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조(李賀朝) 


이하조(李賀朝)                                                              PDF Download

 

이하조(李賀朝, 1664년∼1700년)는 조선시대의 관리이자 문인이다. 그는 문장으로 유명한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의 손자이자,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아들로 태어나 1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관직에 나가 공조좌랑, 부평현감 등에 임명되었다.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인품이 어질어, 장차 세상에 크게 쓰일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3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1664년(1세)
현종 5년, 4월 7일, 2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낙보(樂甫), 호는 삼수자(三秀子),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경기도 양주에서 살았다.

부친은 부제학을 지낸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이며, 모친은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이행원(李行遠)의 딸이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친누이의 남편으로 매형이다.

할아버지는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 1595∼1645)이다. 이명한은 1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1세(1616년)에 전시 을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도승지, 대제학, 이조판서 등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아홉 살 많은 형으로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1655∼1724)가 있다. 이희조는 대사헌,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송시열의 문인이다. 1724년 노론파가 권력을 잃으면서 영암으로 유배를 갔는데 도중에 사망하였다.

1669년(6세)
9월, 부친 이단상(1628∼1669)이 사망하였다.

1682년(19세)
사마증광시(司馬增廣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683년(20세)
양주(楊州) 영지동(靈芝洞)에 있는 형 이희조의 영지서실(靈芝書室) 바로 옆에 개인 서재인 삼수헌(三秀軒)을 지었다.

이즈음 안동김씨(安東金氏)로 현감(縣監)을 지낸 김창국(金昌國)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둘 사이에 아들이 있었으나 일직 죽고, 딸만 넷을 키웠다. 이해조(李海朝)의 아들 숭신(崇臣)을 양자로 삼았다.

1684년(21세)
이즈음 관례를 치루었다. 이 때 매형 김창협으로 부터 다음과 같은 글을 받았다.

“이생 하조(李生賀朝, 이하조)의 관례(冠禮) 때에 내가 찬(贊)을 지어 주었는데, …… 옛날에 사람에게 성인(成人)의 덕을 책임 지울 때는 또한 그 도(道)가 있었다. 젖먹이에서부터 아이가 되고 이어 관례를 치를 때까지 가르치는 데에 순서가 있고 기르는 데에 법도가 있어 시서(詩書)와 육예(六藝)를 가르치고 효제(孝悌)와 인의(仁義)를 연마시켰던 것이지, 하루아침에 당부하고 만 것이 아니다. 그러니 관례를 올리고서 성덕(成德)으로 나아가는 것은 성급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후대에는 가르치고 기르는 것이 평소에 이루어지지 않는 데다 나이가 차기도 전에 관례를 올리고 관례가 끝나면 곧 그 덕이 완성되기를 바라니, 그렇게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다. 예의(禮儀)가 잘 갖추어지고 축사(祝辭)가 많은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

지금 나는 비록 남을 가르치고 경계시킬 말은 없지만, 나는 일찍이 우리 정관(靜觀) 이단상(李端相) 선생을 섬겨 그분의 덕행을 자세히 관찰했었다. 이제 선생은 안 계시지만 그 뜻은 서책에 담겨 있고 그 언행은 가정에 전해지고 있다. 이생(李生)이 밤낮으로 그것을 외고 본받아 실천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음으로써 선대인(先大人)의 사업을 빛내고 키우되 중단하지 말고 더욱 독실히 한다면, 조상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효성이 더없이 클 것이다. 이생은 부디 노력하기 바란다.

시경》에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어, 너를 낳아 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 하였고, 또 “돌아가신 아버지의 아름다운 덕으로, 내 몸을 지키고 드러내리라.” 하였다. 나는 이생을 위해 이 시를 읊어 축사의 후미를 갈음하는 바이다.”(『농암집』권 21)

1685년(22세)
가을, 진천(鎭川) 현감(縣監)으로 부임하는 형 이희조를 따라갔다. 이즈음 매형인 김창협(金昌協)의 제자들인 이이명(李頤命), 이덕성(李德成), 김시좌(金時佐) 등과 교류를 하였다.

이해, 김창협이 함경북도 병마평사로 부임하는 것을 송별하는 문장 「봉신김자형북관지행(奉贐金姊兄北關之行)」을 지었다.

