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金瀏,1814-1884)


 

김유(金瀏,1814-1884)                                            PDF Download

 

1814(순조 14)~1884(고종 21).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량(士亮), 호는 귤은(橘隱)으로 김지관(金志瓘)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과거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나 중간에 뜻을 바꾸어

“문장학(文章學)과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며 과거의 일은 명(命)에 있을 뿐이다”

라고 하고 과거의 일을 단념하였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에게 사사하였고, 돌아온 후에도 1년에 한두 번씩 찾아가 학문을 문의하기를 40여 년간 계속하였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들은 바를 기록하여 편집하고 성리학에 전심하였으며, 후생을 교육하는 데에도 힘을 썼다. 실학자로도 이름이 높다.

여수 지역의 대표적 유학자로 조선조 말 여수시 삼산면 거문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성리철학의 깊은 이치를 깨우칠 정도로 학문이 높았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거문도에 낙영재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학문에 전념했다.

여수항에서 쾌속선으로 두어 시간 포말을 가르다 보면 세 개의 섬으로 형성된 아름다운 거문도(巨文島)를 만날 수 있다. 이 섬은 예부터 문장가들이 많다하여 ‘거문도(巨文島)’라 했다. 행정 구역상으로 거문도는 여수시 삼산면에 속해있다. 이 섬에는 ‘거문도’라는 지명의 유래를 입증해주는 사당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조선시대 거유(巨儒) 귤은 김유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세워놓은 ‘귤은당(橘隱堂)’이다. ‘귤은당’의 주인인 김유는 1814년 동도(거문도는 원래 동도와 서도, 고도로 형성됨)의 유촌리에서 출생한 당대의 선비로, 조선조 6대 성리학자로 손꼽혔던 장성의 노사 기정진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이 섬은 당초 서양에서는 ‘하밀톤’으로, 중국에서는 ‘거마도(巨磨島)’ 등으로 불렸던 것을, ‘거문도(巨文島)’라고 지명 이름을 바꿔놓은 사람이 바로 김유이다. 김유가 타계한 1년 뒤인 1885년 영국 함대의 거문도 점거를 계기로 많은 내․외국인들의 섬 출입이 빈번해졌다. 이때 청나라 수군 제독 정여창이 김유의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들의 필담에 감탄하여, 이 섬은 문장가가 많은 곳임으로 삼도(三島)를 클거(巨) 글월문(文) ‘거문도(巨文島)’로 명명해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함으로써 이때부터 거문도라 부르게 된 것이다.

오늘의 ‘거문도’를 있게 한 김유는 고려 말 경주김씨 김상촌(金桑村)의 후손으로 세조 때 난(亂)을 피해 이 섬으로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이 섬에는 김유와 관련된 옛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의 큰 선비를 낳게 했다는 서도(西島) 수월산(水越山) 밑에 높이 30m 가량의 붓 모양을 한 문필암(文筆岩), 등대 곁 80평 가량의 넓다른 신선바위, 그리고 김유의 죽음을 슬퍼하며 용이 승천했다는 서도 농냉이 바위에 6m 깊이로 파인 웅덩이 등이 그것들이다.

김유는 유년시절 기정진에게서 학문을 닦은 뒤 고향에 돌아와 선배인 만해(晩海) 김양록(1806~1885)과 함께 낙영재(樂英齋)를 지어 영재교육에 힘썼고, 완도 청산도에도 서당을 열어 거문도와 청산도에서 제자들을 수없이 길러냈다. 당시 김유 밑에서 공부를 하기위해 영·호남 지방에서 유생들이 이곳 거문도로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특히 김유는 해외 이방인들이 면접을 요청할 때 제자들로 하여금 해안에서 글방까지 좌우로 늘어서게 하고, 예를 갖추어 손님을 대하고 필담(筆談: 붓으로 글을 써서 대화를 나누는 일)으로 그들의 머리를 숙이게 했다. 따라서 해외 인사들도 선생의 예절과 학문의 해박함에 감탄하여 당초 지명이었던 ‘거마도’를 ‘거문도(巨文島)’로 바꿔 부를 정도였으니, 그의 인품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절해낙도(絶海落島)의 청빈한 선비가 해외 인사들과 학문을 겨루어 지명마저 바꿔 놓은 것은 김유선생의 놀라운 업적이 아닐 수 없다. 김유는 거문도뿐만 아니라 청산도와 여호도에도 글방을 열고 제자를 가르치는 등 평생 동안 선비다운 기품을 보여줬다. 김유는 숨을 거두는 마지막 날까지도 완도 청산재(靑山齋)에서 제자들에게 강론을 하다가 1884년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귤은재유고(橘隱齋遺稿)가 있다.

