을 올리기도 하였다.

정실이 학문에 뛰어난 인물이었음은 다음 몇몇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우선 정실이 관직에서 쫓겨난 뒤에 그를 다시 조정에 불러들일 명분으로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에 적임이자라는 점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정실은 1749년(영조25)에 서장관(書狀館)의 직책을 맡기도 하였다. 청나라 사신으로 기용되는 관리는 뛰어난 학문을 지녀야 했으니 이러한 사실 역시 그의 학문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751년(영조27)에는 낙향하는 정실에 대해 신하들이 그가 강연(講筵)에 적합한 인물이기에 정실이 조정에 올라오기를 재촉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정실에게 임금에게 경서를 강연하는 일을 맡겨야 한다고 임금에게 주청했으니, 그의 학문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훗날 순조조(純祖朝)에 그의 시호를 문정(文靖)으로 한 것은 이러한 그의 학문적 능력을 보여주는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실은 지방관으로 재직하기도 했는데 이때 백성의 안정과 국방의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1756년(영조32)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재직할 때 수재(水災)와 흉작(凶作)으로 고을이 어려움에 처한 일이 있었다. 이때 그는 조정에 세금을 나누어 낼 수 있게 해달라고 주청하여 고을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주었다. 또한 1763년(영조39)에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재직했을 때

“강도(江都)는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으로 진양(晉陽) 진양(晉陽): 동안우(董安于)와 윤탁(尹鐸)이 성주로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관대한 은혜를 베풀고 국방을 튼튼히 했던 곳으로, 조간자(趙簡子)의 유언에 따라 조양자(趙襄子)가 지백(智伯)의 난리를 피신해 간 곳이기도 하다.
에 해당되는 곳인데도 저장해 놓은 군량(軍糧)이 전혀 없어 앉아서 빈 창고만 지킬 뿐입니다.”

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에 힘을 실어줄 것은 요청하였다. 또한 그는

“초지진(草地鎭)은 실로 해로(海路)의 요충지에 해당되는데 진졸(鎭卒)이 단약(單弱)하고 수비가 허술합니다. 이는 대개 목관(牧官)이 나뉘어 거처하고 있어 목자(牧子)로 들어간 진졸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면서 국방의 강화책으로 초지진의 허술함을 해소할 대책을 내놓는 등 관리로서 자신의 직책에 소홀함이 없었다.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그의 성품은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1764년(영조40) 경연에 참여하여 임금과 토론하였던 그는 상소를 올려

“아랫사람이 하는 말이 성상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목소리와 기색을 돋우지 말고 부드럽게 처리하셔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이로 인해 갑자기 크게 노하시어 말씀을 예사롭지 않게 하신단 말입니까? 대소 신료들이 두려워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으니, 실로 위대한 성인의 화평한 기상에 흠이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일로 인해 격노하여 심기를 너무 부린다면 결국 섭양(攝養)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전하께서는 보령(寶齡)이 8순을 바라다보는 시점에 임하셨으므로 서둘러 심신(心身)을 보양하고 정력(精力)을 아끼셔야 하는데 갑자기 일시의 번뇌로 인하여 지나치게 언성(言聲)과 기색(氣色)을 돋우시니, 삼가 몸을 보존하고 정력을 아끼는 방법에 해가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임금의 건강이 염려되어 드리는 말씀이라고 하고 있으니, 그의 상소가 영조의 귀에 조금은 부드럽게 들렸을 듯하다.

그는 도승지(都承旨), 부제학(副提學), 대제학(大提學),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였으며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몇 차례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조정의 요청으로 복귀하였던 그가 나이 70에 벼슬을 그만둘 것을 진정으로 청하자, 이에 영조는 봉조하(奉朝賀)라는 명예직을 부여하기도 하였으니, 그를 예우하는 영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는 1776년(영조52)에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정조실록》의 정조 즉위년 4월 18일조의 기사에 보면 그의 졸기(卒記)가 수록되어 있다.

“전 판서 정실(鄭實)이 졸(卒)하였다. 정실은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의 후손이고, 고 상신(相臣) 정호(鄭澔)의 손자이다. 영묘(英廟)기미년(1739) 에 등제(登第)하여 차례차례 화려하고 중요한 관직 지내고, 동전(東銓)의 장관이 되었다. 문형(文衡)을 맡아 보았으며,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자 치사(致仕)했는데, 물러서는 때가 많고 진출하는 때가 적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염약(恬約)하다고 칭찬하였다.”

이처럼 역사 기록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를

“물러서는 때가 많고 진출하는 때가 적으므로 염약(恬約)하다고 칭찬하였다.”

라고 적고 있는 것은, 그의 한평생에 대한 삶의 궤적이 천추에 길이 빛나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의 편저서에 《송강연보(松江年譜)》가 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네이버 지식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