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낙명(洪樂命:1722~1784)


신재 홍낙명(洪樂命:1722~1784)                      PDF Download

 

조선 중기의 문신인 그의 자는 자순(子順), 호는 신재(新齋)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홍중기(洪重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석보(洪錫輔)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홍상한(洪象漢)이며, 어머니는 어유봉(魚有鳳)의 따님이다. 그는 외할아버지로부터 수학하였다.

그는 1741년(영조1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754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57년에는 정언(正言)과 사서(司書)를 역임하고, 1762년에 강동현령(江東縣令)를 역임하였다. 이듬해에 부응교(副應敎), 필선(弼善), 응교(應敎), 교리(校理)를 지냈다. 1764년에는 부제학(副提學)을, 이듬해에는 참판(參判)과 참의(參議)를 역임하고 1766년에는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768년에 승지(承旨)가 되고, 이듬해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1773년에는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정조(正祖) 즉위년(卽位年)에 강화유수(江華留守)를 거쳐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 되고, 1778년(정조2)에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이듬해인 1779년에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정조의 즉위 초에 세도가인 홍국영(洪國榮)의 친척이라 하여 높은 벼슬에 매번 천거하였으나 그는 병환을 이유로 들어 정계(政界)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러다가 1780년에 홍국영이 실각하자, 다시 등용되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과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이 되었고, 그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경사(經史)에 밝았고 특히 《소학(小學)》을 애독하였으며, 만년에 퇴계(退溪)이황(李滉)과 중국의 팔대문장가(八大文章家)의 한 사람인 한퇴지(韓退之)를 사숙하여 경서(經書)와 문장(文章)에 심취하였다.

저서는 《신재문집(新齋文集)》 6권과 《소학초록(小學抄錄)》, 《경술편(敬述篇)》, 《기락편(旣樂編)》, 《유은록(儒隱錄)》, 등을 남김으로써 학문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뛰어나 주목할 만한 글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의 문집은 간행되지 못하고 연세대학에 필사본 한 질만 보관되어 있는 실정이어 그동안 그에 대한 활발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18세기 정국을 주도한 명문 남양 홍씨 집안사람으로 대제학을 지내고 판서까지 역임하였으니, 청요직을 다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누구나 쉽게 하는 양반다리를 하지 못하였다. 양반의 상징이라 할 양반다리를 할 수 없었기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맹자》에 나온 대로, 손가락 하나라도 남과 같지 못하면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고치려 든 것처럼, 10일이고 20일이고 꾸준히 연습을 하고, 또 여러 가지 다른 자세를 취하여 자신에게 알맞은 양반다리를 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간만 허비할 뿐 되지 않았다. 결국 자신의 다리 구조 때문에 양반다리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맹자는 무명지(無名指) 하나가 펴지지 않으면 고치려 들면서, 마음이 남과 같지 못하면 걱정할 줄 모르니, 이는 작은 것만 알고 큰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라 개탄한 바 있다. 이 말을 그는 위안으로 삼았다. 비록 양반다리를 하지는 못하지만, 남보다 눈이 밝고 귀가 밝으며, 말도 잘할 뿐만 아니라 이치를 잘 분별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닌 것을 다행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잠시였을 뿐 그는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광대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하여 기예(技藝)를 익힌 다음 공연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남들이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일이라 여긴다. 하지만, 이는 타고난 재주가 그러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광대가 먹고 살기 위하여 남들이 하지 못하는 재주를 가지게 되었지만, 자신은 신체구조를 탓하면서 누구나 하는 양반다리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노력이 부족한 때문이라 여겼다. 맹자가 이른 대로, 하지 않은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고 생각의 변화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체 조건이 원활하지 못한 것을 통하여 학문의 경우 역시 실천궁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이점을 깊이 연구하여 실천해 나가도록 노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천집(淵泉集)》
《한국계행보(韓國系行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사료해설집》, 신석호, 한국사학회,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