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

“숙헌(율곡 이이의 자)이 형의 편지를 옷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봉함을 뜯고 두 번 세 번 되풀이 읽었습니다.”

(1560년 10월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

“숙헌이 요즘 임진나루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희 집이 다소 넓기에, 네댓 날쯤 문회(文會)를 열어 『대학』과 『논어』를 강론할 생각입니다. 형이 왕림하여 질정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1577년 윤8월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

“형에게 보내는 숙헌의 편지를 전해 받았습니다. 편지를 미리 뜯어보아도 좋다는 숙헌의 허락이 있었지요. 실례를 무릅쓰고 제가 읽어보았더니, 숙헌의 날카로운 칼날도 형에게 완전히 제압되었군요. 제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답니다.”

(1579년 11월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

위에서 인용한 글은 모두 우계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의 한 단락이다. 율곡 이이와 함께 대학자인 우계 성혼이 학술모임에 초대하기도 하고, 서로 편지를 공유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던 송익필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종 시대부터 선조 시대까지 이어지는 그의 가족사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중종 시대로 돌아가서 그 시대의 상황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1515년(중종 10), 조광조가 혜성처럼 등장하여 원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알성시에 장원으로 급제하며 중종의 눈을 사로잡았다. 당시 조광조는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종이를 제조하는 부서인 조지서의 사지로 재직 중인 초보 관리였다. 조지서라는 별 볼일 없는(?) 관서에 근무하던 조광조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초보 관리의 신분으로 치른 알성시에서 합격한 이후였다. 알성시 장원 급제 뒤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과 사간원 정언을 거쳐 마침내 홍문관에 입성한다. 홍문관 관리가 된 조광조는 중종의 뜨거운 총애를 받으며 승진을 거듭했고 개혁을 주도하며 젊은 선비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조광조는 특히 엉터리로 임명된 반정공신들과 부정부패가 만연한 훈구대신들에 대하여 날선 비판을 하였는데, 그를 추종하는 사간원․사헌부, 홍문관과 성균관의 젊은 유생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때 비판의 대상이 된 대신들 가운데 단 한 명의 예외가 바로 이조판서 안당이었다. 안당은 드물게도 신진 사림들의 지지와 존경을 받은 대신이었고,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마침내 1518년(중종 13) 5월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영광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1519년(중종 14) 조광조와 신진 사림들은 강경하게 위훈삭제(僞勳削除: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 중 자격이 없다고 평가된 사람들의 공신 작위를 박탈하고 토지와 노비를 환수해야 한다는 것)를 주장했다. 결국 중종반정으로 공신에 임명된 총 117명 가운데 4등 공신 65명 전원을 포함한 76명이 공신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조광조와 신진사림들은 비로소 역사를 바로잡았다고 기뻐했지만, 이들은 중종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위훈삭제는 공신들에 의해 왕위에 오른 중종의 콤플렉스를 자극한 것이다.

위훈삭제가 이루어진 지 3일 뒤, 중종은 후궁 희빈 홍씨의 아버지이자 반정공신인 홍경주와 남곤에게 밀명을 내려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는 관리들을 체포하였다. 결국 조광조에게는 사약이 내려졌고, 그를 추종했던 선비들도 모두 숙청되었다. 이를 기묘사화라고 한다. 조광조가 사사된 뒤 중종의 마음을 알아챈 신하들은 안당에 대한 탄핵의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안당은 고신(告身: 관직 임명장)을 빼앗겼다.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과 친밀했던 안당은 집중적으로 탄핵을 받았다. 그를 비난하는 가장 큰 근거는 그의 세 아들들이 모두 현량과에 급제하였다는 것이다. 현량과는 조광조의 건의에 따라 시행된 관리등용 제도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 받아 시험을 치르고, 합격한 사람은 임금과 대신들 앞에서 심층 면접을 본 뒤 곧바로 벼슬을 내리는 방식이었다. 현량과가 시행되자 조광조와 친밀한 젊은 선비들이 대거 발탁되었는데, 그 중에는 안당의 세 아들 안처겸, 안처함, 안처근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안당을 비난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었다. 왜냐하면 현량과가 실시된 지 얼마 뒤 안당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안처겸, 안처함, 안처근 형제들은 어머니의 초상을 치르기 위해 사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곧바로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현량과는 폐지되었고 합격도 취소되었다. 다시 정규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는 이상 정계에 진출할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다.

1521년(중종 16),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3년의 시간이 흘렀고 안처겸 형제들의 삼년상도 끝이 났다. 탈상을 하는 날, 안처겸 형제들은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과 모여 세상을 한탄하며 조광조를 숙청한 조정 대신들을 비난하였다. 안당은 아들들의 이런 생각이나 행동이 위험하다고 여겨 주의를 주었지만 혈기왕성한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들들을 설득하지 못한 안당은 한양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바로 이때 안당의 이종 서조카 송사련이 안처겸 형제를 역모로 고발한 사건이 발생했다.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는 정실부인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재혼을 하는 대신 데리고 있던 집안의 노비 중금을 비첩으로 삼았다. 중금은 안돈후와의 사이에서 딸 감정을 낳았다. 노비의 딸 감정은 천출이긴 하였지만 혈연적으로는 안당과 이복 남매였다. 안당은 감정의 노비문서를 없애고 신분을 양인으로 바꿔주었다. 감정은 평민 출신 군인 송인과 혼인하여 송사련을 낳았다. 비록 신분은 달랐지만 송사련은 안당에게 이종조카였고 안처겸에게는 이종사촌간이었다. 따라서 송사련은 안당 집안의 사람들과 가족처럼 지냈다. 그런데 이 송사련이 안처겸의 역모를 고발한 것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역모에 민감했고 기묘사화가 끝난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정 대신들은 긴장했다. 곧바로 친국(親鞫: 임금이 죄인을 몸소 신문하는 것)이 열렸고 모진 고문 끝에 관련자들이 속출했다. 안처겸, 안처근 등 7명은 사지가 찢기는 능지처참형을 받았고 역모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20여 명이 숙청되었다. 역모 사건이었기 때문에 연좌제가 적용되어 고향에 내려가 있던 안당은 교형(絞刑: 교수형)을 받았고, 남은 가족들은 변방으로 쫓겨나는 형벌을 받았다. 이 사건을 ‘신사무옥’이라고 한다.

신사무옥은 조광조를 추종하던 마지막 세력까지 숙청된 사건이자 송사련과 안당 가문과의 길고긴 악연이 시작된 것을 의미했다. 신사무옥으로 안당의 가문은 풍비박산되었고, ‘같은 집안사람’으로서 역모를 고변한 26세의 송사련은 공신으로 책봉되어 출세의 길이 활짝 열렸다. 종5품 관상감 판관으로 재직 중이던 송사련은 신사무옥이 마무리된 지 열흘 만에 다섯 품계를 뛰어넘어 정3품 중추부 첨지사로 승진하였고, 안당 가문에서 몰수한 재산은 송사련의 차지가 되었다. 신사무옥은 노비의 손자 송사련의 인생을 하루아침에 바꿔놓았다.

신사무옥 당시 안당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둘째 아들 안처함이었다. 아버지 안당의 성품을 닮은 그는 형 안처겸과 동생 안처근이 시절을 한탄하며 세상을 뒤집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모으자 극구 말렸던 인물이다. 신사무옥 이후 경상도 청도에 유배된 안처함은 항상 행동을 조심한 덕분에 1522년(중종 17)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안처함은 처가가 있는 경기도 용인에 거처를 마련하고 여생을 조용히 보내다가 1543년(중종 38) 세상을 떠났다.

구봉 송익필은 1534년(중종 29) 바로 송사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송익필은 어려서부터 비범한 총기를 드러냈지만 이름난 유학자의 제자가 되지 못했다. 안당의 가문을 몰락시킨 송사련의 악명이 선비들 사이에서 워낙 자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익필은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하며 과거시험에 매달렸다. 송익필은 실력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만이 아버지의 오명을 씻고 주류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1558년(명종 13) 다섯 살 아래의 동생 송한필과 나란히 소과 초시에 합격한 것이다.

하지만 송익필은 이내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송익필 형제가 과거시험에 합격한 것이 알려지자 사관 이해수, 김홍식 등이 ‘송사련은 예의를 저버린 죄인이며 그 자식들은 역시 얼손(노비의 자손)들이니 과거에 나아감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선비들 사이에서는 송사련에 대한 비난 여론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1559년(명종 14) 결국 송익필의 초시 합격은 취소되었고, 대과 응시 자격도 박탈되었다. 이때 송익필의 나이는 스물여섯, 그의 아버지 송사련이 양반의 신분을 얻었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

스물여섯의 송익필은 입신양명의 꿈을 포기한 채 파주 구봉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송익필은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바로 특별한 스승 없이 독학으로 학문을 연마한 ‘율곡 이이’와 조광조의 제자였던 성수침의 아들 ‘우계 성혼’이었다. 율곡 이이는 관료가 되기 위해 과거시험을 준비했고, 우계 성혼은 과거시험보다는 학문을 연마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과거시험을 볼 수 없는 송익필은 독서에 매달렸다. 이처럼 각자 목표하는 길은 달랐지만 세 사람은 서로 학문을 논하며 우정을 키워갔다.

1560년(명종 15) 가을, 송익필은 제자 한 명을 받았다. 율곡을 통해 알게 된 김계휘가 아들 김장생을 데리고 찾아온 것이다. 제자를 기른다는 것은 이제 과거시험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송익필은 고민 끝에 김장생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후 과거길이 막힌 절망적인 상황에서 치열하게 학문을 연구한 송익필의 명성은 점점 세상에 알려졌고 김장생을 시작으로 많은 제자들이 파주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송익필의 인생에는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듯 점점 어두워지고만 있었다. 1566년(명종 21) 신사무옥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안당의 둘째 아들 안처함의 아들인 안윤이 할아버지 안당의 신원 복귀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명종은 안당의 신원을 복귀시켰고 고신과 직첩도 돌려주었다. 안당에게 아무 잘못이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안당의 후손들로서는 거의 50년 만에 선조의 명예를 회복한 셈이었다. 안당이 명예를 회복할수록 송사련 일가에 대한 비난 여론은 거세졌다.

정치 활동을 하지 않는 송사련은 이를 개의치 않았고 유력 인사들이나 명사들과 교류를 즐기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비상한 두뇌로 고변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인생을 바꾼 송사련은 그 자체로 만족했다. 그는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명예직 당상관으로서의 신분을 즐기면서 당대의 권세가들과 어울리며 평생을 떵떵거리면서 살았다.
하지만 양반이자 공신의 아들로 태어난 송익필은 달랐다. 그는 실력도 빼어났고 목표도 있었지만, ‘송사련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한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을 정정당당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출사의 꿈을 접은 송익필이 할 수 있는 것은 한가한 서생으로서 제자를 가르치는 것뿐이었다. 송익필은 성리학 중에서도 특히 예학(禮學)을, 그중에서도 가례(家禮)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태생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고 정정당당할 수 없는 자신의 가족에 대한 괴로움을 학문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 결과 송익필에게 학문을 배운 김장생은 훗날 조선 예학의 종주로 성장하였다.