1686년(23세)
민태중(閔泰重)등 여러 사람과 함께 화양동에 가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면담했다. 송시열은 부친 이단상에게 학문적으로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며 형 이희조도 그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이하조도 송시열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배웠지만 깊이 있는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다.

이해 가을에 형 이희조와 송도(松都)를 유람했다.

 

1687년(24세)
청풍 부사로 가는 김창협과 동래 부사로 가는 이덕성(李德成)을 전송하는 글을 지었다.

김창협의 문집(『농암집』)에는 13살 많은 매형 김창협과 이하조의 교류를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結廬倚雲峰 구름 낀 산기슭에 얽어맨 초가집
環堵隔風雪 사방의 흙벽이 눈보라를 막아주네
冥處覽運化 깊은 사색 천지 변화 살펴도 보고
忼慨撫徂節 격한 기분으로 가는 시절 한탄하네
鳴絃發淸商 거문고 시위 튕겨 해맑은 가락
諷書散素帙 책장을 펼치고서 글을 읽기도
遐哉千古心 옛날 옛적 성현들 그리는 마음
明明不可掇 밝고 밝아 어떻게 지울 수 없네
孰是抱幽獨 아 하지만 누구라서 홀로 지내며
而無慕儔匹 마음에 맞는 벗님을 아니 그리겠는가
晤言莫與同 우리 만나 담소할 길은 아득하고
賞心徒自結 산수 즐길 마음만 가슴에 서려
結念屬所思 오로지 그대에게 바라는 생각은
惠好期嘉月 춘삼월 좋은 시절 함께 만나서
深淵網紫鱗 깊은 못의 붉은 고기 그물질하고
中谷採柔蕨 산골짝의 연한 고사리 줄기 꺾으며
披尋閱幽事 유적 찾아 옛일을 더듬어 보고
觴詠陶時物 시와 술로 좋은 풍경 즐겨보세
緘辭申爾約 글월 띄워 이 약속 당부하고서
引領望來轍 그대 행차 목을 빼고 기다리겠네

 

1688년(25세)
5월, 평강(平康)현감으로 재직하던 형 이희조와 함께 금강산과 동해를 유람했다. 형과 같이「해산창주록(海山唱酬錄)」을 지었다.

1689년(26세)
9월, 남용익(南龍翼), 김익렴(金益廉) 등과 함께 용산에서 시모임을 가졌다. 또 남용익이 거처하고 있던 수락산 동해곡의 쌍백정(雙栢亭), 운수암(雲水菴) 등지를 방문하였다.

이즈음 음보(蔭補, 출신을 고려한 관리선발)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洗馬), 시직(侍直) 등에 임명되었다.

1690년(27세)
양주의 주변풍광 등을 노래한 「지사재잡영(志事齋雜詠)」, 「농환와잡영(弄丸窩雜詠)」등을 지었다.

1693년(30세)
부인의 할아버지 김수증(金壽增)의 고희를 기념하여 글(「頌壽序」)을 지었다. 이즈음 친구들이 과거시험에 응시할 것을 권했지만 단념하고 학문에만 뜻을 두었다.

1697년(34세)
7월에 사복시(司僕寺, 말이나 마굿간, 목장 등을 관장하는 관청)의 주부(主簿)가 되었다. 주부는 문서와 부적(符籍)을 관리하는 종6품의 관직이다.

1698년(35세)
4월, 공조 좌랑이 되다. 이해 여름에 부평(富平) 현감이 되었다.

1700년(37세)

2월, 형 이희조가 근무하던 해주(海州)를 방문하고 모친을 뵈었다. 율곡 이이의 유적지인 석담구곡(石潭九曲)등지를 유람하고 「서행록(西行錄)」을 지었다.

7월 10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경기도 양주 영지(靈芝)의 독정리에 묻혔다.

1712년에 형 이희조, 나주목사(羅州牧使) 조정만(趙正萬) 등이 활자로 5권 1책으로 구성된 문집 『삼수헌고(三秀軒稿)』를 간행했다.

