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희(姜敬熙)


강경희(姜敬熙)                                                              PDF Download
강경희(1858년∼1922년)는 고종 22년(1885년)에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병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사간원 대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궁내부에 재직하면서, 고위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시대가 바뀌어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친일활동을 하였다. 특히 이완용과 가깝게 지내면서,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자원 제공을 받은 친일 유림의 공자교 운동에 적극 참여한 바 있다.

 

1858(1, 철종 9)
강문형(姜文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강문형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를 역임한 무인이었다. 3남 중 차남으로 위로는 형 강민희(姜敏熙), 아래로는 동생 강돈희(姜敦熙)가 있다. 나중에 강만형(姜晩馨)의 양자가 되었다. 강경희의 자는 성일(聖一)이고, 호는 유당(有堂)이다. 전라북도 옥구군 출신이며, 본관은 진주(晉州), 본적은 경성부(京城府, 지금의 서울) 남부(南部) 회현방(會賢坊, 지금의 명동, 회현동 일대)이다.

1885(28, 고종 22)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30등으로 합격하였다. 증광시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임시로 행하는 특별 과거시험으로 시험과정은 생진초시·생진복시·문과초시·문과복시·문과전시의 5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시험과목은 매 3년마다 정기적으로 행하는 식년시(式年試)와 같다. 강경희는 이 시험에 도전하여 문과에 급제한 뒤, 형조참의, 병조참의 등을 지냈다.

1890(30, 고종 27)
승정원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었다. 원래 승정원은 국왕의 직속 기관으로 왕명의 출납, 즉 임금의 명령을 바깥으로 전달하고 조정 대신들의 보고나 요청, 의견 등을 임금에게 전달하는 비서기관이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 우레가 있자 동료들과 함께 임금에게 경계의 글을 올렸다. 임금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지금 우레의 재변(災變, 기상이변)을 초래한 원인을 생각하다가 마침 그대들이 올린 글의 내용을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더욱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1891(34, 고종 28)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었다. 사간원은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는 곳으로 ‘간쟁(諫諍)’을 주요 업무로 삼는다. 간쟁이란, 윗사람의 옳지 못한 일을 지적하여 잘못을 고치게 하는 일이다.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거나, 행동에 문제가 있을 때 그 잘못을 말하여 고치게 하는 것이다. 아울러 첨예한 정치 문제에 관해서 의견을 제시하고 신하들의 잘못을 탄핵하는 기능도 겸했다. 요즘의 감사원이나 언론기관의 역할에 해당한다. 사간원에는 대사간(大司諫), 사간(司諫), 헌납(獻納), 정언(正言) 등이 있는데, 우두머리인 대사간은 정3품, 사간은 종 3품이다.

 

1897(40, 광무 원년)
이해 10월 고종이 원구단(園丘團)에서 천제를 올리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그 전까지 조선의 국왕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중국의 천자만이 그러한 행사의 자격이 있다고 여겨져 왔으나 과감히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울러 고종은 연호를 광무(光武)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 칭호를 사용하였다. 11월에 명성황후 국장(國葬)을 치렀다.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강경희는 이후 대한제국 시절에 주로 궁내부에 재직하였는데, 중추원의관, 비서원승, 전선사장선, 시강원부첨사, 규장각부제학, 중추원참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899(42, 광무 3)
정부에서 헌법인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반포하였다. 여기에 황권의 절대성을 명시하고, 황제가 전권을 장악한 전제군주제를 추구하였다.

1904(47, 광무 8)
2월 23일, 러일 전쟁이 일어났다.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에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였다. 8월,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와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내정 간섭을 하였다.

1905(48, 광무 9)
일본이 러일 전쟁에 승리하였다. 일본은 이해 11월, 제2차 한일 협약 성립을 성립시키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나아가 한국 통감부를 설치하고 통감정치를 추진했다.

1907(50, 융희 1)
주임관 2등에 올라, 시강원에서 근무했다. 이해에 친일 유림단체인 대동학회에 가담했다. 이해 황태자 즉위식이 있었다. 강경희는 대거(對擧) 부첨사(副詹事)로서 즉위식을 준비하는데 공을 세우고 여러 관리들과 함께 임금이 내린 상을 받았다.

1908(51, 융희 2)
대동학회 평의원이 되었다.

1909(52, 융희 3)
이해에 경제연구회(회장 김재순)에 가입했으며, 대동학회가 재편된 공자교회에 가담했다. 대동학회는 유교 계열의 친일단체로 박은식, 장지연 등이 반일의 기치를 내걸고 대동교를 결성하자, 유림(儒林)을 기반으로 공자교회로 변신, 개편했다. 공자교회는 ‘유도(儒道)의 진흥과 인도(仁道)를 밝힘’을 목표로 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로 부터 자금의 지원을 받았고, 당시 총리대신인 이완용과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의 주요 활동은 유교 경전의 번역 추진, <대한매일신문> 매입 등이었다. 이후 강경희는 이완용이 주도한 국민연설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국민협성회의 한일 합방실행 추진단체인 한국평화협회에서 자선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10(53, 융희 4)
8월, 한일 합방조약이 강제 조인되어 대한제국이 멸망하였다. 당시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은 이완용, 일본 측 한국 통감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852∼1919)였다. 이 두 사람이 담합하여 강제로 조약을 통과시킴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일합방 추진에 적극 가담한 자들은 이완용 외에도 박제순(외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권중현(농상공부대신)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을사오적이라 불린다.

당시 황현, 민영환 등이 자결하고 많은 지식인들이 극렬히 반대하였으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만주로 도망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강경희는 한일합방 추진에 적극 가담했다.

1911(54)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찬의로 임명되어 이후 10여년간 활동을 하였다.

1915(58)
경기도 시흥군 동면의 공동묘지 용지를 조선총독부에 기부하여 일본으로부터 사례로 나무 잔을 받았다.

1922(65)
향년 65세로 사망했다. 2002년에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2006년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 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참고문헌>

김은지,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고종실록」, 「순조실록」, 「조선총독부관보
「친일반민족행위자 106인 확정ㆍ발표」<프레시안> 2006.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