김장생은 송익필에게 배운 학문을 아들 김집과 김집의 제자 송시열에게 가르쳤다. 김집은 정실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율곡 이이의 서녀를 소실로 맞아 그의 사위가 되었다. 그리하여 김집은 송익필과 율곡 이이의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한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 후 김장생이 세상을 떠나자 김집은 아버지의 제자였던 송시열을 자신의 제자로 받았다. 송익필․이이-김장생-김집-송시열로 이어지는 학맥은 그대로 서인의 계보가 되었다.

이처럼 후대에 흔히 율곡의 제자들로 일컬어지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성혼과 송익필의 제자이기도 한 경우가 많았다. 당시 친우 사이인 율곡, 성혼, 송익필은 제자를 공유하는 하나의 학단(學團)을 이루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대부분이 율곡의 제자로 알려진 것은 율곡의 학문적 비중과 사회적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사실상 성혼, 송익필과 공유되었던 제자들이 율곡문하로 흡수되어 알려졌던 면이 있다. 또한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송익필의 처지와 신분 때문에 그의 제자를 자처하기가 꺼려졌던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선조가 즉위한 지 8년째가 되던 1575년, 조선 정치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한다. 곧 후배 사림이 동인을 형성하고 선배 사림이 서인을 형성하여 이른바 붕당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조정이 온통 동서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기 시작했을 때,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이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가 80세였으니 천수를 누린 셈이었다. 송익필은 율곡에게 아버지의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위(位)를 베푸는 나무패)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못하고 조정에 출사할 수도 없는 송익필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한 율곡은 그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율곡은 누구보다 조광조를 존경해왔고 송사련이 사람들에게 어떤 비난을 받고 있는지도 잘 알았지만, 흔쾌히 친우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당쟁이 본격화된 이후 송익필의 당파와 당색은 자연스럽게 서인이 되었다. 그 후 당쟁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율곡이 동인들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자 송익필은 서인 세력의 숨은 브레인으로 활약을 펼치게 된다. 송익필은 친우인 이이와 정철, 성혼 등이 조정의 주요 사안이나 정책에 대하여 조언을 청할 때면 언제든지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었다. 조정에 나아갈 수 없다는 단점으로 인하여 송익필은 오히려 조정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기를 수 있었다. 그는 파주 구봉산 자락에 앉아서 율곡을 통해 선조의 심리를 읽어냈고 동인들의 목표와 방향을 파악했다. 덕분에 송익필의 조언은 율곡과 서인 세력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1584년(선조 17) 1월, 율곡 이이가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율곡 이이의 죽음은 당파를 초월하여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서인들은 늘 율곡에게 동인의 편을 든다며 원망하였고, 동인들은 율곡이 어차피 서인의 편이라며 비난하곤 했다. 하지만 서인 중에서 율곡을 대체할 인물은 어디에도 없었고, 동인 중에서 율곡처럼 조정의 화합을 이끌 인물도 없었다.
율곡을 통해 세상과 조정과 소통하고자 했던 송익필이 느낀 상실과 슬픔 또한 상상 이상이었다. 서인 세력은 양지에서 활동하던 수장을 잃었고, 양지를 잃은 서인 세력은 음지에서 활동하던 수장 송익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송익필은 조정에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율곡의 죽음과 함께 서인의 실각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송익필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1586년(선조 19), 안당의 손자 안윤이 송익필의 집안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의 내용은 송익필의 외할머니 감정이 안돈후(안당의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노비 중금(안돈후의 비첩)과 그녀의 전남편(노비) 사이에서 생긴 딸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송익필 일가는 안당 집안과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안당 집안의 사노비였다. 중종 시대에 만들어진 『대전후속록』에 따르면 비록 노비라 하여도 2대에 걸쳐 양인이 할 수 있는 부역에 종사하면 그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여기에 따르면 송익필의 경우, 아버지 송사련과 할아버지 송인이 양역에 종사하였고, 또 이미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난 지 60년이 넘었다. 하지만 안당의 후손들은 60여 년을 기다려온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동인 세력과 손을 잡았다. 사헌부를 장악한 동인 세력에 의해 국법은 무시되었고 소송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드디어 그 해 7월 15일, 송익필 집안에 대한 판결이 이루어졌다.

“송사련의 후손 송익필 형제와 그 자손들을 원래대로 안씨 가문의 사노비로 되돌려라.”

판결이 나오자마자 송익필 집안의 일가친척 70여 명은 모두 안당 가문의 보복을 피해 전국 각지로 흩어져 도망노비가 되었다. 송사련의 무덤은 사정없이 파헤쳐졌고 시신은 훼손되었다. 송사련에 대한 안당 가문의 증오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참혹한 사건이었다.

송익필도 안당 가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도망을 쳤다. 그가 도망친 곳은 깊숙한 지방이 아니라 대궐에 가까운 한양, 그것도 동인의 수장 이산해의 집이었다. 송익필이 한양을 떠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동인 이산해의 집에 숨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때 이산해는 송익필에게 서인에서 동인의 편으로 전향하면 모든 고초를 해결해 주겠노라고 회유했다고 한다. 송익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송익필이 다시 노비로 환천되자 제자들과 친구들은 그를 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선조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성혼과 정철은 송익필의 노비문서를 구입하여 그를 다시 양인으로 만들기 위해 돈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안당 가문에서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소송을 진행한 것도 판결을 이끌어낸 것도 동인이었지만 이들은 송익필을 환천시켜 서인의 기세를 완전히 꺾은 것에 만족할 뿐 송익필을 안당 가문에 인도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공노비가 아닌 사노비였기에 도망노비를 찾는 것은 주인의 몫이라는 주장이었다. 동인 중에는 송익필과 학문적․문학적 교류가 깊었던 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차마 송익필을 직접 끌고 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정여립의 역모 사건인 ‘기축옥사’의 배후 조종자의 역할을 한 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고, 조헌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의 미움을 받아 송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갈 곳이 없던 그는 스승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김장생이 충청도 당진에 거처를 마련해 주자 그곳에서 책을 저술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러다가 1599년(선조 32) 66세의 나이로 한 많은 삶을 마감하였다.

아버지 송사련이 저지른 악업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송익필. 그의 삶은 영광보다 고난이, 명예보다 비난이 가득했다. 송익필은 가정의 아픔과 부친의 불명예를 학문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이산해․최립 등과 함께 선조대의 8문장가로 불렸으며, 그가 지은 「제율곡문(祭栗谷文)」은 조선시대 23대 문장의 하나로 평가받을 정도였다. 그는 입신양명이 좌절되자 기꺼이 친구들의 그림자 역할을 하며 서인 세력의 책략가가 되어 당쟁의 역사를 만들었고, 스승을 하늘처럼 존경하는 제자들을 길러내어 조선 산림의 종주가 되었다.

율곡의 사직상소


율곡의 사직상소

 

늘날 선조는 당쟁의 폐단과 임진왜란의 참화를 부른 암군(暗君:어리석은 임금)이라는 혹독한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사실 처음부터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임금은 아니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폭정에서 겨우 벗어나 안정을 찾아가던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특별히 명종의 총애를 받던 선조가 1567년 왕으로 등극했다. 16세라는 어린 나이로 인해 즉위 초에는 명종 비 인순왕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정사 처리에 능숙하여 1년 만에 친정을 하게 될 정도로 선조는 영민했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조선 사회는 희망에 부풀었다. 부패한 척신들이 국정을 농단하던 어두운 시대가 끝나고 올바른 유학자인 사림(士林)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것이라는 기대였다. 이러한 여망에 부응하듯 즉위 초 선조는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고 매일 경연에 나가 정치와 정사를 토론하고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할 정도로 뛰어난 군왕의 자질을 보였다. 또한 정계에서 훈구, 척신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했다.

특히 학문을 사랑한 선조는 비록 퇴계와 율곡으로부터 존경받는 군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당시 성리학의 거두였던 이 두 학자를 나라의 스승으로 추앙하고 존중했다. 실제 선조는 즉위하자마자 퇴계를 스승으로 불러들였다. 병을 이유로 퇴계가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자, 선조는 친히 편지를 보내

“어진 임금은 어진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성군이 되는 것이오.”

라고 하면서 어리석은 자신을 깨우쳐달라며 극진한 예우로 모셨다. 선조가 성군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한 만큼, 율곡은 다가올 찬란한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마음이 더욱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율곡의 부푼 기대와는 달리 정작 선조는 퇴계의 가르침에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퇴계는 1569년(선조 2) 3월 늙고 병약함을 이유로 들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만다. 율곡은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 5개월여가 지난 8월 16일부터 경연에 참석해 선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율곡의 노력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성군의 뜻을 세우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시간이 지나자 신하들의 간언을 뿌리치는 방법까지 나름대로 터득했다.

선조가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희망은 점차 절망으로 바뀌었다. 오만하고 의심이 많던 선조는 임금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척신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진 사림 역시 이내 편을 갈라 싸우기 시작했다. 임금은 신하를, 신하는 임금을, 신하는 다른 신하를 불신하면서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곡은 마치 임금이 성군의 뜻과 방향을 좇아 정치를 하도록 이끄는 것이 자신이 벼슬하는 유일한 이유인 양 줄기차게 선조에게 선정을 실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율곡은 강한 어조로 임금의 태도를 비판했으며, 갈수록 치열해져만 가는 붕당의 대립을 조정하고자 온 힘을 쏟았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1578년(선조 11), 1579년(선조 12)에 제출되었던 대사간 사직상소에 잘 드러난다.

1578년 5월 1일, 대사간에 임명된 율곡은 곧바로 사직 의사를 밝혔다.

신이 쓸 만한 사람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당면한 일들에 대해 하문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신의 말이 채택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신다면 다시는 소신을 부르지 마옵소서.

선조는 그동안 여러 차례 율곡을 요직에 등용했지만, 정작 그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임금이 자신의 간언을 들을 생각이 없으니 사직하는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면 더는 자신에게 출사(出仕: 벼슬길에 나아감)하라고 명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율곡의 반응에 선조도 그날로 임명을 철회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으니 글로 써서 아뢰라.”

라고 말했다. 그러자 율곡은 기다렸다는 듯 장문의 글을 올렸다.

