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진남(白振南, 1564-1618)


 

백진남(白振南, 1564-1618)

 

옥산서실
옥산서실

 

진남(白振南, 1564-1618)은 조선시대의 시인이자 서예가로, 그의 부친 백광훈과 함께 2대가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백진남의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율곡 이이, 충무공 이순신, 그리고 명나라 사신들이 감탄하였다. 광해군이 집권하면서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혼탁하게 변하자 스스로 초야에 묻혀 몸을 굽히고 살았다.

1564년(1세, 명종 19)에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으로 자는 선명(善鳴), 호는 송호(松湖)이다. 부친은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이다. 백광훈은 유명한 문장가로 조선의 8대 문장가로 알려져 있다.
부친 백광훈의 유물이 해남의 옥산서실 내 옥봉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문화재청에서는 아들 백진남의 유물과 합하여 9종 113점을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지정된 유물 중에는 백광훈 교첩, 옥봉집, 영여(靈輿) 등이 있다. 옥봉집은 아들 백진남이 부친의 시문을 모아 간행한 것이며, 영여는 나무로 만들어진 가마인데, 선조임금이 하사한 것으로 백광훈이 사망한 뒤 장례를 치르고 혼백과 신주를 모시고 돌아올 때 사용한 것이다.

1578년(15세, 선조 11) 때 사부학당(四部學堂)의 시험(課試)을 보았는데, 시부(詩賦)가 매우 뛰어나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당시 율곡 이이(李珥)도 백진남의 문장을 보고 칭찬하였으며 귀향할 때까지 특히 아꼈다. 그 뒤로 율곡은 매번 백진남을 만날 때 마다 언제 서울로 다시 올라오는지 물었다고 한다.(백진남의 <묘비명> 참조)
이 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을 가는데 남원 땅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남원 광한루에서 시를 주고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내일 날 밝고 나면 다시 전주 땅을 향한 길일 터인데
두 마리 말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할 때 여러분들의 시를 홀로 읊겠지
(明朝又向全城路, 匹馬超超獨詠詩)

이 시를 읽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는 “(백진남이) 숨은 것을 찾는 재주가 있고 외모마저도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였다.(백진남의 묘비명)

1582년(19세, 선조 15)에 부친이 서울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1590년(27세, 선조 23)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597년(34세, 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통제사(統制使)인 이순신(李舜臣)의 진중(陣中)으로 피난해 이순신을 도왔다. 이순신은 백진남을 중요하게 대우를 하였다.
당시 명나라 장군 계금(季金)과 승덕(承德) 등이 그의 시를 읽고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2012년에 해군사관학교박물관 기획연구실장 이상훈 교수가 공개한 이순신 친필의 편지에는 명나라 장수가 백진남의 활약을 칭찬하는 글이 다음과 같이 들어 있다.

저는 근래 더위 중에도 명나라 장수들이 머무는 곳의 일로 분주하고 아울러 배탈이 나서 몸이 편치 않아 고민스럽습니다. 어제 유격(遊擊, 명나라의 계금季金 장군을 말함)이 말하기를 “백진사(백진남)가 와서 정성스레 대해준 것에 감사한다. 이에 조선 유림의 믿음이 두텁고 정중한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에 아름답고 명예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감탄하여 마지못하겠으며 국가로서도 역시 영광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조선의 유학자로서 정성스럽게 명나라 장수를 대한 백진남의 품성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 사신들이 감탄한 백진남의 글씨

1606년(43세, 선조 39)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왔을 때 민간인의 신분으로 사신을 영접했다. 필법(筆法)으로 이름이 높았던 주지번이 백진남의 필적을 보고 감탄하였다. 주지번과 서로 문장을 교환하며 교류가 두터웠다. 주지번은 백진남에게 필적이 기막히게 뛰어나다고 자주 말하였으며 백진남의 필법을 모방하여 크게 ‘玉峯書室(옥봉서실)’, ‘玉洞煙霞(옥동연하)’ 8글자를 써서 주었다. 또 친히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써주었다. 백진남의 문장은 ‘무엇엔가 바늘을 꽂은 듯하고, 글씨는 산새가 빠르게 나는듯 하였다.’고 한다.(묘지명)
정호(鄭澔, 1648-1736)가 지은 백진남의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내 고조 할아버지의 이름은 진남(振南, 백진남)이고, 자(字)는 선명(善鳴), 호(號)는 송호(松湖)로, 대단하신 옥봉(玉峯) 공(公, 백광훈)의 아들입니다. 시(詩)로 이름 높았고 글씨가 아름다웠습니다. 세대를 뛰어넘는 그런 집인데, 그 두 세대가 관직도 없이 중국 사신들을 영접하였습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영화로운 대단한 일이었지요. 그분들 이름이 그 당시에 그 정도로 무게가 있었습니다.

이후 친구들과 서울의 백악산 아래에 같이 살기로 하였는데, 세상 상황이 크게 변하여 출세를 단념하였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 마땅치 않아서, 그는 옥봉(玉峰)의 옛 집을 수리하여 사용하고, 또 송호(松湖)에 별장(別莊)을 지어 그곳에 거처하였다.  송호는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에 위치한 곳으로 소나무가 우거지고 멋진 호수가 있다. 그는 이곳을 왕래하며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면서 생을 마감하고자 하였다.(⌈묘지명⌋)

백진남이 가깝게 지낸 친구로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현헌(玄軒) 신흠(申欽, 1566-1628)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참화를 당해 외진 땅으로 유배되었다. 백진남은 세상의 재난을 맛보기 전에 스스로 몸을 굽히며 살았다.

1618년(55세, 광해군 10) 12월 초5일(양력 1619년 1월 20일)에 사망하였다. 장지는 해남(海南) 장성산(長星山)이었다. 부인은 해남윤씨(海南尹氏)이며, 슬하에 2남과 여러 딸을 두었다. 저서로 송호시고(松湖詩稿) 1권이 있다. 1832년에 문집 ⌈송호집(松湖集)⌋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