김유가 타계하자 이곳 제자들은 낙영재에서 매년 9월 9일 제례를 지내다가 해방 후 고도에 새로 귤은당을 지어 그의 정신을 기려오고 있다. 낙영재는 1906년 사립 낙영학교로 개편되어 서도국민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귤은당의 유물로는 현감존문장(縣監存門狀)을 비롯하여 순영존문장(巡營存門狀), 영조기증선(英祖寄贈扇), 친필주선(親筆珠選), 해상기문(海上奇聞), 귤은제집(橘隱諸集) 등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1854년 러시아 함대가 거문도를 무단으로 침범했을 때 통상 교섭을 원한다는 그들의 뜻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 내용이 김유의 문집에 「해상기문」이라는 이름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 문서는 우리나라와 서양이 최초로 작성한 외교 문서라고 전해지고 있다.

기정진과 김유 문하에서 수학했던 거문도 유촌마을 출신의 귤당(橘堂) 박규석(朴圭錫) 경사(經史)와 문학(文學)에 뛰어났으며, 스승인 김유가 타계하자 선생의 유고를 모아 귤은재문집을 펴냈으며, 낙영재(樂英齋)를 이어받아 후학 양성에 힘썼다. 김유와 함께 러시아 함선에 올라 필담을 나눈 만회 김양록도 모두 여수시 삼산면 거문도 출신이다. 이 외에도 1937년에 발간된 조선환여승람에는 여수의 대표적 유학자 겸 유림들로 정상백을 포함한 59명이 실려 있다.

귤은재유고는 조선 후기 유학자인 김유의 시문집이다. 모두 4권 2책으로, 그가 죽은 후 17년 뒤인 1901년(광무 5)에 사촌 동생 김준(金濬) 등이 편집하여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권두에 1901년에 스승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奇宇萬)이 쓴 서문이 있다.

권1에는 시 130수가 들어있고, 권2에는 詩 230수, 권3에는 잡저 20편이 있다. 이들 중에 「노문집지서(蘆門執贄書)」는 스승인 기정진에게 처음으로 찾아가면서 가르쳐 주기를 구하는 글이고, 「문음양승강(門陰陽升降)」은 역학에 있어서의 음과 양이 승강(升降)하고 소장(消長)하는 이치를 설명한 글이다. 「일속산방설(一粟山房說)」이란 천태산(天台山)에 은일한 황자중(黃子中)이 정사를 짓고 일속(一粟)이라고 이름한 데 대하여 석씨(불교)의 설과 같다고 논란한 글이며, 「태극권설(太極圈說)」은

“태극도를 그리면서 원도(圓圖)로 표시하는데, 이 원도의 ‘원’이란 어떠한 것이냐”

하는 문제를 문답식으로 쓴 글이다. 「소도원설(小桃源說)」은 선경(仙境)이라 하는 도원(桃源)의 유무에 대하여 논한 후에

“다스리는 관원이 정치를 잘하여 온 백성이 안락하게 살게 되면 이것이 소도원이다”

라고 하고 있다. 그 다음에는 「부선설(鳧船說)」이란 20인 정도가 탈 수 있는 조그마한 목판복개(木板覆盖)의 반철갑(半鐵甲) 전선(戰船)을 만든 모형을 자신이 창안하여 도식(圖式)은 없이 그 설명만을 가한 것으로 과학적이요, 실용적인 배 만드는 조선의 모형설이다.

다음에 서(序) 8편, 기(記) 14편, 발(跋) 2편, 명(銘) 2편, 제문(祭文) 6편이 있다. 권4에는 1874년에 김유 자신이 쓴 가행록서(家行錄序)와 양세가행록(兩世家行錄)이 있고, 부록으로 만회김처사만시(晩悔金處士輓詩), 1879년에 쓴 동백기(冬柏記), 기정진이 쓴 사량가덕후(士亮家德後) 1편이 있다. 부록으로 1901년에 기우만(奇宇萬)이 쓴 행장(行狀), 이어서 사촌 동생 김준(金濬)이 쓴 발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