지금 하늘이 노여워하고 백성은 곤궁하여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워졌음은 전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임금은 한 나라의 근본으로 정치가 잘 다스려지냐 혼란스러우냐는 오로지 임금에게 달려 있습니다. 임금이 할 도리를 다했는데도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율곡은 임금의 다스림의 근본은 ‘성군과 선치(善治)’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율곡은 선조에게 성군이 되겠다는 뜻을 선포하고 선정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였다. 임금의 강력한 의지와 실천만이 혼란스러운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평안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율곡이 보았을 때 임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는 일이다. 국가와 백성을 위해 항상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임금은 그 선택의 올바름을 확보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얻어 부족함을 채우고 더 나은 방향을 찾아야 한다. 요, 순, 우, 탕과 같은 성군들이 자신의 총명함을 과신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좋은 말을 수용하려고 애썼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이들 임금의 경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선조가 자신만 옳다는 아집에 빠져 독단적으로 정치를 행하고 있으니, 그래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율곡은 선조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쓸 만한 재능을 가진 선비가 있으면 전하께서는 그가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할까 봐 걱정하시고, 곧은 말을 개진하며 논쟁하는 선비가 있으면 전하께서는 그가 명령을 어길 것이라며 지레 싫어하십니다. 유학자로서의 행실을 실천하는 선비가 있으면 전하께서는 그가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다고 의심하십니다. 소신은 모르겠습니다. 대체 어떤 도를 배우고 어떤 계책을 아뢰어야 전하의 마음에 부합하여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까?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우선 누구라도 자신에게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언로를 열어놓아야 한다. 옛말에 간쟁(簡爭)하는 신하가 일곱 사람만 있다면 어떤 임금도 성군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어떤 나라도 부강해지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만큼 임금은 자신의 뜻을 앞세우기보다는 먼저 여론에 귀를 기울여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문제도 결국 자만 때문이다.

흔히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문제가 발생해도 결코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다. 일이 실패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 탓이다. 내 판단은 분명히 옳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방해해서, 혹은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도 오로지 주관적인 잣대를 사용한다. 그에게는 내 생각을 따르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내 생각을 반대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밖에도 율곡은 선조의 잘못과 허물들을 가감 없이 거론했다. 그리고 상소의 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부디 전하께서는 기회를 놓치지 마옵소서. 「하서(夏書: 『서경』의 편명)」에 이르기를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미리 대처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이미 위태로운 조짐이 드러났으니, 형세가 매우 급박하여 바로잡을 일이 시급합니다.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율곡은 당시 조선의 현실을 가리켜 ‘흙이 무너지는 형세’, ‘쌓아놓은 계란이 무너지는 형국’이라고 표현했다. 2백 년 묵은 집이 낡아서 동쪽을 고치면 서쪽이 무너지고, 서쪽을 고치면 동쪽이 무너져, 유명한 목수라도 어찌 손댈 바를 모를 지경리라고 했다. 삼척동자 어린 아이의 눈에도 나라가 망하는 것이 훤히 보이는데, 백성의 부모라는 임금은 팔짱만 끼고 앉아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으니, 이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밤중에 벌떡 일어나게 된다고 술회했다.

율곡은 절박했다. 병이 들기 전에 예방했다면 좋았겠지만, 병이 아직 심하지 않은 지금이라도 치료에 나서야 한다. 이때를 놓치면 더는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율곡은 왕명을 거역하고 사직상소라는 강경한 형식을 통해 선조를 일깨우고자 한 것이다.

율곡은 이듬해인 1579년 5월에 또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여기서 그는

“오늘날 동인과 서인에 관한 논의가 큰 문젯거리가 되고 있으니, 신은 이 점이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라며 붕당에 대한 견해와 대책을 상세히 개진했다.

사실 조정과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선 것은 선조 8년, 즉 1575년 때이지만, 이 사건의 발단은 윤원형이 한창 권세를 떨치고 있던 1564년(명종 19)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있던 심의겸이 공무 때문에 윤원형이 집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심의겸은 우연히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과 마주쳤다. 이조민은 전부터 심의겸과 잘 아는 사이여서 자신의 서재로 그를 불러들였다. 그런데 이조민의 서재에는 손님용 침구가 많이 놓여 있는 걸로 보아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은 듯 했다. 심의겸은 드나드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궁금해 이조민에게 누구의 침구인지 물었다.
이조민은 심의겸의 물음에 별 생각 없이 답변해주었는데, 그 가운데 김효원이 있었다. 김효원은 당시 과거급제는 하지 못했지만 글과 학문이 뛰어나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들은 심의겸은 마음속으로 ‘학문을 한다는 선비가 어찌 권문세가의 무식한 자제들과 어울려 지낸단 말인가. 절개가 있는 선비가 아니구나.’ 하고는 이때부터 김효원을 비루한 인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김효원은 권력에 빌붙어 출세 길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장인의 성화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잠시 동안 윤원형의 집에 묵은 것뿐이었다. 심의겸은 앞 뒤 사정도 살피지 않고 한 가지 면만 보고 김효원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

여하튼 그 다음 해 3월 김효원은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 출사했고, 그 몸가짐이 단정하고 책임감이 강해 날로 명성을 얻어갔다. 이러한 명성에 힘입어 김효원은 오래지 않아 이조좌랑의 요직에 천거되었다. 그런데 심의겸이 번번이

“김효원은 예전에 난신(亂臣) 윤원형의 집에 드나들며 권세를 좇던 비루한 사람”

이라며 가로막고 나섰다. 이 때문에 김효원은 낭관이 된 지 6∼7년이 지난 다음에야 이조좌랑이 될 수 있었다. 이조좌랑이 된 김효원은 학문과 인품을 두루 갖춘 선비들을 천거하는 데 힘썼기 때문에 후배 사림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김효원은 자기 앞을 가로막은 심의겸에게 만큼은 관대하지 못하고 그를 괘씸하게 여겨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심의겸은 어리석고 고지식하며 거친 인물이다. 크게 쓸 수 없는 인물이다.”

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심의겸의 주변 인물들은 김효원이 원한을 품고 보복이나 하는 소인배라고 떠들고 다녔고, 김효원을 따르는 인물들은 또 그들대로 심의겸을 두고 올바른 선비를 해치는 간악한 사람이라는 말을 퍼뜨리고 다녔다.

이런 와중에 김효원과 심의겸을 확실하게 갈라놓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김효원이 이조정랑으로 발탁되어 갈 때 자신의 후임(이조좌랑)으로 천거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을 두고서

“이조의 관직은 외척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래서 등용할 수 없다.”

라고 극력 반대했다. 심의겸은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 심씨의 일족이었다. 이 말을 들은 심의겸은 난신 윤원형의 문객 노릇을 한 주제에 도리를 따진다면서 크게 분노했다. 그러자 김효원을 따르는 세력이

“김효원은 나라를 위해서 한 말인데, 심의겸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올바른 선비를 핍박한다.”

면서 성토했고, 이에 대해 심의겸의 편을 든 세력은

“심의겸의 말은 직접 보고 들은 실상을 전했을 뿐이다. 오히려 김효원이 원한 때문에 외척임을 구실삼아 심충겸을 반대하고 있다. 이것은 소인배나 하는 행동이다.”

라면서 비난했다. 결국 이 사건 이후 서로를 더욱 배척했고, 이때부터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당쟁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한쪽으로 분류하기가 힘든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괜한 일을 만들어 소문내기 좋아하는 자들이 동인과 서인에 관한 갖은 설을 지어내어 실상은 살펴보지도 않고 단지 의겸과 가까운 사람은 서인으로, 효원과 가까운 사람은 동인이라고 하니, 조정과 신하들이 모두 동․서로 편입”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굳어져“논의가 갈수록 과격해지고 바로잡아 제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율곡은 상소에서 두 사람 모두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고 하였다.

효원도 신이 아는 자이고 의겸도 신이 아는 자입니다. 이 둘의 사람됨을 논한다면 다 쓸 만합니다. 잘못을 논한다면 두 사람 모두에게 있습니다. 이 중 한 사람을 군자라 하고 다른 한 사람을 소인이라고 부른다면, 신은 그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율곡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지만 심의겸은 외척으로서 정치에 개입하려 한 잘못이 있고, 김효원은 사적인 감정으로 심의겸을 비난한 잘못이 있다. 따라서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되면 자연스레 화합할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이러한 율곡의 입장은 미봉책이라는 반론에 부딪힐 수 있었다. 그도 이 점을 예상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사람들은 신에게 ‘둘 다 옳다고 얼버무리니 시비가 분명하지 않다.’고 나무랍니다. 천하에 어떻게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이 있을 수 있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논함에 있어 세상에는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경우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율곡은 만약 한쪽이 옳고 한쪽이 그르다고 한다면, 헐뜯는 말을 마구 쏟아내고 서로 질투와 반목을 거듭하는 형세를 결코 없앨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시비비를 가리다보면 또다시 예전 사화처럼 큰 피바람이 불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진정 동인과 서인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서로 화해하고 협력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세상의 일이란 둘 다 옳은 것도 있고 둘 다 그른 것도 있다면서, 김효원과 심의겸 양쪽의 반목과 대립은 모두 그른 것이라는 양비론(兩非論)을 내세웠다.

지금 조정의 분열을 해소하지 않고 저들이 서로 헐뜯고 다투게 내버려 둔다면 머지않아 종기가 곪아 터지는 아픔이 오늘날보다 더욱 심할 것이옵니다. 전하께서는 동인과 서인의 묵은 감정을 씻어버리고 다시는 서로를 구별하지 말도록 명하옵소서. 당파와 상관없이 그 사람이 어질고 재능이 있으면 등용하고, 그러지 못하면 버리시옵소서. 편벽되게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 자와 자기만 옳다고 여기는 자는 억제하고, 남을 모함하여 없는 말을 지어내거나 공연한 일을 만들려고 하는 자는 배척하옵소서.

율곡이 동서 화합을 위해 주장한 논리를 보면, 그가 무엇보다 시급하게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말부터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사자들 간의 자발적인 화해가 어렵다면 임금이 강제로라도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정한 인재 등용을 통해 갈등을 억제하고 조정의 분위기를 일신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율곡의 주장은 붕당의 반발을 살 것이 불 보듯 뻔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 신의 상소가 아침에 올라가면 저녁도 되지 않아 신을 헐뜯는 말이 쏟아질 것이옵니다.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만두지 않는 것은 신이 받은 큰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이 몸을 다 바치더라도 어찌 주저하오리까.

동서 분당을 전후한 시기, 율곡은 조정과 사림을 이끄는 리더 중의 리더였다. 따라서 율곡의 말 한마디 혹은 행동 하나가 조정과 사림에 끼치는 영향력과 파급 효과가 엄청났다. 율곡은 자신을 둘러싼 이러한 정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친분과 당파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서 항상 동서화합을 부르짖었다.

율곡의 이 사직 상소는 배수의 진을 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치적 생명을 걸고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자신이 앞장설 테니 임금도 노력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율곡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며 곧바로 그를 해임한다. 율곡의 말처럼 동인과 서인 세력은 결국 말을 다스리지 못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고 결국에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맞는 비극을 초래했다.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시험으로는 나라에 필요한 관리를 뽑는 과거제도였다. 과거에 합격하면 관직에 진출하여 관리 생활을 할 수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과거에 합격하는 데 일생을 걸었다. 과거시험에는 관리를 뽑는 문과와 무관을 뽑는 무과, 그리고 율관․역관․의관 등 기술직 종사자를 뽑는 잡과 등이 있었다. 이중에서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물론 문과(대과라고도 함)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방에서 뽑는 소과에 합격해야 했다. 소과는 다시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뉜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정도를 시험하는 것이었고, 진사시는 문장력을 알아보는 시험이었으니 요즈음으로 치면 논술시험에 해당된다. 고전소설에서 ‘최진사’, ‘허생원’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이다.