매형 김창협은 처남의 죽음에 다음과 같은 제문을 남겼다

“임오년 7월 경술삭(庚戌朔) 8일 정사에 안동 김창협은 삼가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갖추어 고(故) 이군 낙보(이하조)의 영전에 곡하며 제사하고 다음과 같이 글을 지어 자네가 흠향(歆饗, 제물을 받아서 그 기운을 먹음)하기를 권하는 바이네.

아, 자네의 사람됨은 흔히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네. 자질이 아름다워 단정하고 어질고 평탄하고 정직했으며, 행실이 어질었으며 효성스럽고 우애롭고 자애롭고 너그러웠지. 식견이 바르고 분명하여 시비를 분명히 구분하고 언사가 구차하지 않았네. 재주가 민첩하고 풍부하여 문사(文辭)가 유창하며 그 언사의 품격이 뛰어났지.

이러한 됨됨이로 세상에서 활동한다면 그와 앞 다툴 자가 없었을 텐데. 자네는 자신을 부족하게 여겨 평소에 한 가지도 잘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네. 그러면서도 남의 장점에 대해서는 또 진심으로 높이 인정하여 마치 따라 미치지 못할 것처럼 하였네.

아, 이 어찌 오늘날에만 보기 드문 사람이겠는가. 옛사람들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여겼을 것이네. 천도(天道)가 선인(善人)을 돕는다면 이른바 장수와 복록이라는 것이 자네 말고 누구에게 가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갑자기 죽어 이 정도에 그쳤단 말인가. 참으로 애통하고 슬프네.

그러나 예로부터 어진 사람과 재주 있는 선비가 자네처럼 불행히 복록을 누리지 못한 경우가 실로 많았고 그보다 더 심한 경우도 많았으니, 이는 멀리 찾아볼 것도 없네. 우리 집 아이 숭겸(崇謙) 같은 경우도 그중 하나이네. 아, 자네는 숭겸에 대해 일찍이 절세(絶世)의 기재(奇才)로 추앙하며 원대한 사업을 기대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숭겸은 수명이 겨우 자네의 절반에 그쳤고 곤궁함은 자네보다 갑절이나 되었다네. 그렇다면 자네는 부러움을 살 위치에 있었으니, 자네가 또 무엇 때문에 슬퍼하겠는가?

생각하면 나는 15세에 자네의 집에 들어가 당시 어린아이였던 자네를 쓰다듬으며 장성하는 것을 보았네. 30여 년 동안 서로 이끌어주며 어울리는 가운데 형제간의 은혜와 붕우간의 의리를 겸비하게 되었으니, 비록 그동안 만나고 헤어지고 멀리 있고 가까이 있는 등 서로 간의 교류가 일정치는 않았으나 마음에 늘 잊지 못하는 것은 실로 하루 같았네.

나는 이미 세상에서 활동할 생각을 영원히 접었고 자네도 벼슬아치의 일에 종신토록 매달릴 사람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 자식을 이끌고 그대는 그대의 백형을 따라 삼주(三洲) 물가와 영지(靈芝) 골짝에서 서로 어울리며 왕래할 날이 있을 터였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그럴 수가 없게 되었으니, 자네의 죽음이 또 어찌 나를 슬프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나는 자네를 잃은 지 7일 만에 내 딸을 잃었고, 또 3개월 만에 숭겸을 잃었고, 그 이듬해 7월에 또 자네의 대부인(大夫人)을 잃었으니, 우리 양가가 당한 화는 세상에 보기 드문 것이었네. 내 비록 모질게도 즉시 따라 죽지 못하여 오늘에 이르기는 하였으나, 병을 앓고 있는 데다 심정이 참담하여 인사불성이 되어 버렸네.

그 때문에 아직까지 자네의 상에 술 한 잔 올리지 못하였는데, 지금 와 보니 궤연(几筵, 혼백이나 신위를 모신 자리와 그에 딸린 물건들)을 철거하게 되어 만사가 끝나게 되었네. 애통해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직 자네가 나를 허물하지 말고 와서 이 술잔을 들기를 바랄 뿐이네. 아, 슬프네. 부디 내가 올린 제물을 받아 그 기운이나마 즐기시게.”

 

<참고자료>

김창협, 『농암집』, <한국고전종합DB>

조동영, 「율곡학맥인물 – 이하조」, <율곡학 프로젝트>

이미실, 「삼수헌고 해제」, <한국고전종합DB>,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