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겸(金濟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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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율곡학파-김제겸
김제겸의 묘지와 묘비(경기도 여주)
김제겸(金濟謙, 1680년∼172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의 증손자이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손자로, 숙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김창협(金昌協)의 아들이다. 본관이 안동인 이들 집안은 대대로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당파 싸움의 화를 입어 김수항 이하 김제겸의 아들 김성행까지 4대가 불행한 죽임을 당했다.

김제겸은 40세(1705년) 때 병과로 급제하고, 사간원(司諫院)의 정언, 사간, 예조참의, 승지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1722년에 부친 김창협이 연잉군 왕세제 책봉문제와 관련되어 신임사화로 유배를 당한 뒤 사약을 받고 사망하고, 자신의 아들 김성행도 감옥에서 고초를 당하다 요절하는 불행을 겪었으며, 자신도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1680(1, 숙종 6)
아버지 김창집(金昌集, 1648년∼1722년)과 어머니는 박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창집의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이며,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의 손자이다. 또한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로 영의정을 역임한 인물이며, 저서로 ⌈국조자경편⌋과 ⌈국몽와집⌋이 있으며,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의 형이다. 부인은 박세남(朴世楠)의 딸이다.

김제겸은 어려서 작은 아버지 김창흡(金昌翕)에게 글을 배웠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필형(必亨), 호는 죽취(竹醉), 충민(忠愍)이다.

 

1681(2, 숙종 7)
부친 김창집이 내시교관에 임명되었다. 부친은 1672년(현종 13년)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1675년에 그의 부친 김수항(김제겸의 할아버지)이 귀양을 가자 과거 응시를 미뤘었다.

 1684(5, 숙종 10)
공조좌랑이었던 부친이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부친은 정언(正言)·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2017율곡학맥-김제겸
김제겸의 부친 김창집(金昌集)

 1689(10, 숙종 15)
기사환국 때 할아버지 김수항이 진도의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부친은 귀향해서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1694(15, 숙종20)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어 부친이 복권되었다. 부친은 이 해 병조참의, 동부승지, 참의, 대사간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철원부사에 임명되었을 때, 큰 기근으로 도둑이 들끓어 소란하자 관군을 이끌고 토벌하였다. 이후 강화유수, 예조참판,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고, 호조, 이조, 형조의 판서 등에 임명되었다.

 1696(17, 숙종22)
부인 송씨와 사이에 아들 김성행(金省行)이 태어났다. 자는 사삼(士三), 호는 취백헌(翠柏軒)이다.

1705(26, 숙종 31)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부친은 지돈녕부사를 거쳐 이듬해 한성부판윤,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710(31, 숙종 36)
세마(洗馬)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고양 군수를 거쳐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으로 재직하였다.

1712(33, 숙종 38)
부친 김창집이 청나라에 사은사 사신으로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1717(38, 숙종 43)
부친이 영의정에 취임하였다.

1719(40, 숙종 45)
증광 문과에 도전하여 병과로 급제하고,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정언은 사간원(司諫院)의 정육품(正六品) 관직이다. 위로 대사간(大司諫), 사간(司諫), 헌납(獻納)이 있다. 나중에 김제겸은 헌납(獻納)으로 승진하였다가, 집의(執義)·응교(應敎)·교리(校理)·사간·예조참의·승지 등을 역임했다.

1721(42, 경종 1)
부친이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했으나,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후 소론이 탄핵 운동을 벌여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이 정권을 장악했다.

부친 김창집(金昌集)은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등과 함께 세제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파 4 대신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소론이 정권을 잡은 뒤, 소론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 등이 탄핵하여 유배를 당했다. 이어 소론은 노론파가 반역을 도모를 했다고 무고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 신임옥사辛壬獄事)가 발생하였다. 신임사화는 경종이 즉위한 해부터 다음 해 1722년까지 노론과 소론이 연잉군 왕세제 책봉문제로 충돌한 사건이다. 부친은 이일로 거제도에 유배(위리안치)되었다.

1722(43, 경종 2)
부친이 유배를 당한 성주에서 사약을 마시고 사망하였다. 이에 김제겸도 울산에 유배된 뒤에 부령(富寧)으로 옮겨졌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부친 김창집은 1724년에 복권되었으며, 영조는 과천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을 세워 이이명·조태채·이건명과 함께 배향했다. 부친의 저술로『국조자경편(國朝自警編)』·『몽와집(夢窩集)』등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김제겸은 조성복(趙聖復), 김민택(金民澤)과 함께 신임사화로 희생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그는 저서로 ⌈죽취고(竹醉藁)⌋, 편저로 ⌈증보삼운통고(增補三韻通考⌋)를 남겼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3년 뒤(영조 1년)에 관작이 복구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김제겸의 아들 김성행도 같은 해에 화를 당하였다. 향년 27세였다. 아들 김성행은 서덕수 등과 함께 경종 때에 영잉군(영조)을 추대하려고 하였는데, 목호룡(睦虎龍)이 상소를 올려, 임금을 시해하려는 역적 무리 중 한사람으로 지목하여 관청에 잡혀 들어가 심문을 당하였다. 그는 심문 도중,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으나, 거듭되는 고문으로 매를 맞다 요절하였다. 이러한 일로 왕세제 연잉군(뒷날의 영조)은 그 지위를 온존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김성행이 죽은 날은 5월 9일이었다. 김성행은 3년 뒤, 신원이 회복되었으며, 이후 지평, 이조참의, 이조참판 등에 추증되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영잉군이 1724년 영조로 등극한 후,

 

“종사(宗社)가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김성행의 힘이었다.”

 

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아울러 영조는 직접 김성행의 제문(祭文)을 지어 추도하였으며, 김성행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하고 충신 정려를 하사하였다.

김성행의 아들 김이장(金履長)은 나중에 음보로 관직에 진출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하였다.

김제겸은 살아생전에 아들 김성행이 옥중에서 매를 맞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유배지 울산에서 새로운 유배지인 함경도 부령으로 가는 도중에 잠시 아들 묘소에 들러 다음과 같은 묘지문을 적어 아들에게 고하였다.

 

“유세차, 1722년 임인(壬寅) 유월 갑인(甲寅) 삭(朔), 초 7일 경신(庚申)날에 아버지는 죽은 아들 성행(省行)의 묘 앞에서 고하노라. 아아, 슬프구나. 나의 아들은 어질었도다. 나의 아들 너는 능히 목숨을 바쳤구나. 돌아가신 아버님을 보고 이를 따랐으니, 이 완고한 마음은 즐거울 뿐, 슬프지 않구나. 나는 지금 북쪽으로 옮겨가니, 죽고 사는 것을 기약할 수 없어, 너의 무덤 풀밭에 술을 뿌린다. 이 슬픔, 말로 다 할 수 없으니, 아 울고 싶구나. 나의 아들아, 오래도록 편안하여라. 흠향하소서.”

 

3대가 같은 해에 사망한 이들의 묘지는 여주시 대신면 초현리에 나란히 마련되었다. 김제겸의 조부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년 ∼ 1689년)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진도에 유배를 당하여, 1689년 4월 진도에서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한집안의 4대가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참고문헌>

오갑균, 「김제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병섭, 「김성행」,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신임사화 노론 안동 김씨 세장지」, http://blog.daum.net/yacho2011/2006