오늘날 논술고사는 대학입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조선시대에도 진사시 이외에 본시험인 문과에서 책문(策文)이라 하여 주제에 맞는 문장 작성 능력을 비중 있게 평가했다. 그런데 문장시험에서는 직접 생각해낸 글 대신 다른 사람의 문장을 그대로 베껴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인조대의 학자 신흠은 과거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기존의 문장을 그대로 베낀 경우가 거의 반수가 되었다.“고 개탄하기도 하였다.
생원시와 진사시 이 둘을 합쳐서 소과라 했으며, 이 시험에 합격하면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할 자격을 부여받았다. 성균관에서는 출석 점수인 원점(圓點)이 300점 이상 되어야 대과인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줘 성실성을 과거 응시의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 지금의 내신성적과 유사한 셈이다.

문과 역시 초시, 복시, 전시를 거쳐 총 33인의 합격자를 선발했다. 식년시가 3년마다 한 번씩 열렸으니 3년에 33명의 관리가 뽑혔다. 조선시대에 공무원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웠다. 학자들마다 통계에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조선시대를 통틀어 문과 시험이 대략 744회 실시되어 급제자는 모두 1만 4,620여 명이 나왔다. 이 가운데 정기 시험인 식년시 163회에서 6,063명, 각종 부정기 시험 581회에서 8,557명이 선발되었다. 다만 이 숫자는 중시를 제외한 숫자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과거 보러 가는 것을 ‘영광을 보러 간다’는 뜻의 ‘관광(觀光)’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는 그토록 멀고도 험하게 느껴졌던 과거길이 오늘날 여행을 뜻하는 관광길로 그 의미가 달라진 것이 흥미롭다.

과거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는 것을 방방(放榜)이라 했다. 과거 합격자가 발표된 뒤에 궁중에서 방방의 또는 창방의라는 의식이 치러졌다. 왕은 어좌에 앉고 시신과 백관이 서 있는 가운데 의식이 치러졌으며, 급제자는 차례대로 왕에게 사배례를 올린 다음 합격증인 홍패․백패와 어사화와 주과(酒果) 등을 하사받았다. 과거에 함께 합격한 사람은 동기생이라 하여 아무리 나이가 많거나 적어도 친구처럼 지냈고, 따로 계모임을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기도 했다. 합격자는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삼일유가(三日遊街: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시관과 선배, 친척을 방문하며 인사하는 일)를 했으며, 합격자를 배출한 마을에서는 경사가 났다 하여 한바탕 큰 잔치를 베풀었다. 조선후기에는 「평생도」라 하여 자기 일생의 주요 장면을 8폭 병풍에 담아 집에 보관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는데, 이때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과거 합격 장면이었다. 그만큼 과거급제는 개인의 자랑이자 가문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문과 시험이 740여 회 치러졌으므로 장원급제자도 740여 명이다. 문과 급제자 전체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숫자이고, 1년에 장원급제자가 대략 1.4명 배출되었으니 정말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문과 급제는 개인의 영광일 뿐 아니라 가문의 커다란 영예였다. 급제만 해도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는데 더구나 장원급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장원이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이는 엄중한 금기를 깨고 불공을 드리기도 하고, 과거 시험만 보게 해준다면 개구멍이라도 지나겠다고 통사정을 하는가 하면, 신문고를 두드리는 이까지 있었다. 그리고 장원급제자들 가운데는 어렵다는 과거에 연달아 장원을 차지한 수재도 있었고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이들도 있었다.

반드시 머리가 좋고 똑똑해야 장원급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시대 과거의 장원들 중에는 신동으로 널리 알려져 이름을 날린 사람도 많았다. 우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여섯 살에 글을 읽고 글귀를 지어 사람들이 모두 신동이라고 불렀다. 그는 세종 20년(1438)에 19세의 나이로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세종 26년(1444) 문과에 3등으로 급제했다. 세조 3년(1457)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해서 사간원 우사간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정시에도 다시 장원을 차지해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그는 특히 시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장원이었다. 그가 사은사로 북경에 가서 통주관에서 안남국(베트남) 사신 양곡(梁鵠)을 만났는데 그도 장원 출신이었다. 서거정이 근체시(近體詩: 중국 당대에 형성된 시체. 일정한 격률과 엄격한 규범을 갖춤) 한 율을 먼저 지어 주자 양곡이 화답했고 서거정이 곧 연달아 10편을 지어 응답했다. 그러자 양곡이 탄복하기를

“참으로 기재(奇才)다”

라고 했다. 또한 요동 사람 구제(丘霽)가 서거정의 시를 보고는

“이 사람의 문장은 중원에서 구하더라도 많이 얻을 수 없다”

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세조 2년(1456)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임원준(任元濬: 1423∼1500)은 10세에 능히 글을 지었으므로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세종이 22세인 그를 불러서 말하기를

“옛날에 사람이 7보를 걷는 동안 시를 지은 사람도 있고 동발(銅鉢: 타악기의 하나)을 친 소리가 끝나는 동안에 시를 지은 일도 있는데, 네가 능히 옛 사람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하고는 ‘춘운(春雲)’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으라고 했다. 그러자 임원준은 즉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화창한 삼춘 날씨에, 멀고 먼 만 리 구름이로다. 바람은 천 길이나 헤치고, 햇빛에 오화가 문채 나네. 상서로운 빛은 옥전에 어리었고, 서기(瑞氣)는 금문을 옹위하네. 용을 따를 날을 기다려, 장맛비가 되어 성군을 보좌하리라.”

이 시를 듣고 임금은 한참 동안 칭찬을 했고, 얼마 후 그에게 집현전 관직을 제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훗날 훈구파의 거물 임사홍의 아버지인 까닭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뒷날의 사관은 그를 성질이 음침하고 교활하며 탐심 많고 간사한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정인지(鄭麟趾: 1396∼1478)는 어머니가 기이한 꿈을 꾼 후 그를 낳았는데, 5세에 책을 읽을 줄 알아 눈만 스치면 곧 암송하고 글도 잘 지은 신동이었다. 그는 태종 14년(1414)에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여 나중에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조선시대 최고의 신동을 꼽자면 율곡 이이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율곡을 잉태할 때 꿈에 동해 바다에 나갔더니 한 선녀가 옥동자를 안고 있다가 자기 품에 안겨주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또 태어나기 전날 밤 사임당은 큰 바다에서 흑룡이 날아와 침실의 처마 밑에 서리고 있는 꿈을 꾸고서 깨어나 율곡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율곡을 낳은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고, 율곡의 아이 시절 이름이 ‘현룡(見龍)’이었다.

율곡의 천재성은 어려서부터 빛나기 시작했다. 세 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외할머니가 석류를 가지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옛 사람이 쓴 시의

“은행 껍질은 푸른 옥구슬을 머금었고, 석류 껍질은 부서진 붉은 진주를 싸고 있네”

라는 시귀를 인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일곱 살 때에 이미 경서에 통달했고, 학문을 하면서 문장 공부에 힘쓰지 않았는데도 일찍이 글을 잘 지어 사방에 이름이 알려졌다. 여덟 살 때는 고향 마을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 ‘화석정(花石亭)’이란 시를 지었고, 열 살 때에는 강릉 경포의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다.

13세가 되던 명종 3년(1548)에 서울에서 진사 초시에 해당하는 진사해(進士解)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율곡이 어린 나이에 급제한 것이 기특하여 승정원에서 불러보니 동년배의 다른 급제자는 자못 뽐내는 태도를 보였으나 율곡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어 그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한다.

율곡은 23살이 되던 명종 13년(1558) 겨울에 문과 별시 초시에 장원급제했는데, 당시 고관(考官: 시험관)이었던 정사룡 등은 그의 2,500여 자에 달하는 답안지 「천도책(天道策)」을 보고 놀라

“우리들은 여러 날 애써서 생각하던 끝에 비로소 이 문제를 구상해냈는데, 이모(李某)는 짧은 시간에 쓴 대책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천재이다.”

고 말하였다. 율곡의 「천도책」은 당시의 학계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후일 명나라에까지 알려졌다. 뒷날(1582년) 율곡이 원접사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사신이 율곡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천도책」을 지은 분이냐”

고 물었다는 것으로 보아, 율곡의 명성은 이미 그 당시 중국의 학계에까지 널리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율곡은 문과 별시의 최종 시험에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율곡은 아버지 삼년상을 치른 후, 29세 되던 해인 명종 19년(1564)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같은 해 식년문과에도 급제했다. 생원과 진사시는 초시와 복시에서 장원하고, 문과시험에서는 초시, 복시, 전시에 모두 장원하여 일곱 번 장원을 차지하였다. 여기에다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23세에 별시 초시에 장원한 것을 합치면 아홉 번 장원을 한 셈이다. 한 사람이 아홉 번 장원을 차지한 것은 역사상 길이 남을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요즘이라면 기네스북에 오를 경이로운 기록이다. 이렇게 연이어 장원으로 뽑히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는데,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면 아이들까지 ‘구도장원공’이 지나간다면서 우러러보았다고 한다. 율곡이 여러 차례 장원한 것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명종은 그를 대궐로 불러들여 ‘석갈등용문(釋褐登龍文: 갈옷을 벗고 용이 되어 출세하다)’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했다고 한다.

율곡은 왜 문묘에서 쫓겨날 뻔했을까


율곡은 왜 문묘에서 쫓겨날 뻔했을까

 

선왕조는 공자를 받드는 유교의 나라이자 지식인의 나라였다. 건국 이듬해에 문묘(文廟), 즉 공자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그 6년 뒤에는 국립대학인 성균관을 열어 유생을 길러 냈다. 지금의 성균관대 명륜동 캠퍼스 안에 있는 성균관 대성전(사적 143호)이 조선의 문묘다.

원래 문묘는 유교의 성인(聖人)인 공자를 모시는 사당으로, 조선에선 유학과 주자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현인(賢人)들의 위패를 모셔놓았다. 이 때문에 문묘에 종사된다는 것은 조선 모든 유학자들이 한번쯤 꿈꿔봤을 소원이 되었다. 문묘에 종사된다는 것은 자신의 학문과 삶이 완벽히 유학적이었으며, 또한 이후 여러 후학들의 모범이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묘 종사란 유학적 삶의 가장 화려한 종착점이기도 했을 것이다.

문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이었기 때문에 문묘종사의 기준은 당연히 공자의 도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얼마나 공헌했느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 조선시대에 문묘종사가 도학의 실천과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명분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 그 명분 뒤에 숨겨진 실리는 단순히 도학 내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문묘에 종사되는 일은 학문이나 도학의 문제를 넘어 정치의 문제였고, 권력의 문제였다.

1575년(선조 8) 동서분당 이후 조선의 정치는 붕당정치였다. 처음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졌던 것이 동인에서 남인․북인으로, 서인에서 노론․소론으로 나뉘어졌다. 특이한 점은 학문과 정치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자신이 퇴계의 문하였다면 퇴계의 문인이나 그를 종주로 삼는 학파들로 구성되어 있는 동인에 자연스럽게 속하게 된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퇴계를 문묘에 종사한다는 것은 곧 퇴계의 학문이 올바름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자신과 자신이 속한 붕당의 정당성이나 정치적 위신도 덩달아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문묘종사 논쟁은 정치권력 투쟁과 교묘히 연관되어 있다.

문묘에 종사된 18명의 우리나라 선현 가운데 종사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인물은 이이와 성혼이었다. 이이를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이었다. 2년 후인 1625년부터는 이이와 성혼을 함께 종사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두 사람이 문묘에 종사된 것은 1682년(숙종 8)이었으니, 자그마치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다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가 완결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6년 뒤인 1689년(숙종 15)에 문묘에서 출향(黜享: 위판을 퇴출하고 제사에서 제외하는 일)되었다가, 1694년(숙종 20)에 다시 종사되는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가 누구인가?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의 성리학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세계에서도 드물게 화폐에도 등장하는 학자가 아닌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율곡 이이가 무슨 이유로 문묘에 종사되기까지 숱한 논란을 겪었고, 한 번 문묘에서 쫓겨나는 수모까지 겪게 되었을까?

1623년 3월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시절에 정권을 잡았던 북인, 그 가운데서도 대북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인조반정을 추진했던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는 서인이면서 학통으로는 율곡학파 계열이었다. 이귀는 이이의 제자임을 자처했고, 신경진도 이이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 김류는 이항복․성혼의 문인이며, 이시백은 성혼과 김장생의 문인이다. 반정 세력의 정신적 후원자를 자임했던 김장생은 이이의 수제자였다.

이이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은 인조가 왕위에 오른 지 13일 만인 1623년(인조 원년) 3월 27일에 제기됐다. 이날 아침 경연에서 유순익이 이이를 문묘에 종사하자고 제안했고, 이어서 민성징․이민구․유백중 등이 그의 문묘 종사가 공론이라는 이유를 들어 윤허할 것을 청했다. 이렇듯 반정이 일어난 지 보름도 안 되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굳이 이이의 문묘 종사를 들고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이이의 문묘 종사가 시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천리를 멸하고 인륜을 무너뜨려 위로는 종묘사직에 죄를 짓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었다.”

는 것이었다. 주자학적 가치에서 볼 때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한 것은 천륜을 어긴 것이다. 또한 명나라에 등을 돌린 것 역시 당시 주자학자들의 의식 속에서는 의리와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광해군이 명의 구원 요청을 사실상 거부하고 후금과 적절한 관계를 모색한 것은 오랫동안 유지돼왔던, 명을 중심에 둔 중화질서 체제를 깨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노쇠한 명 대신 후금(훗날 청)이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던 시기에 여전히 명과의 의리를 강조하고 명의 은혜를 운운하는 것은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은 언제나 주판알만 튀겨서 해결할 수는 없다. 때로는 커다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해야 할 일이 있다. 당시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은 국제관계에서 나라의 이익 못지않게 나라 사이의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렇게 보면 광해군이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한 것과 후금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모색한 것 등은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러한 명분은 반정 자체를 정당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서인의 집권까지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대북의 대안이 꼭 서인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인 세력으로서는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해줄 다른 명분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유순익이 지금은 눈을 씻고 새롭게 변화해야 할 때라면서 이이의 문묘 종사를 청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인조는 이이의 문묘 종사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권력이 서인들에게 지나치게 집중될 경우에 그것이 가져올 폐단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이의 문묘 종사는 그의 문인들을 비롯한 서인들의 의견일 뿐 공론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이이와 성혼을 함께 문묘에 종사하자는 공식적인 주장은 1625년(인조 3) 2월 오첨 등 40명의 해주 유생들에 의해서 처음 제기됐다. 이때 성균관 유생들도 두 선현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하려고 했으나 영남 유생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성균관 유생들이 대대적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한 것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1635년(인조 13)에 와서다. 이 해 5월 관학 유생 송시형 등 270여 명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는 상소를 했다.

송시형 등은 이이와 성혼이 이황을 이어 유림의 종장이 됐고, 특히 주자학 이론을 발전시켜 우리나라 이학의 이론을 완성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실 이 상소는 당시 율곡학파의 영수이던 김집이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로서 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율곡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여 송시열․송준길 등에게 전한 인물이다. 당시 성균관 유생들 사이에서는 이이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인가, 아니면 이이와 성혼을 함께 문묘에 종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그래서 그들은 김집에게 문의를 했고, 결국 그의 견해에 따라 두 선현의 문묘 종사를 함께 추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남인들은 이이와 성혼을 사림의 종장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남인 계열의 성균관 유생들은 두 학자의 문묘 종사를 반대해 서인 계열 유생들과 갈등을 빚었고, 마침내 채진후 등 50여 명이 성균관을 나와 동학(東學)에 자리를 잡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기에 이르렀다.
남인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려는 서인 측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1635년 6월 19일에는 황해도 생원 윤홍민 등 48명, 파주 유생 유응태 등 36명, 경기 유생 신희도 등 33명, 그리고 평안도 유생 홍선 등 33명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했다. 뿐만 아니라 사학 유생 윤숙거 등 140여 명이 상소를 올렸고, 그 뒤에도 개성 유생 고형 등 50명, 풍덕 유생 최시달 등 15명, 전라도 유생 김시길 등 195명, 충청도 유생 민여기 등 50명이 잇달아 상소를 올렸다. 다음해인 1636년(인조 14) 10월에도 진사 윤성 등 수백 명이 상소를 올려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세 번에 걸쳐 주청했다.

이에 대해 인조는 한결같이 문묘 종사의 문제는 함부로 논할 수 없다는 답변을 내렸다. 특히 홍선 등에 대해서는

“몸을 수양하고 글을 읽는 일이 곧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다. 알지도 못하는 일을 굳이 논하여 남의 비웃음을 사는 일은 하지 말라”

고까지 했다. 『인조실록』에서는

“이때 지방 유생들의 상소는 모두 관학 유생들이 선동하여 꾄 것이라고 하는 유언비어가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답변이 이와 같았다”

고 하였다.
이때 남인들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채진후의 상소를 보면

“비록 두 신하의 학술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지만”

이라고 해 이이와 성혼의 학문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비켜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이의 문장과 학문은 한때의 명신이 되기에 족하니 어진 관리라고 부를 수 있다”

고 해 이이의 학문을 높게 평가했으나, 문묘에 종사하기에는 출처가 바르지 않다는 비판이 있다고도 주장했다. 여기서 이이의 출처가 바르지 않다는 것은 그가 한때 불교를 공부한 적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혼에 대해서는

“이이보다 (학문이) 한참 아래이고 또 간흉과 한 무리가 된 실상과 임금을 버린 행적은 모든 사람들이 눈으로 본 것”

이라며 문묘에 종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성혼에 대해 문제 삼은 것은 기축옥사 때 정철과 한 패가 되어 최영경 등 죄 없는 선비들을 죽였다는 것과 임진왜란 때 피난길에 나선 임금을 제때에 모시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는 효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극심한 갈등을 야기했다. 서인 계열의 태학생 홍위 등 수백 명은 효종 즉위년(1649) 11월 23일을 비롯해 수차례에 걸쳐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효종의 답변은

“문묘 종사는 막중하고 막대한 전례여서 경솔하게 논의하기 어렵다”

는 것이었다.

남인 측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효종 1년(1650) 2월에 진사 유직을 대표로 한 영남 유생 900여 명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 900여 명이나 참여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남인들의 의지가 확고했음을 말해준다.
성균관에서도 서인 계열 유생 사이의 불신과 반목은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을 보듯이 했다고 할 정도로 심각했다. 서인 재임(齋任: 성균관의 유생으로서 그 안의 일을 맡아보던 임원)들은 처음에 이상진․유직 등 8명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했다가 다시 논의해 4명을 구제했으나, 도리어 유직에게만큼은 부황(付黃)의 유벌(儒罰)을 추가했다. 부황은 지목된 사람의 이름을 누런색 종이에 써서 북에 붙이고 그 북을 치면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벌이다. 이는 죄상을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시행된 유림 자체의 처벌로소 유생들에게는 최고의 수치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남인 계열 유생 50여 명은

“하찮은 과거를 위해 구차스럽게 성균관에 남아 있을 수 없다.”

고 하면서 퇴거했다.
이 문제에 대해 영의정 이경여는 유직이 선현을 모함했기 때문에 유적에서 삭제하는 것은 당연하므로 유직의 삭적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해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효종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유직에게 내린 부황의 처벌을 풀도록 분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인 계열 유생들이 이에 반발하여 임금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효종은

“피차의 유생들이 한결같이 명령을 어기고 있는데, 이들은 유독 이 나라 안에 살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알바 아니다.”

라는 반응을 보였다. 나라 안에 살지 않는다는 것은 이 나라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알 바 아니라는 것은 나는 그들을 이 나라 백성으로 인정할 수 없으므로 그들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격한 감정이 실린 발언이었다.
하지만 순순히 물러설 학생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라 안에 살지 않는 자는 또한 교화를 벗어난 일개 난민일 뿐입니다. 이런 죄명을 지고 무슨 얼굴로 다시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라며 공관(空館: 성균관 유생들이 관(館)을 비우고 물러나가던 일)을 풀지 않았다. 이 문제는 결국 효종으로부터 잘못했다는 사과를 이끌어내고 학생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감으로써 일단락되었지만, 효종은 끝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현종이 즉위하자 서인들은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을 다시 추진했다. 현종 즉위년(1659) 12월에는 관학 유생 윤항 등이 다섯 차례에 걸쳐 두 선현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부제학 유계 등도 같은 내용의 차자를 올렸다. 효종 3년에는 김포 진사 이영원을 비롯해 강원도․평안도․함경도․충청도․전라도 유생들이 연이어 문묘 종사를 청했다. 이렇듯 두 선현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은 현종 재위 15년 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반복됐지만, 인조․효종과 마찬가지로 현종도 일관되게 거부했다. 역시 서인들의 위상이 강화돼 권력이 서인들에게 더욱 집중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한편 현종대에 벌어진 두 차례의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서인 세력은 급격히 위축됐고 마침내 숙종이 즉위한 직후 남인 정권이 출범했다. 인조반정 이후 실로 50여 년 만에 있었던 정권 교체였다. 이를 흔히 갑인환국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680년(숙종 6) 이른바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부터다. 이 해 8월 황해도 생원 윤하주 등이 3차례에 걸쳐 두 사람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했다. 이 해 8월 황해도 생원 윤하주 등이 3차례에 걸쳐 두 사람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했다. 이어서 1681년(숙종 7) 9월에는 이연보 등 관학의 팔도 유생 500여 명이 두 선현의 문묘 종사를 청했다.
결국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이 현실화된 것은 바로 이 해(1681년)였다. 숙종은 9월 19일 이연보 등이 전날에 이어 재차 상소를 하자 드디어 담당판서와 대신들에게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양현(兩賢)의 도덕과 학문은 실로 한 세대에서 우러러 사모하여 사림의 모범이 되니, 문묘에 종사하는 것을 대체로 누가 불가하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대대의 조정에서 일찍이 윤허하지 않았던 것과 내가 과단성 있게 처리하지 못하고 미루었던 것은 모두 신중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인사들의 주청이 오래도록 계속되었고, 또한 간절해서 끝내 억지로 어기기 어려우니, 그것을 해당 관서로 하여금 대신에게 묻도록 하여 특별히 오현을 종사하는 청을 윤허할 수 있도록 하라.

숙종실록』권12, 숙종 7년(1681) 9월 19일 무진조

이날 대신 김수항․김수흥․정지화․민정중․이상진이 모두 종사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견을 개진하자 숙종은 우리나라의 두 선현과 송나라의 세 선현(양시․나종언․이동)의 문묘 종사를 허락했다. 이이와 성혼이 실제로 문묘에 종사된 것은 그 이듬해(1682년) 5월 20일이었다. 이로써 60년 가까이 끌어오던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가 완전히 매듭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잠시 동안 이기는 하지만, 그 두 사람은 문묘에서 쫓겨났다 다시 종사되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은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취소하고 그 두 사람의 위패를 문묘에서 철거했다. 물론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종사되긴 했지만, 이이와 성혼이 살아서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는 인조 즉위 이래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사안 가운데 하나였다. 인조반정의 주도 세력인 서인들의 학통이 그 두 학자로 소급되기 때문에, 그들의 문묘 종사는 곧 서인들에게 학통의 권위를 부여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남인에게는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던 학통의 권위마저 위협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서인들에 의해 추진된 두 학자의 문묘 종사가 남인들의 반대와 여러 대에 걸친 임금의 견제로 쉽사리 실현될 수 없었고, 게다가 출향과 복향을 겪어야만 했던 데는 이 같은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율곡,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기 어려움을 말하다

 


율곡,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기 어려움을 말하다

 

선시대에는 조정에서 총명한 문신들을 선발하여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여가를 주는 제도로서 이른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시행하였다. 이 제도는 1426년(세종 8)에 처음 실시되었는데 이때에는 독서하는 장소를 자택으로 한정했기 때문에 독서에 전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진관사(津寬寺 :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소재의 사찰)를 독서의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학자들이기도 한 문신들이 사찰에 머물면서 독서와 연구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1492년(성종 23)에 마포에 남호독서당을 설치했으나 갑자사화의 여파로 폐쇄되고 말았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1517년(중종 12) 봄에 대사헌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자연 풍광이 뛰어난 두모포(豆毛浦)에 정자를 짓고 동호독서당을 두었다. 동호(東湖)는 ‘동쪽의 호수’라는 뜻이지만 사실은 한강의 동쪽, 현재 서울 성동구 옥수동과 압구정동 사이를 흐르는 한강을 가리킨다. 강이지만 마치 호수처럼 넓기 때문에 호수라고 한 것이다.

이 동호독서당은 이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질 때까지 75년 동안 조선 학문 연구의 주요 산실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동호독서당은 독서당의 역사상 가장 활발한 역할을 하였던 중종에서 선조 시기의 독서당이다.
역대 왕들은 젊고 능력이 출중한 문신, 학자, 관료들을 이곳에 보내어 재충전의 기회를 갖도록 했다. 지금의 안식년 제도와 매우 유사하다. 독서당에 궁중 음식 전담기관인 태관(太官)에서 만든 음식이 끊이지 않고, 임금이 명마와 옥으로 장식한 수레, 안장을 하사했음에서 국왕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율곡이 독서당에 들어간 해는 1569년(선조 2)으로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였다. 『율곡전서』「연보」에 따르면, 율곡이 실제 독서당 입당 명을 받은 때는 서른셋 되던 해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였다. 그러나 이때 독서당에 들어갔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해 11월에 이조좌랑으로 제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외조모 이씨의 와병 소식에 사직소를 올리고 시병(侍病: 병자의 곁에 있으면서 시중을 듦)을 하기 위해 강릉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569년 6월에 홍문관 교리에 제수된 율곡은 같은 해 9월에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올렸다. 이는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월과(月課)로 지어서 올리는 글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종의 ‘사가독서 보고서’였다. 따라서 율곡은 6월에서 9월 사이의 어느 때에 동호독서당에서 독서하며 연구한 것을 발표한 셈이다.

손님이 물었다.

“삼대 이후로 다시 왕도를 행한 자가 없는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주인이 슬프게 탄식하며 대답했다.

“도학이 밝혀지지 못하고 행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나라 이후로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도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단지 머리로만 천하를 파악해서, 의미 없이 세월만 보내고, 임시방편으로 끌어다가 날을 보내니 수천 년도 다만 하룻밤처럼 지나갔을 뿐입니다. 정자(程子)께서 주공이 죽고 백세 동안 제대로 다스린 자가 없다고 하셨으니 정말로 그렇습니다.”

손님이 물었다.

“한나라 이후로 글을 읽은 자가 없지는 않습니다. 이른바 도학(道學)은 어떤 학문입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비루하군요. 선생의 말씀이! 도학이라는 것은 격치(格致: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앎에 이름)로써 선을 밝히고 성정(誠正)으로써 몸을 닦으며, 몸에 쌓으면 천덕(天德: 하늘의 덕)이 되고 정사에 시행하면 왕도가 됩니다. 저 독서라는 것은 격물치지 가운데 한 가지일 뿐입니다. 책을 읽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말만 잘하는 앵무새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양나라 원제(508∼554)가 만 권의 책을 읽었지만 마침내 위나라의 포로가 되었으니, 이 역시 도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손님이 물었다.

“삼대 이후로 도학을 행하는 임금이 끊어져 없다고 할지라도 어찌하여 도학을 행한 선비조차 없습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어찌 그런 사람이 없겠습니까? 다만 군주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선비들의 우활함을 의심하여 천직(天職: 타고난 직업이나 직분)을 함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학을 행하는 선비를 진유(眞儒: 유학의 정도를 지키는 참된 선비)라고 합니다. 맹자 이후에 진유가 나타나지 않았다가 천 년 뒤에 비로소 주렴계가 은미한 것을 밝히고 깊은 뜻을 드러내 정자와 주자를 계승하였습니다. 이후에 이 도가 세상에 크게 밝혀졌으니 하늘에 해가 높이 뜬 것과 같았습니다. 다만 송나라의 임금이 도학을 알지 못해 대현(大賢)을 낮은 관직에 머물게 하여 백성이 그 은혜를 입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손님이 물었다.
“한․당 이후로 영민하고 총명하며 능력이 있는 임금이 없지 않은데 어째서 모두 진유를 알아보지 못했겠습니까? 다만 서로 만나지 못하였을 뿐이 아닙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후세의 임금 가운데 누가 진유를 등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선생이 이를 알려주십시오.”

손님이 물었다.

“한나라 고조는 어떻습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군자는 반드시 임금이 공경을 지극히 하고 예를 다하길 기다린 이후에야 나아가는데, 저 한나라 고조는 본래 게으르고 무례하며 그가 부리는 사람들도 모두 부귀공명에 뜻을 둔 자들일 뿐입니다. 진유가 어찌 거세(踞洗: 왕포가 명을 받들어 한나라 고조를 만나러 갔으나 고조가 걸터앉아 여자들이 발을 씻게 하면서 그를 맞이한 사실을 말함)의 치욕을 즐기어 스스로 한신(韓信)이나 왕포의 대열에 몸을 섞겠습니까?”

손님이 물었다.

“문제는 어떻습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문제는 자포자기한 임금입니다.”

손님이 크게 놀라 물었다.

“문제는 천하의 어진 임금입니다. 자포자기했다고 하시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삼대 이후에 천하의 현군이 진실로 문제와 같은 사람은 없었으나 다만 지향(志向)이 비루하고 천박해서 옛 도를 반드시 회복할 수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편안하고 조용한 것에 안주하고 근근이 백성을 기르기만 하였으니 옛 도를 회복하지 못한 것이 문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문제와 같은 사람은 끝내 요순의 도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자포자기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비록 진유를 만났더라도 반드시 등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손님이 물었다.

“그렇다면 무제는 어떻습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무제는 속으로는 욕심이 많았으나 겉으로는 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 인의라 말하는 것이 모두 허문(虛文)을 숭상하여 아름답게 보이게만 할 뿐이니 성심으로 도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동중서와 급암과 같은 사람도 마침내 등용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진유를 등용할 수 있었겠습니까?”

손님이 물었다.

“광무제는 어떻습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광무제는 그릇이 고조에 미치지 못합니다. 자기 멋대로 행하는 데만 힘쓰고 삼공에게 정사를 맡기지 않았으니 그가 진유에게 성공적으로 정사를 이끌기를 바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손님이 물었다.

“명제는 어떻습니까?”

주인이 말하였다.

“명제는 지나치게 꼼꼼하여 임금의 도량이 없었습니다. 벽옹(辟雍: 주나라 때 천자가 도성에 건립한 대학)에 가서 삼로에게 예를 행하는데 다만 형식적일 뿐이니 어찌 이른바 진유를 알겠습니까. 하물며 호교(胡敎: 불교)를 처음으로 숭상하여 만세토록 끝없는 근심을 열어놓았으니, 이 사람이 어찌 유능한 임금이겠습니까?”

손님이 물었다.

“당 태종은 어떻습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태종은 아버지를 위협하고 병사를 일으켜 형을 죽이고 제위를 빼앗았으며 동생의 처에게 음행을 하였으니 개, 돼지와 같습니다. 태종이 비록 진유를 등용하고자 하여도 진유가 어찌 태종의 신하가 되고자 했겠습니까?”

손님이 물었다.

“송 태조는 어떻습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태조는 주나라 세종의 총신으로 진교의 변이 닥치자 끝내 찬탈을 행한 신하가 되었으니 진유라면 반드시 실망하여 떠났을 것입니다.”

손님이 놀라 물었다.

“진실로 선생의 말과 같다면 진유는 끝내 세상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입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만약 진유가 소열제를 만났다면 그 뜻을 약간이나마 펼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소열제가 제갈공명을 세 번 방문하였을 때 공명은 신분이 낮고 나이가 적었으며, 소열제는 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았습니다. 공명에 대해서 다만 그 이름만을 들었을 뿐 깊이 알지 못하였으나 매우 부지런하고 정성스럽게 두 번 세 번 찾아갔으니 현인을 좋아하는 정성이 아니면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공명을 진유로 여기고 반드시 공경하고 믿었던 것이니, 저는 후세의 임금으로는 오직 소열제만이 거의 진유를 등용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유능한 임금은 반드시 공경하고 믿는 신화가 있으니 서로 친한 것이 부자와 같고, 서로 뜻이 맞는 것이 물과 물고기와 같고, 서로 조화로운 것이 궁상(宮商: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서로 마음이 맞듯이 소리 또는 시문의 운율이 아주 우아하고 정교하게 나는 것)과 같고, 서로 합쳐지는 것이 계부(契符: 부신(符信) 또는 부절)와 같은 이후에야 말은 쓰이지 않은 것이 없고, 도는 행해지지 않은 것이 없고, 일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요가 순을, 순이 우․고요를, 탕이 이윤을, 무정이 부열을, 문왕이 태공을 대하는 것과 같은 예가 이런 경우입니다. 또한 이에는 미치지 못하나 다음이 될 수 있는 사례가 제갈량에 대한 소열의 행위일 것입니다. 후세의 군신들은 모두 이런 사례에 미칠 수 없습니다.”
손님이 물었다.

“부견(苻堅: 5호16국시대 전진의 3대 임금)이 왕맹에 대한 관계와 당 태종이 위징에 대한 관계 또한 서로 잘 만났다고 이를 만하나 제가 헤아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제가 서로 잘 만났다고 말한 것은 올바름으로써 서로 믿은 경우에 해당합니다. 저 부견은 오랑캐의 추장으로서 용렬한 인물 가운데 조금 나은 편이고, 왕맹이 짜낸 책략의 공으로도 한 세대조차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입에 담을 만하겠습니까? 태종은 명예를 좋아하는 군주이고, 위징도 명예를 좋아하는 신하입니다. 비록 서로 잘 만나 한 세대를 다스린 것 같았으나 살아서는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았고, 죽어서는 비를 넘어뜨리는 수모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 어찌 마음으로 기뻐하고 정성으로 믿은 것이겠습니까!”

천재일우(千載一遇)’란 고사성어가 있다. 말 그대로 천 년이 지나야 한 번 만날까 말까 한다는 말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며 하늘이 준 기회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이 말은 동진(東晉)의 원굉(袁宏)이 쓴 「삼국명신서찬(三國名臣序贊)」에 나오는 말로

“백락(伯樂:춘추시대 진나라의 정치가로 말을 잘 감정하는 것으로 유명함)을 만나지 못하면 천 년을 가도 천리마 하나 생겨나지 않는다.”

고 하면서 훌륭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기 어려운 것을 비유하였다.

율곡 또한 『동호문답』에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기 어려움을 논하고 있는데, 우선 먼저 왕도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를 도학인 성리학이 밝혀지지 않은 데서 찾았다. 즉 삼대 이후에 왕도를 행한 임금이 없기 때문에 도학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어서 율곡은 왕도를 행한 임금이 없었기에 도를 행하는 선비, 곧 진유가 임금에게 나아가지 않았다고 하였다.
율곡은 이렇게 제대로 된 임금과 신하가 만나기 어려움을 지적하면서도 궁극적인 책임을 군주에게 물었다. 한나라 고조와 문제, 무제, 후한의 광무제, 명제, 당 태종, 송 태조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사실 율곡이 예로 든 황제들은 그 공으로 따졌을 때에는 중국 역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들이다. 적어도 총명함과 능력 면에서 다른 임금들보다는 월등했다. 그럼에도 율곡은 이들을 제대로 된 신하를 등용하지 못한 임금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한 고조는 게으르고 무례하며, 부리던 신하들조차 모두 부귀공명에나 뜻을 두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더구나 신하에게 수치스러운 행위를 강요하거나 신하를 예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유를 만날 수 없었다고 보았다. 심지어 일반적으로 현군(賢君)으로 평가받는 한 문제도 현실에 안주하여 백성을 안정시키는 정도에 그쳤을 뿐 건설적인 이상향을 추구할 의지가 없는 비루한 군주로 보았다.
한 무제는 한 제국의 전성기를 이룩한 황제다. 그러나 율곡의 평가는 냉정하였다. 인의를 베풀었지만 성심으로 도를 믿은 것이 아니라 허례를 숭상한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후한의 창시자 광무제에 대해서도 그가 한 고조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하며, 자기 멋대로 행하고 삼공에게 정사를 맡기지 않았던 한계를 지적하였다. 당 태종이나 송 태조도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단점을 지적하여 진유가 결국 가까이할 수 없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진유는 끝내 세상에 용납될 수 없었을까? 이 질문에 율곡은 삼국시대 촉한의 유비를 예로 들었다. 유비가 평가받을 수 있었던 이유로 높은 지위에 있었고 나이도 많았지만 몸소 제갈공명을 찾아간 점을 들었다. 즉 공경스럽고 믿을 만한 신하가 있더라도 유능한 임금과 짝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했던 것이다.

결국 율곡은 군주와 신하가 만나기 어려운 이유는 그 책임이 군주에게 있는데, 군주가 믿을 만한 신하를 등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현명한 신하를 등용하는 용현(用賢)의 문제는 율곡이 치인 또는 경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로, 국왕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를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곧 임금과 신하의 올바른 만남의 출발임을 지적한 것이다.

율곡과 진복창


율곡과 진복창

 

율곡전서』권33 연보(年譜)에 의하면, 율곡의 나이 일곱 살 때인 1542년(중종 37)에 「진복창전(陳復昌傳)」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율곡은 진복창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군자는 마음속에 덕을 쌓는 까닭에 그 마음이 늘 태연하고, 소인은 마음속에 욕심을 쌓는 까닭에 그 마음이 늘 불안하다. 내가 진복창의 사람됨을 보니, 속으로는 불평불만을 품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려고 한다. 그 사람이 뜻을 얻게 된다면 나중에 닥칠 걱정이 어찌 한이 있으랴.”

일곱 살의 어린 율곡은 마침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던 진복창의 사람됨을 꿰뚫어 보고 이에 대한 글을 남겼던 것이다. 도대체 진복창이 어떤 인물이기에 일곱 살짜리 소년이 그에 대한 약전(略傳)을 쓰고 그 인물됨을 이렇게 평한 것일까?

진복창에 관한 첫 번째 『조선왕조실록』기록은 1535년(중종 30년) 별시문과 갑과에서 장원급제를 해 성균관 전적(정6품)에 제수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 정자·전적을 지내는 등 중앙관직을 역임했으며, 이어 부평부사를 지냈다.

관직생활 10년째이던 1545년(명종 원년) 외직인 부평부사에 있다가 정4품 사헌부 장령으로 중앙정계에 복귀했다. 이때 사관들은 그의 인격을 두고

“사람됨이 경망하고 사독(사악하고 독함)하다”

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이후 그의 행적을 미리 보여주는 듯한 기록이다.
그 때문인지 중종 말년까지 진복창은 외직을 떠돌며 이렇다 할 중앙 관직을 얻지 못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율곡이 「진복창전」을 썼던 것은 이 무렵의 일로 보인다. 문과에 장원급제까지 했던 진복창이 경망스러운 사람됨으로 인해 배척당하게 되자 율곡을 일깨우는 차원에서 어른들이 언급했던 것 같고, 율곡은 군자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하는 차원에서 진복창에 관한 약전을 쓴 것으로 보인다.

중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한 직후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대리청정을 하고 외삼촌 윤원형이 실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이 이끄는 대윤 세력을 제거하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잠재적인 반대 세력인 사림을 중앙 정계에서 대거 축출했다. 이때 진복창은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원형의 수하로 활동하며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여러 관료들을 탄핵하고 몰아내 죽였다. 진복창의 눈에 걸리면 그 집안의 어린아이까지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사관들로부터 ‘독사(毒蛇)’라고 불렸다.

실제로 명종 때 진복창이 보인 행적을 추적해 보면 ‘독사’라는 별명도 칭찬에 가까울 정도다. 을사사화 직후인 1545년에 진복창은 부평부사라는 외직에 있다가 다시 사헌부장령을 맡아 중앙 정계로 복귀했다. 이후 그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요직을 오가며 정적을 무자비하게 탄핵하고 퇴출시켰다. 그의 뒤에는 윤원형이라는 당대 실세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후 그는 홍문관 응교를 거쳐 1548년(명종 3년) 2월 3일, 사간원의 영수인 대사간에 올랐다. 당시 사관은 이를 두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복창은 권간(權奸) 이기의 심복이 되어 그들의 지시에 따라 선한 사람을 마구 공격하였는데 그를 언론의 최고책임자로 두었으니 국사(國事)가 한심스럽다.”

처음에는 권력가였던 이기의 수하에 서서 반대파를 탄핵하고 공격함으로서 자신의 권력욕을 충족시키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을사사화가 성공하면서 권력의 축에 들어가 득세했던 이기의 아래에 몸을 맡기고 있다가, 윤원형이 이기를 몰아내려하자 얼른 이기에게서 등을 돌려 그의 등에 칼을 꽂게 된다.
그가 대사간에 오른 1548년 4월 19일, 대사헌 구수담이 좌의정 이기를 탄핵하고 나서자, 구수담의 편을 들어 이기를 탄핵함으로서 보기 좋게 이기를 배신했다. 구수담은 사림으로 내외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고, 진복창도 구수담에게 학문을 배운 바 있다. 이 때 대사간인 진복창도 구수담을 거들고 나섰다. 한때는 이기에게 빌붙어 영화를 누렸지만 이기가 윤원형의 견제를 받게 되자 미련 없이 배반한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구수담이 유배를 당하면서 잠잠해지나 했던 여론은 이기에게 등을 돌려 그를 공격했고, 진복창은 그 가운데서 이기를 비난하는데 열을 올렸다. 결국 1552년 이기는 실각하게 되고, 조정의 중심 권력은 드디어 윤원형의 것이 된다. 윤원형이 조정의 모든 실세를 장악하자 이기에게 충성을 바치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철저히 윤원형의 심복으로 행세하며 윤원형과 자신의 정적들을 계속 몰아냈다.
한편, 진복창은 1549년(명종 4년) 5월에 홍문관 부제학에서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에 올랐다. 조정 관리들의 목숨 줄을 틀어쥐는 자리에 오르자, 몇 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리는 등 명종의 눈에 강직한 사람으로 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렇게 임금의 신뢰를 받게 되자 그 자만은 극에 달했다.

진복창이 이기를 배반한 것은 서곡에 불과했다. 원래 진복창이 맨 처음 장령이 될 때 힘써 추천한 이는 훗날 을사사화에서 공을 세우게 되는 허자라는 인물이었다. 허자는 정순봉, 임백령과 함께 1등 공신이었고 윤원형은 2등 공신이었다. 그런데 대사헌에 올라 실세로 떠오른 진복창은 이조판서인 허자도 우습게 알았다. 결국 진복창은 허자를 제거하는 데 앞장선다.

진복창의 권력욕은 그칠 줄 몰랐다. 당시 병조판서 이준경은 윤원형도 함부로 못할 만큼 내외에서 큰 신망을 얻은 인물이었다. 마침 집도 가까워서 진복창은 이준경과 친해지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한번은 이준경의 친척인 이사증이 잔치를 베풀었는데, 진복창이 이준경의 곁에 앉게 되었다. 이때 진복창은 술에 취해 이준경에게

“왜 구수담이 나를 저버렸는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준경과 구수담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 이날 잔치에 구수담의 며느리집 여종이 일을 거들기 위해 왔다가 진복창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구수담에게 전하였다.

이에 구수담은

“조만간 나에게 큰 화가 닥칠 것”

이라고 걱정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수담은 진복창의 모함에 걸려 목숨을 잃게 된다.

게다가 뒤늦게 구수담이 자신이 한 말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전해들은 진복창은 이준경이 그 말을 흘린 것으로 단정하고 이준경까지 미워하게 되어 결국 이준경도 형 이윤경과 함께 일시적이나마 병조판서에서 쫓겨나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진복창이 대사헌이 되려고 실력자를 찾아다니며 로비하던 중 개성유수로 있던 강직한 성품의 송순이

“진복창은 시시한 자로 조정을 시끄럽게 하니 미리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며 먼저 대사헌이 된 적이 있다. 그것을 진복창이 모를 리 없었다. 결국 송순은 진복창에게 대사헌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이렇게 배신의 일로를 걷게 되자 그에 대한 악평은 늘어만 갔다. 허자를 제외하고 사림의 존경을 받고 있던 네 사람이 진복창의 공작으로 화를 입게 되자 홍문관 직제학 홍담을 비롯한 뜻 있는 젊은 관료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동안 진복창의 손발 노릇을 하던 사헌부, 사간원까지도 돌아섰고, 조정 대신도 진복창을 멀리 내쳐야 한다는 의견을 계속해서 올렸다. 처음 명종은 진복창이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신하라 하며 그 탄핵들을 물리쳤지만, 윤원형은 그를 가만히 놔뒀다가는 자신과 누나 문정왕후의 앞길에 방해가 될 거라고 여겨 그를 험한 변방 삼수로 유배 보냈다.

진복창의 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561년(명종 16), 그의 아들 진극당이 과거에 급제하자 언관들은 진복창을 다시 비난하기 시작했다. 진복창의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사통하다가 진의손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이 진복창이고, 따라서 그의 어머니는 음탕한 여자이며 행실이 방종하기 이를 데 없으며, 진복창과 진극당은 이런 여인의 소생이므로 관직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출신을 둘러싼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결국 진극당의 과거급제는 취소되었으며, 그를 합격시킨 시험관들에게까지 처벌이 미쳤다.

그러나 삼수로 유배 간 진복창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백성의 땅을 빼앗고 공공연하게 뇌물을 요구했으며 집에 형틀까지 설치하여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을 불러다가 곤장을 치곤하였다. 졸개를 30여 명씩이나 거느리고 매사냥을 하기도 했으며, 사람을 때려죽이기까지 했다. 결국 조정에 보고가 올라가 진복창은 가중처벌에 해당하는 가죄(加罪)를 받아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던 일)되었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문과 장원급제자로서는 너무나도 비참한 죽음이었다.

진복창은 오늘날까지도 간신의 오명과 문명(文名)의 두 가지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는 당대에 간신으로 삶을 마쳤지만, 한편으로는 문장에 뛰어난 수재이기도 했다. 역대 제왕의 사적을 노래한 역대가는 그가 귀양 가서 지었다고 전해지는 그의 대표작으로 전체가 전하지는 않지만 『순오지』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실천이 없는 학문은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실천이 없는 학문은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곡이 첫 벼슬살이(호조좌랑)를 시작한 때는 1564년(명종 19) 8월이었다. 이후 율곡은 1567년(명종 22)까지 3년여 동안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다가 선조가 즉위한 다음 해(1568)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초기 관직 생활 동안 조정의 핵심 기구에서 정치와 행정 경험을 쌓은 율곡은 1568년(선조 1)에는 천추사 서장관 자격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외교 경험과 더불어 해외 문물을 접하는 기회까지 누렸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홍문관 부교리, 이조좌랑에 이어 다시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1570년(선조 3) 율곡은 해주 야두촌에 돌아가 학문의 터를 닦으려 하였으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청주목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미 학문의 성취를 이루기 시작하였던 때라 정중한 상소로 다시 사직하고 파주에 돌아와 조선 성리학의 연구에 전념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임금의 주변에 학문과 경륜 높은 인재가 있어야만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는 조정이 건재하게 되고, 백성들은 그 건재한 조정에 의지하여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1574년(선조 7) 율곡은 군왕의 간곡한 소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황해감사로 나가 반 년 남짓 재직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조정과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면서 대사간, 대사헌, 호조판서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동서로 갈라진 정쟁의 갈등이 날로 높아지는 현실에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다.
급기야 1579년(선조 12) 율곡은 통치자의 정신적 해이와 신료들의 무능함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사임을 청한다.

어제 대사간 이이가 사면하고 아뢰었다.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기강이 무너진 것과 민생이 곤궁한 것은 상께서도 이미 다 알고 계실 것이므로 더 진달(進達:윗사람에게 전달함)할 것이 없습니다마는,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성상께서는 이미 마음을 미루어 위임하시려는 뜻이 적으시고 조정 신하들은 또한 담당하여 힘을 다해 보려는 뜻이 모자랍니다.

큰 관원은 유속(流俗:세속. 세상에 유행하는 일반적인 풍습)대로 하는 것만 편하게 여겨 수수방관하며 성패(成敗)를 임의로 놔두고 있고, 작은 관원은 비록 건백(建白:윗사람에게 의견을 말함)하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혹자는 과격하고 혹자는 우활하여 실용에 절실하지 못하여 의논이 가닥만 많고 통일되는 바가 없습니다.

국가의 사세가 날로 글러짐이 마치 물이 더욱 아래로만 내려가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때에는 위로 임금의 허물과 실수를 바로잡음이나 아래로 관원들의 태만과 경솔을 경각시키는 일은 오직 간관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진실로 재주와 성의를 겸비하고 학식과 생각이 탁 트이어 옛것에 얽매이지도 않고 지금의 사태에 현혹되지도 않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소임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조실록』선조 12년 5월 22일 자

선조는 율곡과 같이 학덕이 높고, 성품이 올곧은 신하를 가까이 두기를 원하였다. 때로는 동료 신료들의 무책임을 통박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바로 알려서 치도를 확립하게 하려는 신료들을 가까이에 두고 싶어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바른 말하는 신료들을 탄핵하는 세력들이 공존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선조는 시골로 내려간 율곡을 다시 대사간으로 불렀다. 대사간의 직책은 간쟁을 수습하고 처리하는 막중한 자리다. 그러나 율곡이 올린 사양상소는 칼날과도 같았다.

사간원 대사간의 벼슬로 이이를 부르니 이이가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오지 않고서 상소를 올려 동서의 분당에 대하여 논하면서

“동인이 서인을 공격함이 너무 심하여 억지로 시비를 결정하고자 하니 바라건대 동서의 당론을 타파하고 사류들을 보합케 하여 그들이 한마음으로 나라에 몸 바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상소의 사연이 시사(時事)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이를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와 옥당이 어지럽게 논박하였다.

선조수정실록』선조 7년 1월 1일 자

조선왕조가 개국한지도 어언 2백여 년이 지나 알게 모르게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고, 사회의 여러 면에서 병폐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살았던 율곡은 조선의 사회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다. 당시 퇴계를 비롯한 선학들이 개척하고 다져 놓은 조선 성리학의 학문적 기초를 토대로 그 이상을 현실 사회에 접목하고 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에게는 넘쳐나고 있었다.

또한 선조는 사가(私家)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림 출신이나 다름없었다. 선조는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사림 출신의 스승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그들과 함께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다짐하였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도 그런 쪽으로 성숙되어 있었고, 성리학적 이념으로 의식화된 사림들이 전국에 산재해 있기도 하였다. 선조는 이들을 개혁 세력으로 삼아서 적극 등용한다면 침체된 정계를 개편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 같은 신구 정치 세력의 교체기에 이이가 대표적인 관료학자로 이념 집단인 사림의 정치화를 선도할 적임자라고 선조는 믿었다.

선조에게 율곡의 간곡한 가르침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다면, 율곡은 때를 가리지 아니하고 상소문을 올려 선조의 선정을 일깨우고자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천하의 일에는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습니다. 먼저 그 근본을 다스리는 것은 오활한 듯하나 성과가 있고, 말단만을 일삼는 것은 절실한 것 같으면서도 해가 됩니다. 오늘날의 일로써 말한다면 조정을 화합시키고 옳지 못한 정사를 고치는 것이 근본이고, 병력과 식량을 조달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은 말단입니다. 말단도 실로 거행해야 하겠지만 더욱 먼저 해야 할 것은 근본입니다.

선조수정실록』선조 14년 4월 1일 자

 

서애 류성룡이 율곡 이이에게 이 말의 진의를 물었다.

“전일 궐정에서 의논할 때 공은 근본적인 장책(長策: 제일 좋은 대책이나 방책)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근본적인 장책입니까?”

하자 율곡의 대답은 명쾌하였다.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바루고 아래로는 조정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근본적인 장책입니다. 그런데 상의 뜻은 사류를 경시하고 유속의 무리들을 신임하니 무슨 일인들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율곡이 생각하고 있는 임금의 소임과 신하의 소임이 무엇인지가 여실하게 드러나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율곡은 평생을 성인(聖人)의 길을 가겠다는 뜻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율곡이 세운 평생의 뜻은 ‘성인이 되겠다.’였다. 이는 과거에 급제해 이름을 드높이고 권력과 출세를 통해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이 아니다.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고 옛 성현을 본받아 자신을 갈고 닦고 백성을 가르치는 삶을 의미하였다. 그렇기에 율곡은 시간을 아껴 늘 공부하고, 다른 사람이 있든 없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단속하며,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간언했다. 또한 백성들의 삶과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정책을 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의 정치적 여건은 그의 이런 의지와 실천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특히 선조는 입으로는 성군의 정치를 말하면서도 이를 실천할 의지가 없는 임금이었다. 율곡의 끊임없는 간언에도 선조는 변명과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율곡이 생각하기에 선조는 용군(庸君)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용군이란 마음이 나약해서 뜻이 굳지 못하고, 결단력이 부족해서 낡은 관습에만 매달리는 탓에 나날이 나라와 백성을 쇠락의 길로 밀어 넣는 임금이다.

선조는 “총명하고 지혜롭지만 덕을 베푸는 것이 넓지 못하고, 좋은 말을 듣기를 즐기지만 또한 많은 의심을 버리지 못해” 쉽게 결단하지 못하는 임금이었다.

그래서 신하들이 힘써 건의를 해도 지나치지 않나 의심하고,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는 신하는 교만하거나 과격하다고 의심하고, 명예를 얻는 신하는 혹시 당파를 이루지 않나 의심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을 비판하면 편파적으로 모함하지 않나 의심하느라 아무런 일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이러한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하와 백성은 폭군이나 혼군이 다스릴 때처럼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살거나 큰 재앙을 입지는 않는다. 하지만 큰 발전과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고 자칫 후퇴와 쇠락의 구렁텅이로 추락할 수 있다.

다만 용군은 폭군이나 혼군과는 다르게 일을 추진할 뜻과 실행할 결단력이 부족할 뿐이다. 따라서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자신의 약점과 결점을 보완하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 혁신한다면 큰 발전과 성장을 이끌 수도 있다. 율곡이 항상 선조의 모자람을 질책하면서도 끝내 기대와 희망을 저버리지 못한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외국학생 초청 문화 체험행사


율곡연구원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2018년 7월24일 ~ 7월 27일에 외국학생 초청 문화 체험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인성 한문·한자교육 – 소학 1학기 1차 수업

금요일 – <소학>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강좌 모습

2018년 9월 7일 금요일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1학기 1차 강좌를 시작 하였습니다.

인성 한문·한자교육 – 율곡문집 1학기 1차 수업

목요일 – <율곡문집>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강좌 모습

2018년 9월 6일 목요일 <율곡문집>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1학기 1차 강좌를 함현찬 선생님과 함께 시작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